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당신을 보고 있는 눈이 있다 (6/15)
  • 5장 당신을 보고 있는 눈이 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엘로디와 패트리샤를 중심으로 시작된 연구는 아드리안이 믿을 만한 사람 몇 명을 붙여주는 것으로 엄청난 속도로 진행됐다.

    엘로디는 이 일을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즐거웠다. 유명한 연금술사 몇에게 서류상으로 그녀의 오류 몇 가지를 짚어주는 문서를 받았을 때는 거의 기절할 뻔했었다.

    “아드리안 님 덕분에 일이 정말 빨리 진행될 것 같아요.”

    그러나 아드리안은 저를 앞에 두고 일에만 열중하는 엘로디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패트리샤가 악당 같은 웃음을 지으며 둘에게 다가왔다.

    “이제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이신가 봐요?”

    “알 것 없잖아.”

    뾰족하게 말을 내뱉은 아드리안을 보고 놀랐는지 엘로디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는 그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자 순식간에 웃어 보이는 아드리안을 보며 패트리샤와 가스파르는 얼굴을 굳혔다.

    ‘팔불출이다!’

    둘은 본능적으로 이 둘의 관계에 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엘로디가 아드리안의 곁으로 뽀르르 달려가서는 그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그의 의견을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보고 가스파르는 감탄했다.

    그가 몰랐던 아드리안의 전혀 다른 모습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그런 아드리안이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저 여자의 모습은 더 놀라웠다.

    어느새 둘이서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웃는 것을 본 가스파르와 패트리샤는 이만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왔다.

    “보기 좋으시네요. 전하 성격, 누가 맞춰줄까 했는데 말이죠.”

    패트리샤는 결 좋은 금발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녀가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랑스러웠던 황태자는 크리스타의 죽음 이후로 급격하게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스스로가 알파라는 사실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혐오는 그가 러트 사이클에 들어가는 순간 더 심해졌었다. 그는 사이클이 올 때가 되면 누구보다도 강한 약을 먹고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들 괜찮을 것이라 여기며 기다려주었지만, 1년쯤 지나 그가 발정기 기간 동안 스스로를 자해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더 심해졌었다.

    그런 그를 도와주기 위해 부른 것이 패트리샤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러트 사이클을 즐기는 패트리샤가 그의 결벽증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황후가 불러온 것이었다.

    처음 아드리안과 친해지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때의 그는 패트리샤와 손이 닿는 것조차 경멸하던 남자였다.

    “아드리안 님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때 묵묵히 황태자 곁에서 그를 도와주던 남자가 가스파르였다. 패트리샤는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힐끗 보았다.

    “알고 있어요. 엘로디 님도 좋은 사람이죠.”

    서로에게 도움이 될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스파르가 받은 엘로디와 패트리샤를 지키라는 업무는 사실상 패트리샤를 호위하라는 말이었다. 적어도 이 대륙에서 황태자와 엘로디가 머물고 있는 장미의 궁으로 쳐들어올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은 말없이 정원을 걸어 나갔다.

    “두 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패트리샤의 물음에 가스파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본인이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옥까지 쫓아가실 분입니다.”

    그의 말에 패트리샤가 웃었다.

    둘은 저 귀여운 커플이 부디 앞으로도 행복하길 기원해 주었다.

    * * *

    “됐어요!”

    패트리샤의 비명 같은 환호에 엘로디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해낸 것을 내려다보았다.

    “하…하하.”

    수년을 노력해 왔던 일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빠르게 완성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무언가 허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엘로디는 멍하니 있었다.

    “전하한테 어서 알려 드려야죠!”

    패트리샤가 멍하게 있는 엘로디를 흔들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디는 쥴리아와 나나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집무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가 이 약을 받고 기뻐해할 모습을 생각하니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드리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꼭 끌어안고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어느새 엘로디는 웃으며 달리고 있었다.

    “엘로디 님?”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녹아내릴 것 같은 그 음성에 엘로디의 얼굴이 그대로 돌아갔다. 굽이치는 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자의 새파란 눈에 경멸이 언뜻 보였다.

    “누구시죠?”

    엘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장미의 궁에서 그녀가 지낸 지 벌써 몇 달째였다.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황태자의 궁에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저 분위기와 눈동자는 분명.

    “처음 뵙습니다, 엘로디 님. 보아르네 백작가의 세실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던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해 보였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에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가 엘로디를 유혹하듯 바라보았다.

    세실 보아르네는 애론이 발현하기 전 가장 먼저 아드리안의 약혼자 목록의 1순위에 있던 여자였다. 엘로디 역시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시간이 되신다면 정원을 함께 걸어도 될까요?”

    엘로디는 그것을 거절하려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거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디.”

    그리고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자신 앞에 등을 보이고 서있는 아드리안을 볼 수 있었다. 엘로디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영애, 내가 분명 제멋대로 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전…하. 그…그것이…….”

    세실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몸의 떨림을 억제하려 애썼으나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황후를 만났을 때의 위압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감각에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마법사로서의 힘만이 아니었다.

    종족의 힘을 등에 업고, 그녀를 덮치는 마력의 양은 일반인이면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때 그의 뒤에 있던 엘로디가 아드리안의 팔을 잡았다. 새파랗게 분노를 불태우던 남자가 그녀의 손이 닿자 순식간에 그 기세를 거둬들였다.

    세실은 그의 놀라운 변화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엘로디를 제 품으로 끌어안고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 돌아섰다.

    “두 번 다시 이곳에 들어오지 않길 바라네, 영애.”

    차가운 말이 비수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세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휙 돌아서 가버리는 그 둘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다 해두었다. 세실은 손목에 걸려있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이 설사 죽은 자를 모욕하는 일일지라도.

    그녀는 팔찌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정직하게 살 것이었으면 6년 전 그런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감자 그 여자가 떠올랐다.

    건방지고 오만했던 그 여자가 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 * *

    “전하! 진정하세요!”

    화가 나서인지 흥분한 듯한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끌고 거칠게 복도를 뛰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엘로디는 당황스러웠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자랑 이야기를 해서 화가 났다고 하기에는 지나쳤다.

    그가 거칠게 방문을 열고 엘로디를 끌어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그 난폭한 행동에 놀란 엘로디는 화가 나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야 해.’

    저런 그의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항상 자신에게 애정을 담아서 바라보던 예쁜 등나무 꽃 색의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압도적인 종족의 우월감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패트리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그녀가 도와준 덕에 아드리안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아마도 앞으로 한두 번 정도는 폭주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었다. 황태자의 정신력은 견고한 편이었지만, 그 역시 인간인지라 언제든 작은 일로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아드리안이 손을 뻗어 엘로디의 양 어깨를 짚었다. 하늘거리는 실내 드레스를 쥐고는 그대로 찢어 그녀에게서 벗겨내 버렸다.

    그대로 자신을 꿰뚫을 것 같은 눈빛이 두려워 엘로디는 발로 시트를 밀어내며 뒤로 움직여야만 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그가 무서웠다.

    그가 잠시 제 상의를 탈의하는 순간 엘로디는 자신의 방과 이어져 있는 문으로 뛰어갔다.

    약이라도 필요했다. 지금 이 상태로 그와 몸을 섞으면 자신은 망가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었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넘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허리를 붙잡았다.

    머릿속에 장미 향이 가득했다. 매번 약을 먹은 상태에서 그의 향을 맡아본 적이 있지만, 먹지 않은 상태에서조차 이렇게 진한 향기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손이 얇은 슬립 위로 엘로디의 몸과 등, 가슴의 형태를 더듬었다. 기본적으로 체온이 높은 그였지만 지나치게 뜨거웠다.

    부드럽게 가슴을 문지르고 천 너머로 유두 끝을 긁어내렸다. 엘로디는 그 자극에 몸을 비틀어야만 했다.

    옷 위로 계속해서 유두를 희롱하던 아드리안은 다른 손으로 엘로디의 다리를 벌렸다. 차가운 공기가 비부에 닿자 그녀는 취조실에 있었을 때를 기억해 냈다.

    “흣!”

    그의 손이 음부를 거칠게 쓸어내리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과 유두, 배와 허리를 더듬어갔다.

    아드리안에게 이곳저곳을 만져져서 예민하게 반응하던 엘로디는 정신을 차리고 아드리안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전하, 제발! 잠시만요. 약만 가져오게 해주세요.”

    그녀의 부탁에 아드리안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지?”

    그가 등에서부터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어 내리자 입고 있던 슬립과 속옷이 그대로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노출된 온몸이 찬 공기에 움츠러들었다.

    엘로디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쥔 그가 그것을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쉬이. 움직이지 마, 엘로디.”

    나른한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가 길게 혀를 내밀어 엘로디의 등을 핥아 내렸다. 어깨에서 날개뼈로, 그리고 오목하게 들어간 등을 타고 내려오는 혀에 엘로디가 몸을 틀었다.

    “으읏.”

    이미 몇 번의 정사로 그의 손을 기억하듯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곧 약을 가져오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천천히 등 쪽을 핥아 내리며 붉은 자국을 잔뜩 남겼다. 그러나 그것에도 만족 못 한 듯 이로 등과 어깨를 물었다.

    “흐읏! 아파요. 앗!”

    등에 잇자국이 이곳저곳 나고 그의 손이 판판한 배 부분을 부드럽게 쓸었다. 분명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다.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를 즐기듯 아드리안의 손과 입이 몸 곳곳을 쓸었다. 그의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성기가 그대로 엉덩이에 문질러지자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비부를 쓰다듬고 음핵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어떤 다정함도 없는 듯한 손길에 엘로디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의 이가 다시 한번 등에 박혔다. 동시에 그가 음핵을 그대로 쥐고 비틀었다.

    “히익!”

    쾌감보다 고통이 더 컸으나 쾌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더 비참했다. 그런 엘로디의 생각을 아는 것처럼 아드리안의 웃음소리가 비틀려 있었다.

    “이런, 아픈 걸 좋아할 줄 몰랐는데.”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아픈 걸 좋아할 리 없다고 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이 다시 한번 음핵을 쥐고 비틀었다.

    아까보다 더 강한 자극에 엘로디가 비명을 질렀다. 아드리안은 그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이 일을 받아들였을 때 각오했던 일이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다정한 황태자의 모습에 안심해서 잊고 있던 제 위치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엘로디는 자신의 양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짐승처럼 엎드린 엘로디의 둔부를 하얀 손이 꽉 쥐고 있었다.

    “흐으… 흣!”

    그녀의 보드라워 보이는 음모를 가르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긴 가운뎃손가락으로 질 중간 부분을 누를 때마다 엘로디의 등이 움찔거리고, 질구가 뻐끔거렸다.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꽉 물었다가 놓는 것을 즐기며 아드리안이 웃었다.

    “야하네, 엘로디.”

    “하읏!”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공포라는 감정이 있어서일까. 엘로디의 몸속은 쉽게 젖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들이 일으키는 마찰이 따가워 엘로디는 몸을 웅크렸다.

    “아파… 아파요, 전하.”

    아드리안은 몸을 숙여 엘로디의 등을 안았다. 엉덩이에 단단한 성기의 크기가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손이 한쪽 유방을 꽉 쥐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고는 쭈욱 잡아당겼다가 놓는 것을 반복했다.

    유두가 따가워서 엘로디는 몸을 틀었으나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몸 안을 들락거렸다. 엄지로는 빳빳하게 발기한 음핵을 문질러주었다.

    흥분보다는 아픔이 더 컸지만, 착실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벗어나는 것을 포기한 듯한 엘로디가 그 거친 손길에 제 몸을 맡긴 채로 눈을 감았다.

    체념한 듯한 그녀가 맘에 안 드는 듯 아드리안이 목 근처를 물어왔다. 그리고 마치 흔적을 남기듯이 짓씹었다.

    “흑!”

    “엘로디, 눈 제대로 떠야지.”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 그런데 자신이 아는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수십 번의 잠자리를 함께해 온 그에 의해 곧 짧은 절정에 다다랐다. 엘로디는 서늘한 바닥에 얼굴을 댄 채로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애액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 안을 꽉 채우던 손가락이 사라지고 버클을 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성기가 드러났다. 그 어느 때보다 공포스러운 모습에 엘로디의 다리가 절로 모였으나 그가 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질구에 닿는 뜨거운 귀두가 느껴졌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볍게 위아래로 훑던 물건이 천천히 몸을 가르며 들어왔다.

    “으응.”

    몸이 함께 밀려 올라가는 것을 아드리안이 막았다.

    “읏! 전하. 그만.”

    “아직 반절밖에 안 들어갔어.”

    작은 악마처럼 웃으며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쥐었다. 엘로디의 항의는 듣지도 않고 그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의 끝까지 밀고 들어간 성기가 자궁 근처를 툭툭, 건드렸다. 그때마다 엘로디의 등이 움찔거렸으나,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저건 아드리안이 아니다.

    서서히 허릿짓의 속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입술을 꽉 물고 그것을 버텼다. 바닥에 닿은 무릎이 아팠다.

    “악! 아아!”

    점점 거칠어지는 그에 의해 고통에 찬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 엘로디. 더 울어봐.”

    갑자기 그가 그녀의 양 손목을 등 뒤로 돌려 잡아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만 의지하는 자세에 엘로디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질벽이 아드리안의 성기를 강하게 짓눌렀다.

    반쯤 일어선 자세로 뒤쪽에서 박혀져서 몸 안은 더 엉망으로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목과 어깨, 날개뼈 근처는 그가 물고 깨문 자국으로 발갛게 변해있었다.

    아드리안이 뒤에서 그녀의 몸을 꽉 쥐고 강하게 쳐올리는 것과 동시에 몸 안에 사정했다. 엘로디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손에 잡혀 몸이 이어져 있는 상태 그대로 뒤집혔다. 여전히 단단한 그의 성기가 질 내를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흐윽!”

    그의 눈동자가 엘로디와 마주쳤다. 흥미로운 동물을 보는 듯한 표정,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눈동자가 엘로디를 꿰뚫었다.

    익히 느껴본 적 있는 그 감각에 그녀의 몸이 굳었다. 육식동물 앞에 전시된 먹이가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차갑게 조소하는 입가가 보이자 엘로디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싫어요……. 싫어요, 전하.”

    그녀의 양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다시 천천히 움직이는 아드리안의 몸에 엘로디가 손을 뻗어 막으려 했다. 그의 양손이 엘로디의 가슴을 짓누르고 유두를 괴롭혔다. 몸을 숙인 그가 가슴 근처와 유륜 근처를 살짝 물을 때마다 놀라서 질 내가 성기를 꽉 압박해 왔다.

    가슴에도 울긋불긋하게 자국을 남기고 얕은 잇자국이 여기저기 남았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아드리안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흐윽! 아아! 그만……! 싫어!”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피스톤질에 엘로디의 울음소리도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아니다.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알파나 오메가는 신의 아이였고, 종종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혹시 이대로 그가 미쳐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이대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릿속에 차올랐다.

    아드리안이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쥐고 한계까지 벌어진 질구에 꽉 찬 그의 성기를 거칠게 움직였다. 귀두가 자궁을 뚫을 것처럼 그녀를 쳐올렸다.

    “싫어! 하지 마! 전하!”

    점점 빨라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손톱을 박아 넣었다. 공포에 이미 질은 바싹 말라있었다.

    “아드리안!”

    엘로디는 울며 그에게 매달렸다. 울면서 저에게 매달려 오는 엘로디의 부름에 그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주 바라본 그의 눈은 공포와 혼란만이 가득했다.

    엘로디는 그를 붙잡았다는 생각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아드리안은 넋이 나간 채로 엘로디의 곁에 앉아있었다.

    세실과 만난 이후로 정확히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엘로디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화를 낸 뒤, 엘로디를 방에 데려다주려 했다는 기억이 다였다.

    그러고 나서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엘로디였다.

    아드리안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끔찍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아닌 척하려 해도 자신은 괴물이었다. 하마터면 엘로디를 영원히 잃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다.

    이 일로 그녀가 자신에게서 벗어나겠다고 마음을 먹고 도망가서 안전해진다면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손을 덜덜 떨며 제 몸을 긁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녀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더 견딜 수 없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이성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보내줘야 한다는 걸 이해했지만,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녀를 내보내느니 차라리 양발을 잘라내어 곁에 두는 방법이라든가, 아이를 갖게 해서 자신의 부인으로 만드는 방법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팔목을 계속해서 긁어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조차 모른 채로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녀는 이미 침실 시녀니까 자신의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경질적으로 손목을 긁었다.

    “전하!”

    엘로디에게 약을 먹이기 위해 방문을 열고 들어온 보나파르트 부인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자신의 양팔이 엉망이 된 것을 알아차린 아드리안이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이미 미쳐있었다.

    그날, 크리스타가 죽었던 날부터 서서히 미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엘로디를 안고 그녀를 갖게 된 순간 완전히 미친 것이다.

    “하…하하…….”

    그것은 절망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로디를 놓아줄 수 없다고 생각한 자신이었다.

    * * *

    “으응.”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엘로디가 힘겹게 눈을 떴다.

    왜 내가 침대에 누워있더라, 따위의 생각을 하던 엘로디는 약의 부작용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아드리안을 떠올리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계세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걱정스러운 표정의 패트리샤와 보나파르트 부인이 있었다.

    “아드리안 님은요?”

    가장 걱정되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하께서는 급한 일이 있어서요. 계속 곁을 지키시다가 방금 나가셨어요.”

    상냥한 패트리샤의 말투에서 거짓이 느껴졌다. 엘로디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패트리샤, 아드리안 님이… 부작용으로…….”

    그때의 일을 기억해 내며 설명하려 하자 그녀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

    “괜찮아요. 들었으니까.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눈을 뜨자마자 서로를 걱정하는 이 사람들을 어떡하면 좋을까.

    패트리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안정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드리안의 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알파는 위험했다.

    그래서 아드리안은 스스로 그녀에게서 멀어지겠다고 말했다. 알파나 오메가의 광증을 아는 패트리샤는 그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와 붙어있기에는 그가 지나치게 위험했다. 엘로디가 만든 새로운 억제제를 먹으며 천천히 그의 사이클이 제대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큼의 시간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사이에 엘로디에게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엘로디 님께 미안하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말을 고르는 패트리샤 옆에서 보나파르트 부인이 말을 꺼냈다.

    “또한 새로운 억제제를 만드신 공을 인정하여 황제 폐하께서 엘로디 님의 침실 시녀 자리를 거둘 것이며, 나바르 가문의 딸이 그간 황태자를 보필한 것을 높이 삼아 나바르가 역시 후작가로 다시 복권시킬 것을, 그리고 앞으로 이 억제제 공익사업을 담당하며 황실에 남은 죄를 속죄하고 봉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

    “엘로디 님은 몸이 좋아지시는 대로 후작저로 돌아가시면 될 겁니다.”

    보나파르트 부인이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건 몇 주 뒤에 발표될 내용이니, 엘로디 님은 평소처럼 행동하시면 됩니다.”

    “네.”

    엘로디는 눈을 감았다.

    그래 잘된 것이다. 아드리안도 자신도,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쉬고 싶어요.”

    “엘로디 님…….”

    패트리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 보나파르트 부인의 재촉에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방을 나갔다.

    그들이 나간 이후로 엘로디는 한참을 아드리안을 기다렸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벽이 지나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하얀 나체의 남자 몸 위로 여자가 천천히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피부와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붉은 눈동자의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가 웃으며 제 가슴을 그의 가슴 위에 비볐다.

    “애론― 우리 꽤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글쎄.”

    “어때, 내 아이를 갖는 건? 우리 둘의 아이라면 대륙 통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데.”

    애론은 얼굴을 구겼다.

    “사브리나, 내 몸 위에서 비켜.”

    애론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밀려난 사브리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옷을 입었다.

    “나중에 생각나면 연락해.”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애론은 후텁지근한 공기에 얼굴을 찡그리고는 테라스에 앉았다. 끝없는 모래사막을 배경으로 하얀 달이 떠있는 모습이 그림 같았지만, 벌써 몇 달째 보는 풍경에 지루해지기까지 했다.

    그때 저 멀리서 사막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얀 새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법이 틀림없었다.

    애론은 손을 뻗어 그 새를 안으로 들였다. 새가 전해온 소식을 들으며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죽거나 죄인이 되어 시궁창에 처박힐 줄 알았던 제 가족들이 생각보다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보다 더 기묘한 소식이 있었다.

    그것을 받아 든 애론은 찾아가야 할 사람을 정확하게 떠올렸다.

    애론은 긴 생각 끝에 자신이 서있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전리품, 자신의 목숨을 쥔 자가 있었다.

    리암은 장검과 총을 든 채로 서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총에 맞은 듯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하얀 옷 여기저기로 피가 물들어 있었다.

    “너 말이야. 사브리나가 허락했다지만 너무 막 나가는 것 아니야?”

    머리카락에 피가 눌어붙어 더 위험해 보였다. 리암의 황금색 눈동자가 애론을 돌아봤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을 텐데.”

    그의 차가운 말투에 애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엘로디가 데려온 그 아이가 당연하다는 듯 알파로 발현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훤칠하게 자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은 돌아볼 만한 남자가 된 그 아이의 세계의 중심은 엘로디였다.

    그래서 그것을 빼앗아보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엘로디의 마음에 들고 싶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가 싫었다.

    “리암.”

    대답 없이 몸을 일으킨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황금색의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제 네 [눈]은 내게 통하지 않아.”

    자신이 큰 은혜를 베풀어주었음에도 무시하고 엘로디를 챙기던 그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인사를 하러 온 거야. 잠깐 일이 있어서 말이야. 몇 달 자리를 비울 예정이거든.”

    “…….”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몸 안쪽이 저릿저릿해졌다. 저 눈을 굴복시켰을 때, 마치 엘로디를 굴복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에게 더 이상 [눈]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어서 애론은 입술을 핥았다.

    요염한 몸짓이었으나 리암은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고 싶음을 알렸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애론은 그 말을 끝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분명 리암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쫓아올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엘로디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애론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그 끝에 그녀는 빼앗기고, 분노와 슬픔, 괴로움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기다리리라.

    * * *

    몸이 안 좋다기보다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기절이라는 패트리샤의 말에 엘로디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미의 궁에만 국한되어 있는 그녀의 활동 범위를 황궁 전체로 넓혀주었다. 그러나 엘로디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누워서 그를 기다리다가 문득 자신이 그에게 받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속의 말이라든가, 증표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몸을 섞는 관계였을 뿐이었다.

    하다못해 그 흔한 손수건 한 장 받은 적도, 건넨 적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에게는 아드리안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더 깊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 엘로디 님.”

    자신과 아드리안의 관계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치료를 해준 패트리샤와 보나파르트 부인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쥴리아와 나나는 엘로디가 황태자에게 차였다고 생각하고 매사를 더욱 조심스러워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면서 가끔은 짜증이 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짜증이 날 때였다.

    “무슨 일이니, 나나?”

    뾰족한 엘로디의 말에 나나가 주저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황후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엘로디 님이 오후 티타임에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엘로디가 고개를 돌려 나나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이 이상한 청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라면 가야지. 알겠다고 전해드리렴.”

    엘로디는 아드리안에 대한 뒤틀린 심사를 핑계로 냉큼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당신 아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고 내버렸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목이 잔뜩 파인 옷을 입고 그 자리에 나가주리라고 마음먹었다.

    “쥴리아, 드레스 좀 준비해 줄래? 목이 깊이 파인 걸로.”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엘로디를 잠깐 바라보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걸로 준비하겠습니다, 엘로디 님.”

    쥴리아는 시킨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사실상 아드리안을 위해서만 기거했기 때문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치장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화장도 안 한 듯 거의 옅게만 했었고, 옷도 얇거나 간단한 드레스 정도만 입고 살았었다. 아마 지난 몇 달간 이 장미의 궁에서 가장 옷을 적게 걸치고 있었던 사람은 단연코 엘로디였을 것이다.

    “좀… 그런가?”

    엘로디는 오프 숄더로 시원하게 목과 어깨 라인을 드러낸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입고 있는 드레스는 아주 잘 어울렸지만 문제는 그녀의 몸 상태였다.

    지난번 정사 때 아드리안이 가혹할 정도로 물고 깨문 자국이 목과 어깨를 따라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비록 아까는 패기롭게 이걸 다 드러내고 가리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입고 나가자니 부끄러워졌다.

    이 정도면 꽤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처음에 잇자국을 보고 마음 약했던 나나는 울기까지 했었다.

    “숄을 가져다 드릴까요?”

    쥴리아의 물음에 엘로디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왕 하기로 한 거라면 모두에게 보여주어 당신들이 떠받드는 황태자가 얼마나 변태 같은 남자인지 다 알게 해주리라.

    그렇게 소문이 나면 누구도 자기 딸을 쉽게 황후 후보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마친 엘로디는 금방 다시 우울해졌다. 결국 아드리안의 평판을 추락시키고자 하는 이유가 그가 다른 여자와 만나지 않기를 바라서였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장미의 궁을 나와 황후가 머물고 있는 국화의 궁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시종들과 관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힐끗거리는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엘로디는 그것을 꾹 참고 황후가 초대한 유리 온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서늘한 외모의 황후가 서있었다. 아드리안은 황후를 많이 닮았다. 특히 햇빛에 반짝이는 빛나는 은발은 그의 것과 똑같이 보였다.

    “엘로디가 인사드립니다.”

    아직 복권이 된 것이 아니기에 엘로디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다.

    “고개를 들어도 돼요.”

    황후가 자신에게 가까이로 오라며 손짓하였다. 그녀의 눈이 잠깐 엘로디의 목과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진 것을 본 엘로디는 조금 떨렸지만 곧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유리 온실 안에는 온갖 국화들이 피어있었다. 다양한 색과 품종의 국화들이 저마다 향과 모양을 자랑하며 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한쪽 벽에 폭포처럼 온갖 색상의 국화들이 쏟아져 내리듯 꽂혀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엘로디는 꽃꽂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엘로디를 보며 황후가 웃으며 차를 권했다.

    “향이 아주 좋은 차랍니다.”

    화사하게 웃자 그녀의 주변으로 꽃이 피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엘로디는 멍하니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시녀가 건네준 찻잔을 받아 올렸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찻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엘로디 양은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가벼운 말투로 황후가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엘로디의 말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찻잔에 차를 채웠다.

    “그렇다면 그들이 신의 아이라고 불리는 것도 알고 있겠군요.”

    “예. 그들의 대부분은 인간을 초월했다 할 정도로 뛰어나니까요.”

    엘로디의 대답에 황후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운명의 반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신이 정해준 상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설… 같은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엘로디 양. 혹시 아드리안과 결혼하게 된다면, 엘로디 양은 애론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엘로디는 말문이 막혔다.

    “엘로디 양은 아드리안의 운명의 반려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메가도 아닙니다. 그러니 각인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황후가 가느다란 손끝으로 가볍게 찻잔을 매만졌다.

    “전 평생을 폐하께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것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난데없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엘로디는 곧 결혼식 날 그녀가 유난히 이 결혼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한평생 황후 폐하만을 사랑하셨습니다.”

    부부 사이의 일은 정확히 모르나 자신이 황제의 사생아라며 나타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면 그는 가정에 충실한 남자였을 것이다.

    “그의 마음이 어떨지 저는 모르지요.”

    그녀는 가볍게 찻잔을 들어 차를 조금 들이켜고 식어버린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금세 내려놓았다.

    “폐하께서는 제가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스러워진 엘로디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저는 제 운명의 반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자벨이 웃었다. 그 모습이 아드리안과 너무 닮아서 엘로디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자벨과 브느와는 그들의 나이 각각 열네 살, 열한 살에 약혼했었다. 아직 책을 읽는 것보다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당시 황태자 브느와는 금발 고수머리에 황실 특유의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던 귀여운 소년이었다.

    열네 살 때 이미 이자벨은 알파로서 발현한 상태였고, 브느와 역시 별문제 없이 알파로 발현할 것이라 모두들 생각했다. 당시 백작 이상 귀족 가문에서 브느와와 결혼할 수 있는 나이 또래의 오메가는 하나도 없었기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직 이자벨보다도 한 뼘은 작았던 꼬마 브느와는 약혼식이 끝나고 이자벨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내 부인이 된다니 영광이야. 내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겠소.”

    나이에 맞지 않는 말투를 구사하며 어른들이 프러포즈할 때나 할 법한 대사를 내뱉는 그를 보며 이자벨은 비웃었었다.

    이자벨이 황태자비로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오겠다는 핑계로 옆 나라 공국으로 유학을 갔다 온 6년 뒤 다시 만난 브느와는 많이 변해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검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총과 검으로 혼자서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가 되어있었다. 이자벨보다 한 뼘은 작았던 키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고, 그녀의 손을 겨우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손은 검을 쥐어 크고 단단하며 두꺼워져 있었다.

    전대 황제에게 혼이 나 도망칠 때면 자신의 몸 뒤에 숨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몸은 이제 이자벨이 양팔을 벌려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게 변해있었다.

    이자벨은 솔직해졌다. 그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강했다. 그가 웃으면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호쾌하고 서글거리는 성격은 제국민들에게 인기 있었다.

    모두들 그런 그의 약혼녀인 이자벨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자벨은 언제나 브느와의 눈이 닿는 자리를 알고 있었다.

    브느와보다 두 살 어린 평범한 남작가의 여식이었다.

    그때의 이자벨은 그것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약혼한 뒤 그가 철이 들 무렵쯤에는 서로를 마주한 적 없던 사이였다.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었다. 브느와는 황태자였고, 고작 남작가의 여식은 후비로도 들어오기 힘들 것이었다.

    그리고 3년 뒤 브느와가 성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이자벨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잊고 있었던 그 남작가 여식의 소문이 들려왔다.

    드물게도 늦게 그녀가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뒤 이자벨은 늘 그녀가 혹시 브느와의 운명의 상대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 둘 사이를 방해한 것은 아닌지를 걱정하는 것은 비단 그녀뿐이 아니었다.

    황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많은 수가 브느와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떠났지만, 이자벨은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황제가 된 브느와는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한 남자였다.

    서로의 사이클이 맞을 수 있도록 항상 조정을 해두었었고, 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며 위해 주었다. 아드리안을 낳고 나서 몇 달을 드러누워 있던 황후를 매일같이 찾아와 점심과 저녁을 함께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언젠가 그의 운명의 반려가 나타나 그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는 공포가 늘 뒤에 있었다.

    그 불안감에 좀먹혀 가기 시작한 이자벨은 간절하게 자신의 반려가 나타나거나 그의 반려가 나타나기를 원했다.

    황족이 이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의 반려가 나타났을 때뿐이었다.

    이자벨은 항상 서로의 반려가 나타나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왔다.

    이자벨이 그럴수록 브느와는 더 정성을 들였고 이자벨은 다시 거기서 고통을 받는, 순환되는 삶을 지속해 왔다.

    그렇게 그의 사랑을 받아가며 황궁에서 이자벨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는 엘로디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아드리안이 운명의 반려를 맞이하는 것으로써 자신과 황제가 찾지 못한 것을 보상받으려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로디는 자신이 아드리안과 함께했을 때 자신이 애론이라는 상대를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자신은 이미 애론과 리암의 일로 무너진 적이 있었다. 만일 한 번 더 그런 일을 겪는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아드리안이라면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엘로디는 말없이 차를 마셨고 황후 역시 그런 그녀를 가만히 두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엘로디는 황후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알파와 오메가의 운명이 얼마나 강하기에 황후는 찾아오지도 않은 반려에 공포를 느끼는 걸까.

    그 공포가 어느 정도였기에 차라리 자신이나 황제의 운명의 대상이 하루빨리 나타나길 바라기까지 할까.

    가을을 담은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날렸다.

    엘로디는 국화의 궁의 정원을 지나며 아드리안을 떠올렸다.

    불안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지금 당장 그를 보고 싶었다.

    * * *

    황후의 이야기를 듣고 장미의 궁으로 돌아온 엘로디는 멍하니 앉아서 다시 원작을 떠올렸다. 이제는 너무도 달라져 버렸지만, 원작 내에 다른 설정이 있었는지를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자신은 그 이전에 아주 잠깐 갈등을 고조시키고 사라질 역할이었기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원작에서는 비정상적으로 줄어든 오메가의 수가 종말이 왔다는 증거라며 사람들을 선동하는 신흥 종교의 등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흥 종교 교주가 새로운 오메가를 만들겠다며 애론을 납치하고, 그것을 아드리안이 구해주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종장을 맞이했다.

    여름에 결혼식이 있었고 엘로디가 궁에 들어온 지 몇 달이 지났으니 흐름상 얼추 신흥 종교 교주가 나타나서 애론을 납치할 때쯤이 되어야 했다.

    “아니, 애론이 얼마나 센데 납치를 했던 거지?”

    소설의 설정 오류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걸 구해주는 게 아드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분이 나빠졌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의 정보를 들어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날 오후에는 황후의 이야기, 운명의 반려, 신흥 종교 따위를 고민하다가 곧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보나파르트 부인의 씻고 누우라는 구박에 쥴리아에게 들려 나가다시피 끌려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엘로디의 상처가 속상한지 나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약을 발라주었다.

    잠을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는 막상 잠이 오지 않았다. 엘로디는 이대로 궁에서 나가게 된다면 다시 아드리안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엘로디가 봐온 그라면 마주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를 끌어안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달라 하고 싶었다. 엘로디는 처음으로 자신의 평범함을 원망했다.

    베타가 아니었다면 그와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을까. 아니,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지금 당장 그에게 찾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드리안과 만난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장미 향기, 단단하고 보드라운 몸, 조금 낮은 상냥한 목소리 모두 그리웠다.

    누워있는 침대가 지나치게 넓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드리안과 함께 잤기 때문일까. 엘로디는 손으로 포슬거리는 시트를 매만졌다.

    보고 싶었다.

    아드리안은 어떨지 모르지만, 엘로디는 이미 그가 좋았다.

    아니. 이미 그날, 결혼식장에서 무관심한 표정으로 상황을 관망하던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정원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는 손길에 혼자 남겨진 곳에서 유일한 구원자를 얻은 기분이었다. 애론과 리암이 완전히 일그러트리고 망가트린 자신의 삶을 다시 복원해 준 사람은 아드리안이었다.

    손끝으로 그가 너무 세게 물어 약한 흉터가 남을 거라고 했던 쇄골 근처의 상처를 더듬었다. 아직 약이 다 흡수되지 않아서 끈적하게 손가락에 얽혔다.

    모두가 그녀의 상처 자국을 걱정해 주었으나 엘로디는 그 상처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아드리안을 기억할 만한 증표를 몸에 남긴 것 같았다. 언젠가 아드리안이 자신을 잊더라도, 엘로디는 이것으로 그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엘로디는 멍하니 누워서 몇 번이고 옆자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잠이 든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지친 듯한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손을 대었다.

    조금 서늘한 감각이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었다. 그대로 손을 넘겨 머리를 쓸어주었다. 잠결에 그녀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틀자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곧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침대 가장자리에 엘로디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히 앉았다.

    그의 눈에 이제는 푸른 기가 많이 빠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미안…….”

    들릴 리 없었지만, 아드리안은 작게 속삭였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녀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패트리샤에게 그녀와 멀어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밤이면 자연히 그녀가 있는 방 쪽을 서성이게 됐다.

    아드리안은 그래서 지금은 비어있는 수선화의 궁에 머물렀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루라도 엘로디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괴로웠다.

    그리고 그녀가 잠들었을 시간에 지금처럼 몰래 와서 얼굴만 보다가 나갔다.

    그렇게 얼마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아드리안은 시간을 보고 일어나려 했다. 어서 가지 않으면 그녀가 눈치챌 수도 있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비누 향기가 기분이 좋았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의 옷을 쥐는 작은 힘에 몸이 멈추었다.

    “가지 마세요.”

    아직 잠에 취한 것인지 반쯤 눈을 뜬 엘로디의 잠긴 목소리에 아드리안은 황홀함을 느꼈다.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전하, 가지 마세요. 제발.”

    그녀의 눈이 눈물로 반들거렸다. 이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엘로디.”

    어느새 목이 메어왔다. 저 눈이 자신을 바라봐 주길 바랐다. 저 작은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래서,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영원히 속박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 된다.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가늘게 떠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엘로디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다.

    “아드리안―”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그녀의 입술 위로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눈물의 맛에 엘로디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물은 따뜻하고 달콤했으며, 쓰고 외로웠다. 눈을 뜨지 않고 닿아있는 입술만의 감촉으로 서로를 확인하며 오랫동안 서로를 붙잡았다.

    그러다 순식간에 사라진 온기에 엘로디가 눈을 떴다.

    참고 있던 눈물이 흘렀다.

    엘로디는 자신의 첫사랑이 실패했음을, 그리고 이제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를 갖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 * *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엘로디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이 부어서 누가 봐도 황태자에게 실연당했음이 명백해 보였다.

    쥴리아와 나나는 아침에 엘로디를 보고 아무 말도 못 했고, 보나파르트 부인 역시 입을 다문 채로 그녀의 시중을 도왔다.

    낮에 찾아온 패트리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며 재빨리 자리를 피해버렸다.

    민망해진 엘로디는 산책을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사람들이 없을 만한 곳으로 숨기로 했다.

    엘로디가 어렸을 적 크리스타가 궁에서 숨고 싶으면 동백의 궁에 있는 여름 정원에 숨으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겨울 꽃 이름이 붙은 궁궐에 여름 정원이라니. 그 조악한 네이밍 센스에 엘로디는 비웃으며 그곳을 찾았다.

    꽤나 넓은 공간에 만들어진 여름 정원에는 온갖 여름 꽃들이 활짝 피워져 있었다. 열대 우림에서 볼 법한 거대한 나무들과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열대 지방의 꽃들만 보면 동남아나 하와이 같은 곳에 놀러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겨울 꽃 이름이 붙은 궁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는지 바닥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고, 나무나 꽃들 위로도 하얀 눈이 덮여있었다.

    그 기묘한 모습에 엘로디는 엘니뇨나 라니냐 현상으로 동남아 쪽에 눈이 내린 종말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 정원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음에도 사람들이 없었다.

    엘로디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크리스타가 말해주었던, 중앙에 있는 거대한 바오바브나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나무 밑에 뜻밖의 인물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에 드레스 자락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분명 세실 보아르네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세실이 몸을 돌려서 엘로디와 마주 보았다.

    지난번 그녀와 만난 이후로 아드리안이 폭주한 것을 생각해 낸 엘로디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가벼운 묵례와 함께 자리를 피하려 했다.

    “잠시만요.”

    상냥한 목소리가 돌아서려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엘로디는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를 눈앞에 두고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자신이 궁을 떠나면 그의 곁에 설 확률이 가장 높은 여자였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격렬한 질투심을 억누르며 엘로디는 입을 열었다. 아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사고 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안녕하세요, 보아르네 영애. 다시 뵙네요.”

    하필 여름 정원에서 만나서 주변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엘로디는 이 자리를 어떻게 빨리 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엘로디 님,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어쩐지 간절해 보여서 엘로디는 결국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저번부터 어떻게든 자신과 이야기해 보려 하는 그녀가 해줄 말이 궁금해졌다.

    “크리스타 영애랑 아는 사이시죠?”

    엘로디는 뜻밖의 이름이 그녀에게서 나오자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크리스타의 인기에 대해서 잠깐 고민했다.

    그녀가 관심을 갖자 세실은 만족한 듯 웃었다.

    “저 역시 그분의 친구였답니다.”

    그녀가 들어 올린 손에서 익숙한 팔찌가 눈에 띄었다. 얇은 금으로 된 뱅글 위에 색색의 보석을 작게 점점이 박아 넣은 디자인은 크리스타가 친해진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다며 엘로디에게 보여준 그것이었다.

    “어…….”

    몇 년 만에 그녀와 관련된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크리스타가 활달하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 취미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엘로디의 친구 겸 교육자 역할도 하고 궁에서 가끔 봉사 활동이랍시고 사서를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역시 곧 돌아가야 하니까 정문 쪽으로 나가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세실이 사람 많은 쪽으로 이동하면서 얘기하자는 말에 엘로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인 곳보다는 여럿이 함께 있는 곳이 훨씬 마음이 놓였다.

    엘로디는 세실이 하는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여름 정원을 빠져나갔다.

    ‘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하자고 부른 거야.’

    어이없을 정도로 성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세실을 보며 엘로디는 생각했다. 세실은 지금 얼마나 여름 정원이 형편없는지, 그 정원을 만든 전대 황제가 미친놈이라는 이야기 등등을 하며 황궁의 정문까지 함께 걸었다.

    “아, 전 여기까지만 올 수 있어서요. 오늘 즐거웠답니다, 보아르네 영애.”

    엘로디는 정문 근처에 서서 그녀를 배웅했다. 세실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엘로디 님.”

    “……?”

    “엘로디 님은 바깥까지 나가셔야지요.”

    그녀의 맑은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엘로디는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자연스럽게 황궁 밖으로 걸어 나가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세실을 넘어 앞에 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그런 엘로디를 막으려다가 갑자기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으로 나가면 자신은 황명을 어기는 것이었다.

    엘로디는 몸을 멈추기 위해서 애를 썼다.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문을 지키던 자들의 손이 뻣뻣하게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황궁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이 기묘한 광경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 돼!’

    엘로디는 문밖으로 몸이 나가는 순간 눈앞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다.

    * * *

    “전하.”

    가스파르는 황제의 앞에 묵묵히 앉아 보고받은 서류를 넘기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는 그의 모습을 보며 황제도, 가스파르도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디를 궁에서 내보내겠다고 이야기한 이후 그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네 생각은 어떠냐.”

    “그러니까…….”

    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이 리암의 가족 실종 사건을 더 조사해 보라고 명한 뒤, 알파나 오메가의 가족 단위의 실종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발현한 이들이 집을 떠나고 나면 남아있는 가족들을 특별히 관리하지 않는 데다가 일가족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생각 끝에 나온 이름을 결국 내뱉어야 했다.

    “리암 다를랑과 애론 나바르를 잡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실종된 가족을 찾았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리암이었고, 만일 애론이 그를 도와주었다면 둘 모두를 찾는 것이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몇 년 전부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다양한 시기를 두고 실종됐던 사건은 작년 겨울을 기점으로 끊겼다. 내부의 문제로 납치 조직이 붕괴되었거나 혹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끝이 났을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 어느 것보다 리암이 다시 엘로디와 만나는 것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붕대를 감아둔 손목 부분을 신경질적으로 긁는 것을 가스파르가 옆에서 붙잡았다.

    그것을 본 황제는 결국 둘 보고 나가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가을이 무르익으며 점점 해가 짧아지고 있었다. 멍하니 앉은 황제는 그들이 조사한 보고서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그 종이를 가볍게 쓸며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은 가스파르를 보내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강력하게 자신을 감시해야 한다고 우기자 금방 포기하고는 그와 함께 수선화의 궁으로 향했다.

    “집을 두시고 다른 곳에서 주무시다니요.”

    “…….”

    “전하,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셨습니까.”

    가스파르가 살살 긁어대는 것을 참으며 아드리안은 입을 내밀고 걸었다.

    “넌 몰라.”

    “예. 맞습니다. 전 모릅니다. 그런데 전하, 이대로 엘로디 님이 출궁하고 다른 분과 결혼한다고 하시면 그것을 그대로 지켜볼 자신은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아드리안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자리에 섰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나빠져서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열망에 부글거렸다.

    “적당히 해.”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만할 법했지만 가스파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포기하신다면 저한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죠.”

    순간 아드리안의 옆에 있던 나무가 그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나버렸다. 그를 놀리려는 마음으로 던진 농담이었는데 막상 아드리안의 반응을 보아하니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서 가스파르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비틀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엘로디 님 요즘 인기가 좋던데요.”

    질투에 눈이 먼 남자가 마력을 서서히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인지 그의 오른손에 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스파르는 여기서 멈춰야 할지, 아니면 그를 더 몰아붙여야 할지 고민했다.

    “전하! 가스파르 경!”

    멀리서 하얗게 질린 패트리샤가 달려오고 있었다. 팽팽하게 긴장의 끈을 잡고 있던 둘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일 났습니다. 엘로디 님이! 아니, 애론 경이 나타나서!”

    헉헉거리며 말을 하는 그녀의 말 속에 엘로디, 애론, 납치라는 이야기를 듣자 아드리안은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그를 옆에서 가스파르가 잡았다.

    “전하, 일단 목격자들을 만나시죠.”

    그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이 가스파르와 패트리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들 어디에 모여있지?”

    “동백의 궁, 사파이어 룸에 모아두었습니다.”

    패트리샤의 말을 들은 아드리안은 마법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동한 곳에는 그 자리에 있다고 보고받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런 그들을 죽 둘러본 아드리안은 불안한 눈빛의 세실과 마주했다. 그는 세실의 깊게 가라앉은 파란색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보아르네 영애만 남고 모두 나가.”

    웅성이며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세실은 눈을 감았다.

    “전하.”

    가스파르가 다가와서 그에게 경위를 물으려 했지만 그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는 사람들을 밖으로 물렸다.

    “나머지 사람들의 사건 경위는 가스파르 네가 듣도록 해.”

    “예.”

    그는 대답을 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큰 룸 안에 아드리안과 세실, 단둘이 서있었다.

    “전하,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거짓말을 하는군.”

    세실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아 공손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엘로디 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죄는 아니지요.”

    “그래, 맞아.”

    아드리안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변으로 한기가 피어올랐다.

    세실은 한겨울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팔을 쓸었다.

    “하지만 황족인 나에게 [눈]을 쓴 건 충분한 죄가 되지.”

    “……!”

    “내가 끝까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세실은 재빠르게 눈을 굴려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타고 하얀 얼음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한기를 두른 채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에 세실은 계속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눈]을 사용한 건 다 나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압도적인 마력과 힘의 차이에 세실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올려다본 그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실은 혹시 그 역시 개안을 한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실의 의심을 알아차린 듯 아드리안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황족 정도 되면 개안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눈]을 사용할 수 있어.”

    “말…도 안―!”

    “그래. 말도 안 되겠지.”

    “그럼, 크리스타의 일을 여태껏 모르는 척하셨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면서!”

    세실은 아드리안을 비웃었다. 그의 사랑은 고작 그 정도였으면서 여태까지 혼자 불행을 짊어진 사람처럼!

    “아니지. 혼자 불행을 짊어진 것처럼 행동한 건 그대가 아닌가?”

    “제 머릿속을 멋대로 보지 마세요!”

    “그게 마음대로 되었다면 여태껏 네가 크리스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겠나?”

    턱에 닿아있는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한기가 세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압도적인 생물 앞에서의 공포로 인해 흐르는 눈물조차 얼어서 바닥으로 떨어져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내가 말했지. 두 번 다시 용서는 없을 거라고.”

    “전하!”

    어느새 사파이어 룸의 중앙에서 시작된 얼음 결정이 바닥에서부터 벽 전체를 덮고 천장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을 돌리지 못한 채로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마치 머릿속과 속마음을 다 헤집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곧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표정을 굳히더니 그녀를 놓았다.

    “크리스타를 나에게 보낸 이유가 있었나?”

    세실은 그의 말에 가늘게 손을 떨며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만졌다.

    “그래요. 그녀가 절 모욕했으니까, 크리스타의 말대로라면 제가 크리스타의 약혼자를 그렇게 유혹한 것이니까요.”

    아드리안은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세실은 강한 알파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눈]을 뜰 정도였다면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거지?”

    “제 머릿속을 멋대로 헤집어 보셨으니 아실 것 아닙니까. 그때의 저는 이성적인 판단도,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유일하게 믿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한기로 하얗게 김이 나오는 방 안에서 세실은 처연하게 웃어 보였다.

    “저는 크리스타의 약혼자에게 당한 날 이후로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습관처럼 손목의 팔찌를 매만졌다.

    “그날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그녀와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면, 크리스타를 만나지 않았다면!”

    눈물이 분노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붉어진 볼을 타고 내려오면서 얼음 결정이 되어갔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보다가 천천히 힘을 거둬들였다.

    “그게 그녀를 죽인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런 것쯤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긴장이 풀린 세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한 번 터진 눈물과 감정은 멈추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파니 내가 말하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닙니다. 그녀는 제 가장 소중한 것이…….”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세실은 그의 눈빛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아드리안은 타인의 생각을 볼 수 있다. 그녀가 거짓말이라고 우겨도 그에게 보이는 것이 절대적 진실일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네 손으로 없애버린 네 소중한 것을 그리워하며 살아.”

    세실은 주저앉은 그대로 굳은 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동안 부인해 왔던 사실을 타인의 입으로 듣고 나서야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을 알았다.

    세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사랑도, 우정도 아니었던 크리스타와의 기억들이 뭉개진 뒤 그 찌꺼기를 끌어안은 세실 보아르네의 부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실이 잃었던 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었건 크리스타와의 인연이었건,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세실은 어느새 들어와 자신을 구속하는 기사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기사들에게 붙잡힌 세실을 보며 아드리안은 모든 마력을 거둬들였다. 당장 엘로디를 찾는 게 급했다. 세실이 조종하는 [눈]을 이용해서 엘로디를 황궁 문 앞까지 내보낸 것은 확실했으나 그녀를 납치한 것은 애론이 맞았다.

    아드리안은 억지로 끌어 쓴 능력 때문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밖에서는 딱딱한 표정의 패트리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엘로디 님은 애론 경이 데려간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피곤한 얼굴의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가스파르를 손짓으로 불렀다.

    “세실 보아르네를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로 그녀의 방에 구금시켜라.”

    “예.”

    “절대 멋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마라. 죽으려 하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살려내.”

    가스파르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턱으로 방 안을 가리키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세실의 양팔을 들어 올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넋이 나간 것처럼 그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계속해서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미친 것처럼 보였다.

    패트리샤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당장 애론을 찾는다. 황궁 내에 있는 모든 마법사를 불러서 그의 마력을 추적해. 나 역시 함께하겠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엘로디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정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황제와 마주쳤다.

    브느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도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계탑을 가리켰다.

    “그녀는 저기에 있다. 가서 찾아와라.”

    * * *

    엘로디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 두 눈을 깜빡였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처럼 붉게 물든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신없는 상황에 멀미가 난 것처럼 어지러워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자 적어도 자신이 궁 안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 확실했다. 아마도 높은 건물 옥상인 것인지 주변에 다른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탁 트인 시야와 하늘만이 눈에 보였다.

    분명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황궁 정문 앞에서 그녀를 배웅하려 했는데 세실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엘로디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 주변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 제 앞에서 등을 돌린 채로 어느새 어깨너머까지 길어진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가 난간 위에 서있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만난다면 죽여버리겠다고 수십 번 다짐했던 자신의 오라비였다.

    “눈 떴어?”

    엘로디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인지 남자가 돌아보며 아름다운 얼굴로 웃었다.

    “애론.”

    엘로디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주저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는 것은 질색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검은 두 눈에서 끝을 모를 심연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괴물처럼 느껴져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왔던 남자 같지가 않아서 엘로디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숨기기 위해 꽉 쥐었다.

    “오랜만에 왔더니.”

    난간 위에서 살짝 뛰어 가뿐하게 자신 앞으로 내려온 그가 손으로 엘로디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에 꽂아주었다.

    “내 여동생이 창녀처럼 다른 남자 페로몬을 묻히고 다닐 줄이야.”

    애론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엘로디의 목 근처 흉터를 살짝 쓸었다.

    “리암이 보면 아주 질투에 미쳐서 둘 다 죽여버릴지도 모르겠어.”

    씨익 웃어 보이는 그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엘로디는 이번에야말로 그가 자신을 죽일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포가 단단하게 뭉쳐져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무슨 소리야. 리암은 네가 좋다고 도망갔잖아.”

    겨우 목을 매만지는 그의 손을 쳐내고는 엘로디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말에 애론은 활짝 웃으며 몸을 빙글 돌려 등을 보였다. 모든 장면이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엘로디는 침을 삼켰다.

    “그래. 맞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서인가, 그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로디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왜 돌아온 거야.”

    “그래서, 나의 반려와 한 섹스는 어땠어?”

    아드리안을 반려라고 부르는 그의 음성에 엘로디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자신의 반려로 여겼다면 소중히 여겨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장 행복하고 화려했던 자리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챙겨주는 것 같은 호칭이 거슬렸다.

    “왜? 이제 와서 아쉬워?”

    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서 시간을 끌려고 했던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서 없어졌다.

    “글쎄…….”

    애론은 말을 빙빙 돌렸다. 마치 아름다운 인형처럼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춤을 추듯 놀고 있었다.

    엘로디는 알아차렸다. 그는 미쳤다.

    “좋았어? 그 남자 밑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더 박아달라고 울었어? 아니면 싫다고 울면서 억지로 당했어?”

    “네가 알 필요 없잖아. 언제부터 남의 밤 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그래.”

    엘로디는 그의 뒤로 보이는 해의 위치를 보면서 자신이 정신을 잃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해 보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드리안이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릴까.

    아니, 그가 자신을 찾아주기는 할까.

    이곳에는 자신 혼자뿐이고, 적어도 대륙 내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인 애론을 이길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럼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어?”

    애론은 엘로디가 어떨 때 가장 화가 나고 비참함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엘로디를 부족한 2등 시민 정도로 취급하고, 알파에게 붙어서 그들의 우수함을 착취하는 기생충처럼 취급해 왔다.

    그의 뚜렷한 악의에 엘로디는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감정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비난하고 끌어내리고 싶은 감정과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엘로디.”

    애론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은 오랜만이었다. 분명 난간에 서있었는데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그 예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붉은색 머리가 기울어져 가는 태양 때문에 불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화려함이 수려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렸다.

    깊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호기심과 즐거움에 반짝였다.

    엘로디는 가깝게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며 넋이 나갔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몇 년 만이었다.

    만일 매일같이 아드리안 같은 미인이 옆에 없었다면 그대로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동자 너머로 심연이 보였다.

    “넌 정말 나에 대한 호감이 없나 보네.”

    애론은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심결에 항상 그가 해왔던 폭력들 때문에 몸이 저절로 굳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형의 기운에 엘로디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이…이거 놔!”

    “내가 왜?”

    그는 길게 뻗은 손을 우아하게 흔들어 엘로디를 난간 밖에 걸어두었다. 긴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껴 마치 깃발처럼 보였다.

    내려다본 도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엘로디는 자신이 시계탑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것을 알았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웃기지 마.”

    “넌 말이야.”

    그녀를 들어 올리고 있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내가 손짓 한 번만 하면 목이 꺾여서 죽을 수도 있는데 항상 내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 내려다보려고 하고.”

    “너도 어렸을 때부터 망나니였지. 네가 말하면 모두들 다 들어줄 것처럼 굴고, 내가 무언가를 갖는 것을 싫어했잖아.”

    엘로디는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 올려 평온을 가장하며 웃어 보였다.

    “맞아.”

    억울했다.

    대체 매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것인가.

    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리암과 바람이 난 것은 서로의 감정적인 문제일 수도, 아니면 자신이 싫어서일 수도 있었다.

    엘로디는 그것 또한 참아냈다. 아니, 그들이 벌인 일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대신해서 벌을 받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구제 불능이었지.”

    애론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엘로디의 말에 그는 빙긋 웃었다.

    “글쎄. 넌 말이야.”

    애론은 천천히 몸을 띄우더니 엘로디의 앞으로 날아왔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엘로디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 위로 훑어 내려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엘로디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애론은 손을 들어 올려 머리카락을 쓸더니 그대로 머리채를 잡아서 뒤로 잡아당겼다.

    “읏!”

    강한 힘으로 마주한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넌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날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 같아?”

    “무슨 개소리야!”

    “너,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는 일들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다 비웃고 있었잖아.”

    “……!”

    “뭐든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맞장구쳐 주는 네가 우스워서 말이야.”

    “아니야! 그건…….”

    살고 싶어서였다.

    그에게 잘 보여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엘로디는 애론이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려고 했거든.”

    엘로디는 그녀의 앞에 있는 애론이 자신이 알고 있는 주인공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남자는 저렇게 비틀려 있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주 날 가지고 놀려고 하더라.”

    “꺄아악!”

    갑작스럽게 사라진 힘에 기묘한 부유감과 함께 엘로디의 몸이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곧 애론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들어 올렸다. 몸에서 힘이 빠져 공중에 떠있는데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얼굴은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지금 이 상황에 비참함과 분노가 함께 느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건가.

    “웃기지 마!”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기만했다고? 아니, 그게 아니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게 내 탓이라고? 거짓말하지 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엘로디는 그가 이대로 자신을 죽이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넌 어렸을 때부터 내가 싫었잖아. 내가 갖고 싶었던 것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전부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던 개새끼였으면서!”

    애론은 그녀의 말에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너보다 잘하는 게 있는 것도 싫어하고, 누군가가 너보다 날 더 좋아하는 것도, 너에게 하지 않는 칭찬을 나한테 하는 것도 전부 다 싫어했잖아. 아마 내가 숨만 쉬어도 싫어했을 거잖아.”

    엘로디는 숨을 들이켰다.

    “왜 네가 날 싫어하는 게 내 탓이라는 거야! 네 성격이 꼬인 거야! 네가 못된 걸 내 탓으로 하지 마!”

    비명을 지르듯이 악을 썼다. 넓은 창공으로 목소리가 흩어졌다.

    애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로디의 몸을 훑었다. 종족이 다른 자에게 사냥당하는 기분에 엘로디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 맞아. 이런 건 그냥 쓸데없는 핑계일 뿐이지.”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말을 고르던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엘로디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네가 싫어. 그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의 휘파람 같은 목소리와 함께 엘로디의 몸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감각에 엘로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우습게도 아드리안과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제대로 해볼걸, 아니 마지막으로 안아달라고 할 것을.

    그날 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책임지라고 울면서 매달릴 걸 후회했다. 다정한 그라면 자신이 울면서 매달리면 절대 내치지 못했을 것이다.

    공중에서의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엘로디는 바닥에 박살 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시신을 수습할 아드리안을 걱정했다.

    살짝 떠진 두 눈에 바닥이 바로 앞인 것처럼 가깝게 비쳤다.

    엘로디는 다시 눈을 꽉 감았다.

    딱딱한 바닥의 감촉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몸이 느껴졌다. 익숙한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엘로디는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목이 잠겨서 그를 부르려면 조금 시간이 걸렸다.

    부드러운 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전하.”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고 싶어 했던 남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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