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그들은 밖의 강을 건넌다 (9/15)
  • 8장 그들은 밖의 강을 건넌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통증에 엘로디가 눈을 떴다.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뜰 터인데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가를 어지럽혔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양손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읏!”

    그러나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다시 앞으로 넘어졌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자 아드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을 주저앉았다.

    “엘로디, 넘어지겠어.”

    잠깐 밖에 나갔다 온 듯한 차림새의 아드리안이 와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잠깐, 폐하께서 부르셔서.”

    따뜻한 음성에 엘로디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향기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어서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그냥… 눈 떴는데 아드리안 님이 안 계셔서…….”

    아드리안은 예전에 그녀가 처음 왔을 무렵 지금처럼 자신이 부재한 상황에 그녀가 울다 쓰러졌던 것을 기억해 냈다.

    “미안, 급한 일이라고 하셔서 금방 다녀오려고 했는데.”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주자 엘로디가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가 없는 것이 싫었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그녀를 제대로 앉혔다.

    “안 나가면 안 돼?”

    한 달 뒤면 엘로디는 황제의 명으로, 억제제를 새로 개발하고 생산한 공을 인정받아 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지금처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싫어서 그는 요 며칠 툴툴거리고 있었다.

    “자주 올게요.”

    엘로디의 말에 아드리안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그녀의 사교계 평판이 바닥에 처박혔다고 하지만 결혼하지도 않은 여자가 궁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세간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 그를 힐끗 보고는 엘로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님, 리암을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걔가 수사에 협조하면 풀어줄 거야.”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오자 아드리안이 얼굴을 굳혔다. 가스파르가 리암을 구슬리고, 협박을 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엘로디와 이야기하고 싶다고만 했다.

    아드리안은 그에게 엘로디를 보여주기 싫어서 며칠째 그것을 숨기다가 황제에게 불려가 혼나고 오는 길이었다.

    “제가 가서 이야기해 볼게요.”

    엘로디 역시 아드리안이 자신과 리암이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그대로 두고 계속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제국의 겨울은 아주 혹독했고, 감옥은 멀쩡한 사람도 추위에 떨며 고통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아드리안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을 불러 먹을 것을 준비시켰다.

    “아직 식사 안 했지? 같이 먹자. 벌써 점심시간이야.”

    엘로디는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하는 아드리안에게 고마워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드리안은 그녀에게 숄을 걸쳐주고 그대로 안아 들어서 자리에 앉혀주었다.

    순식간에 간단한 음식들이 차려지고 둘은 함께 식사를 했다. 부드러운 수프와 간단한 샌드위치 정도로 차려진 음식들을 먹고 나자 몸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좀 걸을 수 있겠어?”

    “네.”

    결국 엘로디의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도 어젯밤 아드리안에게 몇 번이고 안겼기 때문이다. 지난밤의 섹스를 생각해 내자 얼굴에 열이 나는 것 같아서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손이 다시 몸에 감겨들었다. 목 뒤쪽에 내려지는 입술로부터 열기가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엘로디는 작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틀어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뻗어서 아드리안의 얼굴을 끌어 내렸다.

    * * *

    “리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암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무릎을 꿇고 창살 쪽으로 걸어 나갔다.

    “엘로디.”

    가까이 다가가자 은은하게 나던 단 장미 향기가 확연하게 진해졌다. 리암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엘로디는 황태자가 매번 자신을 만나기 전에 그의 페로몬을 얼마나 뿌려두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리암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엘로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살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그러는데.”

    “아니야. 그냥 갑자기 추워서 그런 거야.”

    어설픈 변명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리암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던 엘로디가 입을 열었다.

    “증언, 해줄 거지?”

    “그 이야기 하러 온 거야?”

    “너밖에 없으니까.”

    리암의 가족은 그와 애론이 구해서 숨겨두었다고 했다. 지금 당장 수색하려면 그의 고발이 가장 빠를 것이다.

    “황태자가 부탁했어?”

    “아니야. 내가 먼저 이야기하겠다고 했어. 왜, 하기 싫은 거야?”

    “…딱히 하기 싫은 건 아니야.”

    그들은 리암에게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리암이 두려워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엘로디와 헤어지고 나서 그는 수백 명의 신흥 종교 신도, 즉 이교도인들을 죽였다.

    이교도인들 사이에서 리암은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대부분 평범한 베타로 구성된 그들은 뛰어난 기사이자 알파인 리암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리암은 홀로 교단의 서쪽 지부를 거의 궤멸에 가까운 상태로 밀어 넣었다.

    엘로디가 그것을 아는 것이 싫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자신이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서웠다. 자신을 보는 그 눈이 변하는 것이 무서웠다.

    리암은 처음으로 죄의 무게를 느꼈다.

    “리암, 부탁할게. 없어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

    엘로디의 음성에 리암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정말?”

    “응. 황태자를 불러줘.”

    “아드리안 님을?”

    이름을 부르는 엘로디를 보고 리암은 화를 참으려 애썼다. 이제 와서 그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리암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엘로디, 나 몸이 좀 불편해서 그런데 빨리 불러줄래?”

    여전히 아드리안의 마력으로 양손이 뒤로 묶인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억지로 웃는 그를 보고 엘로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금방 불러올게.”

    약간 상기된 듯한 얼굴의 그녀를 보며 리암은 신음 같은 한숨 소리를 내뱉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향기에 리암은 넋이 나가있었다.

    잠시 뒤 아드리안이 들어와서 리암을 옭아매던 마법을 풀어주었다. 차갑고 싸늘한 표정의 그가 고압적인 태도로 취조실 문을 연 뒤 그를 불렀다.

    아드리안은 리암 정도는 혼자서 제압할 수 있다며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는 리암에게 자리를 권하고 반대편에 앉았다.

    “생각이 바뀌었나 보군.”

    “…….”

    “그럼 제대로 이야기해 볼까? 애론과 함께하는 동안 뭘 봤지.”

    리암은 조용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가 봤던 것은 모두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괴이한 것이었다.

    “그들은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리암이 들어가서 본 것은 알파나 오메가의 가족으로 나눠져 있는 방이었다. 무슨 방식으로 나눈 것인지 모르나 나름의 일정한 분류법으로 그들을 분류해 두었다. 그들을 상대로 알 수 없는 약을 주사하거나, 먹이면서 그들의 변화를 관찰했다고 했다.

    리암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냈다. 부모님은 며칠 전에 약을 먹었다고 했고, 가장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동생은 아무 짓도 당하지 않고 독방에서 생활한 점이 의아했다.

    “무슨 실험인지는 모르나?”

    “네. 매번 정보를 확인하려 했지만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리암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대가 처음 습격했던 곳이 제도 근처였고, 그 뒤에는 서쪽 부근이었지?”

    “예.”

    아마 실험하는 인력은 소수일 것이다. 전국적으로 납치한 사람들을 모두 한곳에 숨겼을 리는 없으니 몇몇 중요한 곳에서만 실험을 했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서기를 불러 리암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게 하고 황제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손목 안쪽에서 깨물린 자국을 발견한 리암이 아랫입술을 꽉 물고 고개를 숙였다. 아드리안은 그의 반응을 보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경의 증언으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겠군. 황제 폐하를 대신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까만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아드리안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를 정말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인의 전 남자를 만나는 일은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경에게 말을 해줘야 할 이유는 없지.”

    그의 대답에 리암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경의 죄는 이걸로 조금 가벼워질 걸세. 폐하께서 증언을 받으면 적어도 중형은 피하게 해주자고 하셨거든.”

    말을 마친 아드리안이 몸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리암은 자리에 앉아서 이제 서서히 피가 돌아 따뜻해져 가는 몸을 주물렀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따뜻해지는 것 같지 않은 기분에 허탈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누군가 데리러 올 때까지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 * *

    엘로디는 자리에 앉아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얼마 전 리암을 만나고 돌아온 그녀에게 아드리안은 당장 결혼하자며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생애 첫 프러포즈를 그런 식으로 받을 줄 몰랐던 엘로디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실수였다.

    “엘로디.”

    아드리안은 황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업무에서 손을 떼버리고 엘로디 옆에 하루 종일 붙어있으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하루 종일 함께할 순 없었지만, 자신을 두고 떠날 때마다 축 늘어지는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조금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저러나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연구실에 머무르는 시간은 확실히 늘어났다. 가끔 그런 그를 찾으러 온 가스파르 경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을 보며 엘로디는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주변에 나나와 쥴리아, 심지어 그를 키웠다던 보나파르트 부인이 있는데도 아드리안은 간식으로 손수 사 온 것으로 보이는 케이크를 잘라서 제 입에 넣어주었다. 거절하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때문에 엘로디는 그가 주는 대로 차곡차곡 받아먹었다.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는 보나파르트 부인의 표정에는 경멸이 어렸고, 나나와 쥴리아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드리안 님, 이제 배부르니까 괜찮아요.”

    “그래?”

    웃으면서 그것들을 치운 아드리안이 엘로디를 끌어와 제 옆에 앉혔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는 그녀의 폭신한 머리카락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전 잠시 일이 있어서.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전하.”

    결국 참지 못한 보나파르트 부인이 일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쥴리아와 나나 역시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직장 상사의 연애를 라이브로 보는 것은 모두에게 잔인한 일이다.

    “진짜! 자꾸 다른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이러시지 말라니까요.”

    그녀들이 나가자 엘로디는 그의 등을 내리치며 짜증을 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귀엽게 보이는지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결국 먼저 지친 엘로디가 그의 볼에 키스를 해주는 것으로 겨우 떼어놓을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연구실에서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고 졸라댔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보여서 의심스러웠다.

    “아드리안 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응? 그래 보여? 난 항상 똑같은 거 같은데.”

    그가 볼까지 붉히자 엘로디의 의심은 더 깊어졌다.

    “무슨 장난을 또 치시려고…….”

    그리고 그가 열어준 문 안쪽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엘로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아진 어머니와 후작이 서있었다.

    자신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마리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엘로디가 손을 들어 등을 토닥이려 할 때 아버지가 힘을 주어 둘을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 안도감에 엘로디도 결국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진정되고 나자, 사용인이 가져온 차와 티푸드가 탁자 위에 올라왔다.

    엘로디는 아까의 울음 때문에 살짝 부은 듯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드리안이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주어 방 안에는 후작가 사람들뿐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한참을 말을 못 하던 엘로디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단다, 얘야.”

    후작 역시 목이 잠긴 채였다. 엘로디가 침실 시녀 자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는 매일 후회하고 있었다.

    애론이 엘로디에 대해 갖고 있던 이상한 집착을 더 빨리 쳐내지 못한 것을, 리암과의 관계를 더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엇보다 그때 차라리 애론의 말대로 리암과의 관계를 인정해 주었다면 엘로디가 저렇게 치욕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마리아에게 이 일을 설명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리아는 엘로디를 품에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몸이 약해져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제는 더 커져버렸다.

    “너는… 너는 좀 어떠니?”

    마리아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전하께서 잘해주시는걸요.”

    엘로디가 작게 웃으며 양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보이더구나.”

    부드러운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리아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녀가 기억하는 엘로디는 아직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다.

    후작은 그런 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너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허락해 달라며 우리를 불렀다.”

    마음 같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은 결혼이었다. 그러나 엘로디의 처지를 모르는 제국민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작가의 총명한 아가씨로 추앙받던 아이였다. 후작이 황태자의 후첩 자리는 안 된다고 했을 때, 황태자는 자신의 정식 비의 자리에 엘로디를 데려올 것이라 대답했다.

    그러나 후작은 황후가 단지 운명의 반려가 아니라는 이유로 얼마나 끔찍한 가시밭길을 걸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엘로디는 심지어 알파도, 운명의 반려도 아닌 베타였다.

    후작은 이 결혼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거절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마리아가 엘로디의 손을 쓸어내렸다. 그 다정한 손길에 엘로디는 안도감을 느꼈다.

    “전… 하고 싶어요.”

    겨우 진심을 뱉어낸 엘로디를 마리아가 다시 끌어안았다.

    “엘로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후작 역시 동의해 주었다. 셋은 그렇게 그간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로디의 생활이라든가, 마리아의 건강 상태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둘이 돌아가야 할 시간인 걸 알아차린 엘로디는 어색하게 웃어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가족들이 가깝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형식적인 가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아드리안이 들어와 후작과 이야기를 하며 정원을 천천히 지나갔다. 엘로디는 마리아와 손을 잡고 그들을 쫓아갔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던 마리아가 조용히 엘로디 쪽으로 몸을 숙여 속삭였다.

    “그래도 역시 네 아버지가 더 잘생긴 것 같지 않니?”

    제국 최고의 미인을 앞에 두고 자신의 남편을 자랑하는 어머니를 보며 엘로디가 크게 웃었다. 마리아는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로디의 웃음소리에 아드리안과 후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마치 정말 한 가족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제 애인이 제일 잘생겼어요, 어머니.”

    엘로디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들 너머로 해가 길게 드리워졌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엘로디는 오랜만에 행복함을 느꼈다.

    다시 한번 더 행복해지고 싶었다.

    가족들을 배웅해 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드리안이 산책을 권했다.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셨나 봐요?”

    짓궂은 그녀의 물음에 그가 볼을 붉혔다.

    “으응. 부모님하고의 시간은 좋았어?”

    “네.”

    엘로디는 조금 말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가족들하고 그렇게 가깝지 않았어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정원을 돌았다. 해가 많이 넘어가서 어스름한 탓에 조심조심 발을 내디뎌야 했다.

    “어머니는 저를 낳고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셨고,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 그런 어머니를 돌보느라 전 대부분 유모의 손에서 자랐고요.”

    “그런 것치고는 아주 좋아 보였는데.”

    눈을 돌려 먼 곳에 있는 장미의 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정원의 가장 바깥쪽인 가장자리의 숲 근처까지 와있었다.

    아드리안이 마법으로 작은 빛을 만들어주고는 근처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엘로디가 앉기를 권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다 애론 덕분이죠.”

    갑작스러운 그의 이름에 아드리안이 얼굴을 굳혔다.

    “엘로디.”

    그녀의 앞에 선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양손에 엘로디의 작은 손을 단단히 쥐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엘로디는 그가 하는 모습을 그저 보기만 했다. 그의 은발이 별빛과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났다. 어둠에 섞인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에게 감사하고 있어. 이렇게 널 내게 보내주었으니까.”

    그의 입 끝이 올라가고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랑 결혼해 주겠어?”

    그의 들어 올린 손끝에 반짝이는 빛무리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것처럼 엘로디 몸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아서 하늘 위로 날아갔다.

    엘로디의 시선이 그것을 좇아 같이 올라가자 그곳에는 눈에 가득 차도록 반짝이는 별들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현대 지구보다 분명 인공적인 빛이 적어서 별을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동안 자신은 한 번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을까.

    리암은 종종 엘로디가 스스로에게 가혹하다고 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끌어안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 같다고 했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라면, 천천히 이 세계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로디는 잡혀있는 손 위로 다른 손을 올려 긴장해서 가늘게 떨고 있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저, 아드리안 님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활짝 웃었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엘로디도 웃었다.

    * * *

    가스파르와 패트리샤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서 결혼을 이야기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차마 엘로디가 있어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들은 그녀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일단 필요한 지원은 전부 받아내기로 황제 폐하와 이야기해 두었다.”

    아드리안은 서류를 둘에게 던져주었다.

    “새로 판매되는 억제제의 이름에 ‘엘로디’를 붙일 거야. 그리고 후작가와 황실의 지원으로 평민들에게 억제제를 무료로 풀 거다.”

    패트리샤는 입을 벌렸다. 아무리 제국이어도, 그리고 부유한 후작 가문이어도 그 정도의 양을 무료로 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린 새로운 지지 기반을 만들 거야. 지금의 귀족들이 아닌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평민 출신 알파나 오메가 계층이 엘로디를 지지할 수 있게 하는 게 이 일의 목표야.”

    일전에 엘로디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낸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테지만, 분명 알파나 오메가들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귀족도 평민도 아닌, 새로운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엘로디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 궁 밖으로 나갈 거예요.”

    “엘로디 님, 지금도 위험하신데 나가시면 더 위험하실 거예요.”

    “괜찮아요. 당장 약혼을 발표할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리암이 이야기한 연구소 내부의 일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엘로디는 리암이 말했다는, 그들만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해 두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었다. 궁도 좋았지만 자유롭지 못해 일을 하는 것이 불편했다. 집에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고민하고 싶었다.

    엘로디가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드리안 역시 반대였기 때문에 표정이 어두웠다.

    “가스파르, 네가 엘로디의 경호 팀을 전담해 줘. 무엇보다 애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아직 붙잡히지 않은 그의 존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패트리샤는 새로 만들어진 억제제를 홍보하고 평민 알파와 오메가를 교육할 기관을 만드는 걸 전담해 줬으면 해. 보나파르트 부인이 도와줄 거야.”

    아드리안은 말은 마치고 옆에 앉아 조금 긴장한 듯한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제 손길에 눈을 돌려 자신을 보는 엘로디를 향해 아드리안이 활짝 웃어 보였다.

    * * *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총에는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달 전 즈음 드디어 과녁을 맞힐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던 그녀는 그 이후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 결국 아드리안은 급한 대로 마법을 담은 아티팩트를 몇 개 만들었지만 이걸로는 애론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다고 가스파르를 24시간 붙여놓을 수도 없었다. 엘로디도, 가스파르도 싫어할 것이고, 황제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엘로디가 나가는 날짜가 황제로부터 통보되고 나자 그는 결국 절대 부르고 싶지 않은 남자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왜 부르셨습니까.”

    양손이 구속된 채로 리암이 아드리안의 집무실로 끌려왔다. 딱딱한 표정의 그를 보며 아드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데려온 기사들을 밖으로 보내고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앉아.”

    “…….”

    잔뜩 경계하는 표정의 남자를 보며 아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고 반대편에 앉았다. 리암은 그런 그를 잠깐 내려다보다가 결국 반대편에 앉았다.

    아드리안은 스트레스에 손목을 긁으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경을 부른 건.”

    망설이던 그가 결국 입을 벌렸다.

    “엘로디가 후작저로 돌아가면 호위를 부탁하기 위해서야.”

    “…….”

    리암은 그의 말을 듣고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황태자 정도 되시면서 본인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아드리안은 그의 눈동자에서 경멸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리암은 자신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쥐고 있으면서 그녀를 지키려 하지 않는 아드리안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드리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당신에게 엘로디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게 아닙니까?”

    곱게 나오지 않는 그의 말에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둘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리암은 그 속에서도 허리를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경은 내가 엘로디의 곁에서 24시간 내내 그녀를 구속하고 가둬두길 바라나?”

    “저라면 엘로디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바라는데도?”

    리암은 무어라 반박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리암은 아드리안보다 엘로디를 오랫동안 보아왔다.

    당시 어렸던 리암조차도 그녀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늘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자리를 잡고 싶어 하면서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라면 차라리 그녀를 강제로라도 궁에 남게 했을 것이다.

    “물론 궁에서 기사들을 보낼 거다. 가스파르가 낮에 가서 상주할 거고 나 역시 자주 찾아가기는 할 거야.”

    아드리안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난 더 많은 안전장치가 있길 원해. 그 안전장치가 그녀의 옛 연인이라고 해도.”

    “질투하지 않을 자신, 있으십니까?”

    리암은 입술을 비틀어 웃어 보였다. 아드리안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만일 엘로디가 마음을 바꾸어 경과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면 글쎄… 나 역시 알파라서 말이야.”

    다시 들어 올린 그의 얼굴을 보며 리암은 이전에 애론이 자신을 향해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그대가 엘로디를 보호해 준다면 애론의 처분은 그대에게 넘기지.”

    리암의 표정을 보며 아드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경은 그에게 많은 걸 되갚음 하고 싶을 텐데, 우리에게 잡히면 오메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아마 신분이 떨어지는 정도의 벌밖에 받지 않을 수도 있어.”

    애론은 한때 리암에게 가족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인생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엘로디와의 미래를 진창에 처박았다. 리암은 엘로디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와 함께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애론, 그의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 힘이 들어간 손에서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만일 엘로디가 마음을 바꾸어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리암의 말에 아드리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 *

    엘로디가 궁을 나가기 며칠 전 즈음 아드리안의 사이클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약 기운이 빠졌고, 아드리안의 주기는 거의 제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새로 만든 억제제를 투여하기에는 아직 위험 부담이 있어서 당분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어놓았다.

    원래대로라면 천천히 진행되어야 할 둘의 결혼은 더 빠르게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는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엘로디가 최대한 빨리 후작저로 돌아가서 결혼 준비를 해주기를 바랐다.

    아드리안은 이 상황이 좋으면서도 그녀가 궁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웠다. 아무리 그녀가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속삭여도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나가야 일이 진행된다니까요.”

    “엘로디가 아니어도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잖아.”

    “약의 설계부터 마지막까지 제가 했는데 저 말고 누구를 믿어요.”

    엘로디는 그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를 했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제조에 전혀 관련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하는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결혼 전에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모처럼 사이가 가까워졌으니 자신의 어머니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달만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

    “아드리안.”

    “알아.”

    엘로디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베개를 끌어안고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그를 뒤에서 안았다. 짙은 장미 향기에 엘로디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날이 갈수록 그의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들고 있던 약을 입으로 넘겼다.

    등을 통해 얇은 슈미즈 너머로 엘로디의 가슴이 그대로 느껴지자 아드리안은 몸을 웅크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엘로디는 그런 그의 얼굴로 손을 뻗어서 옆으로 돌렸다. 매끈하게 드러나는 이마부터 콧날, 입술의 옆선을 눈으로 훑으며 엘로디는 몸을 조금 들어서 그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을 이로 살짝 긁어서 벌리고 천천히 입술 전체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안고 있던 베개를 옆으로 치우고 몸을 돌려서 엘로디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 앞으로 끌어왔다.

    각도가 바뀌면서 혀를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서로 얽었다. 입 안의 느끼는 부분을 살살 쓸면서 아드리안의 손이 엘로디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녀의 입 안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목으로 내려왔다. 약한 부분을 빨아올리자 엘로디가 작게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흐읏.”

    점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그를 엘로디가 잡아서 끌어올렸다.

    “저도 아드리안 님과 계속 있고 싶어요.”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는데 매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은 엘로디로서도 불안한 일이었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였고 자신은 평범한 귀족가의 딸인데다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니었다. 엘로디는 종종 그가 자신의 무엇을 보고 반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녀의 대답에 표정이 환해진 아드리안이 다시 입술을 맞대어 왔다. 따뜻한 체온과 향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몸을 부드럽게 매만져 오는 손과 눈가와 볼, 귀 끝에 닿아오는 입술에 온몸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아… 엘로디.”

    기분 좋은 목소리에 엘로디가 웃으며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침대 위로 누웠다.

    아드리안은 얇은 옷 위로 천천히 가슴을 더듬다가 옷자락을 잡아 올려 벗겨버리고 옆으로 집어 던졌다. 자신의 옷도 벗어버린 그의 입술이 천천히 목에 키스를 하며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과 가슴 근처에 잔뜩 자국을 남기다가 이젠 딱딱하게 변해서 하얗게 굳은 쇄골 근처의 흉터를 혀끝으로 핥았다. 딱 맞게 입을 벌려서 살짝 물어보았다.

    “하윽!”

    엘로디는 허리를 떨며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아파?”

    가슴께에서 올려다보며 물어보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엘로디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던 아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녀의 가슴 근처를 다시 핥아 내리다가 부드러운 가슴의 한 부분을 살짝 물었다. 엘로디는 허리를 뒤틀며 비음을 뱉어냈다.

    그의 손이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나른한 표정을 지은 채로 들어 올려진 다리의 안쪽을 천천히 핥아 내려가는 그의 모습에 엘로디는 얼굴을 가렸다. 머릿속이 어떻게 된 것 같다.

    약 기운 때문인지 그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아서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렸다. 눈을 가린 탓에 허벅지 안쪽에 닿는 혀와 입술의 감촉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의 손이 그녀의 반대편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올렸다. 음순을 밀어서 열고 가볍게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으… 아드리안, 거기…….”

    약 기운에 이성을 잃은 듯 엘로디의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서 멍하게 보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 때도,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 역시 이성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어서인지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저속해져서 그 바닥의 가장 아랫부분을 자신에게 보여주었으면, 아니 자신이 그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의 흐려진 신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드리안은 허벅지 안쪽을 가볍게 물었다.

    “아읏!”

    “말해봐, 엘로디.”

    그의 손가락이 엘로디를 애태우듯 음부 근처를 더듬어갔다. 엘로디는 그의 손을 붙잡아서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드리안이 음순을 천천히 핥아 올렸다. 기대감에 허리가 뜨고 발끝이 저려왔다. 그러나 애태우듯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자 엘로디는 애가 달았다.

    “으응… 좋아…….”

    “좀 더 크게 말해줘.”

    어느새 얼굴 근처까지 올라온 아드리안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엘로디는 부끄러움과 기대감, 그리고 기묘한 정복욕에 휩싸인 채로 입을 열었다.

    “물어주는 거… 좋아요.”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자신에 의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원래 갖고 있던 것인지 모르지만, 다른 누구도 모르는 그녀의 취향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쾌감을 느꼈다.

    “말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기쁜 듯 화사하게 웃는 그를 보며 엘로디는 잠시 넋을 잃었다. 그의 주변에 꽃이 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끌어와서 키스하기 시작했다. 혀가 섞이고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모두 섞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의 말에 만족한 듯 그가 가볍게 가슴이나 쇄골, 유두를 물 때마다 애액이 쏟아졌다. 엉덩이 아래쪽 시트가 젖어서 차갑게 느껴졌다.

    엘로디는 자신의 가슴을 문지르는 그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저번에 섹스를 할 때 자신이 물었던 자국이 연해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안 것처럼 제 손목 안쪽을 내어주었다.

    엘로디는 그 연한 살을 물었다. 그에게도 자신의 흔적이 영원히 남기를 바랐다.

    엘로디는 그의 등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몸을 떨었다.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딱딱하게 서있는 음핵을 문지르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지르다가 가볍게 손톱으로 긁어내리자 엘로디의 몸이 튀어졌다.

    “으응!”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며 계속해서 그녀의 음핵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누르고 문지르다가 비틀기도 했다.

    그때마다 엘로디는 경련을 하면서 몇 번이고 절정에 치달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다리를 오므려서 피하려고 하는 그녀를 아드리안은 가볍게 제지하고는 손가락을 그대로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숨 쉬는 것에 맞춰서 조였다 풀렸다 해서 마치 심장 속에 손가락을 넣은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이전에 찾아두었던 곳을 찾아서 더듬기 시작했다.

    “읍! 으응……!”

    내부를 꾸욱 누르자 그녀의 몸이 뒤틀렸다. 엄지손가락으로 음핵을 긁어내리니 내부를 더듬는 손가락을 적시며 물이 흘러서 넘쳤다.

    그의 입술에 입이 막힌 채로 엘로디는 몇 번이고 신음 소리를 뱉어내며 몸을 떨었다. 이대로 쾌락에 뇌가 녹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빨리 넣어주기를 원한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다리 사이에 단단하게 선 성기를 쥐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에 아드리안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엘로디는 그의 첨단을 손끝으로 가볍게 누르고는 기둥부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입술을 떼고 그녀의 수음에 맞춰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엘로디는 그를 통제하는 듯한 느낌에 입술을 핥았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가슴에 입술을 내렸다. 유두를 혀로 핥고 이로 살짝씩 물면서 그녀의 내부를 자극해 갔다. 엘로디가 그 쾌락을 이겨내지 못해 그의 것을 움켜쥔 손이 느려졌다.

    “아드리안… 빨리…….”

    결국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를 재촉했다. 이미 몇 번이고 절정에 달해서 음부와 엉덩이 전체가 질척거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제대로 자리 잡은 아드리안이 귀두로 그녀의 부드러운 음모를 헤치고 축축하게 젖은 입구 부분을 가볍게 문질렀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서 자신의 질구에 그의 것을 가져다가 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치달은 욕망이 무엇이든 하게 했다.

    “넣을게.”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엘로디는 자신을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성기의 근육과 혈관까지 모두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한 부피감에 반밖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보였다. 엘로디는 허리를 흔들어서 그의 것이 좀 더 수월하게 들어오게 하려 애썼다.

    “읏. 엘로디. 좀 더… 천천히!”

    “흐응, 못 참을, 으읏! 것 같아요.”

    그녀의 내부로 밀어 넣을 때마다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살갗 너머로 심장 박동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완전히 밀어 넣고 잠시 그녀 위에 엎드려서 숨을 골랐다. 가볍게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그녀의 양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자신의 밑에서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허리를 흔드는 엘로디가 예뻐서 아드리안은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예민해진 내부를 누르고 휘저어서 엘로디의 목이 꺾였다.

    “아! 앙, 아아!”

    “흐으…….”

    아드리안의 신음 소리와 엘로디의 비명 같은 교성이 뒤섞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몸을 뒤트는 엘로디의 양손을 들어서 아드리안이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체위의 변화에 페니스가 더 깊숙이 파고들었고 엘로디는 허리를 뒤로 꺾으면서 신음을 뱉어냈다. 아드리안의 어깨를 힘을 주어 잡으면서 그의 몸에 손톱이 박혔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고 그대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내부의 깊숙한 곳에 그대로 박히는 성기의 끝에 엘로디의 교성이 커졌다.

    “앙! 아! 흣, 전하! 아아!”

    “하아… 엘로디,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을 텐데.”

    아드리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 거칠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미 다리 사이는 둘의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서 끈적거렸다.

    “앙, 싫어! 더어… 아읏!”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부에 박아대는데도 부족함을 느꼈다. 엘로디는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는 갈증을 느꼈다. 좀 더, 완벽하게 그가 자신에게 속하기를 바랐다.

    끈적하고 부드러운 내벽이 성기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점점 속도를 올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엘로디, 엘로디이…….”

    어쩐지 우는 것 같은 음성에 엘로디는 그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자신의 허리를 잡고 쳐올리는 탓에 이가 부딪히고 자꾸만 입술이 떨어졌다.

    애가 탄 엘로디가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자신을 안고 있는 단단한 팔이 흔들리고 몸 안에서 팽창하는 부피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점점 짧고 빠르게 쳐올리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자 내벽 너머로 그의 맥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찢어질 것만큼 꽉 찼던 부피감이 줄고 아드리안이 내부에서 성기를 빼냈다. 끈적한 정액과 애액이 뒤섞여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각에 몸이 달아올랐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웃었다. 그의 손이 가슴 위에 올라가고 엘로디의 손이 그의 허리에 닿았다. 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진한 향기를 느끼며 아드리안은 엘로디에게 키스를 했다.

    엘로디는 그가 이대로 자신의 내부로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 * *

    이자벨은 무료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이 하고 있는 일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신념이 강한 멍청이는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주. 내가 처음 그대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알파와 오메가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해결책은 이런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닌가?”

    황후의 말에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주는 열변을 토하느라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황후 폐하,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오메가도, 알파도 늘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없습니다.”

    “교주, 난 제국의 황후일세. 내가 내 백성들을 강제로 교배시켜서 알파나 오메가를 만들라고 했었나?”

    “그러나, 다른 방법이!”

    “난 교주의 초기 비전을 믿고 후원해 준 것인데 나만 난처하게 되었어.”

    교주는 그녀가 발을 빼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입술을 물었다.

    “이제 와서 발을 빼시는 겁니까? 제가 이렇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착각이십니다! 증거는 이미 전부 있습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비열하게 웃는 그를 보고 이자벨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거, 내가 교주를 제대로 보지 못했군.”

    “그러니까 저를 끝까지 믿으시고―”

    “생각보다 더 멍청할 줄이야.”

    이자벨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압도적인 양의 성력이 흘러넘쳤다. 말로만 보았던 성력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라 교주는 몸이 저절로 굳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교주, 내 젊었을 적 별명이 무엇이던가.”

    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 황후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로, 황제가 운명의 반려를 맞이하는 것을 방해한 악녀로 낙인찍힌 뒤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던 별명이었다.

    “시…신의…….”

    이자벨은 20여 년 만에 듣게 된 자신의 별명에 웃었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그녀가 들어 올린 손을 타고 은색의 빛이 교주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 빛이 순식간에 교주를 덮치고 잠시 뒤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눈을 감고 평온한 표정으로 상처 하나 없이 누워있는 것이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향기도, 자취도 남지 않는 이 힘은 누군가를 죽이기에 완벽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자연사로 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힘을 알고 있는 몇은 알아차릴 것이다.

    이자벨은 어느새 시신이 된 그를 툭 걷어차고는 앞으로 나왔다.

    “어쩐다……. 어때, 도와줄 수 있겠니?”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던 애론이 몸을 드러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손을 뻗어 제 앞에 쓰러진 남자의 몸 위에 자신의 마력을 뒤집어씌웠다.

    “이걸로 빚은 다 갚은 거야.”

    “고맙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란다.”

    이자벨은 그에게 작은 약병을 건네주었다. 붉은색의 알약이 위험하게 보여서 애론은 미간을 구겼다.

    “이게 뭔데?”

    “말하자면, 각성제 같은 종류지.”

    “각성제?”

    “애론, 네 [눈]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의 [눈]은 다른 자들과 다르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들만 걸려들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원래 그런 것이지 불완전하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럼 이걸 먹으면 호감이나 이런 거와는 상관없이 유혹할 수 있다는 건가?”

    “음, 비슷하단다.”

    이자벨은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과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는 그녀 역시 장담하지 못했다.

    “사용할 때는 꼭 주의해서 쓰렴. 그리고 하나 더.”

    이자벨은 이대로 애론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 상태는 생각보다 불안했고 위험성이 높았다. 그중 하나라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패를 내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절대로 너 스스로를 잃지 말렴.”

    “어차피 [눈]을 떴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좀 더 정확히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 보라는 뜻이란다.”

    이자벨은 아직 어린 애론을 보며 웃었다.

    “아, 그리고 네 동생과 내 아들이 약혼할 거라는 소식은 들었니?”

    그녀의 말에 애론의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이자벨은 문득 그가 왜 저렇게 제 동생에게 비틀린 감정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곧 그 궁금증을 지우고 몸을 돌렸다. 손을 흔들어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는 반드시 저 약을 사용할 것이다.

    이자벨은 다른 손에 들린 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돌렸다.

    * * *

    이젠 아드리안과의 잠자리에 익숙해져서 엘로디는 눈을 뜨면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아드리안의 얼굴에 가벼운 장난을 할 만큼 편안하게 느꼈다.

    엘로디의 몸 여기저기에 그가 가볍게 물어둔 자국이 남아있었고 아드리안의 손목 안쪽에도 물어서 파랗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그날 아침에 아드리안보다 일찍 일어난 엘로디는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주겠다며 뻗어둔 그의 팔에 얼굴을 부비면서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손톱자국이 연하게 남아있는 팔 안쪽이 보였다. 저 괴물 같은 회복력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남아있는 자국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에 보였다.

    손을 뻗어 그 자국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리자 그가 약한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아드리안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

    자다가 깨서 저음으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엘로디가 웃었다. 가볍게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고는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햇빛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린 아드리안의 등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전하!”

    문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가스파르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일이 거의 없는 그가 저렇게 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정도면 큰일일 것이다. 아니, 큰일이 아니면 안 된다.

    아드리안은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옷을 입고 엘로디를 욕실로 보냈다. 간단한 마법으로 침대 위를 정리하고는 한숨과 함께 며칠간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나른한 표정에 가운을 입고 있는 아드리안의 모습에 가스파르가 조금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뭐야.”

    “지난밤에 애론이 교주를 죽였습니다.”

    “뭐?”

    “오늘 새벽에 본부를 기습했는데, 교주가 죽었고 황실 소속 마법사 말로는 애론의 마력이 감지됐다고 합니다.”

    아드리안은 머리에 손을 올렸다. 대체 그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인가. 그 정도 되는 마법사가 아무리 부상이 심하다고 해도 일반인들에게 쉽게 붙잡혔을 리가 없었다.

    “자료는?”

    “대부분이 남아있습니다만… 그게…….”

    “왜?”

    가스파르는 말을 더 하지 못하고 입술을 물고만 있었다.

    “빨리 말해봐. 뭔데 그러는 건데?”

    “그…그쪽에서 한 실험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시키고, 태어난 아이가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확인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스파르의 말에 아드리안은 입을 벌렸다.

    “인간을 대상으로 교배 실험 같은 걸 했다는 거야?”

    어떤 미친 자가 저런 생각을 해낸 것일까.

    “예……. 일단 거기서 한 연구 자료는 모두 가져오게 했습니다.”

    “잘했어. 일단 최소한의 사람만 자료를 볼 수 있게 하지. 이 일은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패트리샤랑 보나파르트 부인도 불러와.”

    말을 마친 아드리안이 몸을 돌려서 문을 닫았다. 돌아선 곳에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엘로디가 보였다.

    “엘로디, 왜 그래? 어디 몸이 안 좋아?”

    아드리안이 엘로디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몸을 걱정했다. 엘로디는 억지로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자료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엘로디만큼 믿을 만한 연금술사를 찾기 어려우니까.”

    다정한 그의 말투에도 엘로디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조금 뒤 아드리안의 집무실로 사람들이 모였다.

    엘로디는 초조한 표정으로 옆에 쌓인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원하는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자료들을 확인하는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같이 자료를 확인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는 신의 선물이라 여기며 여태껏 그 누구도 그들의 탄생에 관여하려 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자료들을 뒤질수록 강력한 힘을 가진 자들의 멸종을 두려워하는 문구들과 그들의 힘을 이용할 방법을 구상해 둔 기록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몇 시간을 앉은자리에서 자료를 훑던 엘로디는 보던 것을 내려놓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스파르의 물음에 엘로디가 입을 열었다. 자료를 보기 전부터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그녀였기에 모두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알파나 오메가가 태어나는 법칙을 연구한 것 같아요.”

    “법칙?”

    “네.”

    생각해 보면 엘로디, 아니 설화가 살던 곳에서도 콩으로 유전 형질에 관련해서 연구를 했는데 여기서 알파나 베타, 오메가를 상대로 연구를 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는 신의 영역이었던 그들의 탄생의 비밀을 연구해서 더 많은 알파나 오메가를 탄생시키면, 결국 그것이 국력의 원천이 될 것이다. 제국이 수백여 년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황제가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알파라는 이유도 있었다.

    엘로디는 그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여태껏 알파와 오메가의 탄생을 신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라 자신의 이야기를 이단으로 들을 수도 있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엘로디의 말은 알파와 알파, 오메가와 오메가 사이에서도 베타가 태어날 수도 있고, 반대도 가능하다는 건가?”

    “네. 분명 확률적으로는 높지 않은 편인데,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아마도 발현의 가능성은 베타가 가장 높고 그 뒤로는 알파, 오메가 순일 거예요.”

    엘로디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생에서의 혈액형에 대해서만 생각해도 이것에 대해 미리 알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생각해 낸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엘로디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패트리샤가 가장 먼저 그녀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납치한 것이군요. 이걸 통해서 얻으려고 한 것이 뭘까요?”

    “여태껏 알파와 오메가는 신의 아이들이라 불리며 칭송받아 왔었죠. 종교 단체였으니 이걸 통해 세력을 키울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요. 만일 국가적인 일과 연관된다면 강한 기사나 군인을 양성하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죠.”

    엘로디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말을 뱉어낸 엘로디도 기분이 나빠져서 조용히 있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연금술에서도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무겁게 짓눌린 분위기에서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 내용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이만 나가보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엘로디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것을 전생에서 과학이라는 분야로 배웠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과학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생명 공학 쪽은 아직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엘로디는 이 일을 누가 시작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나나가 몸을 일으켜서 빠르게 엘로디에게 다가왔다.

    “엘로디 님, 편지가 와있어서요.”

    “누구한테서?”

    딱히 편지가 오고 갈 만한 친구가 없는 엘로디는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실 보아르네 님이 보내셨습니다.”

    엘로디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놀라서 나나의 손에 들린 편지를 빼앗듯이 잡아챘다. 편지 안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그때는 미안했다는 사과와 꼭 만나고 싶다는 부탁이 전부였다.

    엘로디는 그녀의 자세한 이야기를 패트리샤를 통해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엘로디는 그녀에게 자신이 전해주어야 할 마지막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엘로디는 몇 번이고 그 편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 * *

    “안 돼!”

    “아드리안 님,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중요한 건 다른 사람한테 전하면 되잖아. 대체 왜 위험한 일을 하겠다는 건데!”

    “전하께서도 알잖아요. 저한테 진짜 친구는 크리스타밖에 없었어요.”

    “알아, 아니까 더 반대하는 거야. 그 여자가 널 불러낼 때도 크리스타를 이용했잖아. 이번에도 또 무슨 방법을 쓸지 어떻게 알아!”

    역시나 세실을 만나러 가겠다는 말에 아드리안이 반대를 표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패트리샤 역시 엘로디의 의견에 반대했다.

    “엘로디 님,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위험해요.”

    “난 세실을 믿지 않아. 그녀는 몇 번이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어. 이 편지도 그런 함정 중에 하나일 수도 있어.”

    불안해하는 아드리안의 말에 엘로디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드리안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내가 같이 가지.”

    “리암?”

    얼마 전부터 엘로디의 경호를 담당할 것이라며 아드리안이 붙여준 사람은 다름 아닌 리암이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오던 사이라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먹한 관계인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가면 적어도 멍청하게 눈 뜨고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명백하게 아드리안을 도발하는 말에 엘로디는 숨을 죽이고 가늘게 떨고 있는 황태자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저 비장의 무기도 준비해 뒀고.”

    “엘로디, 미안하지만 그대의 사격 솜씨는 진짜 아니야.”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사격 솜씨를 걱정하는 아드리안을 보며 엘로디는 잠깐 울컥 화가 났지만 잘 참아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어쨌거나 리암도 같이 갈 거고, 전하께서 주신 아티팩트도 챙겨 갈게요.”

    아드리안은 불안한 얼굴로 엘로디를 보았다. 교주가 죽고 나서 반쯤 와해된 종교 집단의 폭동, 구출된 알파와 오메가 가족들의 신변 보호, 후속 지원을 도와주는 것 등으로 바빠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원망했다.

    엘로디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잡고 있던 손등을 엄지로 살짝 문질러주었다.

    “잘 갔다 올게요. 만나고 나서 바로 궁으로 와서 괜찮은지 보여드릴게요.”

    “응.”

    결국은 허락해 주는 아드리안을 엘로디가 꽉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그의 가슴 너머로 언제나 믿어줘서 고맙다고, 자신 역시 아드리안을 항상 믿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런 둘의 모습이 익숙한 듯 다들 신경 쓰지 않았지만 리암은 타인에게 저 정도로 살갑게 구는 엘로디가 처음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엘로디가 아드리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이전의 자신을 대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을 가스파르가 보았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리암 경에게 경호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데려가겠습니다.”

    아드리안은 데려가라고 손짓을 하고는 등을 돌렸다.

    가스파르에게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리암은 아드리안을 보며 본 적 없는 미소를 짓는 엘로디를 훔쳐보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열패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 눈이 자신을 향하게 하고 싶었다. 리암은 눈물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리암은 입을 꽉 다문 채로 가스파르를 쫓아 나왔다. 엘로디의 웃음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엘로디가 자신과 애론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때보다 지금이 더 비참했다.

    어쩌면 자신은 그녀를 다시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스파르는 리암을 연무장으로 끌고 가서 세웠다.

    “경호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습니까?”

    “목숨을 걸고 상대를 지키는 것 아닙니까.”

    “틀렸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이 목숨을 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의 말에 인상을 쓰는 리암을 보며 가스파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시간 내에 가스파르가 원하는 만큼 리암을 끌어올리는 것도 힘든데, 사랑에 눈이 멀어서 멍청한 짓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당신은 엘로디 님의 친구이기도 합니다. 일이 잘못돼서 죽기라도 하면 저희 쪽도 손해라서요.”

    가스파르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기사를 불러서 목검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리암의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실력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후 기사가 허겁지겁 들고 온 목검을 받아 든 가스파르는 그중 하나를 리암에게 던져주었다.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가스파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추가 근무 수당을 요청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럼, 먼저 실력부터 보겠습니다.”

    가스파르는 그간 아드리안에게 시달리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버릴 생각으로 목검을 들어 올렸다.

    * * *

    엘로디는 조금 들떠있었다. 드디어 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아침부터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며 아드리안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는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

    “보내기 싫다, 정말.”

    투덜거리는 그의 말투에 엘로디가 웃으면서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차가워 보이는 손에서 온기가 넘어와서 심장 한구석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손목 안쪽으로 이미 흔적이 거의 사라진 자국을 보며 아쉬움에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런 엘로디를 보며 아드리안은 목 뒤쪽을 입술로 더듬었다.

    “으응… 아드리안 님, 안 돼요. 조금 있으면 리암이랑 가스파르 경이 온단 말이에요.”

    “잠깐만 이러고 있는 것도 안 돼?”

    풀이 죽은 듯한 표정을 보며 엘로디는 결국 그를 다시 끌어안아 주었다. 그에게 너무 약해져서 탈이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엘로디 님, 시간 다 되었습니다.”

    보나파르트 부인의 목소리에 아드리안을 겨우 떼어내고 엘로디가 옷차림을 정리했다.

    궁에 들어올 때 갖고 온 것이 없어서 짐은 거의 없었다. 왼손에 아드리안이 끼워준 약혼반지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몇 개월을 머물렀던 방을 보았다. 얼마나 많은 밤을 이곳에서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오고 로비를 지나 정문으로 나왔다. 준비된 차 앞에 리암과 가스파르, 패트리샤가 서있었다. 그녀의 뒤를 쫓아온 쥴리아와 나나가 멈춰 섰다.

    “잘 다녀오세요.”

    보나파르트 부인이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엘로디는 그런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아드리안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손을 놓자 문이 닫혔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장미의 궁을 넘어서 황궁의 정문으로 차가 달렸다. 엘로디는 다시 저 문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왜 그래?”

    앞쪽에 앉은 리암이 묻자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다시는 밖을 못 볼 줄 알았거든.”

    “…….”

    리암과 엘로디는 후작저로 가는 길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평생을 살아온 집이었는데 몇 달 만에 오니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차 문이 열리자 어머니가 엘로디에게 달려왔다.

    “엘로디, 어서 오렴. 그동안 어디 아픈 곳은 없었지?”

    “네, 어머니.”

    엘로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후작이 다가와서 엘로디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곧 그녀의 뒤에 나타난 리암을 보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비록 애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후작은 그를 좋게 볼 수 없었다. 리암을 무시하듯 몸을 돌려 엘로디와 마리아를 앞으로 보냈다.

    리암은 자신의 앞에 그어진 선을 보고 눈을 감았다. 이 정도의 일은 각오하고 있었다. 가스파르가 그런 그의 등을 가볍게 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시간이 되자 마리아는 엘로디에게 그동안 해주고 싶었다며 그녀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음식들을 잔뜩 만들어서 늘어놓았다. 그것이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서 엘로디는 볼을 붉혔다.

    “생각해 보니까 엘로디가 좋아하는 게 뭐였는지 잘 모르겠더구나.”

    마리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건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마리아.”

    후작은 부인의 등을 끌어안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엘로디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노력하지 못해 애론과 엘로디의 사이가 엉망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어렸을 때 그녀가 해주었던 계란으로 만든 요리를 조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맛있어요, 어머니.”

    “다행이야.”

    마리아와 후작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가 준비해 둔 음식 말고도 그동안 익숙하게 먹었던 요리사의 음식들을 먹으며 엘로디는 저녁을 즐겼다.

    집이 이런 느낌이구나.

    어색하면서 기분 좋았던 시간이 지나고 방으로 돌아온 엘로디는 익숙한 자신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손을 올려서 왼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았다. 어쩐지 반지를 통해서 아드리안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살짝 대었더니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가만히 입술을 댄 채로 눈을 감았다. 멀리 있는 아드리안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침대 아래로 몸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애론은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보며 억지로 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론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화를 내며 뺨을 내려쳤다.

    ‘거짓말쟁이!’

    화끈거리는 뺨을 쥐고 몸을 웅크리자 애론이 주먹으로 엘로디의 등과 어깨를 때렸다. 자신이 어렸기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기억나지 않았다. 후작이 달려와서 애론을 떼어내고 그에게 화를 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쟤는 내 동생이 아니야!’

    ‘애론!’

    눈을 뜨자 성인이 된 애론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가짜 주제에.’

    엘로디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베타 주제에.’

    숨이 막혀왔다. 그들의 주변으로 기포가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물속인 것 같았다.

    살려달라고 지르는 비명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엘로디!”

    “허억.”

    자신을 부른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뜬 엘로디는 몸을 붙잡아 주는 손을 잡았다. 평소보다 서늘한 온기에 고개를 돌리자 리암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으응.”

    어색하게 그의 손을 내려놓고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엘로디가 어렸을 때의 꿈은 10대 후반이 된 뒤로 거의 꾸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기 때문일까.

    “다시 자야지.”

    부드러운 음성에 엘로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왜 내 방에 있어.”

    “그건…….”

    “너랑 나랑 친구여도 이런 방문은 별로야. 우리가 약혼한 사이였을 때도 내가 자고 있을 때 들어온 적 없잖아.”

    엘로디의 말에 리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걱정돼서 방 근처에서 계속 서있었다는 말을 목 너머로 삼켰다.

    “미안. 다음부터 이런 일 없을 거야.”

    “괜한 의심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미안해.”

    리암이 정체를 숨긴다고 해도 황태자의 약혼녀의 방에, 그것도 밤에 남자가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 엘로디와 아드리안의 평판은 결코 좋지 않았다.

    엘로디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확실한 선을 긋기 위해 애썼다.

    후작저로 돌아온 뒤의 리암은 이전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엘로디는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금방이라도 녹아서 사라질 것같이 보였다.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

    “응, 미안. 어서 더 자.”

    리암은 말을 마치고 엘로디의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방을 나올 때까지 평정을 유지하던 그는 문이 닫히자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을 거부하는 엘로디는 처음이었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울컥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가스파르의 말을 계속해서 떠올리려 애썼다.

    엘로디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감정에 함부로 휘둘리지 말고 매번 다음 일을,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라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태양이었다.

    어차피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빛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몸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새까만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 소유욕, 분노, 슬픔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어둡고 음습한 감정이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리암은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밤새 앉아있었다.

    복도에 난 창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그의 발끝에 닿았다. 리암은 발을 조금 움직여서 그 빛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봄이 되어 따뜻해야 하는데 햇빛에서는 아무런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제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엘로디가 뒤척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엘로디의 경호를 맡고 있는 기사와 자리를 바꾸고 밖으로 나와 정원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리암은 그곳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소리를 죽여서 울었다.

    * * *

    세실은 아름다운 방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찬란해 보였으나 사람이 아닌 무기질처럼 보였다.

    “아가씨, 나바르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철저하게 감시를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붙여두었다. 세실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알파이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꽉 다문 입술 너머로 한숨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뵈어요.”

    엘로디의 목소리에 세실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실은 문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해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보고 있는 엘로디를 향해 웃었다.

    “그러게요.”

    엘로디는 푸른 멍 자국이 남은 목과 손목에 둘러져 있는 붕대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세실은 엘로디 뒤에 서있는 리암을 힐끗 바라보고 자리를 권했다. 엘로디는 말없이 권해준 자리에 앉았고 곧 다과가 올라왔다.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리암 경을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될까요?”

    “제가 영애의 무엇을 믿고 그렇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전 이 자리에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세실은 말없이 양손을 매만졌다.

    “다른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어요. 제 마력은 전부 묶여있고, 이제 당신도 제 [눈]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나요.”

    그러나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엘로디를 보며 세실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부탁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세실을 보며 엘로디는 갈등했다. 결국 그녀는 리암에게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만 떨어져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한 손에 그에게서 건네받은 총을 쥐었다.

    아무리 그녀가 모든 힘을 억압당했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손바닥 안쪽에 땀이 흘렀다. 세실은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먼저 차를 마셨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세실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타의 무덤은 어디에 있나요?”

    “…….”

    자신이 크리스타의 시신을 수습한 사실을 세실이 알고 있는 것에 엘로디는 당황했다. 그날 밤 모두의 감시 속에서 애론이 만든 가짜 시신을 던져 넣고 몰래 크리스타의 시신을 수습한 것을 아는 자는 자신과 애론, 리암 셋밖에 없었다.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세실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걸려있는 팔찌를 매만졌다.

    “너무 쉽게 그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당신이 도와줬다는 건가요?”

    엘로디의 물음에 세실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본인이 죽여놓고 시신을 수습하게 도와주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세실은 크리스타를 그렇게 공중에 부유하는 채로 둘 수 없었다.

    나무를 사랑하고 땅을 사랑했던, 그리고 멍청하게도 약혼자를 믿었던 여자의 시체를 찾으려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와준 것은 그저 크리스타가 그때까지 세실에게 심어주었던 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실은 그녀의 약혼자를 납치하고 두 번 다시 걷지 못하도록 사지의 근육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를 매음굴에 집어던지는 것으로 자신의 복수를 끝냈다.

    그러나 한 번 무너져 내린 세계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세실은 무너진 바닥에서 빛과 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숨만 쉬면서 살아왔다. 황후에게 붙잡혀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용당하면서 삶을 연명해 갔다.

    아니, 황후가 자신을 끌어가지 않았다면 세실은 이미 예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수렁에서 숨통이 서서히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죽이면서 살아갔었다.

    “엘로디 님, 크리스타가 제 친구였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에요.”

    “하지만 크리스타는 당신이 죽인 거예요.”

    엘로디의 말에 세실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화려하고 정제되어 있는 방 안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맞아요. 이제 와서 너무 늦었죠.”

    세실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걸려있는 팔찌를 습관처럼 쓸었다.

    “크리스타의 약혼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알아요?”

    “…….”

    “당신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날 더럽히고 크리스타 앞에서 모욕했죠. 그녀가 나에게 줬던 팔찌를 이용해서 말이에요.”

    엘로디는 그녀의 손에 닿은 팔찌를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들고 온 노트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것이 세실에 대한 위로가 될지, 혹은 그녀를 최악의 상황으로 끌고 갈지 엘로디도 알지 못했다.

    “피해자는 나인데 왜 제가 비난받아야 하죠? 제가 그런 더러운 남자를 원했을 거라고 크리스타가 믿는 것 자체가 전 싫었어요.”

    “크리스타도 그때는 당황해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녀가 당신에게 심한 짓을 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전해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세실은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무덤은 이제 와서 알려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이걸 드릴게요.”

    죽기 전 후작가에 왔다가 두고 갔던 크리스타의 다이어리였다. 나무 밑에 따로 묻어둔 것을 다시 꺼내온 것이다. 엘로디는 그동안 이 일기의 내용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내용을 확인했다.

    세실은 일기장을 들어서 책등을 가볍게 쓸었다. 저 아가씨가 가져온 것이라면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이 맞을 것이었다.

    세실은 천천히 손끝에 닿아오는 책의 표지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황태자 전하를 조심하세요.”

    “무슨 소리시죠?”

    “왜 그들이 황족인지 엘로디 님은 알고 있나요?”

    세실은 눈을 뜨고 엘로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뒤쪽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보고 있는 리암을 힐끗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족은 가장 신에 가까운 자들이에요. 특히 황제와 황태자의 힘은 신이라고 불릴 만큼 강하죠. 그들의 육체적인 강함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눈]의 특수성 때문이에요.”

    세실은 황태자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금되어 있는 사이 자신의 모든 인맥을 이용해 황실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으나 유일하게 알아낸 사실은 역대 황제들 중에 [눈]을 뜬 자들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황제와 그들의 상대를 파멸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없을 그들의 이야기를 더 찾는 것은 어려웠다.

    “제가 당신 말을 왜 믿어야 하는 거죠?”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조심하기만 하면 돼요.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말을 마친 세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덤 위치를 알려달라는 것과 전하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부른 거예요.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미 늦었다는 게 무슨 이야기죠?”

    그녀의 말에 세실은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았다. 정렬되어 있는 바닥의 모양이 어지럽게 보였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에요. 과거 황제들에 대해 제가 말한 것들은 전부 거짓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세실은 혼란스러워하는 엘로디의 눈을 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엘로디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혹만 가득 안은 채 결국 백작저를 떠나야만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리암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지만 별일 아니라고 말을 돌렸다.

    엘로디는 문득 아드리안이 보고 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실을 만나고 바로 황궁으로 향했으나 아드리안은 신흥 종교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잠시 궁을 비웠다고 했다. 조금 더 기다릴까 했지만 결국 그를 못 만난 채로 엘로디는 돌아서 나와야만 했다.

    겨우 며칠 못 본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그리워할 줄은 자신도 몰랐다. 아무리 바쁘다지만 잠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 * *

    며칠 뒤 엘로디는 세실 보아르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엘로디는 그녀가 크리스타의 일기 속 사과를 보고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뜬 자의 운명은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는 아드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엘로디는 자신이 일기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죽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이제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눈]을 뜬 알파의 최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들에게 [눈]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비밀이 많은 종족, 엘로디는 그들이 정말로 신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안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엘로디는 연구실로 내려갔다. 궁을 나오고 나서 엘로디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황태자의 침실 시녀였던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평민들 사이에서도 엘로디를 보는 눈빛에 흥미로움이나 경멸 같은 것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엘로디는 그들의 눈빛에서 예전에 애론을 보던 사람들의 눈빛과 같은 것을 보았다.

    “하아…….”

    결국 생각이 끝나지 않았다. 엘로디는 들고 있던 플라스크를 내려놓았다. 이제 엘로디는 짧은 시간 동안 알파나 오메가의 활성을 완전히 없애는 약을 개발하고 있었다.

    만일 베타가 된다면 애론은 평범한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비록 하루나 이틀 정도만 약효가 갈 것이지만 그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비참해할지 뻔한 일이었다.

    자신이 알파나 오메가였다면 약을 먹어봐서 부작용을 확인했을 텐데 방법이 없는 것이 조금 불안했다. 엘로디는 부디 이 약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엘로디.”

    리암이 부르는 소리에 병을 내려서 밀봉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날 밤 이후 리암은 엘로디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맞춰주기 위해 애를 썼다.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한 날이 계속되었다.

    “우리 잠깐 나갈래?”

    “너 나가는 거 싫어하잖아.”

    “내가 사장이잖아. 오늘 문 닫는다고 하고 가자.”

    엘로디는 그렇게 말하면서 집사에게 연락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리암은 그런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날씨가 눈이 부실 정도로 좋았다.

    차의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볕 좋은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을 보면서 엘로디는 어쩐지 전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커피 인기 많네.”

    “새로 가게가 몇 개 생겼다고 하더라. 네 카페 근처에도 하나 생겼어.”

    “정말?”

    엘로디는 리암과 예전처럼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둘은 가게로 향했다.

    항상 먹던 것을 시키고 둘은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리암은 세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엘로디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크림이 올라간 것을 스푼으로 눌러서 커피 속으로 밀어 넣고 천천히 돌렸다. 뭉개지고 녹았는데도 조금씩 덩어리가 진 채로 떠다니는 것이 자신같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그런 리암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리암, 괜한 죄책감 때문에 날 지켜주지 않아도 돼.”

    “무슨 소리야.”

    손에 들린 커피 잔의 온기는 아드리안을 떠올리게 했다. 엘로디에게 이제 자신의 삶을 함께 걸어갈 사람은 리암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인지, 혹은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사랑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옆에서 스스로를 상처 입히면서 함께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난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받은 적 없어.”

    엘로디는 얼굴을 구긴 채로 잔인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불편해서 그래.”

    “…엘로디, 내가 부담스러워?”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지.”

    리암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엘로디는 다시 잔을 들어 커피를 조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미안해. 난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아드리안 님이 상처받는 게 싫어.”

    리암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 것을 엘로디는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가려진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알고 있어.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그게 너와 내 탓이 아니라는 것도, 황태자도 피해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엘로디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다시 내렸다. 여기서 그를 받아주면 계속해서 기대할지도 모른다.

    “네가 더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그냥 네 곁에만 있게 해줘. 네가 안전해지면 그때는 떠날게.”

    엘로디는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고인 채로 불안해하는 그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그 눈이 위험할 정도로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것을 그는 알까.

    엘로디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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