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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오메가버스 세계에서 베타로 살아남기 (12/15)
  • 11장 오메가버스 세계에서 베타로 살아남기

    약혼식 이후 리암은 애론을 죽이지 못한 것에 혼란을 느꼈다.

    분명 [눈]을 사용하려 하였으나 힘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결국 엘로디가 준 약을 써야 했다.

    그리고 엉망이 된 약혼식을 뒤로하고 도망쳤다. 사랑하는 여자의 약혼식과 원수를 죽일 기회 사이에서 애매하게 되어버린 리암은 몇 주를 숨어 지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짙은 무력감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다였다.

    “리암.”

    그런 그를 찾아온 것은 애론이었다.

    리암은 늘 품에 안고 있던 총을 꺼내려 했다.

    “잠깐.”

    애론은 나긋하게 손을 들어 리암의 손을 멈추었다. 리암은 압도적인 마력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다.

    “엘로디를 갖고 싶지 않아?”

    애론은 서서히 리암에게 다가갔다. 달큰한 향기에 리암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애론은 오랜만에 마주한 리암에게서 자신을 향한 분노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심장 근처가 지근거렸다.

    애론의 하얀 손이 리암의 팔 위에 닿았다.

    “꺼져.”

    리암은 그런 그의 손을 쳐내고 몸을 뒤로 물렸다. 한 발짝 물러섰을 뿐인데 달빛을 받고 있는 애론과 달리 완전히 어둠으로 숨어버렸다.

    “생각이 있다면 탑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애론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리암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린 것은 자신이었다.

    * * *

    애론은 리암을 손에 넣고 싶었다. 처음에는 엘로디를 괴롭힐 생각이었다.

    엘로디에게 유일한 편이었던 리암을 빼앗아보고 싶었다. 리암을 향한 엘로디의 신뢰가 부서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까지 했었다.

    그래서 리암이 자신을 믿어주기 시작했을 때 기뻤다. 그의 가족을 찾아주고 도망을 봐주면서 마치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암은 엘로디를 대하는 것만큼 사근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애론은 알 수 있었다.

    리암만이 진심으로 자신을 대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 빛이 나고 더 갖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미안. 난 엘로디가 먼저라.”

    그날은 히트 사이클이 얼마 남지 않아 예민하던 시기였다.

    우연히 마주친 엘로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가볍게 장난을 칠 생각으로 그녀를 공중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공포에 질린 엘로디가 애론의 옷을 붙잡고 버둥거려서 그 사고에 엮여 같이 날아갈 뻔했다.

    그리고 멀리서 달려온 리암을 보고 애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자신과 마주친 눈은 그러나 엘로디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엘로디를 붙잡고 단단한 바닥에 내려놓고 안부를 확인한 후에야 사람을 불렀다. 그러고는 공포에 질린 엘로디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며칠 뒤 리암과 둘이 마주한 자리에서 들은 말이 저것이었다. 애론은 심장이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몸 깊은 곳이 뜨거워지고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분노도, 고통도 아닌 감정들이 몰아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폐허에서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보았던 꽃, 리암과 함께 보았던 하늘, 홀로 올려다본 녹아내릴 것 같은 태양.

    애론은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리암의 손을 붙잡았다.

    인상을 쓰며 뒤돌아보는 그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입꼬리가 올라갔다. 위험할 정도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미소에 리암의 두 눈이 흐려졌다.

    “사랑해.”

    “응.”

    “날 사랑해 줘.”

    “…….”

    리암은 말없이 애론을 끌어안았다. 애론은 쓰디쓴 침을 삼켰다.

    세상이 무너져도 리암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는 엘로디의 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애론은 웃었다. 어느새 리암과 엘로디 중 누가 목적이었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 * *

    패트리샤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로디에게서 떨어졌다.

    요 근래에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잠이 늘었다고 해서 아드리안에게 불려왔다.

    “정말, 별일 아니라는데 자꾸 불러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패트리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패트리샤, 혹시 [눈]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나요?”

    엘로디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패트리샤와 가까워졌다고 하나 [눈]은 아드리안의 능력과 관련된 이야기였고 가급적이면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패트리샤는 엘로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사실 알파나 오메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아요.”

    패트리샤가 어깨를 으쓱이며 엘로디의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가령, 불과 몇 년 전에는 알파나 오메가를 죽여 피를 마시면 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많은 평민 알파가 납치되기도 했어요.”

    “말도 안 돼요.”

    “네. 맞아요. 황제 폐하가 그런 짓을 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어렵다고 생각하셨겠죠.”

    엘로디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할 정도로 잔인해요.”

    “전 그게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황제 폐하 역시 같은 생각이셨구요.”

    신의 아이들이라 불리며 특별 취급 당하던 그들은 고귀한 숭배의 대상이었고,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로디에게는 그들이 능력과 외모에 짓눌려 파멸하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에 대해 알아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엘로디 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무엇이든 좋아요. 말해줘요.”

    “사실 그 힘에 대해서도 거의 구전되어 오던 것이라 어떤 조건으로 발동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태껏 [눈]을 뜬 자들에 대해 알려진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몇 가지 확실한 것은 있어요.”

    패트리샤는 손을 들어 올려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알파나 오메가로서 힘이 강하거나 약하거나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아주 고위급 인사들이 [눈]을 뜨게 되죠.”

    “하지만 리암은 아니었어요.”

    패트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하나예요. 엘로디 님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알파나 오메가에게 항상 하는 말. 누군가에게 함부로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이야기요.”

    “그럼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인가요?”

    “음… 정확히 말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그 대상을 잃었을 때 오는 상실감이 맞겠죠.”

    엘로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눈]을 뜬 사람들이 고위직인 것은 길지 않은 삶에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갖지 못해본 적이 없어서일지도 몰라요.”

    “그럼 리암의 경우에는…….”

    “리암 경은 어렸을 때부터 후작저에서 길러졌죠. 평민 계층의 알파들과 다르게 원하는 것의 대부분을 얻을 수 있었고, 게다가 엘로디 님의 약혼자이기까지 했었으니까요.”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리암의 운명을 뒤틀어서 [눈]을 뜨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황태자 전하는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이미 누군가를 상실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틴 것일지도 몰라요.”

    패트리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로디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로디 님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시니까요. 모든 일을 엘로디 님이 책임지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패트리샤.”

    엘로디는 패트리샤가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리암을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이 일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다.

    “엘로디 님, 나바르 후작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나나가 들어와 엘로디에게 방문자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약혼식 이후 엘로디가 각인을 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한 번도 부모님과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오늘이었니? 들어오시라고 전해줄래.”

    엘로디는 나나에게 대답을 하고 패트리샤를 돌아보았다.

    “패트리샤, 미안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패트리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바르 후작 부부는 오랜만에 만난 엘로디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며 안도했다. 후작저에서의 엘로디는 늘 위태롭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후작은 그런 엘로디를 신경 쓴다고 노력했으나 아드리안과 약혼 후의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깨달았다.

    후작 부인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헤어져서 아쉬워.”

    “이미 거의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걸요.”

    엘로디가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당분간 커피 대신 홍차 종류를 마시기로 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도움을 받아 연금술 협회에 조사단을 요청해 커피 생산지를 살펴보게 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게…….”

    후작은 잠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염치없는 이야기인 건 알지만 애론의 처분에 대해 물으려고 왔단다.”

    “아버지는 제가 어떻게 하시길 원하시나요.”

    엘로디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진 것을 보고 마리아가 손을 뻗어 엘로디의 손을 끌었다.

    “엘로디, 애론이 우리나 너에게 심하게 한 건 안단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잖니.”

    “애론은 저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엘로디는 마리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저는 싫어요. 매번 이런 식으로 애론을 용서해 줘서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후작은 엘로디를 보며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애론은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아이였다. 알잖니, 예민하고 섬세한 데다가 다른 사람들 시선에도 많이 신경 썼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없던 오메가의 탄생, 그리고 황태자의 약혼자가 되면서 애론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다.

    열다섯 살의 애론이 엘로디를 거의 죽기 전까지 몰아세웠던 것이다.

    후작은 그때 처음으로 애론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끔찍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이후로 내가 애론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우리도 애론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건 안다.”

    엘로디는 자신의 아버지의 눈을 보았다. 부드러운 인상의 그는 애론이 도망가고 난 뒤 부쩍 늙고 지쳐 보였다.

    “그래서요.”

    “그저… 죽이지만 말아다오. 우리가 바라는 건 그게 다다. 우린 네가 애론을 죽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구나.”

    엘로디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 저는 애론의 손에서 몇 번이고 죽을 뻔했어요.”

    “안다.”

    엘로디는 후작 부부의 마음은 이해했다. 만일 애론이 아드리안과 결혼했다면 분명 자신을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원작의 최후에 한 줄로 정리된 후작 부부의 마지막은 엘로디를 잘못 키운 죄책감에 후작령으로 내려가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는 것이 다였다.

    이번에는 애론을 잘못 키웠다며 자신들을 미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엘로디.”

    후작 부인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엘로디는 그 얼굴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 볼게요. 돌아가 주세요.”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드리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엘로디는 한창 바쁠 그의 방문에 당황했다.

    혹시 부모님이 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닐까.

    “방문했다면 나에게도 이야기하지 그랬습니까.”

    아드리안은 딱딱한 표정으로 후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엘로디는 그의 표정만으로 애론의 처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금방 돌아가실 거여서 말 안 했어요.”

    엘로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드리안 곁으로 다가갔다.

    “애론의 처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습니까?”

    후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엘로디와 함께 있을 때나 가끔 만나봤던 아드리안은 그저 잘생긴 황태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위압감이었다. 후작은 과거 검 한 자루를 들고 자신을 찾아왔던 브느와를 떠올렸다.

    “예. 황태자 전하.”

    “안된 이야기지만, 애론의 처분권은 나에게도, 엘로디에게도 없습니다.”

    엘로디는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아드리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처분에 관해서는 리암 경에게 전적으로 맡길 겁니다.”

    “하지만!”

    리암과의 일을 알고 있는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황태자인 내가 공증한 일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아드리안의 힘이 공기를 짓눌렀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팔을 붙들었다.

    “아드리안.”

    작게 이름을 부르자 분노로 굳은 얼굴이 엘로디를 돌아보았다.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마리아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해도 환자였다.

    “그럼 나가보도록.”

    고압적인 태도의 아드리안의 행동에 후작은 말없이 마리아를 부축해서 빠져나갔다.

    엘로디는 그런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신경 쓸 거 없어.”

    “알아요.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엘로디는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애론이 죽기를 바랐다. 신이 있다면 그에게 벼락이 내리기를, 때로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기를 바랐다.

    “상상뿐이었을 때는 정말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엘로디의 눈이 눈물로 일그러져 흔들렸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로디의 얼굴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가 선택한 게 아니야, 엘로디.”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오로지 애론의 선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엘로디 네가 할 수 있던 선택지는 거의 없었잖아.”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 내가 선택할 수 있게 해줄게. 너와 리암 모두에게.”

    부드러운 음성에 엘로디는 몸에 힘을 풀었다.

    제멋대로 살아온 애론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은 엘로디만이 아니었다.

    엘로디는 얼굴을 정리하고 아드리안과 함께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섰다.

    “엘로디 님.”

    엘로디는 리암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리암 경.”

    리암은 엘로디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눈이 좋아 보였다.

    그것이면 되었다. 소중한 사람이었으니 행복하게 된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앉지.”

    아드리안은 리암에게 자리를 권하고 상석에 앉았다. 엘로디는 그의 옆, 리암과 마주하는 자리에 앉았다.

    준비할 차를 거절한 리암은 아드리안이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이곳에 부른 이유는 애론의 처분 때문일세.”

    “애론을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곧 붙잡을 거다.”

    아드리안은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애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칠 거야.”

    “어떻게요?”

    엘로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모두를 불러놓고 말하지. 일단 이 자리에서는 애론의 처분만을 이야기하자.”

    아드리안은 생각에 빠진 리암을 돌아보았다.

    “리암 경의 의견을 먼저 듣고 싶군.”

    “저는…….”

    리암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습니다.”

    “죽이길 바라나?”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고 싶습니다.”

    * * *

    애론은 바네사가 안내한 탑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분명 이자벨 역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냥 두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 한 권이 마치 보아달라는 듯 놓여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열었던 책 안에는 애론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평범하게 성장해서 아드리안과 결혼하고, 엘로디를 징벌하는 내용이었다.

    애론은 내용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었음을, 그리고 이 운명을 엘로디가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면 교묘하게 운명을 비틀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론은 책을 집어 던졌다. 그 안에서도 리암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평탄했어야 할 자신의 삶을 망친 자에게 향했다.

    어느새 밖은 밤이었다.

    달이 차지 않아 어두운 탑의 1층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에 애론은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갖지 못할 것은 없어.”

    엘로디가 자신의 운명을 뒤틀었다면 자신도 해낼 것이다.

    애론은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서있는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엘로디.”

    후드를 내린 엘로디는 표정 없는 얼굴로 애론을 마주했다.

    “네가 날 찾아오는 건 조금 색다른데.”

    엘로디는 잠시 웃었다. 애론을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가족으로서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천천히 방 한가운데에 서있는 애론을 중심으로 엘로디가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방 안을 돌았다.

    “그러게. 이렇게 마주한 것도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넌 대체 누구야?”

    애론의 말에 엘로디가 웃었다. 그의 생각이 흘러 들어와 본래의 자신의 운명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나야. 네 말대로 평범하고 볼 것 없는 베타인 엘로디 나바르.”

    “거짓말.”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하지 않았고.”

    엘로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냥, 내 전생을 알아차렸을 뿐이야. 네가 아는 엘로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원래 그게 나였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애론의 새까만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오랜 기간을 엘로디에게 기만당했다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엘로디가 아니라고 한다고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리암은 여기에 안 올 거야.”

    엘로디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러니까 기다려봤자 소용없어.”

    “그 애가 널 포기한다고?”

    애론은 엘로디를 비웃었다. 그녀는 알파인 리암을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름다움에 가려진 알파와 오메가들의 집착과 광기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온 거야.”

    엘로디는 빠르게 손을 바닥에 가져다댔다. 아드리안의 힘이 심장에서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 *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혼자서 애론을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거의 소리를 지르려 했다.

    “안 돼! 절대.”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애론을 방심하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그때 보셨잖아요. 애론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강해졌다고요.”

    “그래도 안 돼. 차라리 나랑 가스파르가 가서 잡아오는 것이 낫지.”

    “그러다가 애론이 마력을 개방해서 제국민들을 발현시키면요.”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애론을 잡는 일은 좀 더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수행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널 그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수 없어.”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눈을 내려다보며 감정을 토해냈다. 그녀가 애론이 있는 밖으로 나가는 것도 싫은데 그와 싸우러 나간다니 말도 안 됐다.

    “애론은… 베타의 기운을 무의식적으로 확인 안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대는 다르잖아.”

    “그건 제가 애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고요. 애론은 베타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정도로 여기거든요.”

    그녀의 말에 가스파르가 자리에서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뒤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엘로디는 가스파르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약을 꺼냈다.

    “이건 애론을 완벽하게 베타로 만들 약이에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일이 끝나고 엘로디는 패트리샤의 도움으로 약간의 개량을 거쳐 발현을 가라앉히는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리암 경. 그대도 함께 가주었으면 해.”

    엘로디의 말에 리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엘로디 님의 명이시라면.”

    아드리안은 인상을 쓰며 엘로디를 돌아보았다.

    “왜 나는 안 되고 리암은 된다는 건데.”

    “뻔하죠. 애론은 제가 나타나면 당연히 리암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리암의 기운 역시 신경 쓰지 않겠죠.”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손을 붙잡고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의 불안함이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걱정 마세요. 당신 목숨도 함께 걸렸는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리암은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엘로디를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하, 그러나 저는 그가 베타가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아드리안은 당연히 리암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리암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생포하실 것이라면 저번에 주셨던 총알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엘로디는 리암을 한참을 보았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리암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싶었다.

    “좋아.”

    엘로디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총에는 일시적으로 베타로 만드는 총알 하나와 영구적으로 만드는 것 여러 개를 넣어서 사용해. 생포하겠다고 목숨 걸게 하지 말고.”

    아드리안의 말에 가스파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애론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처음 시도가 실패할 시 오메가인 채로 생포는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둘의 말을 들은 리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반나절 동안 엘로디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힘을 끌어 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로디를 보며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줬던 아티팩트들을 떠올렸다.

    “여기에 내 마력이 들어가 있으니 미리 덫을 만들어놓으면 좋을 거야.”

    “어떻게요?”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말에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끝까지 들은 엘로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티팩트 사용법을 확실하게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아드리안은 불안해하면서 그런 엘로디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드리안은 가스파르에게 순간 이동 아티팩트를 주고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것을 깨서 자신을 그 자리로 소환시키도록 명해두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에게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 * *

    바닥과 벽에서부터 시작되어 몸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애론이 공중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엘로디의 행동이 더 빨랐다.

    마치 늪처럼 몸을 타고 오르는 마력에 애론은 당황했다. 엘로디가 마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애론을 보며 집중하는 엘로디의 얼굴에서 한기에도 땀이 떨어져 내렸다.

    “엘로디, 감히 너 따위가!”

    애론은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마력을 화염으로 바꿔 이 구속과 엘로디를 한 번에 처리하려 했다.

    “리암!”

    그러자 엘로디가 지켜보고 있을 리암을 불렀다. 리암과 가스파르가 각각 숨어서 엘로디가 만든 약이 든 총을 들고 있었다.

    둘은 애론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애론은 어느새 마력으로 얼음을 녹이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쯧.”

    가스파르는 그가 오메가인 채로 생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첫 발을 쏘고 다시 총알을 장전했다. 리암은 그런 가스파르를 보며 인상을 썼으나 엘로디를 지키기 위해서 그 역시 총알을 갈아 끼웠다.

    “감히!”

    둘은 애론을 맞히기 위해 몇 번이고 총을 쐈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총알은 애론에게 닿지 않았다. 너무 강한 열기 앞에 총알이 흔적도 없이 공중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가스파르는 지금의 애론은 자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지켜야 할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그는 곧 미련 없이 아드리안이 준 아티팩트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나 애론은 그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마법으로 아티팩트를 증발시켰다.

    “잔머리는 그만 굴려.”

    애론의 두 눈은 리암을 향해 꽂혔다. 자신의 사랑을 비웃고 제 손을 빠져나간 남자의 두 눈에는 증오만이 가득했다.

    애론은 리암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 자신을 기억하고 생각하기를 바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엘로디를 보았다.

    “저걸 죽이면.”

    해사하게 웃으며 애론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아드리안의 힘을 끌어오는 데 성공한 엘로디가 그의 양손을 얼려버렸다.

    “이런 잔기술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엘로디는 말없이 그의 양발도 얼렸다.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얼음의 무게에 애론의 몸이 바닥으로 다시 떨어졌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지. 안 그래, 애론?”

    “이게!”

    엘로디는 그가 이성을 잃기를 바랐다. 가스파르는 곧 엘로디가 일부러 그를 도발해 자신들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는 재빨리 총알을 재장전하고 애론을 향해 겨눴다. 눈에 보이는 애론은 분노로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서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보며 침을 삼켰다. 예전이라면 무서워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떠올렸다.

    멀리 리암과 가스파르가 총을 겨누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애론이 마력을 잔뜩 모은 채로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을 보며 애론은 몸을 이동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애론의 몸이 검에 꿰뚫렸다.

    “안 돼!”

    엘로디는 비명을 질렀다. 도망치기 위해 모아둔 그의 마력이 엄청난 기세로 공기층을 찢으며 퍼져나갔다.

    검 끝이 애론의 몸을 뚫고 하얗게 빛났다. 엘로디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애론의 뒤에는 브느와가 서있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폐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황제를 보았다.

    방금 전 사람을 베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서 웃는 브느와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브느와는 아무렇지 않게 애론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었다. 엘로디는 하얗게 질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마력은 여태껏 애론이 보여주었던 것과는 완전히 형태가 달랐다.

    별처럼 빛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애론의 마력을 보며 엘로디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가스파르가 쓰러지면서 엘로디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애론의 마력이 커피를 통해 지속적으로 약 기운이 쌓인 사람들과 반응해 알파나 오메가로 각성시킬 것이다.

    “가봐야 하지 않겠나?”

    여유 있는 표정의 브느와가 턱으로 가스파르를 가리켰다. 엘로디는 입술을 깨물고 리암과 가스파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브느와는 검을 휘둘러 피를 떨궈내고 바닥에 쓰러진 애론을 내려다보았다.

    “경이 이렇게 된 것은 욕심이 과해서일세.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애론은 눈을 굴려서 엘로디 쪽을 보았다. 엘로디는 다시 한번 애론의 마력에 노출되어 쓰러진 가스파르의 곁에서 따로 준비해 둔 약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쪽에 서있는 리암과 어느새 나타난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불렀네.”

    “무슨…….”

    브느와는 애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에게만 들릴 법한 크기로 속삭였다.

    “궁금해하지 않았나? 엘로디 나바르가 왜 달라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출혈에 의한 쇼크로 애론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다른 세계의 그녀를 이쪽으로 끌어와서 태어나게 해주었지. 그녀의 말은 맞아.”

    브느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엘로디는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저 몸이었고, 난 그녀의 운명을 보고 미리 알려주었을 뿐.”

    애론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운명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더군. 애론 경, 하지만 오늘의 일은 모두 그대의 선택이었음을 잊지 말게.”

    말을 마친 브느와가 아드리안과 엘로디의 곁으로 다가갔다.

    “분명 원하는 것이 생길 걸세. 그렇게 되면 날 찾아오게.”

    엘로디는 아드리안과 같은 색의 눈을 보았다. 그의 두 눈에는 오만과 여유 그리고 광기가 스쳤다.

    * * *

    자리에 앉아있던 이자벨은 작은 새가 날아와 그녀의 몸 위에 앉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속삭이듯 무언가를 말하고 사라진 새를 보며 이자벨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일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틀어져 버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랜 동안 기다려온 것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브느와가 만들어준 온실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만들어준 화려한 정원은 어느새 족쇄가 되어갔다.

    이자벨은 천천히 그것들을 어루만졌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이 꽃에서 멀어졌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나 이자벨은 그 자리에 계속해서 서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으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애론의 마력을 보았다.

    자신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던 시녀가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발현을 시작했다.

    “드디어!”

    이자벨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가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두 눈에 수많은 알파와 오메가의 탄생이 보였다.

    “아… 아아…….”

    이자벨은 재빨리 아티팩트를 이용해 성당으로 향했다. 신탁이 내리는 방 앞에 당황한 사제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들을 밀쳐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반려의 신탁은 붉은색으로 빛났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었다. 이자벨은 수백 장의 신탁의 종이를 끌어모아 정신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이 다가오고 새벽이 되어갈 때까지 자신의 반려를 찾아낼 수 없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많은 반려가 서로를 찾았는데 왜 자신에 관한 신탁은 한 장도 찾을 수가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자벨은 미친 사람처럼 들고 있던 신탁을 계속해서 다시 읽어 내렸다.

    “이자벨.”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이자벨은 돌아보지 않았다.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체향이 훅 들어왔다. 등 뒤에 닿아오는 남자의 몸에 이자벨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걸 찾습니까?”

    브느와는 붉은 종이를 이자벨에게 넘겼다. 이자벨은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여자였다.

    모두가 브느와의 반려라고 믿었던, 자신이 직접 죽인 여자의 이름을 보며 이자벨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안 돼……. 브느와 당신이!”

    이자벨은 분노에 가득 차서 브느와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던 브느와는 이번에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자벨은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몇 번을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소리치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브느와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자벨은 기절하듯 쓰러졌다.

    브느와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자벨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브느와는 그녀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가슴팍에 닿은 작은 머리 위에 입술을 가볍게 대었다.

    그의 얼굴에 지금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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