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운명의 반려 (11/15)

10장 운명의 반려

애론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꿈인가.’

어린 시절의 꿈인가 싶었다. 애론은 비웃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엘로디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작고 어린 그녀는 가끔 만나는 부모님들을 능숙하게 속였으나 자신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저것은 엘로디가 아니다.

“애론.”

웃으면서 자신에게 친한 척하는 것이 역겨웠다.

엘로디는 자신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애론은 그런 것에 관심 없었다.

어차피 그 아이는 덜 떨어진 베타일 뿐이었다. 껍데기가 같은데 내용물이 달라진다고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연금술에서 재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애론은 자신보다 어린 엘로디가 연금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만 느꼈다. 부모님들이 엘로디가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며 호들갑을 떨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는 엘로디는 전혀 아름다운 축에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용물이 바뀐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자랑스러워하며 어디서 빌어먹었는지도 모를 남자애를 데려오는 게 꼴사나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한 연금술 공부로 엘로디를 눌렀을 때 묘한 희열을 느끼기까지 했다.

엘로디가 초경을 시작할 때까지 발현하지 못하자 집안 분위기가 좋지 못했으나 곧 모두 그것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애론의 주위는 그러지 못했다.

“쟤야? 베타인 동생보다도 덜떨어진 멍청이가?”

“자기가 시대의 유일한 오메가라며 거만 떨더니 결국 동생은 베타였던 거잖아.”

애론은 왜 자신이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어릴 때부터 예민했던 자신의 오감은 주변인들의 동경, 사랑, 질투의 감정을 쉽게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까지의 감정 대부분은 동경과 질투 혹은 욕정이 다였다. 그러나 엘로디의 발현이 없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퍼지자마자 그를 향하는 감정들 대부분은 비웃음과 무시 같은 것들이었다.

애론은 자신을 향하는 그 감정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엘로디보다 못하면 안 되는가?

그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꼬투리를 잡고 애론을 비웃었다.

베타의 이중성에 치를 떨었다. 애론은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아니,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든 스트레스를 엘로디에게 풀었다. 저 가짜가 건방지게 잘난 척을 했다고, 그 때문에 자신이 이 모욕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엘로디가 더 미워지고 싫어졌다.

그래서 더 괴롭히고 무너트리려 했다. 자신이 밖에서 겪었던 그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퍼붓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놀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애론은 새까만 눈을 반짝였다. 꿈이었지만 그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엘로디가 넘어지고 그것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신이 될 것이다.

종말의 오메가라 불리던 그들은 베타라는 종족들에게 종말을 선고하라는 신의 계시이다.

애론의 몸 구석구석으로 피가 흐르듯 마력과 약 기운이 흘렀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몸이 옅게 빛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던 이자벨도, 바네사도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바네사, 왜 멋대로 일을 진행하는 거지?”

“폐하께서 먼저 저희를 버리신 것 아닙니까? 그 여자가 황후가 되는 모습을 제가 지켜보라는 겁니까?”

“바네사!”

바네사는 들고 있던 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각성제를 먹은 탓에 온몸에 활력과 힘이 넘치는 기분이었다.

양 볼이 상기된 채로 누워있는 애론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베타인 동생보다 덜떨어진 오메가라며 수많은 사람이 그를 무시하고 비웃었었다.

만일 바네사가 이대로 애론을 숨기고 자신의 반려로 삼아 아이를 갖게 한다면 그들의 가문은 반드시 다시 커질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아이가 황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네사의 눈에 욕망이 가득했다.

이자벨은 바네사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자신이 브느와를 통해 본 일들이 애론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친 다음부터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브느와가 한 말을 기억해 냈다.

* * *

“이제 그만두면 안 됩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이자벨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당신이야말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이자벨의 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그의 감정이 제멋대로 흘러 들어와 이자벨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보나요, 폐하.”

“……!”

“전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도 제가 [눈]을 뜬 것은 알고 있겠죠. 아니, 이미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요.”

“이자벨, 나는…….”

이자벨은 머리가 아파져 왔다. 지긋지긋했다. 살아가는 것도, 그에게 휘둘리는 것도, 모든 일에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도 전부 지겨웠다.

“후회하시나요? 그러니 그때 제가 죽게 그냥 두시지 그러셨어요.”

허물어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이자벨을 브느와가 급하게 다가가 안아 올렸다.

이미 이자벨은 브느와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여서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가볍게 묶어둔 은발이 흩어져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왜 그러셨어요, 왜……. 왜 아드리안이 각인을 하게 그냥 두셨어요!”

“이자벨.”

“그 상대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얼마나 후회하면서 살아가는지 아시면서 왜……. 대체 왜!”

브느와는 이자벨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브느와의 잘못이었다.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보는 운명이 현실이 되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이자벨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알고 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브느와, 제발 절 사랑한다면 이제 놓아주세요.”

브느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자벨도 그가 이제 와서 놓아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자벨,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됩니다.”

“제가 있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죽어가잖아요.”

“죽어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는 이자벨을 꽉 끌어안았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남자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이자벨은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브느와는 아주 오래전 이자벨을 잃을 뻔했던 날, 죽어가는 그녀를 다시 살리기 위해 강제로 각인을 했었다.

되살아난 이자벨은 브느와의 생명을 깎아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이자벨은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몰랐으나 이자벨은 브느와를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죽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각인은 운명의 반려만이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자벨은 그 여자를 떠올렸다.

먼 타국으로 시집간 그녀를 찾아갔을 때 이자벨은 그녀가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당신, 진짜가 아니군.”

이자벨의 말에 여자가 삐뚤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도 두려우십니까, 황후 폐하.”

브느와에게서 살고 싶다면 타국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쫓겨나다시피 한 결혼이었다.

이자벨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대가 브느와의 반려라면 그를 위해 내 각인을 풀어다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폐하께서 저를 버리신 것이지, 제가 그분을 버린 것이 아닌데요.”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에 이자벨은 고개를 숙였다.

“내 각인을 푼다면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는 당신을 떠올리겠지. 황후가 되고 싶던 것이 아니냐?”

그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떠나버렸다.

이자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그녀가 이자벨과 브느와의 각인에 대해 알고 있는 이상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다.

이자벨은 무표정하게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성력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람을 죽인다.

내일 발견된 그녀는 아마도 돌연사 정도로 기록될 것이다.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자벨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만일 강제로 발현한 오메가나 알파에게도 운명의 반려가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 또한 운명의 반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궁에서 벗어나, 브느와에게서 벗어나 이 기생하는 삶을 마침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 *

엘로디는 패트리샤를 불렀다. 처음에는 엘로디를 노린 일이라고 생각했던 강제 발현은 그날, 애론의 마력에 가스파르가 쓰러지면서 모두 뒤집혔다.

이 일은 엘로디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노리고 있었다. 엘로디와 가스파르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고, 외부 음식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원재료까지 확인해서 먹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네요.”

“물은 아닐까요? 아주 소량이라도 물이라면 매일 마시니까 가능할 것 같아요.”

“물에 녹인다면 정말 엄청난 양의 약물이 필요할 텐데 가능할 것 같지가…….”

엘로디는 순간 커피를 떠올렸다. 처음 커피를 대중화시킬 때 애먹은 것은 압력을 가해 추출한 에스프레소식 커피에 익숙해져 있던 자신의 입맛이었다.

드립 커피나 콜드브루 같은 다양한 방법의 커피를 먹으려고 했으나 그 특유의 맛을 잊지 못해 몇 번이고 공방을 들락거리며 기계를 고안해 냈다.

엘로디는 사람을 시켜 에스프레소를 가져오게 했다.

“커피는 이미 한 번 확인하셨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제가 마신 건 이걸 물에 희석한 것이었죠.”

연금술사가 에스프레소를 가져가자 엘로디는 며칠 뒤를 약속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시키는 약이요. 커피에 들어있었어요. 정확히 말해서 커피콩에요.”

“대부분 에스프레소를 물에 희석시켜 먹어서 확인되지 않았던 거군요. 많이 마실수록 몸에 더 빨리 쌓이게 되고요.”

“네. 아마도 엘로디 님은 다른 종류의 약을 많이 복용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작용한 걸 수도 있어요. 아직 조사 중이지만.”

패트리샤는 불길한 것을 만지듯 커피를 들어 올렸다.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해서 활성시키는 걸지도 모르죠. 주변에 알파나 오메가가 많아서 더 빠르게 나타났을 수도 있어요.”

“그럼, 가스파르 경이 쓰러진 것도…….”

“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스파르 경도 주변에 알파들이 많았으니까요.”

엘로디는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애론 대신 그녀가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커피가 이렇게까지 대중적인 음료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불호가 강해서 단골과 신기한 것을 찾아다니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판매했다.

“패트리샤, 커피가 유행하게 된 게 저랑 아드리안이 카페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이 찍힌 다음부터인 거 알아요?”

“들었습니다. 그때 아드리안 님이 단 걸 좋아하신다고 해서 커피에 연유를 넣어주신 게 유행했죠.”

“그날 데이트는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사진을 찍을 예정이긴 했지만, 그전에 미리 시식을 해서 반응을 보고 싶었거든요.”

엘로디는 손톱을 가볍게 깨물었다. 깔짝거리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생각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그냥 우연이겠거니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날 찍힌 사진은 이상했어요.”

표정 없고 차가운 황태자로 알려진 아드리안이 커피 잔을 들고 활짝 웃는 사진은 정말 잘 나왔다.

“어쩌면 황태자 전하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면 당연히 인기가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누군가의 짓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커피를 오랫동안 마셨어요. 분명 커피콩에 무언가가 들어가기 시작했다면 최근일 거예요.”

엘로디는 황후를 떠올렸다. 그날 둘의 일정을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그녀의 일정을 아는 사람들 중에 황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매번 티파티에 초대할 때마다 내려주던 커피와 그녀의 알 수 없는 태도들을 떠올렸다.

패트리샤를 돌려보내고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찾았다. 아드리안은 결혼을 앞두고 엄청난 양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아드리안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로디, 무슨 일이야. 저녁 같이 먹으려고 온 거야?”

부드럽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남자에게 엘로디는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은 이따가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손을 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두르고 품으로 끌어안았다.

엘로디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 혹시 황후 폐하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요?”

“어머니에 대해서? 갑자기 왜?”

되묻는 아드리안을 보며 엘로디는 잠시 숨을 삼켰다. 자신이 그의 어머니를 의심하는 것에 기분 나빠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패트리샤에게 이야기 들으셨죠?”

“커피에서 약 성분이 나왔다고 들었어. 아주 소량이지만 몸에 축적된다고 그러던데.”

엘로디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패트리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로 이자벨을 떠올렸을까. 분명 신흥 종교의 누군가가 벌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좀 그런데… 이상하게 황후 폐하가 떠올랐어요.”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느낌이 그렇다고?”

“네.”

자신의 눈치를 보는 엘로디를 보고 아드리안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씁쓸함이 남아있는 것을 엘로디가 알아차렸다.

“아드리안?”

“아마 엘로디, 내 [눈]의 영향일지도 몰라.”

“아드리안 님은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못하잖아요.”

“황족이라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어.”

“아드리안의 [눈]은 무엇인가요?”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어깨 위에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댔다. 조금 따뜻한 그의 몸이 어깨에 닿자 엘로디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망설이는 듯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드리안은 깊은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 감정을 들을 수 있어.”

아드리안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원해서일 때도, 원하지 않더라도 그 소리가 들려.”

“그럼…….”

“각인은 서로의 생명과 정신력을 공유하지. 어쩌면 어머니를 만났을 때 느꼈던 일에 내 힘이 더해져서 확신으로 변했을지도 몰라.”

잠시 고민하던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잡고 두 눈을 보았다.

“만일 황후 폐하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면요.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무는 해의 빛에 그의 머리가 금발처럼 반짝거렸다.

엘로디는 그에게 금발도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황제를 떠올렸다.

“아버지께서는… 하아… 엘로디, 너도 알겠지만 어머니가 연관된 일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몰라.”

엘로디는 아드리안이나 아버지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황제는 과거 황후의 자격을 논하던 귀족 가문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전시하고 두 번 다시 이 일에 관해 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일 이 일의 배후에 황후가 있다고 아드리안이 들고일어난다면 과연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몰랐다.

“일단, 애론을 잡는 데 집중해요.”

“그래. 그 수밖에 없겠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엘로디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황후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 * *

엘로디의 황궁 생활은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이미 몇 개월을 머물렀던 곳이었고, 지금 그녀의 상태로 궁 밖에서 머무는 것은 엘로디에게도, 아드리안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엘로디는 각인을 한 이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드리안의 감정이 훨씬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다였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자신을 대할 때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느낄 때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갑자기 열이 올라서 엘로디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나, 가서 차가운 물 좀 가져다줄래?”

“네, 황태자비 전하.”

엘로디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정원을 돌아보았다. 나나와 쥴리아가 종종 장난식으로 놀리는 그 단어가 나쁘지는 않았다. 장미의 궁은 불안정한 엘로디의 상태를 고려해 아드리안을 제외한 모든 알파가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엘로디는 마지막으로 리암과 인사를 했을 때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파이기 때문이었을까. 리암은 엘로디의 몸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엘로디는 그의 상심한 표정을 보며 미안한 감정을 가졌으나 더는 그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나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본 엘로디는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윽!”

손이 떨리고 몸 안쪽에서부터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앉아있던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엘로디는 고통과도 같은 쾌락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복부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열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뒤덮었다.

엘로디는 몸을 겨우 가누어 앞으로 기어갔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드리안을 찾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가야 한다. 그에게 가서…….

“엘로디!”

시선 끝에 아드리안이 보이자 엘로디가 환하게 웃었다. 이미 그녀는 이성을 잃은 채였다. 아드리안을 보는 순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그를 그대로 밀어서 넘어트렸다. 서툴고 급한 키스가 오고 가고 엘로디는 한 손으로 그의 상의를 찢다시피 벗기기 시작했다.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중 엘로디의 불안감을 느끼고 급하게 공간 이동을 한 아드리안은 그녀가 히트 사이클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로디. 잠깐, 여기서는.”

“하아… 아드리안. 저는 더 못 참겠어요.”

어느새 그의 상의 단추를 다 풀어서 맨가슴을 더듬는 손바닥이 열기로 뜨거웠다. 아드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엘로디를 안아 올렸다. 마법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그녀가 목덜미를 무는 바람에 방이 아닌 정원 근처 나무 뒤로 떨어졌다.

“엘로디, 조금만 참아봐.”

그녀의 두 눈이 욕망으로 반짝였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달래려고 애썼으나 곧 부딪쳐 오는 입술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엘로디의 페로몬이 퍼지면서 아드리안의 이성도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했다. 입술이 부딪치고 더운 숨이 얽혀들어 갔다.

“엘로디 님! 어디 계세요.”

멀리서 엘로디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엘로디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그녀가 계속해서 몸을 비벼오는 탓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엘로디 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데리고 더 먼 곳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 계속해서 치근대는 탓에 집중이 어려워서 궁 내의 그녀의 방까지 한 번에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윽!”

엘로디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의 바지를 벗겨 내리고 성기를 꺼냈다. 하얀 손이 검붉은 성기를 쥐고 문지르자 점점 부피가 커지고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잠…잠깐, 엘로디.”

그의 손이 엘로디를 막기도 전에 그대로 성기를 삼키고는 끝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소리를 참기 위해 입을 손으로 막고 눈을 감았다.

멀리서 엘로디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지자 불안감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엘로디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제 몸에서 떼어내서 바둥거리는 양손을 꽉 쥐고 단숨에 침실로 이동에 성공했다. 아드리안은 침대 위에 엘로디를 눕히고 그녀의 옷을 헤집었다. 이미 그의 이성도 한계에 가까웠다.

엘로디가 소리 내 웃으며 그의 손길에 몸을 틀었다. 부드러운 가슴과 둔부가 아드리안의 손에 감겨왔다.

아직 밖이 밝아 환하게 들어오는 빛에 엘로디의 나신이 모두 내려다보였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어깨까지 키스하며 내려왔다.

“으응.”

엘로디가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는 아드리안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다댔다.

아드리안은 순순히 그녀의 손길을 따라가서는 천천히 위아래로 음순을 문질렀다. 손끝에 닿은 음핵을 가볍게 튕기자 엘로디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하아… 아! 아드리안, 더어… 빨리!”

아까부터 계속해서 조르는 엘로디를 보며 아드리안은 작게 웃었다. 아까 엘로디가 쥐고 핥아서 이미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성기의 끝을 가져다가 대었다.

엘로디는 허리를 움직여 그 끝에 자신의 질구를 문질렀다. 단순히 문지른 것만으로도 가볍게 절정에 다다랐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양다리를 단단하게 쥐고 천천히 몸 안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내부는 아드리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아… 아!”

엘로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좁은 내부를 벌리면서 들어오는 그의 페니스가 움직일 때마다 몸 전체를 내려치는 기분이었다.

올려다본 아드리안의 눈이 욕망에 젖어있었다. 천천히 엘로디의 내부를 문지르던 아드리안은 곧 엘로디가 이성을 찾기 시작한 것을 보고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움직임에 흔들리면서 엘로디는 다시 한번 성감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질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성기를 압박하고 풀기를 반복할 때마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사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입술을 내려 그녀의 유두를 핥아 내리자 엘로디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몸을 들락거리는 그의 몸짓이 빨라지고 엘로디의 신음 소리와 아드리안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철벅거리는 젖은 소리와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 한낮의 더운 공기와 함께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몸 안에 정액을 쏟아부었다.

“으음.”

엘로디는 제 몸 안에서 길게 사정하면서 자신 위로 쓰러진 아드리안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등을 양손으로 쥐고 가볍게 쓸어내렸다.

엘로디가 한 작은 행동은 그러나 내부에 들어찬 그의 성기를 다시 부풀어 오르게 했다. 몸을 일으킨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하고는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사정과 절정이 오가고 둘은 지쳐서 침대 위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았다.

엘로디는 낮의 일을 기억해 내고 볼을 붉혔다. 패트리샤가 몸이 완전히 돌아온 것 같지 않으며 부정기적으로 오메가처럼 발정기가 올 수 있다고 했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이제 좀 괜찮아?”

“아까부터 괜찮아졌어요.”

계속해서 질러댄 신음 때문에 엘로디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로디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약 기운이 다 빠지면 네가 만든 억제제를 먹으면 될 거야.”

“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내가 다시 올 거고.”

“알고 있어요. 아드리안을 믿으니까.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은 웃으며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둘은 각인을 하고 난 뒤 절대적인 상대가 생겼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긁어내리면서 웃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행동에 등을 움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엘로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엘로디는 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좀 더 자는 건 어때.”

고개를 끄덕이고 엘로디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로 직전의 섹스를 떠올렸다. 온몸이 쾌락만을 좇아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섹스의 도중에는 기억이 휘발될 정도로 감각에 지배당했다.

약으로 경험했던 오메가로의 발현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로 상대를 원하고 있었다. 그저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젖어들고 몸이 간지러웠다.

결국 엘로디는 뒤를 돌아 아드리안의 몸 위로 올라탔다. 눈을 감고 있던 아드리안이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놀란 눈으로 엘로디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배 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스스로 가슴을 문질렀다. 다시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해 갔다.

엘로디의 입술이 아드리안의 이마에 닿는 순간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엘로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몸을 타고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각인의 문양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의 온몸을 타고 흐르는 장미 덩굴은 마치 올가미처럼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쇄골에 입술을 대고 가볍게 물었다.

* * *

애론이 눈을 떴을 때는 바네사뿐이었다. 이미 강화제를 몇 개를 먹었는지 빈 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애론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눈을 떴군.”

바네사가 몸을 일으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애론은 주변을 살피고 이곳이 예전에 자신이 치료를 위해 머물던 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황태자와 네 동생은 이미 서로를 반려로 삼은 듯하다.”

바네사는 제 몸 안에서 요동치는 힘을 느끼며 애론을 바라보았다.

“어때, 나의 반려가 되는 건? 지금의 나와 너의 아이라면 분명 황제의 자리도 노릴 수 있을 거다.”

이상할 정도로 무감한 표정의 애론이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난 네 반려가 될 생각은 없어. 나의 반려는 하나뿐이거든.”

“그만 인정해. 황태자는 이미 늦었다. 나 정도라면 네게……!”

그러나 바네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애론이 웃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마력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숨을 쉬지 못한 채 꺽꺽거리는 바네사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애론은 곧 힘을 풀었다.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발끝으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날 탑으로 안내해. 너희가 원하던 그 일 말이야. 내가 해주지.”

애론은 달빛을 받으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가 아는 베타들은 오만했다. 강한 힘을 가진 알파와 오메가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평민인 그들은 가축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가. 애론은 베타들이 내부 깊숙이 갖고 있는 계급과 형질에 대한 열등감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실질적인 세계의 중심이 자신들이라 믿고 있는 어리석은 베타들에게 종말을 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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