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각인 (10/15)

9장 각인

잠이 든 엘로디는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떴다. 궁에서 나온 이후로 억제제 생산을 위해 바쁘게 지내왔다.

공정을 잡는 것을 도와주거나 대량으로 생산된 억제제의 안정성 확인, 판매처의 확대 같은 자잘한 업무들을 후작과 함께 처리하면서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요 며칠 무엇 때문인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났다.

몸을 일으켜 커튼을 치기 위해 발코니와 연결된 문가로 나갔다.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드리안 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던 거예요?”

“온 지 얼마 안 됐어.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애매하게 웃는 아드리안의 표정을 본 엘로디는 그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로디는 문을 열고 그를 끌어당겨서 방 안으로 들였다. 아무리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밤이 추워서 그의 몸이 차가웠다.

사실 아드리안은 당연하게 엘로디의 방으로 마법을 이용해서 들어가려고 했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나바르 후작가에서는 애론이 엘로디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방 근처의 마력을 모두 차단시켰고, 그 사실을 몰랐던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방 발코니 근처에 떨어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엘로디가 깰 것이 걱정되어 그냥 밖에 잠깐 앉아있는다는 게 꽤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제가 안 일어났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으음… 그냥 기다리면 될 것 같았어. 나 운이 꽤 좋은 편이거든.”

엘로디는 차갑게 굳어있는 그의 손을 제 양손으로 잡았다. 원래 남들보다 체온이 높았던 그의 몸이 서늘했다.

아드리안을 침대에 앉히고 이불을 끌어와서 몸에 둘러주었다.

“사람을 불러서 따뜻한 걸 받아 올게요.”

말을 마친 엘로디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손을 붙잡았다.

“얼굴만 보고 금방 가려고 온 거니까 그냥 같이 있어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그가 엘로디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맡는 장미 향에 엘로디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술이 이마, 목, 어깨에 닿았다. 엘로디는 평소보다 차가운 그의 온도에 몸을 웅크렸다.

“차가워?”

“아니요. 더 해주세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이 웃으며 다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이 엘로디의 입술을 벌렸다. 입 안으로 따뜻한 살덩이가 들어와 이곳저곳을 훑는 감각에 엘로디는 등을 떨었다.

손을 뻗어서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드리안 특유의 웃는 소리가 입 안에서 울려서 기분이 좋아졌다.

“으음.”

엘로디가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더듬었다. 부드럽게 쓸어 올려서 움켜쥐자 아드리안이 몸을 튀며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흣, 엘로디. 오늘은…….”

아드리안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상체를 더듬는 엘로디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엘로디는 그런 그의 손을 잡아끌어서 그대로 침대 위로 눕혔다.

그녀의 장난에 즐거운 듯 예쁘게 휘는 눈을 보며 엘로디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천천히 몸을 내려서 다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자 엘로디는 몸을 좀 더 밑으로 내려서 아드리안의 성기 위로 음부를 문질렀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감각에 몸이 떨렸다.

“하윽, 잠깐…….”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제 것을 문지르자 아드리안이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엘로디는 그의 몸 위에서 입고 있던 얇은 잠옷을 벗어서 옆으로 던졌다.

아드리안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몸을 올려다보았다. 엘로디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부드럽고 말랑한 가슴의 감촉을 즐기면서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하는 그의 손을 느끼며 엘로디는 눈을 감았다.

“아… 아드리안… 하읏.”

“하아… 오늘 적극적인데.”

그의 말에 엘로디가 눈을 반쯤 뜨고는 웃었다. 손을 뻗어서 그가 입고 있던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손바닥을 안으로 넣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끌어 내려서 키스를 했다. 입 안을 탐하면서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속옷을 끌어 내렸고 엘로디는 그의 바지를 벗겼다. 순식간에 나체가 돼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 위해 몸을 붙였다.

아직 차가운 아드리안의 몸에 엘로디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얼마나 밖에 계셨던 거예요.”

“으음… 나도 잘 모르겠어. 중간에 잠들어서…….”

엘로디는 그의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은 부끄러웠는지 살짝 얼굴이 상기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아드리안 님.”

“응?”

“빨리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나도 그래.”

아드리안은 웃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불안감이 녹아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자신의 밑에서 부풀어 제 존재를 과시하는 아드리안의 성기를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손길에 아드리안이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보며 그의 것을 잡아서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얕은 신음 소리를 내며 흐트러진 아드리안의 모습에 아랫배 쪽이 쑤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성기 끝을 문질렀다. 맑은 액체를 흘리는 것을 핥아 올리자 그가 허리를 틀면서 억눌린 소리를 뱉어냈다.

“읏.”

아드리안은 자신의 물건을 입에 문 채로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엘로디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 안과 가끔 가볍게 긁어내리는 그녀의 치아마저도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잡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눕히고 성기를 쥐고 그녀의 질구에 가져다대고는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허리를 들고 다리를 벌리며 그를 수월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썼다. 천천히 몸을 가르며 들어오는 뜨거운 체온에 몸의 감각이 달아올랐다.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더 깊은 곳으로 아드리안을 끌어들였다.

“아!”

아드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를 끌어당겼다. 무리 없이 끌려오는 그의 입술을 찾았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단단한 손에 허리를 잡힌 채로 쳐올려질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끌어안은 체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엘로디는 이 세계에서 완전무결한 무언가를 얻고 싶었다.

아드리안의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빠르게 끌어 올려져 가는 쾌감에 엘로디는 몸을 떨었다. 키스의 중간중간에 배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몸 위로 쓰러졌다.

엘로디는 몸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맥박에 눈을 감았다. 조금 더 그와 닿아있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 서로의 몸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바라만 보던 엘로디는 그의 등 너머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닦아주고 자신이 벗겨 내린 옷을 입혀주었다. 가볍게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대자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엘로디, 혹시 나 몰래 약 먹었어?”

“네? 아니요.”

아드리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가장 가까이서 몇 번이고 그녀와 관계를 가졌던 자신이 이것을 몰랐다는 것이 한심했다.

“당장 패트리샤를 불러와서 진찰을 받자.”

“왜 그러세요?”

“너에게서 약을 먹었을 때 같은 단 향이 나.”

* * *

아드리안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엘로디와 패트리샤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패트리샤는 아드리안의 설명을 듣더니 엘로디에게 간단한 문답을 하고 피를 채취해 갔다.

“결과는 금방 나올 거예요. 별일 아닐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패트리샤의 말에 엘로디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불안해 보여 아드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

그의 말 없는 위로에도 기묘한 불안감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손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몸을 돌려 아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감정의 바닥으로 끌려 내려가 두 번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며칠 뒤, 결과를 들으러 오라는 소식에 엘로디는 궁으로 향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체향을 맡을 수 없어 모르고 있었던 사실 때문에 불안해했다. 리암은 그런 그녀와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 그녀에게 늘 갖고 다니던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아. 고마워, 리암.”

리암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엘로디를 다시 만났을 때부터 나던 신경을 긁어내던 향기가 단순히 아드리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불안한 듯 오랜만에 손톱을 물어뜯는 엘로디를 보며 리암이 손을 뻗으려다 며칠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 손을 내렸다.

“엘로디.”

“아! 응.”

리암에게 불린 엘로디는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멀리 궁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정문에서 내려서 들어가야 했지만 황제가 엘로디는 그런 절차 없이 바로 장미의 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어서 금세 궁 앞에 도착했다.

“엘로디 님!”

정문에서 기다리던 나나와 쥴리아가 차에서 내리는 엘로디 근처로 다가왔다. 헤어진 지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잘 지냈어?”

“그럼요. 엘로디 님, 역시 집이 좋으신가 봐요. 피부가 엄청 좋아지셨어요.”

나나는 엘로디의 손을 붙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쥴리아는 그런 그녀 옆에서 맞장구를 치면서 함께 들어갔다. 리암은 조금 어색하게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엘로디는 나나와 쥴리아의 안내에 따라 자신이 머물던 아드리안의 침실에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리암은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가려다 쥴리아에 막혔다.

“죄송하지만 여긴 남자 출입 금지 구역이라서요. 밖에서 기다려주실래요?”

리암은 순간 항의를 하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리암도 이곳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방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쥴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뒤로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너머로의 엘로디가 아득해 보였다.

방 안에선 보나파르트 부인과 패트리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밝은 표정의 패트리샤가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엘로디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엘로디 님, 그때 가져갔던 혈액 시료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제 몸에 이상이 생겼나요?”

패트리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보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엘로디 님,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귀족 중에서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저와 황제 폐하, 그리고 파라디 공작 정도밖에 모르죠.”

보나파르트 부인이 엘로디에게 앉을 것을 권하고 나나와 쥴리아를 밖으로 내보냈다. 엘로디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엘로디 님도 아마 황제 폐하의 운명의 반려라고 알려져 있던 여자분에 대해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보나파르트 부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준비된 차를 조금 더 마셨다.

“그분은 사실 발현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게… 무슨…….”

“엘로디 님, 이 일은 엘로디 님과 같은 반절은 오메가나 알파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황제의 운명의 반려라 알려졌던 여자는 황후의 자리를 노리던 파라디 공작의 연금술사 집단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당시 파라디 가문의 공작은 현 황후와 가까운 사이의 보나파르트 공작가가 자신들보다 득세할 것을 우려했다. 파라디 가문의 후계자가 아직 없고, 황후 자리를 두고 몇 번의 언쟁이 있었기에 황제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황제의 그런 태도는 파라디 공작의 불안감을 더 가중시켰다.

그는 지금의 황제가 운명의 반려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제국민들의 운명의 반려에 대한 애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과거 운명의 반려라 알려진 오메가를 내쳤던 황제의 황후가 그녀를 모시던 사용인에게 독살당한 것은 꽤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파라디 공작은 그런 대상에 맞을 만한 오메가를 수색했으나 몇 년이 지나도 귀족 중에서 발현되는 오메가의 수는 아주 적었고, 그나마 그 적은 수도 자신의 운명의 반려를 찾아 떠나가 버렸다. 그러던 와중 황제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여자의 소문을 들었다.

공작은 그녀의 가문에 접근해 딸을 황후로 만들어주겠다고 꾀어냈다. 그 여자가 베타인 것은 상관없었다. 파라디 공작은 갖고 있던 모든 자금력을 동원해 연금술사들을 끌어모아 베타를 오메가로 바꿀 약을 개발시키기 시작했다.

이름 없이 죽어간 베타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들의 피로 강물이 물들 무렵 마침내 약이 완성되었다. 파라디 공작은 결과를 받아 들고 신이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황제의 첫사랑이라 알려져 있던 여자는 오메가 형질을 갖고 있었고, 그 형질이 있다면 약으로 발현될 확률은 100%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그녀는 오메가로 발현되었다.

파라디 공작은 현 황후를 끌어내리기 위해 이 소문을 제국민 사이에 퍼뜨렸다.

황제의 운명의 반려가 나타났다. 그리고 욕심 많은 황후가 황제를 손에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제국민이라면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고 황후에 대한 비방이 쏟아져 나왔다.

공작은 그런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 결집시키고 황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황후가 이혼을 거부할 것이고 황제는 그 여인을 사랑한다고 믿었기에 생각한 얄팍한 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 사실에 거세게 반발했다. 보나파르트 가문에 기사 파견을 요청하고 그 자신이 선봉에 서서 황후를 해하려 한 자들의 가문을 모두 짓밟았다.

파라디 공작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그럼, 지금 제 몸이…….”

“그때처럼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에요.”

패트리샤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로디의 손을 붙잡았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엘로디 님, 궁으로 빨리 다시 들어오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아가씨는 외국으로 나간 뒤 몇 년 안 돼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습니다. 아마도 그 약의 부작용일 것이라고 저희 쪽에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엘로디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입을 꽉 다물었다.

“제가 먹은 음식에 그 약이 섞여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절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천히 약을 넣어 엘로디 님을 각성시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저희 쪽에서도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아드리안은 일을 마치자마자 엘로디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방 문 앞으로 이동했다.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의 모습에 문 앞을 지키고 서있던 리암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아. 리암 경, 고생이 많군. 내 궁에서 습격당할 일은 없으니 돌아가도 되는데.”

명백한 축객령을 들으며 리암은 입술을 틀어 웃었다.

“그런 것치고는 애론에게 너무 쉽게 뚫리던데요.”

“그건 문밖의 일이지.”

리암은 자신만만한 아드리안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저 남자의 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리암이 목숨을 걸고 죽이려 해도 거의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뭐, 있으려면 그 자리에 계속 있어도 돼.”

아드리안은 명백한 비웃음이 섞인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려 엘로디의 방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엘로디.”

아드리안은 확연한 불안감이 떠오른 엘로디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어디에서 스며들고 있는지 모를 약과 원하지 않는데 형질이 발현되어 자신의 삶이 크게 일그러지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패트리샤와 보나파르트 부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던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를 듣자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머리를 끌어안았다. 단 향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저…저 무서워요.”

“엘로디.”

“만일 부작용으로 죽으면요.”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드리안은 숨죽여 우는 엘로디를 제 품으로 더 끌어들였다. 그녀의 두려움이 눈물과 심장 박동을 따라 아드리안에게로 넘어왔다.

“괜찮을 거야.”

천천히 언젠가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눈물을 닦아주고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일을 좀 더 빨리 진행하자. 내가 널 지켜줄게.”

그러나 엘로디는 이 일이 그가 아무리 강해도 해결이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가장 큰 예시인 이자벨이 있지 않던가.

지금 황실과 나바르 가문 모두 둘의 결혼으로 큰 위험 부담을 갖고 있었다. 애론의 존재, 그리고 베타인 황후를 받아들여야 하는 제국민들의 좋지 않은 시선들이었다.

엘로디가 억제제를 만들어 보급하고, 평민 알파와 오메가를 후원하면서 신흥 세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현 황후인 이자벨은 결혼 당시 압도적인 무위와 성력을 자랑했었다. 그런 그녀도 운명의 반려라는 존재의 등장으로 목숨이 사선을 넘나들었다고 했다. 엘로디는 그저 평범한 자신이 이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드리안과의 사랑만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지, 이대로 오메가로 발현되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앞날에 대한 확신이 거의 없었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손을 꽉 쥐었다. 엘로디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았다. 자신의 불안이 전염된 것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님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요.”

“응.”

아드리안은 그녀를 붙잡은 것이 어쩌면 자신의 이기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엘로디가 평범하게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처럼 발현에 대한,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절 놓지 마세요.”

* * *

엘로디는 지금 이 상황을 견뎌서 반드시 이 이야기를, 아니 자신의 끝을 해피엔딩으로 만들 것이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사랑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그녀가 궁을 나가고 평민들 사이에서 지지 세력을 넓히기 위해 활동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엘로디는 일부러 예비 황태자비로서의 공식적인 모든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드리안과 비공식적인 데이트를 하는 것만 노출시켰다. 그녀와 아드리안의 파파라치 사진은 가십지를 오르내렸고 처음에는 한두 개의 소식지에서 나오던 사진들이 경쟁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엘로디가 아드리안과 하는 모든 것들이 화제에 올랐다. 커피를 마시기 힘들어하는 아드리안을 위해 엘로디가 자기 가게에서 내어준 연유를 넣은 커피가 유명세를 치르면서 이제는 귀족들도 커피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황후에게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엘로디는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그녀가 부르는 대로 궁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네요. 이제 곧 황태자비가 되겠어요.”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이자벨을 보며 엘로디는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자벨은 그런 엘로디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언제나처럼 유리 온실로 안내되었다.

늘 알파와 오메가들이 있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자신과 이자벨 단둘뿐이었다. 엘로디는 그것이 조금 무서웠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이자벨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쪽에 앉아요.”

“네. 폐하.”

엘로디는 가능한 한 화사하게 웃어 보이려 애쓰며 자리에 앉았다. 저렇게 웃고는 있지만 분명 이자벨은 엘로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뭇거렸지만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듯 이번만큼은 황후가 사용인을 불러 같은 커피를 권했다.

엘로디는 자신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황후를 보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황후 정도의 위치의 사람이 권하는 것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사실 엘로디는 황후가 주는 최고 수준의 커피를 자주 마신 덕에 궁 밖에 나가서 마시는 커피의 맛 때문에 괴로워했었다.

이것만큼은 기뻐서 엘로디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이자벨은 그런 엘로디를 보며 웃고는 주변 사람들을 내보냈다.

“아드리안과 약혼식 날짜를 당긴다고 들었어요.”

“네. 조금 일이 생겨서요.”

엘로디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자벨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엘로디 양, 황후가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네?”

“물론 원래 이런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을 테니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겠지만 조금이라도 해둔 것이 있나요?”

엘로디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평민 출신 알파나 오메가가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베타 출신인데도요?”

“제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베타도 알파나 오메가를 도울 수 있고,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자벨은 그녀의 말을 듣고 웃어 보였다. 말 한마디 없이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엘로디가 답답함과 압박감에 초조해질 무렵 이자벨이 입을 열었다.

“엘로디 양, 알파나 오메가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요?”

“알파…도요?”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오메가뿐만 아니라 알파의 수도 꾸준히 줄고 있답니다. 특히 최근 30여 년 사이에는 발현된 알파나 오메가의 수가 눈에 띄게 적어졌어요.”

엘로디는 종족의 멸망을 떠올렸다. 전체 인구수의 10% 정도 되는 인구가 꾸준히 유지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리라.

“그 일의 해결책이 폐하께서 원하시는 황후로서의 목표인가요?”

“글쎄요. 비슷하다고 해두죠.”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없나요?”

이자벨은 직접적으로 묻는 엘로디를 보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청초한 모습에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전에도 말해주었지만 엘로디 양, 저는 이 황궁을 나가고 싶습니다.”

이자벨은 찻잔에 조금 남아있는 찻물을 마셨다. 그리고 황제의 운명의 반려라고 불리던 그 여자를 다시 만났던 날을 기억했다.

“얼마 전, 그 여자에 대해 들으셨다고요.”

“네.”

엘로디는 어째서 알파와 오메가 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가 운명의 반려에 대해 집착해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어차피 반려가 발현되지 않은 채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엘로디는 혹시 자신도 모르는 반려에 대한 다른 비밀을 이자벨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황후에게 물어봐도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폐하께서, 그 교주의 뒤를 봐주신 겁니까?”

엘로디의 목소리에 생각에 빠졌던 이자벨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엘로디와 눈을 맞췄다.

“그건 오해랍니다. 난 그를 후원한 것이지 그의 일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황후는 여전히 엘로디에게 의뭉스럽게 굴었고 엘로디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그녀가 이 일에 무언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엘로디는 마지막으로 황후에게 물었다.

“혹시 운명의 반려를 아직도 기다리시나요?”

그녀의 물음에 이자벨은 웃어주었다.

“엘로디 양, 제 나이가 이제 쉰이 넘었어요. 젊었을 때의 저는 황궁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궁 밖에서의 시간보다 안에서 지낸 시간이 더 길죠.”

“그럼…….”

“하지만 만일 만날 수 있다면 만나보고 싶어요. 내 삶을 뒤흔들고, 한때 내가 간절하게 바랐던 상대를.”

황후는 멀리서 걸어오는 아드리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답니다.”

* * *

오랜만에 찾은 성당에서 이자벨은 신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 방에는 발현된 알파와 오메가에게 내린 신탁이 있었다.

그 예언은 그들의 운명일 때도, 때로는 죽음일 때도, 그리고 그들의 반려일 때도 있었다.

이자벨은 오래전부터 그 신탁들을 보고 있었다. 발현된 사람들에게 운명의 반려는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한참을 신탁을 살펴보던 이자벨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화려한 금발의 남자가 가벼운 차림으로 벽에 등을 기댄 채 이자벨을 보고 있었다.

“브느와.”

“이자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부드러운 음성이 이자벨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저 목소리가 늘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앞으로 다가온 브느와가 이자벨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체온이 조금 높은 그의 손이 뺨에 얹어지고 귀를 넘어서 목을 쓸어내렸다. 이자벨은 그의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이자벨, 아직도 밖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자벨은 그의 말에 눈을 감았다.

“약속을 잊지 마세요. 모든 건 제가 결정할 거니까.”

브느와의 웃음소리에 이자벨은 얼굴을 구겼다. 브느와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마와 볼에 키스를 했다.

“나는 거짓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대야말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세요.”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자벨, 사랑합니다.”

수백 번을 들어온 고백에도 이자벨은 가슴이 떨렸다.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어 갔다. 이자벨은 브느와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브느와도, 자신도 미쳐가는 것 같았다.

* * *

자신을 데리러 온 아드리안과 걸으면서 엘로디는 황후의 목표가 신흥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교는 알파와 오메가의 숫자를 늘리는 것을 통해 제국 내에서의 세력을 키우려 했고, 황후는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운명의 반려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엘로디는 어쩌면 황후도 개안한 알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모든 감각들이 황후를 조심하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애론을 만났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엘로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에요. 아드리안 님, 오늘도 오실 거예요?”

화제를 돌려 밤에 올지를 묻자 아드리안이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했다.

“일 늦게 끝나실 것 같으면 오지 않으셔도 돼요.”

“음, 너무 늦지 않게 갈게.”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살짝 끌어안았다가 놓아주고는 차가 서있는 곳까지 가서 손수 차 문을 열어 태워주고 배웅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엘로디는 저녁을 먹은 뒤 리암을 응접실로 불렀다. 둘은 얼마 전의 대화 이후 가급적 서로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들을 줄이려 애를 썼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무슨 일이야?”

엘로디는 들고 온 상자를 탁자 위에 내리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세 개의 총알이 들어있었다.

“리암, 네가 이걸 맡아줬으면 해.”

“이게 뭔데?”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억제제를 강화한 거야.”

엘로디는 애론이 반드시 약혼식에 참석할 것이란 걸 알았다. 그녀도 지난 몇 달 동안 논 것은 아니었다. 그때 세실을 만나러 갈 때 만들어진, 알파와 오메가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하는 시제품을 변형해서 더 안정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만일 애론이 다시 한번 나타나서 나나 우리 가족들을 해치려 한다면 리암, 네가 이걸로 애론을 쏴주길 바라.”

“이건 누가 갖고 있을 예정이지?”

“나와 너 그리고 가스파르 경까지 총 세 명에게만 줄 거야. 아직 많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이런 제품이 있다면 다른 알파나 오메가들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엘로디는 그 무엇보다 신중을 기하였다. 만일 이 약의 존재가 알려지면 무력해진 알파나 오메가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리암은 안에 놓여있는 총알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알겠어.”

엘로디는 굳은 표정으로 리암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에 다녀온 엘로디는 모든 음식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먹는 것부터 마시는 것까지 모든 것을 조심했다. 가급적이면 저택의 요리사가 만든 것들만 먹었고, 마시는 것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아드리안이 보내준 연금술사에게 확인을 받은 뒤 마셨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귀찮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로디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아드리안 역시 불안한지 종종 새벽에 찾아오고는 해서 엘로디는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고 자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날도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며 아드리안을 기다리던 엘로디는 얇은 유리창 너머의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을 보았다.

엘로디는 아드리안과 보았던 별들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안감이 조금 밀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기다리면서 마시려고 가져온 커피를 내려다보며 지난번 황후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황후의 원하는 바를 알 수 없는 것이 불안했으나 엘로디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애론을 경계하는 것밖에 없었다.

여느 때처럼 불안이 온몸을 휩쓸었다. 아드리안의 손길이 절박해져서 엘로디는 몸을 웅크렸다.

엘로디는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문가로 다가갔다. 달빛을 받으며 서있던 남자가 예쁘게 웃으며 자신을 돌아봤다. 매일같이 보는 모습이지만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드리안 님.”

문을 열자 그가 꽃을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구해 온 것인지 한아름 들고 온 꽃다발을 엘로디에게 안겨주며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웬 꽃이에요?”

“아니, 그냥. 내가 엘로디에게 준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꽃을 테이블 위에 올려다놓고 뒤를 돌자 아드리안이 가깝게 서있었다. 그는 엘로디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로디, 내 청혼을 받아줘서 고마워.”

“아드리안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드리안은 잠시 나갔던 시찰에서 본, 엘로디에 대한 험담을 하던 평민들을 떠올렸다. 그는 같은 베타들한테마저 그녀가 배척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깨닫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그는 엘로디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짙은 체향에 아드리안은 인상을 썼다. 그녀의 몸에서 원래 나던 향기가 아닌 페로몬으로 인한 향기는 연해지지 않고 점점 더 진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엘로디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안고만 있었다.

“빨리 돌아와.”

아드리안의 투덜거림에 엘로디가 웃으며 그의 등을 쓸었다. 따뜻한 체온은 이제 퍽 익숙해져서 항상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약혼식만 하면 들어가잖아요.”

그녀의 달래는 말에 아드리안은 몸을 떼어내고 엘로디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가서 앉혀주었다. 엘로디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무릎을 꿇고 엘로디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와 약혼하면 이제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줘야 해.”

“네?”

“매번 전하나 아드리안 님이라고 부르잖아. 리암 경은 그냥 이름만 부르면서.”

아드리안이 눈을 피하며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녀에게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떼어놓고 그녀의 곁을 전 약혼자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자신이 부탁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음…….”

엘로디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안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언제나 부드럽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머리에 손을 올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머리카락에서 귀로, 그리고 볼에 손이 닿자 아드리안은 눈을 감고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엘로디가 소리를 내어 웃자 아드리안 역시 웃어 보였다.

“약속한 거야.”

“네.”

엘로디는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이 행복을 놓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엘로디는 침대에 밀어 눕혀지면서 총알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를 보았다.

약혼식이 코앞까지 와있었다.

* * *

유난히 느리게 가는 것 같던 시간은 순식간에 흐르고 약혼식 당일이 되었다. 지난 몇 달간 후작 가문의 이름으로 퍼부은 자선 사업비는 엄청났다.

초반에는 꺼림칙한 눈으로 보던 제국민들도 들어오는 돈의 단위와 뿌리는 필수품들을 손에 받아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애론이 과거 황태자와의 결혼식 당일에 엄청난 패악질을 부리고 사라졌고 엘로디 역시 자신의 약혼자를 잃었기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는 가여워하는 분위기가 많이 퍼져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베타인 황태자비에 대한 말은 많았다.

결국 약혼식은 비공개로 일부 고위 귀족들과 가족을 불러 황궁의 에메랄드 홀에서 열기로 했다. 애론과의 약혼식을 결혼식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하게 한 것에 비하면 소박한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그 일에 대해 엘로디에게 미안해했으나 엘로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애론이 이 약혼식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의 문제이기도 한 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목욕과 마사지를 받고 옷을 갈아입었다. 엘로디는 일부러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한 드레스를 골랐다.

결혼식에 흰색을 입을 것이기에 연한 보랏빛의 레이스와 샤를 이용한 풍성한 벨라인 드레스에 작은 다이아몬드들로 장식해서 화사함을 더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요 며칠 정성껏 관리돼서 평소보다 더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나나는 그것을 예쁘게 모양을 내서 딴 후 하나로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시켰다. 쥴리아가 작은 진주가 달린 핀 여러 개를 꽂아서 화려하게 장식했다.

“엘로디.”

마리아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상자를 보고 엘로디는 격양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내가 네 아버지와 결혼할 때 쓴 티아라란다.”

“어머니…….”

“네가 원래 쓰려고 했던 것도 있지만…….”

마리아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에메랄드와 루비,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화려한 티아라가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엘로디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작은 티아라만을 쓸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화려한 장식은 그녀가 원하는 지지층의 반감을 살 수도 있을 거란 판단이었다.

“분명 초대된 기자들이 네가 어머니의 티아라를 물려받았다고 쓸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떠니?”

“잘… 쓸게요.”

엘로디의 말이 끝나자 쥴리아가 티아라를 꺼내 엘로디의 머리 위에 올렸다. 빛을 받아서 더 반짝거리는 장식을 보며 엘로디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고작 약혼식일 뿐인데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엘로디는 이 약혼식이 끝나면 궁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로디의 결혼이 끝나면 후작과 함께 후작령으로 내려가서 살아갈 예정이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른 결정이었다.

마리아는 한참을 엘로디를 보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물기 있는 목소리가 엘로디의 귓가에 울렸다.

“너무 힘들면 꼭 엄마한테 말해야 한다.”

“네. 저 잘 살게요.”

애론의 결혼식이 그렇게 끝나고 마리아가 엘로디의 결혼을 잠시 포기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녀가 사교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가문의 주변인들과 사용인들이 엘로디를 황태자에게 몸을 판 여자라고 수군거리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괴로웠으나 궁에 갇힌 채로 가문과 가족을 살리는 대신 자신의 목숨 값을 내어준 딸을 생각하며 억지로 음식을 먹고 약을 들이켰다.

엘로디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마리아는 남편인 후작과 달리 그녀가 원한다면 한 번 도망갔던 리암이 그 상대라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 엘로디.”

마리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딸을 끌어안았다. 어렸을 때 칭얼거리던 작은 아이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녀가 되고 어른이 되어버렸다.

마리아는 이 약혼식이 아무 일 없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 * *

아드리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주머니 속에서 엘로디가 준 총알을 만지작거렸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주저하지 말고 애론에게 쏘라고 한 총알의 정체를 들었을 때 가스파르는 엘로디에게서 결의를 느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 가스파르는 아드리안을 돌아본 뒤에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가스파르는 문 너머에 서있는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브느와는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리 좀 피해주겠나?”

명령이나 다를 바 없는 말에 가스파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밖으로 나갔다. 브느와는 아드리안과 단둘이 남게 되자 자리에 앉았다.

약혼식이지만 엘로디와 아드리안의 뜻에 따라 과하게 꾸미지 않은 복장이었다. 브느와는 자신을 닮은 아드리안을 보며 웃어 보였다.

“네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단다.”

“폐하?”

아드리안은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원히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망설이지 말거라.”

“……!”

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아드리안이 인상을 쓰자 브느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네 선택이지.”

말을 마친 브느와가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리고 남겨진 아드리안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약혼식은 빠르고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엘로디와 아드리안이 함께 입장해 홀에 모여있던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약혼 서약을 하는 것이 다였다. 반지는 이미 교환해서 끼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그것조차 생략했다.

엘로디가 약혼식에 참석해 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언제쯤 결혼을 할 계획인지, 앞으로의 계획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약혼식은 마무리 되었다. 애론 때와는 달리 이번 약혼식은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언론 기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축하연이 절정에 다다르고 황제와 황후의 축하사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엘로디와 아드리안은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제대로 준비하려면 1년은 해야 하는데.”

엘로디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안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볍게 그의 팔을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려고요.”

곁에 있던 가스파르가 인상을 쓰며 제 친구를 노려보았지만 아드리안은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며 웃었다.

평화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약혼식은 그러나 그 안에 있던 모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멀리서 리암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과 몸을 가리고 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앉아 엘로디가 건네준 총알을 만지작거리던 리암은 몸을 일으켰다.

홀의 중앙에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고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자신의 근처로 끌어당겼다. 사실상 이 약혼식은 애론을 붙잡기 위한 함정이었다.

엘로디는 애론이라는 불안 요소를 밖에 두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런 그녀가 일부러 약혼식을 애매한 규모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

아주 작다면 애론이 무시할 것이었고, 너무 크다면 부담스러워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가문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남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론이 엘로디가 빙의한 자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듯이 엘로디 역시 애론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엘로디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멍청한 건 그였다.

“오랜만이야, 애론.”

엘로디가 애론에게 인사를 먼저 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애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깊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 너머의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지저분하고 어두웠다.

“네가 올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안 오면 어쩌려고 그랬어.”

비웃으며 입꼬리를 들어 올린 애론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유혹적이었다. 엘로디는 그런 애론의 얼굴에 얼마나 많이 속았었는지 기억해 냈다.

“안 올 리가 없지.”

엘로디의 말에 애론은 큰 소리로 웃었다.

“마치 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말하네.”

그의 주변이 붉은 마력의 기운으로 뭉개져 가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아드리안의 손을 잡고 그의 옆으로 나섰다.

“우린 서로 오랫동안 미워해 왔지. 네가 어떻게 하면 날 상처 줄지 아는 것처럼 나 역시 네가 어떻게 하면 비참하고 괴로워할지 잘 알고 있어.”

엘로디는 그에게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넸다. 애론은 그런 그녀를 보며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고 들어 올린 손으로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너 따위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곧 그의 손을 타고 유려한 불꽃이 엘로디를 향해 쏟아져 내렸으나 아드리안의 마력에 모두 파쇄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애론은 그것을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타인 내가 네 자리를 빼앗을까 봐 싫어한 것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아름다운 얼굴에 미미한 금이 가는 것을 보며 엘로디는 침을 삼켰다. 좀 더, 좀 더 그를 자극해야 했다.

“네 주변에 있는 알파들 중에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네가 기필코 가서 그들을 꾀어냈던 거, 내가 정말 몰랐을 거 같아?”

“헛소리.”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리암을 협박한 거잖아. 그렇게 그가 갖고 싶었니?”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면서 애론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입 다물어!”

애론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공기층을 찢었다. 엘로디는 그의 마력의 흐름에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 정말 오늘 죽고 싶구나.”

엘로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애론이 손을 뻗어 엘로디를 자신의 앞으로 이동시켰다.

아드리안은 평소라면 캐스팅 시간을 가졌을 애론이 시동어도 없이 순간 이동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애론의 주변으로 그가 여태껏 움직여본 적이 없을 양의 마력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그대로 그의 앞으로 끌려가서 바닥에 처박혔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엘로디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움직이지 마. 안 그러면 이대로 죽일 테니까.”

애론은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분노를 불태우는 그와 눈이 마주하는 순간 아드리안은 구토감을 느꼈다.

“애론! 이제 그만하렴.”

“부인!”

그런 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나바르 후작 부인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채로 애론의 마력 범위 안에 들어가려 하는 그녀를 후작이 막아섰다.

“잘못이 있다면 다 우리가 한 것이니 제발, 엘로디에게 이런 짓 좀 그만해!”

“어머니가 무엇을 잘못하셨는데요?”

애론은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제가 가장 필요로 하실 때는 없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뭘 해주실 건데요.”

애론은 비릿하게 웃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엘로디를 마법의 힘으로 들어 올렸다. 엘로디의 머리 위에 놓여있는 티아라를 보며 애론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절 비참하게 만드시는군요.”

“애론! 너 어머니한테 무슨 말버릇… 크읏!”

후작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애론의 손이 움직이면서 그를 뭉개듯이 짓눌렀다. 마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눈동자에 공포와 경악의 감정이 떠오르자 애론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다.

“어머니, 아직도 엘로디가 진짜라고 생각하세요?”

애론은 엘로디가 10세 즈음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항상 자신에게 무엇이든 이기려 하고, 심지어 자신과 말도 잘 섞지 않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공손한 태도를 보인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엘로디의 장난인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욕보이기 위한 유치한 장난일 거라고 생각하고 엘로디가 터질 때까지 상황을 몰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엘로디는 그 모든 상황을 감내해 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차려입은 엘로디의 옷에 주스를 흘렸을 때도, 간단한 마법으로 열 발짝을 걸을 때마다 넘어지게 만들 때도, 심지어 애론이 그녀의 외모를 노골적으로 폄하하여도 엘로디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애론은 그 이상하다 생각했던 시기의 어떤 날, 자신의 동생이 죽고 가짜가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부모는 엘로디가 왜 변했는지, 무엇이 달랐는지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 엘로디가 그 나이 또래에 성취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을 해내었을 때는 그녀 역시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며 기뻐하기까지 했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고, 아무에게도 사랑을 주지 않았지.”

“애론, 제발 엄마가 이렇게 빌 테니까…….”

애론은 피를 토하는 제 아버지를 붙잡고 있는 마리아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애론을 보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로디는 그의 손아귀에서 바둥거리면서 그의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한테는 잘못이 없잖아!”

애론은 그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자신의 마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기층을 밀어내듯이 애론의 마력이 홀 안을 넘실거렸다.

브느와와 황후는 주요 인사들을 뒤로 물리고 그 마력을 정면으로 막아냈으나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정통으로 애론의 마력을 뒤집어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인 것처럼 사람들이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있었다. 황제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얗게 질려서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이면 엘로디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손을 뻗어 죽었던 크리스타가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엘로디가 겹치면서 아드리안은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드리안은 무언가를 듣기 시작했다.

“경!”

엘로디는 비명처럼 가스파르를 불렀고 가스파르는 엘로디가 자신에게 총알을 넘기면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애론에게 쏘라고 한 것을 기억해 냈다. 몸이 저릴 정도의 마력에 저항하며 총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애론이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폭발하듯 애론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애론의 눈이 순식간에 가스파르를 향하자 다량의 마력이 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가스파르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총을 떨어트렸다. 온몸이 불타서 사라질 것 같은 고통이 배 속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주먹에 힘을 주어 바닥을 눌렀다. 그의 주변의 대리석이 부서져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심장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찾듯 가슴을 쥐어뜯으며 쓰러진 가스파르의 곁으로 패트리샤가 뛰어왔다.

“이런, 역시 베타는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지, 엘로디?”

애론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엘로디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의 손이 엘로디의 머리 위에 닿았다.

“요즘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는 천천히 엘로디의 몸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네가 발현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말이야.”

“뭐?”

“그래서 말이야. 내가 도와줄까, 하고.”

엘로디는 자신의 몸 내부를 뭉개듯이 들어오는 애론의 마력에 피를 토했다. 애론은 그런 그녀를 보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론은 얼마 전 바네사에게서 훔쳤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황후는 그의 [눈]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각성제 같은 종류라며 붉은색 알약을 건넸었다. 그 정체를 의심하던 그는 우연히 그녀의 방을 비밀리에 오가던 바네사를 발견하였다. 바네사를 유혹해 황후가 준 약의 정확한 비밀을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애론 자신의 마력으로 알파나 오메가 형질을 발현시킬 생각을 하다니. 아주 발칙한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애론은 그런 이자벨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해 주기로 했다.

“일단 시작은 너부터.”

공기 중에 끈적할 정도로 짙은 농도의 마력과 페로몬이 홀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애론은 웃으면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괴로워하는 가스파르와 자신의 동생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패트리샤는 자신의 앞에서 쓰러진 가스파르의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한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지금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가스파르와 엘로디였다.

그녀는 가스파르가 떨어트린 총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런 패트리샤의 앞으로 아드리안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드리안은 동공이 풀린 채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엘로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붙잡아.]

[쓰레기 같은 새끼.]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무서워. 이게 뭐야.]

[가. 가서……!]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애론을 향했다. 그의 손끝으로 한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생성되는 기운을 보며 애론은 웃었다. 엘로디를 자신과 아드리안 사이에 둔 채로 애론은 뒤로 물러섰다.

“왜, 이번에도 엘로디를 죽일 셈이야?”

아드리안은 그의 도발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애론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두 눈이 기괴하게 반짝였다.

마력과의 충돌에 눈을 질끈 감은 엘로디는 곧 아드리안의 품에 안겨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엘로디는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알파들의 것보다 두려웠다. 엘로디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로디를 끌어안은 채로 애론에게 다가갔다.

“오…오지 마!”

기세등등하던 애론은 아드리안의 무력 앞에 공포를 느꼈다. 압도적인 우월함 앞에서 마치 사냥감처럼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다였다.

“어째서?”

느릿하게 들어 올린 입꼬리, 웃으면서 휘어져 반달 모양이 되는 두 눈, 마력의 기류에 흩날리는 은발까지. 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신이 내린 완벽한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드리안이 들어 올린 손에 거대한 마력이 모였다. 애론은 자신이 온 힘을 다해도 저것을 막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애론은 최대한의 힘을 양손에 모았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다.

탕―

“아아아아악!”

애론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을 맞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개방했던 마력이 순식간에 애론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애론의 눈에 총을 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리암이 보였다.

애론은 그대로 정신을 놓았다.

아드리안은 쓰러진 애론을 보다가 눈을 돌려 제 품 안에서 발버둥 치는 엘로디를 보았다. 이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왜 도망가려 해? 나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잖아.”

“저…전하.”

엘로디는 생리적인 공포를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늘 두려워하던 광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포식자로서의 위압감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드리안의 앞에서 엘로디는 금방이라도 짓눌려서 없어져 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의 품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아드리안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아드리안이 만들어낸 마력의 벽 안으로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의 사랑.”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말에 웃었다.

그것은 깊은 심연으로 끌려 내려가는 것 같았다. 깊고 어두운 곳에서 웅웅거리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통, 두려움, 호기심, 성욕, 환희와 같은 감정들이 머리와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뜨여진 눈 너머가 하얗게 점멸되어 갔다. 그것은 마치 하늘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감정, 생각, 기억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고의 흐름에서 빛을 잃은 눈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감각이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쓰러지듯이 허물어지는 그가 엘로디의 발목에 손을 댔다. 고통과 환희로 얼룩진 아드리안은 제 몸을 통제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생각 속 깊은 곳에 원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혀 있었다.

상대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나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리고 나의 일부가 되어주는 것.

엘로디는 이미 애론이 부어넣은 마력과 페로몬으로 엉망이었다. 자신의 발목을 쥐고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드리안을 보며 순간 영원히 그에게 갇혀 살기를 바랐다.

이것이 그에 대한 사랑인지, 아니면 오메가로서 자각하는 상대에 대한 욕망인지 엘로디는 알 수 없었다.

엘로디는 그가 붙들고 있는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안의 아름다운 얼굴이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여서 엘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엘로디!”

멀리서 리암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로디는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고통에 일그러진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았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둔다면, 그래서 자신을 망가트리게 둔다면 이 상냥한 남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눈에 보였다.

엘로디는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엘로디는 드레스 안쪽에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패트리샤, 총으로 가스파르 경을 쏴요.”

역시 바닥에서 괴로워하는 가스파르를 붙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패트리샤에게 말을 건네고 엘로디는 아드리안에게 총을 겨누었다.

“제발, 아드리안.”

어떤 각오를 해도 손끝이 떨려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엘로디는 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양손으로 총을 쥐고 그의 복부에 겨눴다. 엘로디의 손이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과 함께 아드리안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애론이 쓰러지고 나서 아드리안의 마력에 불안해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엘로디는 총을 집어 던지고 무너진 아드리안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눈앞이 가물거렸다.

서서히 초점을 찾아가는 보랏빛의 눈이 엘로디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엘로디.”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피가 잔뜩 묻은 손이 엘로디의 볼에 닿았다. 많은 양의 피를 잃어서 조금 서늘한 감각에도 엘로디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다.

그 생각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가스파르에게 억제제를 쏜 패트리샤가 뛰어와서 엘로디를 받쳐 들었다.

황제는 사제와 기사들을 부를 것을 명령했다. 그는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면으로 나섰다.

이자벨은 그 모습을 보고 바네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바네사는 혼란한 틈을 타 사람 몇을 애론의 곁으로 보냈다.

순식간에 마력을 개방하고 여럿이서 주문을 영창한 뒤 애론을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마법사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브느와는 그 모습을 보고 이자벨을 돌아보았다. 이자벨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아수라장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 *

“헉!”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은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밖을 보고 새벽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드리안은 머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럽고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왔다.

“전하!”

눈이 부어있는 패트리샤가 아드리안에게 다가왔다.

“큰일 났습니다, 엘로디 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 듯 패트리샤가 입을 열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돌아본 곳에는 놀랍게도 황제, 브느와가 서있었다.

“내가 설명할 테니 모두 나가있도록.”

황제의 명에 패트리샤도, 보나파르트 부인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브느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아드리안의 침대 근처에 앉았다.

“무슨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애론의 마력을 받아들인 자들 중에서 몇몇이 발현을 했다.”

말을 마친 브느와는 아드리안을 보면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특히 너 같은 경우에는 [눈]을 뜰 뻔하면서 거의 소멸 직전까지 갔다는 걸 기억하느냐.”

아드리안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엘로디가 애론에게 잡혀가고 나서 그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엘로디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낼 수 없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네 [눈]은 너무 위험해.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다다르면 육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제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 않으십니까.”

아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긁었다. 다른 무엇보다 엘로디의 상황이 걱정이었다.

“엘로디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브느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엘로디 양은 반 정도 오메가로 발현한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드리안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인상을 쓰는 게 다였다.

“엘로디가 만든 특수한 억제제를 사용하면…….”

브느와는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그때 갖고 있던 것 중 하나는 애론에게 사용했고, 하나는 가스파르 경에게, 그리고 남은 하나는 너에게 사용했다.”

아드리안은 브느와의 말에 입술을 짓이겼다. 엘로디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최소량의 특수 억제제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럼 엘로디는 발현한다면 살 수 있습니까?”

“엘로디 양은 너의 시녀로 들어오면서 페로몬을 만들어내는 약을 꽤 여러 번 먹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서서히 발현시킬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지.”

아드리안은 그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다양한 종류의 약들은 엘로디의 의지와 상관없이 섭취하던 것들이었다.

“이대로 발현시키면 몸에 어떤 영향을 줄지 확신할 수 없다는구나.”

“그럼 이대로 억제시킨다면요.”

“억제는 불가능하다. 엘로디 양은 지금 따로 격리되어 있다. 이미 반쯤 발현했고, 몸 안에 페로몬을 완전히 풀어내지 않으면 결국 독이 되어 그녀를 죽이게 될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라고요?”

브느와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았다. 제 아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부인을 떠올린 그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너만 알아두도록 해라. 엘로디 양에게 말하는 건 네 자유지만, 가스파르에게도, 보나파르트 부인에게도 함구하는 게 좋을 거다.”

브느와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각인’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봤겠지?”

“오래전에 사실이 아니라고 성당 측에서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파와 오메가를 보호하기 위해 성당 측에서 발표한 거짓이다.”

브느와는 손가락 끝으로 침대를 가볍게 두들겼다.

“각인은 시술자의 생명력과 정신력을 상대와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아드리안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죽어가는 사람에게 네가 각인을 하면 그 사람과 네 생명력이 공유되지. 정신력 또한 마찬가지. 상대가 정신적으로 몰려있을 때 각인은 상대의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

아드리안은 브느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표정의 그는 이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엘로디에게 각인을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과거에 이 각인이 공식적으로 부정당하기 전에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킬 생각으로 알파나 오메가를 잡아가던 인간들도 부지기수였으니까.”

브느와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도 그들 중 죽는 자들이 상당수였다. 역으로 알파나 오메가가 죽기도 했지.”

아드리안의 눈이 브느와와 마주했다.

“상관없습니다. 엘로디가 살 수만 있다면요.”

브느와는 한숨을 쉬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지만 말아라. 난 네가 결혼하고 나면 은퇴할 생각이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가보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다.”

아드리안의 어깨를 두들기고 브느와는 자리를 떴다. 아드리안은 그런 황제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각인을 시도하신 적 있으십니까?”

문을 열던 브느와는 아드리안의 말에 동작을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서서 마주친 그의 두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아드리안은 복도를 걸어 내려갔다. 어느새 해가 거의 사라진 창밖으로 노을빛이 좁은 길목에 내려앉았다.

엘로디가 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근처에 알파가 있으면 위험했기에 아드리안의 방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에 격리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봉쇄한다고 했으나 아드리안은 공기 중에서 엘로디의 페로몬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 안은 숨이 막혔다. 눅진하게 내려앉은 향기에 아드리안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엘로디는 양손이 뒤로 향한 채로 침대에 묶여있었다. 얼마나 발버둥을 친 것인지 침대 위에 있어야 할 베개나 이불들은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시트는 반쯤 벗겨져 있었고 엘로디의 신음과 울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엘로디.”

아드리안은 그녀의 얼굴에 손을 올려서 자신을 향하게 했다. 항상 예쁘게 빛나던 눈은 빛을 잃은 채로 물기로 반짝였다.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던 아드리안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도…도와주세요, 전하.”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고 아드리안은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것들을 끊어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품으로 떨어지면서 환희를 느꼈다. 몸 구석구석에 열기와 쾌감이 돌고 앞이 하얗게 탈색되어 보였다.

“엘로디, 날 봐.”

엘로디는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서툴게 입술이 부딪쳤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행동에 호응하듯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따듯한 온기가 오가고 엘로디의 손과 몸이 아드리안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겨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려했던 드레스가 엉망으로 변한 것을 보고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전하, 빨리… 저 좀 어떻게 해주세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숨을 내쉬는 엘로디는 여전히 쾌락과 열기에 지배당한 채였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아드리안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을 뒤틀었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엘로디의 옷을 벗겨내면서 가벼운 키스를 계속했다. 그의 입술이 이마와 눈가를 지나 목덜미로 내려왔을 즈음에는 엘로디가 걸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녀 위로 올라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만나면 알게 될 것이라는 브느와의 말이 옳았다.

“사랑해.”

작게 속삭이는 그의 말은 엘로디에게 닿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린 그의 손이 엘로디의 몸에 닿았다. 닿는 피부에 작게 은색의 장미가 피어났다.

키스하며 가볍게 가슴을 움켜쥐자 엘로디가 허리를 틀었다. 단순히 아드리안의 손에 닿은 것뿐인데 참을 수 없는 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의 손가락 끝이 유두를 문지르고 긁어내리자 엘로디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아드리안의 입술이 목으로 내려와 희미하게 흉터가 남아있는 쇄골 근처에 닿았다.

“흣!”

조금 세게 빨아들여 붉은 자국이 남은 것을 보며 아드리안이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아드리안도 엘로디의 페로몬에 취해 제대로 사고하기가 어려웠다.

보드라운 입술이 천천히 내려와 가슴 이곳저곳을 빨아들였다. 옅은 자국들을 남기던 것이 뾰족하게 서있던 유두를 물었다.

“으응!”

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녀의 몸이 틀렸다. 혀끝으로 유두를 굴리다가 가볍게 물고 문질렀다. 다른 손이 반대편 가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의 손길에 뭉개지고 굴려질 때마다 엘로디는 가벼운 절정에 다다랐다.

“더… 더어… 주세요.”

엘로디는 해사하게 웃으며 아드리안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다댔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대로 그와 완전히 이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였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고 다리를 조심스럽게 열고 천천히 음순을 핥아 내렸다. 느릿하게 훑어 내리다가 손으로 살을 벌리고 애액으로 반질거리던 입구를 빨아들였다.

“아흣! 아드리안.”

엘로디는 그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쾌감에 다리를 벌벌 떨었다. 허벅지에 닿아있던 아드리안의 손끝을 타고 장미 덩굴의 문양이 피부를 따라 떠올랐다. 그것은 허벅지 안쪽에서 다리 끝까지 뻗어 나가고 엘로디가 쾌락에 흐드러질 때마다 꽃을 피우고 꽃잎을 떨구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음핵을 찾아서 가볍게 핥아 올렸다. 엘로디는 그 자극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은 엘로디의 내부로 들어갔다. 여전히 음핵을 빨아들이며 익숙한 내부에서 그녀가 가장 느끼던 부분을 문지르고 눌러주었다. 엘로디는 정신없이 그가 주는 쾌락을 받아들이면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뱉어냈다.

“엘로디, 날 봐.”

아드리안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로 신음 소리만 뱉어내는 엘로디의 상태가 무서워 그녀의 볼을 가볍게 쳤다. 초점을 잃었던 그녀의 눈이 아드리안과 마주했다.

힘이 없어 축 처져있는 엘로디를 뒤집어서 눕혔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피어난 장미들을 보며 아드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머리를 쓸어서 한쪽으로 치우자 하얀 목덜미와 등이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귀 뒤쪽부터 시작해서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허리 근처를 쥐고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엘로디는 몸을 떨어야만 했다. 좀 더, 좀 더 강한 것을 원했다.

엘로디는 시트를 움켜쥐며 신음을 뱉어냈다. 그가 척추를 따라 길게 키스를 하며 내려오면서 그녀의 몸에는 수십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

“아… 아드리안, 빨리…….”

엘로디의 부추김에 아드리안은 그녀를 다시 돌아 눕히고 다리를 벌렸다. 순순히 벌어진 두 다리 사이에 몸을 끼워 넣고 제 물건을 가져다가 대었다. 엘로디의 눈이 기대감에 취해 자신의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가볍게 질구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을 가버려서 축축한 내부가 부드럽게 열리며 그를 끌어당겼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서 엘로디의 몸이 뒤틀렸다.

“흐읏! 아드리안, 너무…….”

“괜찮아. 천천히 할게.”

엘로디가 부피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평소에도 쉽지 않았지만, 오늘은 더 버거운 느낌이었다. 아드리안은 조금 뒤로 빠지는 듯한 엘로디의 허리를 잡고 전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내부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의 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리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몸이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희미한 빛을 발하던 문양들이 선명하게 색과 향을 띠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드리안, 더.”

엘로디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드리안의 팔을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녀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아드리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마찰 소리와 신음 소리,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명 같은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엘로디는 아까와는 다른 열기에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몸 안을 채워오는 온기와 서늘함, 머릿속을 지배하는 듯한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어깨를 잡아 내렸다.

“아…아드리안, 나, 나아…….”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쾌락과 향기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엘로디의 입술을 아드리안이 집어삼키듯 덮쳐왔다. 그녀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거친 키스가 오가고 몸을 쳐올렸다. 엘로디의 신음과 비명은 그의 몸 안에서 흩어져 버렸다.

어느새 문양들의 빛이 눈이 멀 정도로 강해졌다. 엘로디는 그것들에 저항하던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종이에 물이 들듯 발과 손끝에서 시작된 잠식은 빠른 속도로 온몸을 뒤덮었다.

아드리안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이미 익숙한 내부를 문지르고 찔러댈 때마다 다리 사이로 애액이 쏟아져 나왔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귀와 어깨, 가슴을 문질렀다.

아직까지 닿아있는 입술 사이로 아드리안의 신음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내부의 가장 안쪽을 찍어 올리고 문지를 때마다 엘로디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드리안은 그걸 알아차린 듯 그 부분을 계속해서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에서 벗어난 엘로디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기, 그마안.”

“하아. 엘로디. 엘로디.”

눈을 반쯤 뜬 채로 거칠게 움직이던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여린 몸 전체에 덩굴과 꽃이 가득했다. 마치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은 느낌에 환희마저 느껴졌다.

힘껏 쳐올리자 엘로디의 등과 목이 뒤로 꺾였다. 문양은 어느새 가슴을 지나 목을 타고 그녀의 머리까지 올라갔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양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움직임을 계속했다.

“앙, 아아.”

아까의 여운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속되는 절정에 엘로디는 눈물을 터뜨린 채로 흔들렸다.

“좀 더… 좀 더 열어줘.”

“아아아!”

엘로디는 그가 열어달라는 것이 몸도,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저항할 기력도, 마음도 없었다. 어딘가 깊은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엘로디는 한 손으로 몸을 받쳐 반쯤 일으키고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닿고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단단히 고정한 채 속도를 올렸다. 가냘프게 흔들리던 엘로디의 몸이 경직되고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 안에 정액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 있던 문양들이 강렬한 빛을 뿜어대다가 피부 아래쪽으로 가라앉았다.

“하아. 하아…….”

엘로디는 평온함을 느꼈다. 분명 바로 전까지 거친 섹스를 하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머릿속이 깨끗하고 몸 안이 정갈한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 정신이 들어?”

“아드리안.”

마침내 빛을 찾은 눈이 아드리안과 마주했다. 바로 전의 섹스를 기억해 낸 엘로디가 얼굴을 붉히며 웃어 보이자 아드리안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거지? 어디 몸이 이상한 곳은 없는 거고?”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엘로디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아직도 내부에 들어찬 페니스의 느낌에 엘로디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잠깐만요, 아드리안.”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로 그녀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저 괜찮아요, 아드리안.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엘로디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아드리안의 등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아드리안은 안도감을 느꼈다.

“혹시 나 때문에 네가 잘못될까 봐…….”

아드리안의 고백에 엘로디가 작게 웃었다. 엘로디는 그의 기분에 감염된 것처럼 불안감을 느꼈다가 지웠다.

“당신 두고 그 어디에도 안 갈 거라고 약속했잖아요.”

“…….”

아드리안은 말없이 엘로디의 입술을 찾았다. 엘로디는 가볍게 고개를 틀어 그와의 입맞춤을 반겼다.

키스는 눈물의 맛과 장미 향이 났다.

* * *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자신의 침실에 옮기고서는 주위에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엘로디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희미한 기운을 느끼며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는데도 근처에 아드리안이 같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도 엮인다는 것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침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는 아드리안을 보며 엘로디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트레이에 묽은 수프 그릇이 놓여있었다. 아드리안은 떠먹여 주려고 했지만 엘로디는 숟가락을 빼앗아 들었다.

부드러운 음식이 들어가자 몸 안에 생기가 돌았다. 엘로디는 천천히 그것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애론은 어떻게 되었나요?”

“갑자기 괴한들이 나타나서 데려갔어. 주문을 외우고 모두 그 자리에서 죽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

“그렇군요.”

약혼식이라는 미끼를 집어던졌는데도 제대로 생포하지 못한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다. 엘로디가 그 생각을 하며 인상을 쓰자 아드리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지금은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해.”

“네.”

엘로디는 볼을 가볍게 두들기고 떨어져 나가려는 손을 잡아서 손바닥 안쪽에 입술을 묻었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그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전염된 것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대체 각인이 뭐죠?”

“상대에게 체력이나 정신력을 나눠주는 술법 같은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방금 전하가 느끼는 걸 저도 느꼈어요.”

“…….”

“단순히 저한테 나눠주기만 한 거 아니죠?”

엘로디는 먹던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시선을 피한 채로 입을 열었다.

“상대와 생명력과 정신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생명력이라면… 생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아드리안!”

“말했잖아. 이제 나는 다른 사람 같은 거 상관없어. 너만 내 곁에 있게 할 수 있으면 그 대가가 무엇이든.”

너무 위험했다.

아직 밖에는 애론이 있었고, 만일 이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된다면 제국의 정점인 아드리안을 없애기 위해 엘로디를 제일 먼저 죽이려고 들 것이다.

“너무 무모해요.”

“상관없어.”

“아드리안.”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린 아드리안을 보며 엘로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자신이었어도 아드리안을 위해 생명력을 내어놓았을 것이다.

“고마워요, 살려줘서.”

엘로디는 입을 꽉 다문 채로 울고 있는 아드리안을 끌어안았다. 그의 감정이 공기를 통해 흘러 들어왔다.

상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자신에 대한 자책 같은 것들이었다.

엘로디는 그 진득한 감정에 빠져서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느껴지자 오히려 평온함조차 느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이런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젖어있는 눈가에 입술을 닿게 했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손을 둘러 엘로디를 끌어안았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의 감정을 느끼며 평온함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손과 어깨를 쓸어내리며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드리안에게 엘로디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우리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아요. 매일 사랑한다 말하고, 좋아하는 것들도 잔뜩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아이들도 많이 낳아서 매일매일 시끄럽게 보내는 거예요.”

아드리안이 작게 웃자 엘로디는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단단한 거 같으면서도 그는 늘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애들 중에 제일 똑똑한 아이한테 황위를 넘기고 은퇴 생활을 하는 거죠. 아드리안은 어디가 좋아요? 나는 바다가 좋아요. 따뜻하고 푸른 바다가 있는 남쪽에 가서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하는 거죠.”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몸을 제 쪽으로 더 끌어안았다.

둘은 한참을 서로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말했다. 엘로디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아드리안은 더 먼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의 끝이 이제 하나밖에 없음을 알게 되자 둘은 오히려 마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느새 둘은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 * *

가스파르는 수선화의 궁에 마련된 손님방에서 눈을 떴다. 겨우 뜬 눈으로 몸을 일으키자 근처에 앉아서 졸고 있던 패트리샤가 알아차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경, 좀 괜찮나요?”

“예…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전하는… 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천천히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껄끄럽게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스파르 경이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요. 기다려보세요, 마실 것이라도.”

패트리샤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것을 가스파르가 붙잡았다.

“엘로디 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패트리샤는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드리안 님의 조치로 엘로디 님이 가장 빨리 회복하셨어요.”

패트리샤도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 엘로디의 상태가 가장 안 좋았고 패트리샤조차도 그녀의 곁을 지키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엘로디는 말끔하게 나아서 괜찮다며 웃으며 나타났다. 패트리샤는 황태자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실 기밀 같은 거였나 봐요.”

한숨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가스파르가 웃었다.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의학에 관한 그녀의 열정만큼은 가스파르를 감탄하게 하고도 남았다.

“어디 몸이 좀 이상하거나 그런 곳은 없죠?”

“네.”

패트리샤는 잠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날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애론의 마력에 당신이 갖고 있는 알파 형질이 발현한 것 같아요.”

“그 말은… 제가 알파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옛날 황제 폐하의 운명의 반려를 만든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때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패트리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보는 어디서든 새기 마련이죠. 단, 발현 조건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았어요. 전하의 약혼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 가문 내 알파나 오메가가 있는 분들이 더 있었지만 다들 괜찮았거든요.”

“몇이나 쓰러졌습니까?”

“엘로디 님과 경. 두 사람이 발현으로 쓰러진 거였어요.”

가스파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엘로디를 보호하기 시작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그녀와 비슷한 것을 먹고 마셨다. 만일 엘로디만을 노렸다면 자신 역시 같은 약에 노출되었을 리가 없었다.

“저희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군요. 발현시키려는 대상이 엘로디 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특정 다수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엘로디 님을 노렸을 가능성도 아직 배제할 수 없어요. 일단 전하께 말씀드려서 조사를 시작하기는 했습니다.”

패트리샤는 말을 하며 가스파르의 눈치를 살폈다. 가스파르는 그런 패트리샤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발현했을 때, 어떠셨나요.”

가스파르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패트리샤 님도 발현을 하신 적이 있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음… 그때는 너무 어렸어서요. 혹시 불편하신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패트리샤는 조용히 생각에 빠진 가스파르를 기다렸다. 고요한 방 안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가스파르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고 들이켜고 만지는 것들까지 전부 다르게 보였습니다. 마치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 속에서 살게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솔직히 말해서 무서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26년을 살던 세계가 아니라고 느껴지니 마치 이방인이 된 듯한, 아니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조난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패트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저는 평생 그렇게 살라 하면 못살 것 같았습니다.”

가스파르의 말에 패트리샤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이제 둔감해지신 것일 수도 있지요.”

패트리샤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애론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픔과 배신으로 얼룩진 감정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애론은 마력이 하나로 제어되지 못하고 멋대로 흩어져 버리는 것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다.

“왜…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애론은 주변을 살폈다. 그의 삶에서 세상은 언제나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시끄러운 곳이었다.

아주 작은 것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던 그의 오감이 마치 투명한 막을 씌워놓은 것처럼 둔탁하게 느껴졌다. 애론은 계속해서 몇 번이고 마력을 끌어올려 집중시키려다 실패했다.

“말도 안 돼. 왜… 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력을 강하게 끌어올린 애론은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제대로 제어되지 않은 마력이 온몸을 할퀴었다.

애론은 강한 두통과 함께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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