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3/15)
  • 에필로그

    애론이 잡히고 후작 부부는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겼다.

    아버지는 엘로디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결혼식이 끝나면 후작령으로 내려가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애론의 일로 충격을 받은 마리아의 건강이 다시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브느와가 애론을 산 채로 찔렀던 탓에 애론의 마력은 제국 전체를 뒤덮었다. 짧은 시간 내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커피 산업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알파와 오메가가 새로 발현되었다.

    나바르 후작가의 사업은 더 바빠졌다. 알파와 오메가가 두 배 이상 늘어난 덕에 엄청난 양의 억제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약을 개발한 엘로디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다.

    과거 전체 인구의 15%도 되지 않았던 그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이 지나자 제국 내의 베타의 수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황실에서 세운 교육 기관에는 재능 있는 아이들이 넘쳐 났고 입학은 더 치열해졌다. 엘로디는 새로 지어진 아카데미의 개관식을 아드리안과 공식적으로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로 결정했다.

    예비 황태자비로서 대중 앞에 처음 나서게 된 엘로디는 긴장했다. 일부러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왔으나 미남, 미녀가 가득한 학교에서 그런 것은 쓸모없는 짓이었다.

    무사히 개관식을 마치고 학교 내부를 둘러본 뒤 엘로디는 아드리안에게 말하고 잠시 화장실로 향했다.

    ‘학교 화장실이라니 어색해.’

    이 세계로 넘어온 지 벌써 21년, 엘로디는 여럿이서 사용하는 화장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화장실에서 나오고 천천히 교정을 걸어가는 엘로디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멈췄다.

    [아직도 베타라니.]

    [황태자에게는 내가 더 어울릴 텐데.]

    [알파에게 기생하는 베타 주제에.]

    [결국 신데렐라 놀이에 성공했네.]

    엘로디는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몸을 돌려 다시 화장실로 달려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왔다.

    인구의 과반수가 알파나 오메가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엘로디는 반은 오메가인 채로 나머지 반은 베타인 채로 살아가기로 했다. 완전한 치유를 하면 아드리안과의 각인이 끊어져 죽을 수도 있었고, 완전한 발현은 오히려 그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

    [덜떨어진 생명체가 저런 고위 알파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될 거라니.]

    엘로디는 숲에서 신물을 게워냈다. 그들이 자신에게 갖는 악의가 바늘이 되어 제 몸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돌보아 줘야 한다고 믿었던 그들은 삶이 안정되고 지위가 궤도에 오르는 순간 엘로디와 베타들을 찌를 칼이 될 것이다.

    “엘로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엘로디를 데리러 온 아드리안은 화장실 입구에서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아드리안은 본능적으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눈]을 끌어 쓴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엘로디의 몸을 일으켜서 끌어안고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 쓰지 마.”

    엘로디는 조용히 그에게 안겨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울리던 소리들이 멈추지 않았다.

    * * *

    엘로디는 브느와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무실 앞에 섰다.

    며칠 전, 그 일이 있고 나서 엘로디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울리던 그 소리들이 몸을 파고들었다.

    대량의 발현 이후 그동안 수적 우열을 갖고 있던 베타들에 대한 공격 수위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다. 엘로디가 만든 억제제의 투여를 거부하고 상관없는 베타들을 납치, 강간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황제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투입해 치안을 강화했지만 그런 사건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이미 이전에도 몇 번 있던 일이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알파와 오메가가 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강력한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충동에 쉽게 휘둘리며 성욕이 강했다.

    엘로디는 부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신의 발정기 때 어떤 행동들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중간중간 기억이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한창 섹스 도중에 정신을 차리면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못할 만한 음란한 말들을 뱉어내고는 했다.

    애론에 의해 발현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주변국의 상황도 심상치 않았다. 엘로디는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돌아오는 아드리안의 한숨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의 일들을 걱정했다.

    “베타도 알파나 오메가를 도울 수 있고,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엘로디는 이자벨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는 것을, 이곳은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었던 것을 인식하고 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하게 보였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사용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정신을 차린 엘로디는 안으로 들어가 브느와에게 인사를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어서 오게. 자리에 앉지.”

    브느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로디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로디는 이것이 자신의 직감인지, 아드리안의 [눈]의 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될 걸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웃고 있는 눈을 보며 엘로디는 그가 아드리안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등 뒤로 오싹한 기운이 일어났다.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습니까?”

    “내 [눈]에 대해 알고 싶은가? 미안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비밀은 반려에게도 알려주지 않아.”

    엘로디는 제 앞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커피를 다시 이용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성향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건 소용이 없어요.”

    브느와는 큰 소리로 웃었다.

    “원하는 게 정확히 뭔가?”

    “멸망을 원합니다, 폐하.”

    * * *

    아드리안은 마탑을 향했다. 그곳에는 양손을 잃은 애론이 갇혀있었다.

    리암이 요구한 것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마법사로서 모든 것을 잃게 해주십시오.”

    처음 엘로디와 아드리안은 애론을 베타로 완전히 바꿀 약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암은 그를 베타로 만드는 것보다 마법사로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기를 원했다.

    애론은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대마법사에 필적하는 힘을 얻은 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엄청났다.

    잡혀온 애론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양손에 마력으로 만들어진 실을 박아 넣었다.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나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손은 살아있었으나 마법사의 손은 잃은 것이다.

    문이 열리고 아드리안은 넋을 놓은 채로 주저앉아 있는 애론을 보았다.

    “오랜만이군. 나를 찾았다고?”

    창이 하나 나있는 마탑은 그를 위해 나쁘지 않은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이미 대륙은 수많은 알파와 오메가가 새로 태어났고 그의 희소가치는 바닥에 떨어졌다.

    만일 엘로디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았다면 애론은 벌써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로디가… 엘로디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어?”

    “또 그 이야기군.”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이 오지 않으면 죽겠다고 머리를 벽에 부딪치며 난리를 피워서 어쩔 수 없이 찾아왔다.

    결혼식과 대관식이 코앞인 지금 이런 구석에 처박힌 마탑에 관심을 가질 시간조차 아까웠다. 혹여 엘로디의 귀에 들어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봐 찾아온 것뿐이었는데 헛걸음을 했다.

    “애론, 난 엘로디가 가짜이건, 진짜이건 관심 없어. 그녀를 만났을 때와 지금이 같은데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드리안은 애론을 비웃었다.

    “당신은 내 운명의 반려잖아! 날 도와줘.”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난 운명 따위 믿지 않아. 그리고 그대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아드리안은 애론을 내려다보며 한참 그의 머릿속을 [눈]으로 보았다. 기이하게도 각인을 하고 나서는 [눈]을 사용하는 데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개안을 한 것인지 걱정했으나 브느와가 아니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그대가 잃은 건 자기 자신이야. 애론, 넌 리암을 사랑했겠지만 너 스스로를 가장 사랑했다. 리암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얻지 못해 개안한 거야. 엘로디와 리암 경 탓은 이제 그만둬.”

    “아니야. 나는… 나는… 리암을…….”

    동공이 풀린 채로 중얼거리는 애론을 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들리는 애론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리암은 며칠 내에 제국을 떠날 거다. 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

    그의 말에 애론의 등이 반응했다. 애론이 주저앉아 있는 바닥에 동그란 물 자국이 몇 개가 생겨났다.

    아드리안은 그런 애론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떴다.

    * * *

    “정말 결혼식 안 보고 갑니까?”

    리암은 자신을 배웅해 주러 나온 가스파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봤자 다들 불편하기만 할 겁니다.”

    리암은 바람에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의 갈색 눈을 보며 가스파르는 말을 삼켰다.

    “후회 안 합니까?”

    리암은 애론을 잡아넣고 엘로디에게 부탁해 베타로 변하는 약을 먹었다. 그의 황금색 눈은 빛을 잃었다.

    가스파르는 가벼워 보이는 리암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괜한 것을 물었군요. 건강히 잘 다녀오십쇼. 돌아와서 갈 곳이 없으면 파라디 공작가를 찾아와도 됩니다.”

    가스파르의 말에 리암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제야 제 나이로 보여 가스파르도 미소를 지었다.

    “그때면 파라디 공작이시겠군요. 돌아오면 잘 부탁드립니다.”

    리암은 그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배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던 가스파르는 서둘러 결혼식이 열리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아드리안은 긴장감에 손을 만지작거렸다. 두 번째 앉아본 대기실이었지만 긴장감이 완전히 달랐다.

    아드리안은 괜한 오지랖으로 가스파르에게 리암이 정말로 대륙을 떠나는지 확인해 달라 부탁한 것을 후회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 아드리안을 보나파르트 부인이 한심하게 바라보며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브느와는 아드리안을 보며 웃었다. 아드리안은 그러나 웃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 아드리안은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브느와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오늘도 어머니는 나오지 않으십니까?”

    아드리안의 가시 돋친 말에 브느와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네 정혼자가 도망가면 네 어머니는 다시는 일어나시지 못할 거다.”

    “아버지!”

    아드리안의 짜증 섞인 소리에 브느와는 다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가 웃음을 그치는 순간 대기실은 숨이 막힐 만큼 적막한 압박감만이 느껴졌다.

    “네게 엘로디가 그렇듯, 나에게도 네 어머니가 그렇단다.”

    아드리안이 지지 않고 맞서자 브느와는 조금 물러섰다. 그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아드리안에게 건넸다.

    “이건…….”

    그곳에는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붉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보고 아드리안은 이것이 엘로디의 반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가지고 있거라. 그를 죽이든 살리든, 그건 네 선택이다.”

    아드리안에게 종이를 넘긴 브느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끝이다.”

    “폐하!”

    불만이 섞인 소리에 브느와는 몸을 돌려 세웠다. 제 반려와 자신을 반반씩 닮은 아드리안을 보며 브느와는 이자벨을 떠올렸다.

    “우리 모두가 갖고 싶은 것을 얻었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 아니겠느냐?”

    브느와의 말에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과 엘로디는 서로를 온전하게 손에 넣었고, 황제는 아마도 이자벨을 온전히 차지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아드리안을 두고 브느와는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앞으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이제 나는 운명을 보지 못하니.”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아드리안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그 문을 바라보았다.

    * * *

    엘로디는 대기실에 앉아서 부케를 내려다보았다. 약혼식 때보다 비어 보이는 대기실 풍경에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엘로디.”

    그사이에 조금 수척해진 나바르 후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로디는 애써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결혼 축하한다, 얘야.”

    후작이 웃으며 엘로디를 끌어안았다. 엘로디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곧 그를 끌어안고 가만히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요?”

    엘로디가 묻자 후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후작 부인은 엘로디에게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결혼 축하한단다.”

    “제가 미우세요?”

    엘로디는 고개를 숙인 채로 늘 묻고 싶던 이야기를 뱉어냈다.

    “그럴 리가 있니. 난 그저 너희 둘이 서로를 죽일까 그게 두려웠단다. 애론은 충분한 벌을 받고 나오겠지.”

    마리아는 천천히 엘로디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가볍게 닦아주었다.

    “울지 말렴. 난 네 결혼식을 아주 오랫동안 기대했어.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들어갔으면 좋겠구나.”

    마리아의 말에 엘로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되었습니다.”

    쥴리아가 대기실 밖에서 말을 걸어왔다. 마리아는 엘로디에게 인사를 고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후작은 엘로디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가자.”

    엘로디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복도를 따라 조금 걸어 버진 로드의 시작점에 섰다.

    “엘로디, 행복하게 살거라.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네. 아버지.”

    후작은 엘로디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빛 아래 아드리안이 서있었다.

    엘로디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버진 로드를 걷고, 아드리안을 향해 걷는 길이 두려워졌다.

    “엘로디.”

    후작은 엘로디의 팔을 가볍게 끌며 이름을 불렀다.

    “괜찮을 거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엘로디의 심장은 곧 평온을 되찾았다. 어느새 아드리안의 앞까지 왔다.

    아드리안에게 엘로디의 손을 넘기고 후작이 자리에서 빠진 뒤 온전히 둘만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긴장돼?”

    “네.”

    딱딱한 표정의 엘로디를 보며 아드리안이 붙잡고 있던 손의 손등을 가볍게 문질렀다. 엘로디는 그의 장난에 웃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어느새 교황이 주례를 끝내고 결혼 선언을 했다. 황제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향해 돌아섰다. 붉은 장미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아드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다.

    엘로디는 그에게 끌려가며 눈을 감았다. 아드리안의 입술이 닿는 순간 숨이 멈추었다.

    짧았던 키스가 끝나고 고개를 드는 아드리안을 보며 엘로디가 작게 웃었다.

    * * *

    아드리안이 마법으로 장미의 궁에 돌아오자 엘로디가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정식 대관식 준비로 바빠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서둘러 돌아온 아드리안은 엘로디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늘은 별일 없었어?”

    “낮에 패트리샤를 만나고 왔어요.”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향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패트리샤를?”

    “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에 엘로디는 안심하게 되었다.

    “저, 아이를 가졌대요.”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하…하하. 그래, 안 생기는 게 이상할 정도였지.”

    근 1년간 몸을 섞은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엘로디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엘로디.”

    엘로디는 손을 올려 아드리안의 등을 토닥였다. 이 아이가 그의 삶을 지탱해 줄 또 다른 기둥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잠시 말이 없던 엘로디는 몇 주간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폐하. 저는 알파도, 오메가도 없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요.”

    아드리안은 갑작스러운 엘로디의 고백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알파여서 행복하신가요?”

    아드리안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알파가 아니었다면 불행하셨을 것 같나요?”

    이번에도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알파였기에 행복했던 적은 손에 꼽았다. 철이 든 이후 그의 삶 대부분은 알파였기에 불행하고 괴로운 일들뿐이었다.

    “아니, 하지만 알파가 아니었다면 너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

    그가 주춤거리며 하는 말에 엘로디는 말없이 웃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저와 약혼했을지도 모르죠.”

    “그럴까?”

    “사실 저 아드리안에게 첫눈에 반했는걸요. 분명, 다시 만난다 해도 아드리안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거예요.”

    느릿하게 아드리안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엘로디는 창을 등지고 바로 섰다. 창 너머에 저물어가는 저녁 빛이 엘로디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이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엘로디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아드리안은 어때요? 제가 생각하는 세상이 마음에 드시나요?”

    “그대가 원한다면.”

    “아니, 아드리안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너머에는 체념과 불안이 있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손을 붙잡아서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은 두려움 때문인지, 기대감 때문인지 모를 감정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그는 아버지가 건네준 종이에 적힌 이름을 떠올렸다.

    “없어지길 바라.”

    엘로디는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각인에 의한 [눈]의 공유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보아온 시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엘로디는 조금 슬픈 느낌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평생을 이런 감각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상대의 진심을 늘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그 진심이 서로가 공유한 시간에 기인한 것인지, 능력으로 확인한 것인지 의심하면서 말이다.

    빛을 받아 음영이 드리워진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엘로디가 웃었다.

    둘은 행복해질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보며 마주 웃었다.

    새로운 시대는 이제 곧 시작될 운명이었다.

    완결

    BL소설에서 베타로 살아남기 2권<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