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소설에서 베타로 살아남기 2권
7장 Waiting for Love
아침 일찍 아드리안을 깨우러 들어간 가스파르는 방 안의 풍경을 보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변해서 무음의 비명을 지르며 복도를 내달리는 그를 보나파르트 부인과 패트리샤가 발견해서 붙잡았다.
“경! 아침부터 시끄럽게 뭐 하는 겁니까?”
“아뇨! 부인. 그게 아니라. 아니요. 아…….”
정신을 반쯤 놓은 듯한 그의 모습에 보나파르트 부인은 엘로디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텅 비어있는 그녀의 침대와 열려있는 발코니로 향하는 창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쫓아 들어온 패트리샤가 재밌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부인께서도 예상하지 못하셨나 보네요.”
보나파르트 부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
“그…그냥 두실 거죠?”
어느새 옆에 와서 머뭇거리며 묻는 가스파르를 보고는 보나파르트 부인은 코웃음을 쳤다.
“폐하께서는 예전에 벽도 부쉈는데 저 정도 패기도 없으면 안 되지요. 그냥 두세요. 일어나시면 알아서 나오시겠죠.”
뜻하지 않게 황제의 흑역사를 들은 가스파르와 패트리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아서 나가는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 * *
애론은 멍하니 누워서 제 손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이상하게 회복 속도를 늦추는 그 탄환은 아마도 리암의 것이리라.
애론은 자신의 [눈]의 정체를 알고 분노와 혐오에 가득 찼던 그의 황금색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던 아드리안을 생각했다.
애론은 황후에게 운명의 반려에 대해 물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글쎄. 사실 운명의 반려는 조금 전설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
황후는 애론의 질문에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내가 황제와 결혼하고 나서 2년쯤 지났었던가.”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아직 아드리안을 낳기 전이었으니.”
손으로 빙― 찻잔 끝을 둘러 만졌다.
“갑자기 태후가 나를 부르더구나.”
이자벨은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 딸려 올라간 그 찻잔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브느와의 첫사랑이었던 여자가 오메가였다고. 운명의 반려일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해줬다.”
그녀의 말에 애론은 인상을 썼다. 운명의 반려는 정말로 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신이 서로에게 꼭 맞는 한 쌍을 내린다. 시작의 알파, 최후의 오메가의 결합은 신의 섭리라는 것이 교회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찾아내는 경우는 아주 드문 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모든 것이 이해됐지. 브느와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심한 남자였단다. 내가 공국에서 결혼을 위해 돌아왔을 무렵, 브느와가 매번 신경 쓰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소문은 궁 전체에 퍼져있었지.”
“그래서, 결국 당신이 계속 황후인 걸 보면 그 여자가 물러선 것 아니야?”
그의 말에 이자벨은 다시 미소를 띠었다.
“브느와가 그녀가 자신의 운명의 반려임을 확인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
결국 자신에 의해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자벨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괴로워했었다. 태후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운명의 반려를 확인하지 않는 황제를 못마땅해했다.
그다음으로 힘들었던 것은 제국민들의 눈이었다. 신이 내려준 반려의 사이를 갈라놓은 황후라는 소문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제국민들은 황실에 대해 자긍심이 엄청났다. 황실은 대대로 강한 알파를 배출해 왔으며, 수십 년에 한 번 운명의 반려와 이어진 황제들은 성군이 되어 제국을 발전시켜 왔다.
그들은 모두 황제가 운명의 반려를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거기에는 개인인 브느와와 이자벨의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단다. 운명의 반려를 찾지 못한 알파는 반쪽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름답고 보기 드문 신성력을 지닌, 총명하고 강한 알파였던 황후 이자벨은 순식간에 권력을 탐하여 신이 맺어준 인연을 갈라놓는 악녀가 되어있었다.
브느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오명을 벗겨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이 그런 감정들에 상처받게 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야기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벨은 자신이 브느와의 배려에 말라죽은 고목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신이 생각하는 운명의 반려가 뭐야.”
이자벨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고민의 빛이 잠깐 어렸다가 사라졌다.
“신이 맺어준 인연.”
“그게 다야? 운명이라면 반드시 서로를 사랑하거나 그러는 게 아니라?”
이자벨은 애론을 보며 웃었다.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애론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애론, 넌 운명의 반려인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니?”
“잘생겼다?”
“그래. 내 생각은 이렇단다. 운명의 반려는 그냥 첫 만남이 서로에게 강렬하거나 호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이일 것이라고.”
“그렇지만 아드리안이 마법을 쓸 때는 뭔가 특별한 게 느껴졌어.”
“그건 너희 둘의 마력 파장이 잘 맞아서일지도 모르지.”
이자벨은 웃었다.
“나 역시 브느와가 검기를 쓸 때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과 다른 걸 느꼈으니까.”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은 애론은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서 그녀가 앉아있는 탁자 근처로 갔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내가 아드리안과 이어지길 바라는 거야?”
이자벨은 수려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니 안 닮은 것 같지만 엘로디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그걸 제국민들이 원하니까.”
운명의 반려라고 알려졌던 그 여인이 먼 곳으로 시집을 가고 나서 이자벨은 필사적으로 오메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운명의 반려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메가의 수가 지나치게 적었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처럼 제국 내의 오메가 수가 줄고 있었다.
이자벨은 자신의 운명의 반려는 발현하지도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자벨이 발현하고 3년 뒤부터 급격하게 줄어드는 오메가의 숫자를 유추해 보았을 때 그랬다.
그때의 자신은 한계까지 몰려있었다. 자신을 칭송하던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상냥했던 사람들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때쯤이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은.
그것은 고요한 아침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운명의 반려 소문이 나고 나서 황제는 거의 매일같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잠든 날도 많았지만 몸을 섞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날 역시 그렇게 전날의 정사가 끝나고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던 날이었다.
멀리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너머로 바다 끝 수평선에서 해가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이자벨은 그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새로운 감각의 탄생과 같았다.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몸에서, 자신의 몸에서, 그리고 배 속에서 방금 생성된 것 같은 향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손끝이 저리고 통각이 목까지 올라오자 아득한 시야 너머, 확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것처럼 펼쳐졌다.
마치 눈앞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가 알파임을, 자신이 알파인 것을, 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막 생긴 아이 역시 알파임을 보았다.
이자벨은 확인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라진 오메가의 수를 늘리기로 했다.
* * *
그 사건 이후로도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피해 다녔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그의 삶을 좀먹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원하면서도 도망가고 싶어 했다.
엘로디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주변을 돌며 아드리안이 다가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스파르의 도움을 받아 총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상 몸치에 가까웠기에 그녀가 표적을 맞히는 데는 한 달이나 걸렸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연습은 중단되었고, 그 대신 그녀는 애론을 제압할 만한 탄환을 연구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의 실력으론 하나도 못 맞힐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 엘로디는 후작가가 복권이 된다면 가문의 총기 기술자를 불러 상의하기로 했다.
멍하니 누워서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를 일으킨 건 쥴리아였다.
“엘로디 님.”
“무슨 일이야?”
“황후 폐하께서 다음 주에 있을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또?”
황후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드리안이 깨어난 이후 줄기차게 티파티나 오찬 자리에 엘로디를 초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찾아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불편한 자리가 되었다.
엘로디는 침실 시녀가 되는 순간 성을 박탈당하고 신분이 격하되면서 사실상 사교계에서 퇴출당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애초에 엘로디 본인도 사교계에 큰 뜻이 없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런 자리에 나가는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나바르가가 유력 가문이었음에도 입궁 전엔 한 번도 황후가 주최하는 자리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 자리는 오로지 알파와 오메가들만 부르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번의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음에는 꼭 와달라는 간곡한 편지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가 세 번 부르면 한 번쯤은 나가는 것으로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불려 나가는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비록 궁 내부에서의 생활 반경이 늘어난 것뿐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면서 엘로디는 복장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긴 한숨과 함께 저를 위해 준비된 옷들에 몸을 꿰어 넣어야만 했다.
날씨도 추운데 오라 가라 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물론이고,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국화의 궁으로 가는 길이 더 앙상하고 메마르게 느껴졌다.
엘로디는 멍하니 그 길의 끝에 있을 골칫거리들을 걱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만에 들어온 온실은 겨울 느낌을 내고 싶은 모양인지 흰색이나 엷은 색의 국화들이 잔뜩 피어있었다. 다른 꽃의 존재 따위는 모두 지워버리고 오로지 한 종류의 꽃으로 가득 피워낸 온실 내부는 언제 보아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일전에 세실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대로 황제들은 대대로 여자에게 미치면 괴상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취미가 있는 듯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온실의 중앙에 긴 머리를 간단하게 묶고 화려한 여자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져 들어갔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드리안과 닮아서 엘로디는 부담스러웠다.
“어서 와요.”
부드러운 음성이 공간에 울리고, 엘로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권한 옆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테이블에는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물론 황후였지만, 더 부담스러운 건 매번 멤버가 바뀌어서 이 자리에 오는 그녀들이었다.
모든 사교계 활동을 끊고 궁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몰랐지만, 엘로디의 존재는 사교계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황태자의 바람난 반려를 대신해서 가문을 위해 희생한 베타, 혹은 모두에게 무관심하고 선을 긋는 황태자가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 요부 정도였다.
황후는 그런 그녀의 위치를 인식시켜 주려는 듯 지치지도 않고 사람들을 바꿔가면서 모아왔고, 대부분은 알파였다.
오메가가 압도적으로 부족해진 상황에서 그 자리에 참석한 오메가 여자아이는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어느 한미한 남작가의 여자아이 하나였다.
엘로디는 황후, 공작가의 후계자, 그리고 후작가의 장녀 같은 이 어마어마한 배경의 사람들 사이에 그 아이가 단지 태생 덕분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할 뿐이었다.
“베아트리스 카셀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로디 님.”
누가 보아도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에 엘로디는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불편하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지 동동거리는 것은 귀여웠으나, 역시 종족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기묘하게 내리누르는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다 모였으니, 차를 내어올게요.”
이자벨은 그런 엘로디의 상태를 아는 것처럼 웃으며 사람을 불러 다과를 내어왔다. 엘로디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시간은 바로 이 시간이었다.
“엘로디 양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두었어요.”
어디서 들은 것인지 엘로디 것만 커피였다. 새삼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배려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커피가 무슨 죄가 있는가.
이자벨이 공수해 온 커피는 나름 잘나가는 후작가의 영애였던 엘로디도 먹기 힘든 상등품이었고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바리스타의 솜씨 역시 훌륭했다.
엘로디가 이 모임에 나와서 불편하면서도 가장 즐거운 이유가 커피였다.
오늘의 멤버는 파라디 공작가의 후계자인 바네사와 드뇌브 후작가의 장녀 아델이라는 구성으로 이전보다 더 화려했다.
엘로디는 그래도 가스파르를 아는 사이여서 바네사가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녀의 그 얄팍한 생각은 바네사가 입을 여는 순간부터 깨졌다.
“황후 폐하, 어찌하여 저치를 저희와 함께 부르신 겁니까?”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다 뿜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아아… 여기 여자 애론이 또 하나 있구나.
엘로디는 이미 애론에게 저런 말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험악하게 다뤄졌기 때문에 곧 표정을 되찾고 황후를 향해 웃어 보였다.
“폐하,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것 같으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엘로디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바네사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예전에 애론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성질을 죽이며 살아왔던 그녀는 이제 없다. 그렇게 죽어라 납작 엎드려서 얻은 것이라고는 그의 혐오뿐이었다. 남에게 눈치 보며 사는 인생 따위 이제 질려버렸다.
어차피 파라디 공작가는 가스파르가 아까울 정도로 세를 잃은 가문이었다. 현 황제가 귀족을 정리하겠다며 보나파르트 공작가와 손을 잡고 가장 먼저 친 가문이 파라디 공작가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공작 일족은 모두 살려두었지만, 사실상 손발이 다 잘린 가문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엘로디에게 말조차 붙이지 못했을 사이였다. 차후 나바르 후작가가 복권된다면 아마 바네사도 저런 이야기는 입에도 올리지 못할 것이다.
가문이 약해진 틈을 타 자신을 짓누르려는 그녀의 시도는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남은 커피가 아까워 한 번에 쭉 들이켜고는 어쩐 일인지 말리지도 않는 황후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돌아서서 나온 곳에 양 볼이 상기된 채로 뛰어온 것인지 아드리안이 서있었다.
“어머니!”
평소보다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 조금 안되어 보였는데, 주변 사람들의 묘한 시선에 엘로디가 눈을 굴렸다. 그 끝에 베아트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과 아드리안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엘로디는 앞으로 어떤 소문이 날지를 상상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드리안, 이런 자리에서 그런 호칭은 맞지 않는 것 같구나.”
꼭 닮은 남녀가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이자벨에게 뭐라 말하려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엘로디를 제 곁으로 끌어왔다.
“엘로디는 저랑 선약이 있어서 이만 데려가겠습니다.”
말을 끝낸 그의 재촉하는 눈빛에 엘로디 역시 인사를 가볍게 하고는 자리를 떴다. 황후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더니 남은 손님들을 향해 몸을 돌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드리안 님, 왜 뛰어오셨어요?”
짧은 거리도 귀찮다며 마법을 사용하는 남자가 양 볼이 발개질 때까지 뛰어온 것이 신기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늘 체온이 높았던 그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것인지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국화의 궁 내에서는 마법이 안 통해.”
“왜요?”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암살당할 것을 걱정하셨거든.”
엘로디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였으나 워낙 유명해 엘로디 역시 황제의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뒤늦게 발현한 오메가가 있던 남작 가문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불타올랐다.
운명의 반려를 맞이한 황제는 성군이 된다. 역대 황제들을 보았을 때 모두가 그랬고, 그 당시 파라디 가문의 세를 업고 그들은 황후를 바꿀 꿈을 꾸었다.
그러나 황제는 상상 이상이었다고 했다. 나바르 후작은 엘로디에게 종종 그때의 황제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고는 했다.
황후가 처음 독에 당해서 쓰러졌을 때 황제는 거의 미쳐있었다고 했다. 그는 성인이 되고 황제가 된 뒤 들지 않았던 검을 들고 몇몇 가문의 사병과 근위병과 함께 파라디 공작가를 짓밟았다. 그때의 황제의 모습은 죽음의 신과 같았다고 했다.
이 평화의 시대에 그의 별칭이 기사 왕이 된 것은 그때의 일 때문이었다. 차마 황제를 죽음의 신이라 부를 수 없었던 중신들이 순화해서 붙여준 것이라고, 비밀이라며 후작이 엘로디에게 속삭여 주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이런 모임은 몇 번이나 있었는데 신경 쓰지 않았던 그였다. 아드리안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붉어진 얼굴을 슬쩍 가렸다.
“그… 바네사 파라디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 그 애론 같은 여자분을 이야기하시는군요.”
결국 그녀가 바네사와 말을 섞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괜찮아요. 애론에 비하면 저런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던데요.”
엘로디는 정말로 그녀의 말에 별로 상처받지 않았다.
“바네사의 베타에 대한 적개심은 유명하거든.”
“그 정도 위치 되시는 분이 대체 왜요?”
엘로디는 여기 애론과 판박이처럼 닮은 인간이 또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알파와 오메가는 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들이다. 대체 뭐 때문에 그녀가 베타를 싫어하는 걸까. 단순히 열등한 인물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네사는 둘째야.”
“그럼 가스파르 경이 첫째인가요?”
“응.”
“그럼 왜 후계자가 가스파르 경이 아니죠?”
아드리안은 잠깐 말을 하다 말고 엘로디의 손을 꽉 쥐었다.
“별로 숨길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스파르는 베타거든.”
엘로디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가스파르 파라디는 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인기 있는 남자였다. 비록 껍데기만 남았다지만 공작가의 장자였고, 큰 키에 잘생긴 외모는 사교계에 별 관심이 없던 엘로디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를 그렇게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의 힘이었다. 인간이 아니라 평가되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아드리안과 동등할 정도로 강한 그의 힘은 유명했다.
그들이 몇 년 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싸웠을 때 황제가 나와서 막지 않았다면 장미의 궁 절반이 날아갔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더 유명해졌었다.
그래서 엘로디 역시 그가 알파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스파르 님이 베타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요.”
엘로디는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차기 공작은 알파인 것이 유리했다. 대부분의 가문이 그러했다. 가주가 알파나 오메가가 아닌 가문을 멸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너무 뛰어난 베타인 가스파르는 공작가 내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궁을 넘어왔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멀리 넘어가고 있었다.
아드리안을 따라 걷던 엘로디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겨울의 청명한 공기에 반사된 저녁노을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하늘을 뒤엎었다.
엘로디는 그것을 보다가 애론을 떠올렸다.
바네사는 알파임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베타인 가스파르와 항상 비교당하며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열등감의 원천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애론은 어땠을까.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 * *
엘로디를 궁 앞까지 데려다준 아드리안은 장미의 궁을 나와서 등 뒤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부터 내내 신경 쓰이던 존재의 사실이 명확해졌다.
아드리안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신했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허공에 대고 말한 그가 한참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30분 뒤까지 집무실 창문을 열어놓지. 안 오면 두 번 다시 엘로디 얼굴을 확인하지 못할 거야.”
아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몸을 휙 돌리고 그 자리에서 이동해 집무실로 갔다.
그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을 열고 소파에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어차피 와도, 안 와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안 와주는 게 훨씬 나았다.
눈을 감고 기다리던 그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왔군.”
아드리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선 곳에는 예상하듯 리암이 눈을 내리깐 채로 서있었다. 어두운색의 후드를 뒤집어써서 그의 눈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생각했지?”
“…….”
“오늘 일로 내 인내심은 끝났다, 경.”
아드리안의 딱딱한 말투에 리암은 말없이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내가 지금까지 그대를 봐준 것은 엘로디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전하, 저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자네는 선을 넘었네. 내 어머니가 정말로 엘로디 뒤를 쫓아다니는 자네를 몰랐을 거라 생각하나.”
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면 몰라도 이 황궁 안에서 그의 존재를 확실히 알 사람은 몇몇 있었다. 그리고 황후 역시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바네사가 그녀에게 애론이 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리암은 평정심을 잃고 그대로 적의를 드러냈다. 그 순간 황후의 무기물 같은 눈이 자신이 숨어있는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내 부모님들이 그대를 봐주고, 가스파르 역시 모르는 척해주니 본인이 아주 대단한 인물인 줄 아는가 본데.”
아드리안의 고압적인 태도와 함께 그의 마력이 리암을 짓눌렀다. 리암은 그의 힘에 눌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기울어진 턱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그대를 눈감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허락한 것이다.”
버티고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아드리안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말없이 그를 짓누르는 힘을 늘렸다. 리암은 결국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대의 그 알량한 자만심이 누구를 위험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나?”
리암이 엘로디 근처를 맴돌며 아드리안의 신경을 계속해서 긁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그가 엘로디나 자신에게 악의를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 황후의 궁에 갔을 때 느낀 것은 분명한 살의였다. 만일 황후가 마음만 먹었다면 엘로디와 그가 끌려 나와 반역으로 묶일 수도 있었다. 황제 역시 황후와 연관된 일이면 앞뒤 사정 다 무시하고 즉결 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더 이상 그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리암은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그가 양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드리안은 그의 모습에서 엘로디를 보았다. 후작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저 살려만 달라며 매달리던 그녀를 떠올린 그는 결국 힘을 거둬들였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사내가 무엇을 안단 말인가.
리암은 몸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른한 표정으로 책상에 기댄 그의 눈동자가 멍해 보였다.
“일어나. 하나만 묻지.”
엎드린 채 고개만 올렸던 리암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너, 애론의 [눈]에 당했나?”
리암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비참하게도 후작가에서 내쳐진 그에게는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가 자신의 목을 이 자리에서 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도움이었다.
“모두 애론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 말은 네가 그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어도 된다는 뜻인가?”
“애론의 [눈]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리암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담아왔던 비밀을 털어놓는 대상이 전 약혼자와 동침하는 남자라는 것이 어색할 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을 유혹하는 [눈]을 가졌습니다.”
“용케도 그걸 알아냈군.”
아드리안은 그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조건의 [눈]은 아버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었다.
“애론이 엘로디에게 쓰려 했는데 실패하는 걸 보았습니다. 아마 애론도 그때 알았을 겁니다.”
“그럼 그대가 애론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받아들여도 되나?”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남의 연애사는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은 리암이 왜 엘로디의 주변을 돌고 있는지였다.
그가 애론을 좋아한다면 둘이서 멀리 나가서 살 수 있게 돈을 쥐여줄 수도 있었고, 함께 애론을 붙잡아와 그에게 넘길 생각도 있었다.
“애론에게 인간적인 호감은 느꼈지만 연애 감정은 아닙니다.”
리암은 인상을 쓰며 그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애론이… 그럴지는 몰랐지만, 제 가족들을 찾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입니다.”
아드리안은 뜻하지 않은 애론의 모습에 놀라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망나니로 유명한 녀석이 무슨 일로 남을 도와주었을까.
리암은 자신의 가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지만,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일을 후작과 엘로디와 상의하기 위해 몸을 돌리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있었다.
“마법이야.”
샐쭉한 표정의 애론이 짧게 뱉은 말을 리암은 의심했다. 엘로디를 사이에 둔 그와 애론의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다.
굳은 리암의 표정을 본 애론이 씩 웃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았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어때?”
그의 의도가 의심스러웠으나 리암은 당장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종되고 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찾을 확률은 낮아져 갔다.
그리고 그 일을 리암은 평생을 후회하게 되었다.
“전하께서도 아마 평민 중심으로 알파나 오메가의 가족들이 납치당하는 일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드리안은 그의 말에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리암은 그의 모습에 조금 긴장된 것처럼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제가 그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아드리안은 별로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요즘 한창 뜨는 신흥 종교 집단이지. 알파와 오메가의 수가 줄고 있다고 하면서 멸망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떠든다던데.”
그는 초조해 보이는 리암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
“그 정도로 티를 내는데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모를 리가 있나.”
“…절 엘로디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부르신 겁니까.”
“뭐, 겸사겸사.”
아드리안은 이 고집불통 사내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마 엘로디와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얻어내지 못한 걸 그대가 갖고 있어.”
“무엇입니까.”
“증인.”
“…….”
“그 집단에 납치됐던 그대 가족이나, 탈출을 도와주었던 본인까지 모두 나와주면 고맙겠는데.”
말을 마친 아드리안이 웃어 보였다. 리암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당장 결정하란 말은 하지 않을게.”
“만일 제가 증인으로 나선다면, 전하께서는 무엇을 해주실 겁니까.”
“자네 생명을 살려주지. 잊었나 본데, 애론과 그대는 여전히 수배범이야.”
“엘로디를 풀어주세요.”
아드리안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이봐. 남의 인생 멋대로 휘두르려는 것 좀 그만하지 그래.”
“그거야말로 전하께서 엘로디에게 하셨던 일 아닙니까.”
둘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한참을 말이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결국 아드리안이 눈을 돌리고 이런 어린애와 싸워봤자 뭐에 쓰나,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대에게 엘로디는 지켜주고 돌봐줘야 하는 대상인가?”
“제가 벌인 일입니다. 당연히 제가 책임질 일입니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아직도 열려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닫고 몸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그 소원은 못 들어줘.”
“그럼 저와 가족들이 증인으로 자리에 설 일은 없을 겁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엘로디는 자신의 힘으로 궁에서 나갈 거다. 후작가 역시 곧 복권될 것이고.”
아드리안의 말에 리암은 숨을 들이켰다. 그가 하는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아드리안이 웃었다.
“엘로디가 내 비로 들어오는 건 아니야.”
눈에 띄게 안도하는 그의 표정에 아드리안은 짜증이 났다.
“어쨌거나 다른 보상을 생각하는 게 좋을걸. 그리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아드리안이 빙긋 웃으며 양손을 활짝 펼치고 창가에 손을 대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을 따라 은색의 마력이 벽과 바닥으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그대의 선택권은 하나야.”
리암이 놀라서 몸을 일으켰으나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마력의 줄에 그대로 바닥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양손과 양발이 묶인 데 이어 그 자리에 선 채로 묶여버렸다.
“날 도와줘서 살아 나가는 것.”
창을 등진 채로 리암을 향해 웃어 보이는 모습이 마치 마왕과도 같아서 리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로디는 속고 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리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리암을 집무실 안에 묶어두고 방 밖으로 나온 아드리안은 대기하고 있던 가스파르에게 그의 신변을 인계하기로 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아까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랑 마주쳐서 그래요.”
“바네사?”
“예.”
여전히 짜증 난 표정의 가스파르가 아드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게 너무 관대하신 거 아닙니까?”
“이제 스무 살 먹은 어린애한테 무슨…….”
“엘로디 님도 올해 스무 살인 건 아시죠?”
“…….”
아드리안은 손으로 당황한 기색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를 보며 가스파르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저 녀석, 알아서 처리해. 죽이지는 말고 잘 구슬려서 그 이상한 집단에 쳐들어갈 구실을 만들어 내놔.”
몸을 획 돌려 나가는 그를 가스파르가 붙잡았다.
“어디 가시려고요!”
“상처 하나 없이 잡아줬잖아. 이제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건드리지 말고 두라고 하신 건 전하잖아요!”
“아, 몰라. 난 갈 테니까.”
“전하, 진짜 이러실 겁니까?”
“부러우면 네가 황태자 해.”
아드리안은 말을 마치고 마법과 함께 사라졌다. 가스파르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은색 빛의 마력 잔상만을 바라보았다.
* * *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방문 앞에서 옷을 살피고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찾아가는 것은 오랜만이어서 긴장되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럽고 폭신한 몸이 안겨 들어오는 것에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그녀를 안아 올렸다. 엘로디와 함께 있을 때는 완전히 다른 공간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라 생소했다.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쓸어 올리고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닿은 감각이 간지러운지 엘로디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얼굴을 들어 올려 볼과 코 위로 키스를 이어나가자 결국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드리안, 간지러워요.”
엘로디는 웃으며 그를 끌었다. 그의 입술이 여기저기 닿을 때마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아드리안은 그녀가 겨우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인상을 쓰면서 멈칫했다.
엘로디는 평소와 다른 그가 이상해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니야.”
아드리안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몸짓에서 불안감이 느껴진 엘로디는 자신을 끌어안은 그를 떼어내고 얼굴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이야기해 주세요.”
“응.”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은 망설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옷자락을 부여잡은 엘로디를 보며 아드리안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손을 잡고 끌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하고 있었어?”
“으음, 그냥 이것저것 보고 있었어요.”
엘로디는 일부러 웃어 보이며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확실했는데 진솔하게 감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감정만으로 이루어지기에는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짊어지고 있는 것이 많았다. 며칠 뒤면 궁을 나가는 엘로디는 지금과 같은 이 시간이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엘로디.”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든 엘로디는 웃으려고 애썼다.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눈에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엘로디가 눈을 꼭 감았다. 아드리안이 다시 깨어난 뒤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일이 부끄러워졌다.
그의 입술이 눈가와 볼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침대 근처로 끌어서 그대로 밀어트렸다.
엘로디는 자신 위에 올라타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쫓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드리안이 상의를 벗어서 던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엘로디가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정말로 무슨 일…….”
그녀의 말을 자르듯 그가 다시 키스해 왔다. 입술을 열고 들어와 입 안의 약한 곳들을 건드렸다. 엘로디는 곧 그의 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몸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다가 얇은 슈미즈 드레스를 끌어 내렸다.
찬 공기에 둥근 가슴이 드러나고 흥분한 유두가 바짝 서있었다. 그의 손이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유두를 긁어내렸다.
“으응.”
입 안에서 들리는 얕은 신음 소리에 아드리안이 만족한 듯 웃고는 입술을 떼고 목으로, 어깨로 내려갔다. 쇄골 근처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이제는 하얗게 새살이 돋아난 잇자국을 혀로 더듬었다. 분명 미안한 일이었는데도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을 자신의 흔적을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그곳을 핥던 아드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은은한 조명에 그의 몸이 빛나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멍하니 그의 몸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세요.”
“…….”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고 싶지 않아요.”
“아직… 아무것도 정확하지 않아.”
아드리안은 이전에 그녀가 리암의 배신이 애론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알려주세요, 전하.”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종종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거나 화가 나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유치하게도 그는 그녀가 영원히 리암이 애론과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고 믿고 그를 증오하길 바랐다.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녹색의 눈동자에 아드리안은 심장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크리스타와의 비밀을 뱉어냈을 때? 아니면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안겼던 날?
아니다.
그날, 그 취조실에서 모진 말을 듣고 나서도 살려달라며 저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던 그 순간, 그의 속에서 부서진 것은 어쩌면 광기를 억제시킬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녀 없이 한순간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내보내고 행복을 빌어준다는 생각 따위는 애당초 버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엘로디가 추울지도 몰라서 이불을 몸에 덮어주었다. 엘로디의 몸 위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감기는 팔에 아드리안은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쓸었다.
“리암을 잡았어.”
엘로디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애론이 널 납치하고 나서부터 계속 네 주위를 맴돌고 있었거든.”
“그…그걸 알고 계셨어요?”
아드리안은 잠깐 말하는 것을 멈추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그녀에게 말해주어야 할까 고민했다. 세실의 경우에는 최면이었다고 숨겼지만, 피해자인 그녀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엘로디, 알파와 오메가가 신의 아이들이라는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엘로디는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네…….”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더 끌어안았다.
“알파와 오메가는 무엇인가에 몰두하면 안 돼.”
“네?”
“그것이 사물이거나 사람이어도, 하다못해 사상이어도 안 돼.”
엘로디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래. 무엇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면…….”
조금 멍한 눈으로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둥근 어깨, 그리고 자신의 손아래에서 뜨겁게 떨리던 몸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이룰 수 없거나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눈]을 뜨게 돼.”
“[눈]…이요?”
아드리안은 웃었다. 신의 아이들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 우리들은 그것을 새로운 감각의 탄생이라고 불러.”
천천히 그녀의 몸을 쓸어내렸다.
“이 능력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야. 각자 모두가 고유의 [눈]을 가지고 있고, 그 [눈]의 정체를 상대에게 들키면 사용할 수 없게 돼.”
엘로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눈과 마주쳤다.
“좋은 것 아닌가요?”
그의 눈이 부드러운 빛을 띠고는 휘어졌다.
“[눈]을 뜬 자들은 모두 파멸을 예정받아.”
아드리안은 세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소중한 것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아드리안은 요즘도 그녀가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세실은 그가 말해주기 전까지 자신의 소중한 존재가 크리스타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은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으리라.
“그거랑 리암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애론 역시 [눈]을 갖고 있다는군.”
“…….”
아드리안은 초조함에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동자가 얼마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애론은 유혹하는 [눈]을 갖고 있다고 했어.”
“아…….”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설마…….”
“애론이 왜 그랬는지는 듣지 못했어.”
엘로디의 눈동자가 물기로 반짝였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안고 있지 않는 손을 꽉 쥐었다.
“그와 이야기해 보겠어?”
“아드리안… 저는…….”
엘로디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친구의 비극과 자신이 일부러 애론을 들먹이며 그를 후벼 팠던 말들이 떠올랐다.
“제가… 그러니까…….”
“엘로디.”
아드리안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고 고개를 어깨에 묻을 수 있게 끌어안았다. 엘로디는 그를 꽉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로디는 애론을 만나고 나서부터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신이 나타나면서 애론도, 아드리안도, 리암마저도 삶이 크게 비틀렸다. 그들 중 좋은 방향으로 갔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었다.
원작대로였다면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했을 애론과 아드리안도, 비록 평민으로 비천하게 살아갔더라도 지금처럼 반역자가 돼서 쫓기지는 않았을 리암 역시 그랬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아드리안은 항상 엘로디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엘로디, 너는 항상 너무 많은 걸 책임지려 해.”
침실 시녀 일만으로도 그렇다. 평범한 영애였다면 치욕을 당했다며 그 자리에서 죽으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황제가 그런 말을 그녀 앞에서 일부러 꺼내게 해서 그 일의 비참함을 미리 알려주려고 했던 것 역시 이해했다.
“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라 애론의 잘못이야.”
“만일, 애론이 그렇게 변한 게 제 잘못이면요.”
“엘로디.”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공포와 혼란을 느꼈다.
“전하, 만일 애론의 운명이 그런 것이 아닌데… 만일 제가 잘못해서… 제가 이상하게 만들어서 애론이 그렇게 된 거라면.”
엘로디는 파멸을 예정받는다는 [눈]이 무서웠다.
자신의 마지막을 바꾸기 위해 한 일이 애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면, 그래서 그의 성격이 비틀리고 자신을 괴롭힌 것이라면…….
그건 누구의 잘못인가.
“엘로디, 네가 모든 걸 할 수는 없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자색의 눈은 기묘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뿐이야.”
아드리안은 조금 말을 고르는 듯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애론의 파멸은 그의 선택이야.”
그는 엘로디의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내렸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
“아드리안.”
그의 입술을 느끼며 엘로디는 눈을 감았다. 이제 이 이야기는 자신의 손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아니, 자신이 그 소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멍청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엘로디에게,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어느새 그 세계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엘로디는 그의 입술이 지나갔던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되뇌었다.
* * *
리암은 온몸이 마력에 묶인 채로 지하 감옥에 있었다.
겨울의 얼음같이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때렸다. 추위 때문인지 생각이 명료하지 못했다.
리암은 아드리안의 옆에서 웃던 엘로디를 떠올렸다.
엘로디에게서 그의 향기가 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아드리안을 죽이려고 했다. 그녀를 욕보이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의 편의에 의해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엘로디가 행복해 보였다.
가끔은 싸우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긴 겨울의 밤을 그와 함께 보내기도 하면서 그녀와 자신이 꿈꾸던 미래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리암은 자신이 그녀와 함께 꿈꾸던 미래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내내 후회했었다.
그때 애론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아니면 처음 애론의 [눈]에 당했을 때 주변 누군가에게 알렸다면, 엘로디에게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말했다면.
리암은 바닥이 없는 늪 속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도와주었을 때의 애론은 지금껏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기분 좋을 때 웃고, 화가 날 때는 소리 지르고, 슬플 때는 우는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오랜 시간 엘로디의 옆에서 보아왔던 그와 너무 다른 모습에 호기심을 갖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엘로디에게 저렇게 잔인하게 굴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호감의 형태일 줄은 자신도 몰랐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했던,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람이 들어왔다.
“엘로디.”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그녀는 쇠창살 너머에 주저앉아 있는 리암을 내려다보았다. 울다 온 것인지 눈가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올수록 진해지는 장미 향기에 리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만이네, 리암.”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리암은 전율을 느꼈다.
“응.”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암은 천천히 엘로디를 제대로 뜯어보았다.
매번 자신과 엘로디 둘만 남을 만한 기회면 귀신같이 나타나는 아드리안 때문에 그녀의 몸이 건강한지 알 수 없었다.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팔이 예전보다 가늘게 느껴졌다.
“몸은 어때?”
리암은 쓸데없는 걸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래.”
엘로디의 대답으로 다시 적막이 흘렀다. 엘로디는 리암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고통스러웠다.
내 가족이 혹시 널 성폭행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더럽다고 했던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았는지 따위를 생각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숨소리뿐이었다.
“엘로디, 미안해.”
그날, 그 결혼식장에서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엘로디는 고개를 숙였다.
“너한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어야…….”
“미안해.”
물기 어린 음성에 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애론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너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어.”
리암과 엘로디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해 왔다. 둘은 친구이자 가족이고 연인이었다.
그런 상대가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데도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너한테 했던 말들도 전부 미안해.”
“엘로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리고 주저앉는 엘로디를 보며 리암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엘로디가 우는 것을 본 것이 몇 년 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구나. 자신이 애론과 잠자리를 갖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저렇게 울었었다.
“울지 마. 울지 마, 엘로디.”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어서 답답했다.
창살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그녀의 곁으로 기어갔다. 엘로디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끌어안겨진 그녀에게서 단 향기가 났다. 리암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괜찮아. 나는 이제 진짜 괜찮아.”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그녀에게서 배신자라고 낙인찍혀 평생을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애론의 결혼식 전날, 어떻게 빠져나온 것인지 애론이 자신의 방 창가에 앉아있었다. 이미 그의 [눈]을 알아낸 자신에게 다시 한번 능력을 쓰려고 한 그는 통하지 않자 당황했다.
그때의 리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었다. 엘로디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끔찍했다.
“나랑 같이 도망가자.”
초조한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리암은 한껏 비웃었다. [눈]조차 통하지 않자 이제 남은 것은 사정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조소를 본 애론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네가 여기 남는다고 엘로디가 널 다시 봐줄 것 같아?”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그럼 이건 어때. 내가 황후가 되면…….”
애론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엘로디를 어떻게 할까.”
리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애론이라면 엘로디에게 어떠한 명목을 붙여서라도 죽일 수도 있었다. 분명 서로를 싫어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애론의 엘로디에 대한 감정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폭발적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그와 함께 갔다.
엘로디를 살리기 위해.
리암의 삶은 엘로디로 인해 새롭게 시작되었었다. 평민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는 외모로 가족들은 자신이 알파이거나 오메가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비싼 억제제 값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귀족들은 평민들 중 미리 싹이 보이는 아이를 사기 위해 그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리암의 가족 역시 그 지역 유지인 남작 가문에 짓밟히기 직전이었다. 아마 엘로디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과 가족들은 남작 가문에 노예로 끌려갔을 것이다.
발현된 리암은 귀족들을 만족시키고 씨를 받기 위한 노리개가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다음 자식이 알파나 오메가가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분류되어 끊임없이 임신을 강요당했을 수도 있다. 여동생의 처지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펼쳐진 어둠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 가는 자신 앞에 나타난 엘로디는 태양이었다. 종종 자신의 눈을 보며 해처럼 빛난다고 웃던 엘로디에게 늘 아니라고 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가 리암의 태양이었다.
그녀에게 구원받고 나서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배우고 싶던 것을 배우고, 해보고 싶던 것, 먹고 싶던 것도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열다섯 살에 자신이 알파로 발현하고 나서 약혼하자는 그녀의 말에 리암은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빛이 나고 있었다.
엘로디를 중심으로 도는 자신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그녀만이 빛이었다.
비참하게 되리라 여겼던 그 인생을 자신의 구원자, 태양, 그리고 사랑이었던 그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완벽한 엔딩이라 생각했다.
결국 애론과의 일로 그 끝은 파국을 맞았으나 리암은 그 순간들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론을 쫓아갔다.
그녀의 곁에서 자신을 볼 때마다 서서히 메말라 가는 엘로디를 보는 것은 죽는 것보다 힘들었다. 어차피 떠날 것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미워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녀의 머릿속에, 심장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았다.
그러나 리암은 어디선가부터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애론과 함께 떠난 서역에서 사람들을 죽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삶을 비틀어 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였다. 어느새 대륙 전체에 점점이 지부를 갖고 있는 신흥 종교의 아지트에 들어가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분노와 절망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죽이는 것은 너무 쉬워서 살인이라기보다는 물건을 망가트리는 것 같았다.
“리암, 미안해.”
자신의 어깨를 적셔오는 그녀의 눈물에 리암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돌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대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줄 수 없어 입술을 가져다댔다. 흠칫 몸이 떨리자 리암은 예전과 변하지 않은 그녀의 반응에 말없이 웃었다.
“너한테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엘로디는 울음을 간신히 참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울지 마.”
리암의 말에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촛불에 그녀의 모습이 가물거리는 것 같아서 리암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저 아래 지하에서 올라오는 손 같은 것에 정신과 육체가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리암은 그렇게 엘로디의 곁을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 * *
그렇게 수개월을 보냈다. 매일매일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지옥 같은 곳에서 어느새 리암은 웃으며 지냈다.
그것은 어둠을 뚫고 올라오는 태양처럼 찾아왔다.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신도의 목을 발로 밟아 부서트리는 순간 리암은 온몸이 물에 푹 젖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도 높은 액체 속에 몸이 담가졌다가 꺼내지고 손끝에서부터 온몸이 단단하게 뭉쳐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사막의 지평선을 타고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그 태양이 온몸으로 파고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사랑의 뜨거움, 배신의 괴로움, 분노의 날카로움 같은 것들이 모여 거대한 폭발 같은 것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빙글 돌아선 세계는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열기는 전신을 장악하고 마침내 새로운 경지에 닿았다.
리암은 [눈]을 떴다.
며칠 후 일이 있다는 애론이 찾아왔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엘로디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래서 리암은 엘로디를 지키기로 했다.
과거 그녀가 자신의 삶을, 가족의 삶을 지켜준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그녀의 삶을, 가족을 지켜주기로 맹세했다.
그는 반드시 애론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 * *
가스파르는 자리에 앉아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서늘한 인상의 남자는 날이 잔뜩 선 표정으로 책상을 손끝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리를 지르며 그만하라고 했을 법했지만 그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아는 가스파르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전하, 그렇게 신경 쓰이시면 가보세요.”
“아니야.”
엘로디가 리암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보내준 뒤로 계속 저 상태다. 아침부터 내내 저기압인 주제에 아닌 척하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모르나 보다.
가스파르는 속으로 세 번만 참으면 살인을 면한다는 바다 건너 어느 나라의 명언을 생각하며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아…….”
그러나 그의 인내심은 또다시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깨끗하게 날아갔다.
“전하, 진짜 그만 좀 하십시오.”
“뭐가.”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엘로디 아가씨가 리암 경이랑 바람이라도 날까 봐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엘로디가 리암 경이랑 만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가스파르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리는 아드리안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 두 분이서 사귀는 사이 아니었습니까?”
“어? 아니… 그…그러니까…….”
가스파르는 입을 벌렸다. 이 멍청한 인간이…….
“아니, 이 멍청한 인간이 진짜!”
가스파르는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문을 열고 서있는 인형을 보고 자신이 한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전하, 지금 하신 말이 사실입니까?”
가스파르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삿대질을 하며 황태자에게 달려드는 패트리샤는 무섭지 않았다. 다만 그 뒤에서 분명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닌 듯한 보나파르트 부인의 모습이 어렸을 때의 그것과 같아 섬뜩할 뿐이었다.
“제대로 말씀 안 하신다면 제가 직접 엘로디 양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잠깐만!”
입을 꾹 닫고 그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던 아드리안은 보나파르트 부인의 초강수에 결국 사실을 실토해 내야만 했다.
잠시 후 아드리안의 절절한 사연을 들은 세 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가스파르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엘로디 님을 지켜줄 자신이 없으시다고요?”
말이 없이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아드리안을 보며 패트리샤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애론 때문이신가요?”
여전히 말이 없는 그를 보며, 보나파르트 부인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후 폐하처럼 되실까 봐 걱정하시는 거군요.”
그녀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황실에 대한 제국민들의 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대로 위대한 능력을 지닌 알파들을 배출해 낸 황실은 제국의 상징이었다.
알파가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된 이후 150여 년이 넘는 통치 기간 동안 황후가 단 한 번도 알파나 오메가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첩이나 코르티잔으로 베타가 들어오는 경우는 있었으나 황후는 반드시 알파나 오메가였다.
“난 엘로디가 내 곁에서 행복해할지 모르겠어. 만일 엘로디가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느끼게 된다면? 그래서 나를 원망하게 된다면?”
현 황후 이자벨의 결혼은 모든 제국민이 환호했던 결혼이었다. 황제의 운명의 반려라고 알려진 오메가 여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비록 아드리안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으나 황제가 황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귀족들을 숙청했는지는 유명한 일이었다.
황후는 실질적인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동시에 온갖 비난을 직면해야만 했다.
만일 베타인 엘로디가 정실이 아닌 후첩으로 들어온다면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엘로디 님이 황태자비가 되었으면 하시나요?”
패트리샤의 말에 아드리안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곁에 묶어둔다면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자신의 어머니가 궁 안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어떻게 시들어갔는지를 보며 자라났다. 엘로디가 그렇게 시들어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입을 손으로 막고 표정을 감추려는 그를 보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고백 한 번 안 하시고 엘로디 님을 내보내실 거예요?”
“그건…….”
패트리샤는 아드리안의 처지를 머리로는 이해했다. 알파와 오메가는 원하는 것을 단념하는 법을 모른다. 그녀의 주변에서, 가끔 들리는 풍문으로 그렇게 쓰러지는 알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의 파멸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던, 혹은 소중히 여기던 것에 대한 파괴적인 욕망 역시 함께 자라났다.
아드리안이 애론을 자신의 비로 맞이하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욕망이 그를 향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 운명이니 파괴니, 그런 거 믿지 않습니다, 전하.”
가스파르는 친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오고 함께 울고 웃었던 그는 누구보다 쉽게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이건 약속하겠습니다. 만일 전하가 정말로 미쳐버리신다면 제가 엘로디 님을 위해 전하를 쓰러트리겠습니다.”
반역이라 할 수도 있는 말을 당당히 하는 그를 보며 아드리안은 웃었다. 그러나 그 말고는 아무도 웃지 못했다.
“난 아직 잘 모르겠어.”
황태자의 상태는 그 자신이 제일 잘 알 것이었다. 아마 그가 엘로디를 놓아주겠다고 결정했던 순간 이 일은 끝이 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매일 고민했다. 엘로디가 곁에 있어도, 곁에 없어도 미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엘로디도 가스파르도, 모두 도와준다고 했으나 신의 저주를 피해가는 일이 쉬울까.
자신이 죽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엘로디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자신이 무서웠다. 세실의 [눈]에 이용당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때의 감정들이 모두 그것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모를 일이었다.
“엘로디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녀를 가끔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드리안에게 엘로디라는 존재는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어도 너무 큰 리스크였다. 패트리샤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내내 듣고 있던 보나파르트 부인은 조용히 일어섰다.
“전하, 밖으로 나오세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드리안을 보며 보나파르트 부인이 웃었다. 가스파르는 순간 오래전 그녀가 자신들을 신나게 두들겨 팼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 * *
가스파르와 패트리샤는 연무장 가장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늘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보나파르트 부인은 간단한 바지 복장을 입고 서있었다.
패트리샤는 가스파르에게 몸을 기대며 그의 귀에 속삭였다.
“보나파르트 부인이 전하를 이길 수 있을까요?”
가스파르는 몸을 경직시키고 살짝 거리를 벌리더니 중얼거렸다.
“부인이 마력이 아주 많은 편은 아닙니다. 운용을 정말 끝내주게 잘하시죠.”
아드리안은 천천히 양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선명한 은색의 마력이 구름처럼 뿌옇게 몰려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보나파르트 부인이 짧은 시동어와 함께 힘차게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부인의 젊은 시절 별명을 아십니까?”
가스파르는 저절로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으로 제 팔을 눌렀다. 저 기술로 얼마나 많이 혼났던가.
패트리샤는 고개를 젓고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옆구리를 찔렀다.
“귀신.”
검붉은 색의 마력을 주먹에 모은 보나파르트 부인이 그대로 아드리안의 배에 꽂아 넣었다. 아드리안은 늘 그랬듯이 얼굴을 공격할 줄 알고 들었던 손을 황급히 내렸지만 느렸다.
한 번 뒤로 밀리자 그 뒤로는 거의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아드리안은 겨우겨우 그녀의 육탄 공격을 막아냈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마력을 두른 양손과 발로 아드리안을 몰아붙였다.
그것은 귀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세상에…….”
패트리샤는 아드리안 정도의 강한 알파가 베타인 사람에게 저 정도로 몰리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 역시 그런 강자인 것을 알고 생각을 고쳤다.
방어만 하던 아드리안을 힘껏 돌려 찬 보나파르트 부인이 바닥에 쓰러져서 콜록콜록거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하, 제가 어렸을 때 가스파르 경과 전하께 항상 뭐라고 했습니까.”
“…….”
“기억 안 나십니까?”
아드리안은 숨을 들이켰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옥에서라도 가져오라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몸에서 하얗게 빛나는 마력을 보고 비웃었다. 어렸을 때 고치라고 한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으니 저 모양이다.
상대가 방심했다고 생각한 아드리안이 일어나는 반동으로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보나파르트 부인은 웃으면서 힘껏 아드리안을 두들겨 패주었다. 이건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있는 엘로디의 몫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 *
엘로디는 쓰러진 리암을 부탁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간수들은 황태자가 잡아온 남자를 함부로 손을 대도 될지 걱정하며 그녀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결국 물을 넣어주고 담요를 덮어주는 것 정도만이 엘로디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엘로디는 리암의 곁에서 그가 혹시 깨어날까 기다리다가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생각이 뒤엉켜서 복잡한 와중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만일 이 일을 몰랐다면 자신은 리암을 향한 증오에 계속해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한숨과 함께 뽀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눈]을 뜬 자는 파멸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세실은, 그리고 애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아드리안에 대해 생각했다.
세실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했을 때의 그는 미친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이나 말을 하고, 엘로디의 몸을 뜯어놓았다.
손을 들어 옷 아래에 있을 그의 자국을 더듬었다. 그 뒤로 아드리안은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내려 애썼다. 애론의 납치 사건 이후로는 완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방황하는 것이 보였다.
엘로디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싫다고 하면 정말로 상처받을 것이다.
가끔은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예전의 그는 원하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잘 이야기해 주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의 궁으로 들어서자 주변 경계를 서고 있던 경비병들의 모습이 소란스러웠다. 엘로디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기 위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가스파르는 아드리안을 업고 와서 침대에 집어 던졌다.
온몸을 두들겨 맞아서 부드러운 침대 위인데도 여기저기가 쑤셨다. 아드리안은 몸을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스파르는 시종을 시켜 물과 약을 들고 와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아드리안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눈동자에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약간 멍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내가 정말 미치게 되면 말이야.”
“그럴 일 없다니까요.”
“계속 들어봐.”
아드리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족들은 말이야. 다들 반쯤 [눈]을 뜨고 있다는 거 알아?”
가스파르는 시종이 가져온 물컵을 건네려다가 몸을 멈추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황제 폐하도, 나도 어느 정도 [눈]을 사용할 수 있어. 근데 이게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드리안은 자신의 [눈]에 대해 가스파르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이 다시 한번 정신을 놓으면 [눈]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반드시 미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광기가 덮칠 첫 번째 대상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가스파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네가 약속한 거야.”
가스파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약을 던져주었다.
“걱정 마십쇼. 제가 봤을 때는 엘로디 님이 전하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뭐야, 나보다 엘로디를 더 믿는 거야?”
장난스럽게 던지는 아드리안의 말에 가스파르는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거의 뛰는 것처럼 걸어오는 엘로디가 보였다.
“전하는 엘로디 님 마음이나 잡고 나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시죠. 지금 까딱 잘못하면 예전 남자한테 가버리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는지 아드리안이 인상을 썼다.
“엘로디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야, 나 좀 일으켜봐.”
“제가 왜요?”
초조한 듯한 그가 짜증을 내자 가스파르는 실실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야!”
“전하!”
계단에 다다라서는 거의 뛰어 올라온 엘로디의 양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엘로디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침대에 반쯤 누워있는 아드리안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가스파르는 그런 둘을 보고는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엘로디의 손이 맞아서 약간 부은 듯한 아드리안의 볼에 닿았다.
“세상에…….”
손을 내려서 급하게 상의를 벗겨내자 여기저기에 멍 자국이 나있었다.
“대체… 뭐 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가스파르가 두고 간 약 뚜껑을 열었다.
“누워보세요.”
“어? 어…….”
엘로디는 추위 때문에 조금 딱딱해진 연고를 손의 온기로 녹여서 그의 몸에 천천히 바르기 시작했다. 배와 가슴 부분을 바르고 그를 앉힌 다음 등에 손을 대었다. 간지러운 듯 웅크리면서 웃는 아드리안에게 엘로디는 조금 화가 났다.
“지금 웃음이 나오세요?”
“어?”
이 황태자는 본인이 튼튼한 것만 믿고 몸을 너무 막 굴린다. 엘로디는 매번 그를 걱정하는 것이 자신의 몫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발랐어요.”
조금 쌀쌀맞은 듯한 말투에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눈치를 보며 옷을 입었다. 엘로디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정리하고 약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가려는 듯 몸을 돌리자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가?”
“리암이 쓰러져서 약을 넣어줄 수 있는지 전하에게 물어보러 온 거예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다시 가보려는 거야?”
“일단 그쪽도 환자인 것 같아서요.”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엘로디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 몸을 빼려고 했다.
“엘로디…….”
“왜 그러시는데요.”
“나 아직 약 안 발라준 데 있는데.”
엘로디는 다시 손을 뻗어 약통을 집으려 했다. 아드리안은 다른 손으로 그 손을 붙잡아 입가로 끌어왔다. 아까 보나파르트 부인에게 맞아서 입가가 찢어져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엘로디는 그것을 보고 그가 말하는 곳을 깨달았다.
“잠깐만 놔주세요. 금방 발라, 읏!”
엘로디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열기에 얕은 신음 소리를 뱉어냈다. 자신보다 조금 낮은 눈높이에서 앉아있는 아드리안의 빤히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천천히 입술 사이에서 붉은 혀가 나와 엘로디의 두 번째 손가락을 감아올렸다.
“전하!”
손을 빼려는 그녀를 보며 그가 손가락을 문 채로 웃어 보였다. 엘로디는 심장이 그대로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따뜻한 덩어리가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손가락 사이의 연한 부분을 훑었다. 다시 손가락을 살짝 물고는 입 안으로 밀어 넣은 그 끝을 혀로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흐으… 전하…….”
엘로디는 한 손은 그의 입 안에 묶이고 다른 손마저 그의 손에 잡힌 채로 애무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눈이 열기로 달아오르자 아드리안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가지 마.”
“아.”
“가지 마, 엘로디.”
몸을 뒤로 물러서려는 엘로디를 붙잡아서 그대로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이마와 볼에 가볍게 키스를 내렸다.
“흐읏, 전하. 하지만…….”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을 리암이 걱정된 엘로디가 그를 밀어냈다. 이유를 깨달은 아드리안이 인상을 쓰더니 엘로디를 풀어주고는 겨우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갔다가 곧 들어왔다.
엘로디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그저 침대 위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드리안이 웃으며 엘로디의 옆에 앉았다.
“사람 보냈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그의 손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엘로디는 무언가 물어보아야 할 것 같은데 차마 물을 수가 없어서 다시 입을 닫았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손끝에 닿아오는 보드랍고 폭신한 감각에 슬쩍 웃어 보였다. 자신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뭐가요.”
엘로디는 전에 그가 해주었던 말을 기억해 내고는 초조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널 불안하게 해서.”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이 그의 온기가 닿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엘로디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마에서 코끝으로, 그리고 입술을 찾아든 아드리안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엘로디는 그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결혼식장에서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어딘지 모르게 텅 빈 듯한 그의 눈동자에 첫눈에 반했었다. 마치 이 세상의 일은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석 같은 무기질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은 채로 있었다. 어쩐지 그 안, 그 너머에서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이번에도 그것을 피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랑해.”
엘로디는 대답을 하려 입을 벌리려다 다시 닫았다. 초조한 듯 조금 상기된 표정의 아드리안의 양 볼에 손을 올려 끌어 내렸다.
부드러운 입술, 따뜻한 숨결, 맞닿아 있는 몸이 처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서 엘로디가 원작에 의한 안배 없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손에 넣은 감정이었다.
엘로디는 그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서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선 나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너머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것이 보였다.
추운 겨울 공기가 창을 때리고 방 안에는 둘의 숨소리만 들렸다.
맨가슴에 닿은 그의 손이 지나칠 정도로 급하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가슴을 누르고 유두를 문지르자 저절로 허리가 들렸다. 엘로디는 무릎 위에 자신을 앉힌 채로 키스를 해오는 그를 받아들이며 그의 상의를 벗겨내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다른 알파가 있다는 사실에 아드리안은 예민해졌다. 엘로디의 목 근처로 입술을 내리고 그 연한 살을 빨아들였다.
“으응! 아드리안 님, 거긴 보이는 곳이잖아요.”
가슴 끝을 문지르며 목과 어깨, 쇄골 근처를 빨아들여 울긋불긋하게 만들어둔 아드리안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웃어 보였다.
“안 돼?”
그 요염한 미소에 엘로디는 결국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기로 하고 다시 그의 얼굴을 끌어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에는 아드리안이 외모를 이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그의 미모에 약하다는 사실을 안 건지 아무렇지 않게 저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조금 뾰로통해져서 엘로디는 그의 목을 세게 물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좋았는지 아드리안이 크게 웃으며 그녀를 들어 올렸다.
이마와 눈가에 키스를 받으며 안아 올려진 채로 돌려 눕혀진 엘로디는 그 간지러운 느낌에 기분이 좋아 그를 꽉 끌어안았다. 언제부터인가 약을 먹지 않아도 그에게서 장미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침대 위에 엘로디를 내려놓은 아드리안이 옷을 벗었다. 엘로디가 자신만 벗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드리안은 섹스를 하기 전에 꼭 옷을 다 벗었다.
처음에는 그녀 앞에서 벗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자신이 벗고 있는 모습을 보는 엘로디의 눈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오히려 즐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양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가슴을 쥐자 엘로디가 몸을 틀었다. 그녀의 가슴 가운데부터 키스를 하며 유두 쪽으로 올라갔다.
평소 엘로디는 자신의 가슴이 꽤 크다고 생각해 왔지만, 아드리안이 지난 몇 달 동안 내내 물고 빨아준 덕인지 조금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으응.”
가볍게 이로 물어주는 것만으로도 약하게 절정에 올라서 애액이 배어 나왔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양다리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자신의 음부가 훤히 드러나자 수치심에 엘로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읏, 이런 자세는 싫어요!”
“그렇지만 매번 사용하는 곳이잖아.”
마치 자신이 사용할 다기를 고르는 것 같은 말투에 엘로디가 얼굴을 붉혔지만 가뿐히 무시한 아드리안이 그녀의 비부에 혀를 가져다댔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대고 천천히 혀로 갈라진 틈을 핥아 내리는 그를 보자 엘로디는 배덕감과 고양감이 함께 일었다. 그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그대로 가버릴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드리안이 이를 세워 그녀의 음핵을 살짝 힘을 주어 물었다.
“아읏!”
가벼운 통증에 엘로디는 애액을 뿜어내며 몸을 떨었다. 무엇 때문인지 오늘따라 짓궂게 구는 아드리안이 원망스러워 노려보자 그가 사르르 웃으며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빨아올렸다. 다시 온몸을 덮쳐오는 쾌감에 시트를 부여잡고 허리를 틀었다.
“아응! 아드리안, 너무! 하읏!”
혀끝으로 음핵을 굴리는 것에 집중하던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에 놀란 엘로디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엘로디는 양다리를 활짝 벌리고 공중에 앉아있는 것처럼 떠있었다. 아드리안의 마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위치한 그가 아직도 빤히 음부를 보고 있었다.
“왜 화가 나셨어요?”
“별로. 화난 거 아닌데.”
정말로 삐친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엘로디가 조심스레 물었다. 차마 리암을 만나고 온 것이 질투가 나 그렇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
길게 그의 이름을 늘어뜨려 부르며 엘로디는 다리를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아드리안의 얼굴이 그녀의 음부에 파묻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를 끌어들인 엘로디의 몸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드리안 님, 빨리요.”
엘로디가 그를 재촉하며 허리를 흔들었다. 공중에 떠있는 것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와 어서 이어지고 싶었다.
곧 그가 손을 뻗어 엘로디의 양 허벅지를 잡아 더 벌렸다. 그의 앞에 활짝 벌려진 비부가 움찔거리며 애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단지 그가 바라만 보는데도 갈 것 같은 기분에 엘로디의 숨이 거칠어졌다.
보드라운 입술이 그녀의 음모를 헤치고 클리토리스를 시작으로 잘게 키스를 하며 밑으로 내려갔다. 질구 근처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는 허벅지 쪽으로 길게 훑어 내리며 이번에는 손을 가져다대었다. 예민해진 부분에 닿은 낯선 감촉에 그녀는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음순 근처의 음모를 매만지던 그의 손가락 끝이 어느새 질구에 닿았다. 그러고는 긴 가운뎃손가락이 순식간에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허벅지에 닿아오는 뜨거운 입술의 감촉과 제 내부를 느긋하게 눌러오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엘로디의 몸이 튕겨져 올랐다.
“흐읏. 아드리안 님, 더어…….”
“으음… 매번 천천히 해달라고 그랬잖아.”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안달이 난 엘로디가 허리를 틀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더니 그녀의 질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이미 애액으로 충분하게 젖어서 어렵지 않게 밀려 들어갔다.
“윽!”
“하아… 엘로디, 좀 더 벌려봐.”
한껏 벌어진 그녀의 허벅지 안쪽 보드라운 살을 살짝 물거나 빨아올려 자국을 남긴 그가 다시 그녀의 비부 쪽으로 입을 옮겼다. 점점 손가락을 움직이는 속도를 천천히 올렸다. 그에 따라 엘로디의 신음 소리 역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 아응……! 아…드리안… 니임……!”
애액이 그녀의 질 내부에 들어가 있는 손가락을 흠뻑 적시고도 넘쳐서 아드리안의 팔을 타고, 엘로디의 둔부 쪽을 타고 길게 늘어져 내려와 침대 위의 시트를 적셨다.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움찔거리며 그녀의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아드리안은 그 감각을 즐기다 언젠가 엘로디가 거의 울 뻔했던 질 중간쯤의 부분을 찾아 더듬었다.
“흐읏… 싫어……. 아드리안 님… 거기 싫… 아앙!!”
“거짓말, 여기 만져주는 거 제일 좋아하잖아.”
그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인지 엘로디가 막으려 했지만 그녀보다 아드리안이 좀 더 빨랐다. 살짝 도톰하게 올라온 질 내벽을 꾸욱, 누르자 엘로디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 아응! 안…안 돼요! 전하!”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잖아.”
저도 모르게 전하라고 부르는 엘로디가 마음에 안 들어 아드리안은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이로 살짝 물었다.
“아아앙!”
눈물과 타액이 흘러내리는 것보다 방금 전 가는 것 때문에 넘쳐흐른 애액이 더 많았다.
아드리안은 그 애액을 손으로 문질러 묻히고는 제 성기에 비볐다. 그러고는 아직도 공중에 떠서 몸을 떨고 있는 엘로디의 몸을 돌렸다. 가슴이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고 질 내부에 고여있던 애액이 갑작스러운 체위 변화 때문에 쏟아져 나왔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성기를 쥐고 그녀의 질구 근처를 문질렀다. 귀두로 음순과 음핵을 가볍게 문지를 때마다 그녀가 몸을 틀며 애액을 뱉어냈다.
“너무 느끼는 거 아니야?”
“하아… 누구 때문인데요……. 으응!”
그녀의 대답에 아드리안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엘로디의 몸을 좀 더 낮춘 뒤 천천히 뒤쪽에서 밀어 넣었다.
손가락만으로는 부족했던 질 내로 그의 물건이 들어왔다. 몇 번이고 몸을 겹쳤는데도 그의 성기의 크기에 도통 익숙해지지 않아 버거웠다.
“흐읏!”
그녀의 하얀 엉덩이를 꽉 쥐고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귀두 끝으로 깊은 안쪽에 닿는 느낌에 아드리안이 몸을 떨었다. 천천히 문질러서 내부 뒷부분을 찔렀다.
“악. 앙, 거기! 아응!”
“으응… 엘로디, 조금만……!”
질 내벽이 움찔거리며 들러붙는 감각에 아드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허리를 꽉 쥐고 내벽 깊은 곳을 성기로 박기 시작했다. 그곳에 귀두가 닿을 때마다 내벽이 성기를 꾸욱 물어댔다.
뜨거운 살이 페니스를 압박했다 떨어질 때마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몸 안에 사정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몸을 숙이고 손을 앞으로 뻗어 엘로디의 모양 좋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양손으로 유두를 잡고 살짝 잡아당기자 엘로디의 비명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몸이 너무 달아올라서 꺽꺽거리면서 가슴을 쥐고 있는 아드리안의 손을 잡았다.
아드리안은 그 손을 부드럽게 치우고는 한 손으로는 오른쪽 가슴의 유두를 잡아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이어져 있는 곳의 조금 위쪽에 위치한 음핵을 잡았다.
“아으으!”
다시 눈앞이 번쩍이고 엘로디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아드리안이 살살 손가락으로 유두와 음핵을 문질러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성기를 잡아먹을 것처럼 엘로디의 질 내가 압박해 왔다. 아직도 느긋하게 움직이는 그의 허릿짓에 안달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왜 그래?”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모습에 엘로디는 몸이 한껏 달아올랐다.
좀 더 그가 박아주었으면 좋겠다. 엉망진창이 되어서 아무 생각조차 못 할 때까지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엘로디는 갑자기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하지만 그를 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드리안 님! 빨리… 더어! 세게에!”
“원하시는 대로.”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허리를 꽉 쥐고는 아드리안이 아까의 위치를 세게 박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앙! 아앙!”
엘로디는 거의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날아가고 자꾸만 눈앞이 어두워졌다. 생리적인 눈물과 공포를 기반으로 한 눈물이 섞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윽! 아드리안 님! 안 돼요! 거기… 싫어엇!”
성기로 거의 몸이 뚫릴 것처럼 질 내를 박아왔다. 쾌감으로 안쪽에서부터 흘러내린 애액이 접합부에서 빠르게 뭉개지면서 하얗게 거품이 일었다. 그럼에도 벌써 몇 번이고 가버린 탓에 애액이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엘로디는 어느새 싫고 무서운 것보다 쾌락이 더 커졌다.
“흣! 엘로디!”
“아아아!”
그의 허릿짓이 더 빨라지더니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바닥으로 짓누르고 몸 안으로 정액을 부어넣었다.
엘로디의 질 벽이 정액을 모두 뽑아낼 것처럼 꽉 눌러서 아드리안은 한참을 내부에 있다가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 꽉 들어차 있던 정액이 애액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아직도 엉덩이가 공중에 들려있어서 엘로디는 제 가랑이 사이로 그것들이 흘러내려 시트를 적시는 것을 보았다.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은 만족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마침내 침대 위에 엉덩이가 닿자 엘로디는 긴장돼 있던 몸을 풀었다. 자신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드리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아드리안 님.”
그런 그를 엘로디가 불렀다. 재빨리 마법을 사용해 시트를 바꿔준 그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것인지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엘로디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드리안의 단단한 손이 잡혔다. 등 뒤로 그의 가슴이 느껴져 몸을 뒤로 살짝 기대었다.
그러고 나서 엘로디는 그 팔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깨어있었는지 움찔거리는 것이 등 너머로 그대로 느껴졌다. 그녀가 아드리안의 팔을 풀고 몸을 돌렸다.
이제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
“아드리안 님.”
“난 엘로디… 네가 필요해.”
엘로디는 그가 뱉어낸 말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으로 널 놓아주지 못할 것 같아.”
예쁜 눈동자가 물기로 반들거렸다. 고백 같은 다짐에 엘로디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날 미워해도, 싫다고 해도 상관없어.”
아드리안이 그녀를 품으로 더 깊이 끌어들여 꽉 안았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전하도 제 것이 되어주세요.”
엘로디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따뜻한 몸, 그의 향기……. 앞으로 그를 완전히 자신만의 사람으로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었다. 엘로디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쳤다고 해도, 비난해도 상관없었다.
아드리안이 몸을 숙여 귓가에 약속의 말을 속삭여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것이었다. 엘로디는 그런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 * *
보나파르트 부인은 황제의 집무실 앞에 서있었다.
며칠이고 자신의 방문을 거절한 그가 마침내 만나주겠다는 전갈을 보내자 황급히 나온 부인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 앞에 서있었다.
시종이 와서 문을 열어주고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커트를 살짝 들어 올리고 약식 인사를 하자 황제가 돌아섰다.
“오랜만이야.”
“폐하께서 안 만나주신 것이지 저는 항상 궁에 있었습니다.”
브느와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쩐 일이지. 그대가 나에게 먼저 만나자는 이야기를 다 하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안과 같은 색의 그것은 좀 더 어둡게 느껴졌다.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황제는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이제 쉰에 가까운 나이였으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보나파르트 부인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보셨기에 지금 같은 일을 방치하시는 것입니까.”
그의 눈동자가 찻물에서 떨어져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 깊고 어두운 색이 기묘하게 느껴져 보나파르트 부인은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웃어 보이며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라는 것을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보나파르트 부인의 얼굴 가까이로 몸을 굽혔다.
“걱정 말게, 결국 끝에서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