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그가 지옥에서 보냈던 한철 (5/15)

4장 그가 지옥에서 보냈던 한철

아드리안은 제 앞에서 엎드린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남자들을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가스파르가 고개를 살짝 숙여 아드리안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저치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아드리안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낸 방법이 정당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입에 그들의 저속한 말들을 올리고 싶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아드리안을 보고 가스파르는 몸을 돌렸다.

“왜 불렀는지는 그대들이 알 것이라 생각하네. 사실 내 욕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그런데 꼭 내가 머무는 궁 내에서 했어야 했나?”

“그…그것이…….”

아드리안은 이것이 단순한 심술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엘로디에게서 그 사실을 알아냈을 때, 그녀의 비참함도 함께 밀려 들어와 그의 기분을 더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자신이 예전에 느꼈던 것들과 비슷해서 더 마음이 쓰였다.

“되었네. 앞으로 그대들을 궁 안으로 부를 일이 없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그 말을 하자고 부른 것이니 그만 돌아가게.”

“전하!”

꽤 큰 가문들의 후계자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아드리안에게 달려들려는 것을 가스파르가 막아서자 그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감히 베타 따위가 앞을 가로막아!”

가스파르는 그런 그들이 익숙한 듯 능숙하게 막아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일 때문에 기분이 저조해서인지 평소처럼 그들을 대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을 중심으로 내리누르는 마력에 남자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스파르는 그것을 보며 만족해하다가 아드리안이 과도하게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를 막아섰다.

“전하!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의 말에도 힘을 거두지 않고 남자들을 더 짓눌렀다.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보다가 그제야 힘을 거둬들였다.

“자네들이 누구 앞에 있는지를 모르고 함부로 입을 놀리나 본데.”

아드리안은 친절하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그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요요하게 빛나는 자안 너머로 느껴지는 명백한 살의에 남자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는 내 궁이야. 다시 한번 더 그런 말을 하면 말을 못 하게 만들어주지.”

가스파르는 그런 아드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좀 나아지나 싶었더니 또 저 모양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예민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를 모시는 것에 이제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가스파르는 멀리 있는 기사들에게 손짓을 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치우라고 하고 아드리안과 함께 자리를 떴다.

“전하, 너무 과합니다. 사실 그치들을 불러서 그렇게…….”

잔소리를 하던 가스파르는 아드리안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몸이 붉게 달아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었다.

아드리안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나 먼저 들어갈 테니, 뒷정리 좀 부탁할게.”

말을 마치고 재빨리 사라져버린 그를 보며 가스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사용한 힘과 분노 때문에 아드리안의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피가 전신을 빠르게 흐르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열기가 솟구치는 느낌에 어지럽기까지 했다.

러트 사이클에 다시 들어간 듯한 감각에 제대로 된 사고가 힘들었다.

침실로 향하는 도중에 숨을 들이켜는 것이 힘들 정도로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황태자는 거칠게 문을 열고 시종을 모두 내보냈다.

옷을 거의 찢듯이 벗어 던지고 차가운 물이 받아져 있는 욕조에 몸을 넣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 입술이 파랗게 변하고 몸이 떨려왔지만 욕망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옆방에 엘로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다시 열이 올라왔다. 그녀의 뜨거운 몸과 자신을 끌어안고 뱉어내던 더운 숨소리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젠…장……!”

단지 그녀를 생각한 것만으로 발기하기 시작하는 제 성기를 보고 아드리안은 욕설을 내뱉었다.

몸을 대충 닦고 가운을 입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부드러운 시트가 볼과 온몸에 닿아서 기분이 좋았다.

불과 몇 주 전 이 침대 위에서 엘로디를 눕히고 미친 듯이 박아대던 기억에 등이 떨렸다. 그녀가 제 밑에서 울면서 더해달라고 빌 때의 쾌감은 그 어느 것보다 짜릿했다.

아드리안은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뻗어 자신의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 저 문을 부수고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일 것이다.

“흐으.”

단단하고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으로 기둥을 쓸고 손톱 끝으로 귀두를 문질렀다. 저번에 엘로디가 해준 것처럼 자극을 계속했다.

눈을 감고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얗고 작은 체구에 폭신해 보이는 적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검붉은 자신의 성기를 입에 물고 제 반응을 살피려 올려다봤던 것을 기억했다.

그 짙은 녹음과도 같은 녹색의 눈과 마주치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었다.

긴 속눈썹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다가 사라지다가 했다.

자신이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고 그녀가 눈동자를 돌리는 순간 그 눈이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다는 욕망에 정신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으… 으응……!’

이성을 잃고 그녀의 입 안에 박아댔다.

작은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도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귀두가 그녀의 목구멍 끝을 찔러 헛구역질을 해대는데도 몸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자 아드리안의 손이 빨라졌다. 몸이 움찔거리면서 등이 뒤로 휘었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그의 귀두 끝에서 흐르는 질척한 액체가 문질러지는 소리가 합쳐져서 정말 추접한 소리가 났다.

“아… 아아……!”

결국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으로 아드리안은 그대로 제 손에 정액을 토해냈다. 허벅지와 허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긴 사정을 계속했다.

아드리안은 수음이 끝난 이후 다시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엘로디를 범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를 상상하고 그녀와 가졌던 성관계를 생각하면서 자위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충 몸을 정리하고 마법으로 침대를 치우고는 다시 누웠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으나 다시 떠오른 엘로디와의 정사에 아드리안은 몇 번이고 수음을 더 하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아드리안은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파라는 사실을 저주했다.

그에게 있어서 알파라는 종은 자긍심을 느껴지게 해주는 것이 아닌 짐승의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날도 그저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느지막이 일어난 엘로디는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엘로디에게 친절하고 성실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첫 러트 사이클 이후 엘로디와 단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았다. 혹시 밤에 몰래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엘로디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드리안은 정해놓은 선을 넘지 않았다.

엘로디는 그가 동침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기묘하게 느껴졌다. 엘로디가 알고 있는 발정기와는 너무 달랐다.

하루하루가 편안했으나 그것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면서 허공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엘로디 님!”

가끔 와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주던 패트리샤가 하얗게 질린 채로 서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에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으로 가자 그녀의 뒤에 시종의 등에 업혀서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패트리샤는 침대에 아드리안을 눕히고, 그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사이클이 멋대로 돌아왔고, 아드리안이 그걸 억지로 참다가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로디는 자신의 방에 눕혀져 있는 황태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아드리안에게 고마움과 짜증이 함께 일어났다.

욕정을 풀 대상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아 쓰러져 버린 황태자에 대한 짜증과 그 사용될 대상이 자신이었기에 느끼는 고마움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취조실에서 무턱대고 자위를 해보라며 비웃던 그 남자는 생각보다 성적으로 결벽증이 심한 남자였나 보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이제는 혼전 관계에 대해 남녀 모두 엄격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족은 달랐다.

이 나라의 황실이 예로부터 성에 대해 폐쇄적으로 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대로 강한 알파가 많이 태어났던 혈족이라 피가 아무하고나 섞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될 때까지 스스로 처리하다니. 엘로디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만일 그가 러트 사이클 때문에 큰일이 벌어진다면 엘로디에게는 더 끔찍한 일이 생길 뿐이다.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든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댔다. 차갑고 서늘하게 생긴 남자가 잔뜩 열이 올라 가쁜 숨을 내뱉으며 자는 모습이 유혹적이었다.

엘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한참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기다렸다.

새벽 즈음이 되자 그의 눈이 힘겹게 들어 올려지고 자수정처럼 투명한 눈이 마주쳐 왔다. 아드리안은 자신이 엘로디의 방에 있는 것을 알고 놀라서 튕겨져 일어났다.

“읏.”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어지러워서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설탕 시럽처럼 달콤한 향기가 그의 코끝에 닿았다.

“전하, 괜찮으신가요?”

엘로디가 손으로 그의 몸을 받치려 뻗자 그 향기가 더 진해졌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이성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녀를 밀어내고 몸을 뒤쪽으로 피했다.

부드러운 이불을 쥐고 있는 손을 떨면서 자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미남자의 모습에 엘로디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변태가 된 기분이잖아!’

엘로디는 그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삐죽였다. 슬쩍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아드리안은 깜짝 놀라 남은 손도 숨겨버렸다.

“나…나는 괜찮으니 나가봐.”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외면하는 아드리안을 보자 엘로디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는 그렇게 자신을 원했으면서 이제는 마음이 변한 걸까.

그가 그럴 성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로디는 그의 모습을 한참을 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전하, 제가 싫으십니까?”

“뭐?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찾지 않으셨나요.”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그…그건…….”

“만일 전하께서 또 이런 일로 쓰러지신다면 그때는 정말 저도, 저희 가문도 살아남지 못해요.”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말투에 그의 등이 움찔거렸다.

엘로디는 말해놓고 비참함을 느꼈다.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그녀가 황실에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몸을 내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엘로디는 손으로 얇은 슈미즈를 벗어 내렸다. 온몸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찬 공기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며 천천히 황태자가 누워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마주친 아드리안의 눈이 흔들리고 그 너머로 욕망이 작게 일고 있었다.

“엘로디… 나는…….”

황태자가 겨우 입을 여는 것을 엘로디가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그가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흩어지고 엘로디는 나체를 아드리안의 몸에 바짝 붙이고 매달렸다.

그가 내는 얕은 신음 소리에 엘로디는 좀 더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앉아있던 그를 눕히고 입혀져 있던 가운의 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잠깐만… 엘로디!”

“말하지 마세요.”

다시 그의 입술에 키스를 내렸다. 쪼아 붙이듯 그의 입술에 키스를 계속했다.

혀가 얽혀들고 타액이 떨어져 내렸다. 아드리안의 양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을 더듬었다.

엘로디는 그의 몸을 마음껏 더듬었다. 몸에 뭘 바르고 다니는 건지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가슴팍을 매만지다가 그의 유두에 손끝이 스치자 그의 몸이 튀어 올랐다.

“읏!”

엘로디가 놀라서 키스를 멈추자 아드리안 역시 자신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

“아니, 전하. 그러니까 이게…….”

아드리안이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움에 온몸이 달아오른 데다가 달콤한 향을 내는 서늘한 여자의 나체가 몸에 달라붙으니 이성을 붙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런 아드리안의 모습에 민망해진 엘로디는 슬쩍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뒤늦게 찾아온 민망함에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서 몸을 가렸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움직임에 손을 치우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역시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대가 싫은 건 아니야.”

아드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엘로디와 몸을 섞고 난 뒤에는 거의 매일 그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끝은 항상 그녀를 울리고 있었다.

싫다고 버둥거리는 그녀를 강제로 취하고 몇 번이고 그녀의 몸 안에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를 남긴다. 그러고는 어디에도 도망 못 가게 자신의 곁에 묶어둘 상상을 한다.

그는 이 집착의 끝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알파들 중 몇몇은 자신의 상대에 대해 광증 같은 것을 갖기도 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여자가 떠올랐다.

“내가 알파여서, 발정기라서 억지로 관계를 갖는 게 싫어서 그래…….”

결국 아드리안은 얼굴을 돌리고 거짓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로디는 뭐라 말하려다 멈추고 고민하더니 그의 입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낯부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이 마주치자 엘로디가 웃었다.

“지금은 제정신이시잖아요.”

“뭐?”

“저번에는 사이클을 못 이기실 정도로 한계였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시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드리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 저는 무슨 향기가 나나요?”

“너……!”

아까부터 엘로디에게서 묘하게 단 향기가 나고 있었다. 알파나 오메가에게서나 날 법한 향기였다.

“함부로 그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읍.”

엘로디의 입술이 아드리안의 말을 잘랐다. 조금 거친 듯한 입맞춤이 계속됐다. 과감하게 입 안으로 살덩이가 밀고 들어와 당황한 아드리안의 혀를 부드럽게 훑어 올렸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서늘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만 더 붙들고 싶어졌다.

질척한 소리가 나고 어느새 아드리안의 가운을 벗겨낸 엘로디가 거침없이 그의 몸을 더듬어 내렸다.

“잠…깐만! 엘로디!”

“전하, 빨리요. 저어,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

엘로디의 눈이 흐려졌다. 이미 약을 먹은 상태로 그가 깨어나기를 꽤 오래 기다렸다. 그가 일어나자마자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에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쓴 것이 최선이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하체에 몸을 비비고 있는 엘로디를 보다가 그녀를 잡아서 자신의 몸 위로 쓰러트렸다.

“후회하지 마.”

그의 눈에 광기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엘로디는 몽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요사스럽게 웃었다.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아드리안의 입술이 그녀의 목 근처에 내려앉았다. 혀를 내어 쇄골 부근을 핥아서 내렸다. 엘로디는 간지러워 몸을 뒤틀었다.

“으응.”

“간지러워?”

아드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것이 귀여워 엘로디가 작게 웃었다. 그의 양 볼을 붙잡아서 끌어올렸다. 당연하게 맞닿은 입술의 감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입 안을 침범하는 낯선 온도에 엘로디가 조금 주춤했다. 그러나 곧 그에게 호응하듯 혀를 얽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입 안을 훑으며 자극할 때마다 등이 저려왔다.

“전하…….”

엘로디는 온몸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기관들이 예민해져 있다고 느꼈다. 아드리안을 보고, 그의 체향을 맡고, 자신의 몸을 훑는 것을 느끼며 가볍게 절정에 올랐다.

엘로디가 키스를 한 채로 등을 떠는 것을 느낀 아드리안이 멈추고 잠깐 물러섰다. 그의 눈에 풀리지 않은 정욕이 번들거렸다. 그것을 본 엘로디가 상체를 일으키고 그와 마주 앉았다.

앉은 채로 다시 끌어안고 키스를 하던 엘로디는 천천히 손을 내려 목을 쓸어내리고 가슴을 덧그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유두를 스치자 아드리안의 이마가 구겨지는 것을 보며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고 키스를 하며 손을 밑으로 밑으로 내려 보냈다. 양손 가득히 닿은 페니스의 뜨겁고 단단한 감촉이 좋았다. 엘로디는 그것을 손으로 장난스럽게 쓸고 문질렀다. 키스의 농도가 진해질 때마다 움찔거리는 몸과 성기가 신기했다.

입술을 떨어트리자 아드리안이 반만 눈을 뜬 채로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부작용으로 갑자기 찾아온 러트 사이클로 괴로워했지만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엘로디는 아니었다. 그녀는 웃으며 천천히 입술을 내려 그의 성기의 끝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귀두에 닿는 감각과 ‘쪽’ 하는 민망한 소리에 아드리안은 등을 떨었다.

엘로디는 혀 전체로 페니스의 끝을 문질렀다. 이쪽으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기묘하게 안정감을 얻었다. 그녀는 그의 물건의 반쯤만 입 안에 담은 채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로디의 입 안에서 시작된 질척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입을 한껏 벌려 커다란 성기를 목 깊은 안쪽까지 밀어 넣었다. 그것은 마치 몸을 이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혀로 귀두의 끝을 찌르고 손으로 음낭을 부드럽게 짓누르자 남자의 몸이 비틀렸다. 얕은 신음 소리를 참으며 몸을 떠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엘로디가 힘을 주어 빨아들이자 그의 손이, 따뜻하고 커다란 것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제 어깨를 밀어내려 더듬었다.

“그마안!”

그러나 엘로디는 그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혀끝으로 그의 기둥 끝을 찔러댔다.

입 안쪽의 연한 살에 닿을 때마다 아드리안은 정신을 놓을 만큼 달아올랐다. 입 안에 다 들어가지 못한 부분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릴 때마다 그의 등이 뒤로 휘어졌다.

“아!”

엘로디가 무리해서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고 빨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그가 입 안에서 파정했다.

당황한 그가 허둥지둥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개의치 않고 엘로디는 그대로 삼켜버렸다. 놀란 얼굴로 귀 끝까지 붉어진 아드리안의 모습에 엘로디가 웃었다.

그녀는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리를 벌려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흐으―”

아직도 딱딱하게 서있는 그의 성기 위에 자신의 음부를 가볍게 비볐다.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허벅지 안쪽으로 그의 성기를 비볐다.

그녀를 말리려고 반쯤 일으킨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아드리안의 팔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아드리안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황태자는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의외로 몸이 좋았다.

모양 좋은 가슴을 더듬으며 입술을 내려 그의 유두를 물었다.

“읏! 잠깐만.”

그가 해주던 것처럼 혀끝으로 그의 유두를 감고서는 빨아들였다.

팔에 힘이 빠진 건지 그의 몸이 주저앉았다. 그러나 엘로디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가슴에 들러붙었다. 몸 여기저기에 키스를 해주고 살짝 빨아들이자 그 자리를 따라 발갛게 부어올랐다.

엘로디는 그것을 손으로 더듬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붙어있는 하체 쪽에서 그의 성기가 다시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그의 것을 문지르다가 자신의 음부를 갖다 댔다. 그의 검붉은 기둥에 살이 비벼지면서 질척한 소리가 났다. 단지 닿은 것뿐인데 애액이 흘러내려 그의 음모와 허벅지를 따라 떨어져 내렸다.

“하… 엘로디… 으응.”

그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그가 원하는 걸 알고 있지만 조금 더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 각도를 바꿔 그의 성기에 음핵을 눌러 문지르기 시작했다.

딱딱하고 뜨거운 것에 문질러지자 순식간에 쾌락이 치솟았다. 당장 그의 성기를 몸 안에 박아 넣고 싶은 충동에 손발이 벌벌 떨렸다.

“아흣!”

조금 느릿하게 앞뒤로 애태우듯 문지르다가 그녀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순과 음핵이 모두 그의 성기에 문질러지고, 질에서는 끊임없이 애액이 흘러내려 둘의 성기를 흠뻑 적셨다.

아드리안이 자신의 가슴에 열중하던 그녀의 머리를 당겨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엘로디가 키스에 집중해 움직임이 느려지자 허벅지를 열고 그녀의 갈라진 비부를 손으로 문질렀다. 신음 소리가 입 안에서 울리는 것을 무시하고 질구를 훑고 조금 위로 올라와 아까의 자극으로 빳빳하게 선 클리토리스를 쥐었다.

“아앙!”

그녀가 참지 못하고 입술을 떼고 신음을 뱉어내자 그가 더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문지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굴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엘로디는 몇 번이고 가버려서 애액을 쏟아냈다.

“전하…….”

그래도 부족했다. 엘로디가 몽롱한 눈으로 거대한 그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서버려서는 끄덕이며 그 끝에서 액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물건을 쥐고 음모를 헤치고 음부에 가져다댔다. 그 자극에도 몸이 떨렸다.

마침내 질구에 닿았고, 엘로디는 그것을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지난번의 긴 정사의 여파인지, 아니면 약을 먹어서인지 그녀의 몸이 쉽게 열리면서 순식간에 그의 성기를 삼켰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이 열리면서 자신의 성기를 서서히 삼키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질 안쪽이 페니스에 들러붙었다. 마치 그녀의 질이 성기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체중과 약 기운, 그리고 아드리안의 짙은 페로몬 탓인지 엘로디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아드리안의 향기를 더 맡고 싶어져서 그대로 몸을 기울여 그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닿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가는 것 같았다.

몸 아래쪽에서 왈칵 물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키스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로 느끼는 것에 엘로디는 당황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모르는 듯 한 손으로는 엘로디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인 것처럼 엘로디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몸이 굽혀진 상태로 질 안쪽을 질서 없이 쳐오는 감각은 어떨 때는 고통을, 어떨 때는 쾌락을 선사했다.

엘로디는 더 정신없이 그에게 매달렸다.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잡았다. 부드럽고 단단한 가슴을 더듬고 유두를 자극하자 그의 물건이 자신의 안에서 점점 더 부피감을 키워갔다.

“앙… 아아! 더… 더… 으응!”

그의 몸짓이 더 빨라지면서 입에서는 제대로 된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엘로디가 제대로 삼키지 못한 침이 눈물과 섞여서 얼굴을 타고 흘러 가슴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하읏. 엘로디, 엘……!”

자신을 부르는 그의 입을 막듯이 다시 키스를 했다. 엘로디는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기쁘면서도 싫었다. 자신도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엘로디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쾌락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깊숙한 곳이 문질러지자 엘로디의 몸이 그대로 튕겨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애액이 터져 나왔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더니 허리를 꽉 쥐고 그곳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앙! 아아! 전…하……! 싫어!”

“정말 싫어?”

짓궂게 묻는 아드리안의 말에 엘로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지는 기분이었다.

엘로디는 허벅지로 앉아있는 그의 허리를 감고 더 몸을 바싹 붙였다. 몸이 가까워진 탓인지 귀두가 몸 더 깊숙한 곳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엘로디는 약에 취해 진심을 토해냈다.

“하읏. 좋아요! 거기!! 거기 더!!”

눈 안쪽이 계속해서 점멸하면서 몸이 벌벌 떨렸다. 내벽이 끈적하게 그의 페니스에 달라붙어 더 깊은 쪽으로 안내하듯 몸을 열었다.

“크읏!”

다시 한번 절정과 함께 그녀의 질벽이 귀두에서부터 뿌리까지 조여왔고 그대로 정액이 질 가장 안쪽 자궁 내로 쏟아부어졌다.

엘로디는 그가 몸 안에 사정하는 순간 익숙해진 부피감과 몸 안을 적시는 따뜻한 체액, 그리고 환희와 쾌락으로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한 그들은 다시 한번 몸을 섞기 시작했다.

“으응…….”

작은 비음 같은 소리를 내며 엘로디가 눈을 떴다. 약을 먹고 이성을 놓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듣기로는 저번에 먹은 약은 일반적인 것이었고, 이번에 받은 건 자신의 몸에 맞춰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저번보다 더 정신이 없었고, 심지어 기억조차 중간중간 끊겨있었을 정도였다.

허리 근처의 손길과 머리 위에서 낮은 숨소리에 아직 아드리안이 저를 안고 있음을 깨닫고 그녀는 부끄러워졌다. 그의 성기가 자신 안에 아직 들어차 있는 것을 알자 그 부끄러움은 더했다.

엘로디는 거북한 느낌에 엉덩이를 움직여 그의 것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꽉 끌어안고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점점 부피감이 커지는 듯한 느낌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결국은 포기하고 가만히 그의 품 안에 있기로 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반듯한 얼굴의 남자가 자고 있었다.

엘로디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젯밤에 자신을 안으며 색욕에 젖은 그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기억해 냈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거나, 음란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에 묘한 만족감 같은 것을 느꼈다.

아랫배 쪽이 뜨거워지고 제 몸 안에 들어찬 그의 물건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엘로디는 이것이 성욕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자신의 상태와 다르게 편안한 표정으로 자는 그가 얄미워서 놀려줄 심산으로 허리를 움직여 문지르자 그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하얗던 얼굴이 점점 상기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엘로디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으응… 엘로디?”

아침이어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묘한 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쳐 왔다.

“일어나셨어요?”

그의 얼굴을 홀린 듯 올려다보며 인사를 했다. 아드리안은 그녀와 자신의 몸 상태를 보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몇 번이고 몸을 섞었는데 자신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엘로디는 늘 재미있어했다.

“잠깐만, 그러니까… 하읏… 움직이지 마.”

어젯밤에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으니 이 정도의 복수는 귀엽게 봐주셔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로 어떻게든 하려는 그를 괴롭히고 싶은 가학심에 그의 가슴을 살짝 물었다.

“흣!”

쾌락 때문인지 눈물이 어린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초조해진 느낌에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어제 과하게 물고 핥아서인지 유두가 부어있어서 쓰라려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고통만이 다가 아닌 그 기묘한 감각에 엘로디가 손을 못 대게 하려 애를 썼지만 그녀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유린하는 엘로디의 모습이 햇빛에 반짝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아드리안은 결국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슴에 닿는 혀와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손길 때문에 열이 오르면서 그의 성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엘로디는 이제 그의 위에 완전히 올라타서는 허리를 문지르며 신음 소리를 냈다.

눈이 안 보이자 더 자극적으로 느껴져서 아드리안은 결국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하며 몸 안쪽 깊은 곳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키스에 집중하던 아드리안이 방심하는 사이에 엘로디가 그의 유두를 세게 비틀었다.

“흐윽!”

놀람과 동시에 그대로 그녀의 몸 안에 사정한 아드리안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엘로디는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주었다.

아드리안은 더 자신을 괴롭히려는 엘로디를 재빨리 떼어냈다.

“아.”

막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어제의 흔적들이 전부 쏟아져 내렸다. 아드리안도 엘로디도, 그것을 보고는 말을 잃었다.

그 이후로 둘은 며칠을 방 안에서 뒹굴거렸다.

아드리안이 두 번쯤 쓰러지니 황제도 드디어 일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원래 이 정도로 바쁘지 않았는데 결혼식 이후로 노골적으로 놀고 싶어 하는 황제 덕에 황태자는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다.

이렇게 된 김에 놀 수 있을 때까지 놀자며 다짐했지만 아드리안은 내리 잠만 잤다. 그동안 피로와 긴장감에 제대로 잠을 못 잤기에 거의 기절하다시피 누워있었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끌어안거나, 가끔 먹을 걸 들고 온 쥴리아에게 음식을 받아 깨워 먹이거나 했다.

아드리안은 어쩐지 한가한 휴가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둘은 낮에는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티타임을 갖거나 별 쓸모없는 것들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세계의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엘로디의 관점을 듣는 것을 아드리안은 좋아했다.

밤이 되면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자기도 했고, 어떤 날은 이성을 잃고 서로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긴 휴가 내내 서로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주변에서 둘의 사이를 수군거렸지만 정작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심지어 예전보다 엘로디를 훨씬 마음에 들어 하며 이것저것 둘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그렇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드리안은 아침부터 가스파르가 울면서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전날 밤에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섹스의 여파로 둘의 몸은 엉망이었다. 곧 쥴리아와 나나에 의해 끌려갔는지 울음소리가 멀어졌지만 아마 내일쯤에는 나가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옆에 누워있는 엘로디가 아직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서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깊이 잠이 든 엘로디를 보았다.

한참을 보아도 질리지 않아서 종종 자신이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자고 있는 그녀를 몇 시간이고 지켜본 적도 있었다.

“황태자 전하. 쥴리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침에는 웬만해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드리안은 그녀를 들였다.

쥴리아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있었는데 아마도 가스파르가 준 것 같았다. 어떡해서든 자신에게 일을 시키고 싶어 하는 친우의 우정이 눈물겨워 아드리안은 별말 않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서류 안에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들어있다.

얼마 전 실종된 리암의 가족에 대한 내용이었다. 리암은 가족을 찾지 않았지만,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보고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도망갈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계속해서 보고서를 넘기며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리암의 집 안에서는 희미한 마법의 흔적이 있었다고 적혀있었고, 주변인들은 가족을 찾으러 온 리암이 당황해하는 것이 연기 같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아…….”

걱정하던 일이 들어맞을 확률이 높아지자 아드리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개 애론이 리암의 가족을 납치해서 그를 협박했을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높았다. 대체 애론이 왜 엘로디를 그렇게까지 괴롭히려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기까지 했다.

애론은 자신의 결혼보다 엘로디의 불행을 원해 타인의 가족을 짓밟고, 제 가족인 엘로디와 나바르 후작 부부의 삶조차 짓밟으려 했다.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이 보고서를 보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암이 애론의 협박 때문에 그와 관계를 가졌고 도망갔다고 한다면 엘로디는 리암을 용서해 줄까.

만일 그래서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한다면…….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뒤쪽에 놓여있던 대리석 탁자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드리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힘을 거둬들였다.

정말로 위험했다.

그는 엘로디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과 그녀를 자신의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다는 감정에 휩쓸렸다.

“네 마음을 함부로 빼앗기지 마라.”

아버지인 황제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기억해 내고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그녀를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엘로디와 아드리안은 그러고도 며칠을 더 놀았다. 아드리안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나 리암의 보고를 받고 나서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나오라고 요청하기 전까지 아드리안은 엘로디와 몇 번이고 몸을 섞었다. 그 긴 휴가 동안 아드리안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드디어 휴가의 마지막 날이 왔다.

엘로디가 정오 즈음 일어나자 그가 간단한 마법으로 그녀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어젯밤의 모습은 없어진 단정한 차림의 그를 보며 엘로디가 웃었다.

아드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디는 뚱한 표정의 그를 보며 다시 웃었다. 요 몇 주간 살펴본 그는 차가운 표정 뒤에 여러 표정을 숨기고 있었고, 그것들을 들키면 당황하는 것이 귀엽게 느껴졌다.

“전하, 오늘은 그럼 뭘 하실 건가요?”

“글쎄…….”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돌아보았다. 장미의 궁으로 온 이후로 아마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밖에 나갈래?”

“하지만 전 궁에만 있어야 하는데요.”

“내가 황태자인데 뭐 어때.”

아드리안은 웃으며 얇은 슈미즈 드레스만 입은 그녀에게 어디서 났는지 평민들이 입을 법한 옷을 꺼내왔다.

엘로디는 순간 그의 취향을 의심해 봐야만 했다.

“방금 만든 거야!”

그녀의 눈치를 알아챈 아드리안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엘로디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에게 옷을 받아서 입었다.

녹색의 통이 넓은 모슬린 원피스를 입고 그가 쥐여준 굽 낮은 신발을 신었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그렇게 차려입자 종종 신문에서 보던 시장을 누비던 귀여운 소녀처럼 보여서 웃었다. 생각해 보니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충분히 그렇게 보일 만했다.

아드리안 역시 평민이나 입을 법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나가시게요?”

엘로디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아드리안은 제 옷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지 살폈다.

“뭐, 내가 잘못한 게 있어?”

“으음…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전하의 외모는 너무 튀어서요.”

“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아드리안은 당황했다. 과거에 몇 번 몰래 나가서 놀았던 적이 있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었다.

“이러고 몇 번 나갔다 왔을 때도 아무도 몰랐으니 괜찮을 거야.”

“아니요, 전하. 사교계에서 종종 전하가 몰래 밖에 나와서 놀다 가시는 맛집 리스트를 제가 직접 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

아드리안은 엘로디가 거기까지 말하자 아무 말도 못 했다. 여태껏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이었다는 것을 알자 부끄러움에 귀 끝이 달아올랐다.

“제국에 은발에 보라색 눈은 전하뿐이잖아요.”

부끄러워하는 아드리안이 안쓰러워 엘로디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알려주었지만 그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머리 색이랑 눈 색만 바꾸면 되겠지?”

“음… 그래도 지나치게 잘생기긴 하셔서…….”

“그건 괜찮아. 인식을 잘 못 하는 마법을 걸어두면 될 테니까.”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손을 움직였다.

딱.

손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은발이 갈색으로, 보라색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황실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많이 감소됐지만, 아름다운 외모는 그대로여서 오히려 더 다가가기 쉬운 친근하고 상냥한 분위기의 미남자가 되어있었다.

엘로디는 얼굴을 붉히며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이만하면 되겠지?”

“네… 뭐…….”

그녀의 떨떠름한 대답에 아드리안은 엘로디를 가볍게 끌어안고는 작게 주문을 외웠다. 공간 이동 마법은 처음이었기에 무서워진 엘로디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꽉 쥐었다.

잠시 후 둘이 있던 자리엔 마력의 빛만이 흔적을 남겼다.

* * *

화려한 제국의 수도, 알펜시아의 상업 지구.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로 순식간에 은색의 빛무리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두 남녀가 나타났다.

아드리안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엘로디를 품에서 놓아주었고 엘로디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좌우를 살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당분간 우리가 방에서 나올 때까지는 찾지 않을 거 같은데.”

엘로디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궁으로 들어갈 때는 한창 더운 계절이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선선한 기운에 엘로디는 궁에 들어가면서 오랫동안 마시지 못했던 커피를 떠올렸다.

“저… 전하.”

“밖에서는 이름을 불러야지, 엘로디.”

아드리안은 행여나 그녀가 한 말을 누군가 들었을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외모가 황태자의 상징이라는 것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서 주의하는 모습에 엘로디는 울컥했다.

“네. 전, 아니 아드리안 님.”

아드리안은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변장했다는 기분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끌었다.

“그럼 내가 다니는 곳 말고 엘로디가 추천해 줘.”

“제 취향을 잘 모르시잖아요.”

“사람 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

엘로디는 자신만만하게 웃는 아드리안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럼 커피부터 마시러 가요.”

아드리안은 제 앞에 놓인 검은색의 물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평민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던 커피라는 것이었다.

엘로디가 데려온 카페에서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음료를 마신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커피라고 하는 콩을 볶아서―”

앞에서 엘로디가 이 검은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며 커피의 원리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그 음료를 조금 넘겼다.

“읍!”

역시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이란 말인가!

인상을 쓰는 그의 모습에 엘로디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아드리안은 얼굴을 붉히고는 처음 그녀가 권했던 각설탕 몇 개를 커피 안으로 떨어트렸다.

“그러게 다른 거 드시라고 했잖아요.”

엘로디의 말에 아드리안은 말없이 조금 먹을 만해진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봤자 탄 콩을 우린 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열렬한 커피 추종자로 보이는 엘로디 앞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거도 드세요.”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그녀가 시켜준 케이크가 아드리안 앞으로 밀어졌다. 왠지 어린아이가 된 거 같아서 얼굴을 붉혔지만 곧 케이크를 먹으며 입 안의 쓴맛을 지웠다. 엘로디는 단 음식을 좋아하던 리암을 떠올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케이크에 열중하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앞으로 그 약, 먹지 마.”

“아드리안 님께서 제때 와주시면 안 먹어도 되잖아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잠시 열정적인 포크질을 멈추고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가려지지 못한 귀 끝이 발개진 걸 보니 부끄러운가 보다.

엘로디는 그를 놀리는 게 재밌어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투덜거리면서 아드리안이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사실 제가 이 일을 하기 전에 부작용 없이 오랫동안 약 효과가 유지되는 억제제 개발을 하고 있었어요. 조금만 더 하면 완성이었는데… 아시다시피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제가 그 연구를 끝내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기존의 억제제는 제한이 너무 많았다.

일단 약효가 지속되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자주 시간을 맞춰 정확히 먹어야만 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약효가 잘 안 들기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부작용으로 제대로 된 사이클 없이 부정기적으로 발정을 했다.

아드리안은 아직 부작용이 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부작용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엘로디는 그라면 자신의 연구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고민하는 그의 모습에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걸 만들려고 한 거지? 리암 경 때문이었나?”

뜬금없이 소환된 반갑지 않은 이름에 인상이 구겨졌지만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아드리안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엘로디는 말하고 싶지 않은 이름을 내뱉었다.

“아드리안 님, 크리스타가 제 선생님이자 친구였습니다.”

크리스타의 이름이 나오자 그가 들고 있던 포크를 그대로 떨어트렸다.

상처받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엘로디는 그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아드리안이 크리스타를 죽였을 리 없다.

“저랑 같이 크리스타에게 가주시겠어요?”

그곳은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제도의 한쪽에 위치한 숲 안쪽에 엘로디와 아드리안이 서있었다. 표식도 없는 숲 한가운데에 주변보다 조금 작은 나무 앞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아무도 수습해 주지 않으려 했던 크리스타의 주검을 엘로디가 애론에게 애원하다시피 매달려서 가까스로 빼돌렸다. 그러고는 리암과 함께 이곳에 묻어주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주었다.

표식은 없었지만 크리스타와 친했던 애론이 나무에 마법을 걸어 원하면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해주었었다.

엘로디가 애론에게 고마워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그 나무를 한참을 올려다 바라보았다.

“네가… 그녀가 말하던 그 학생이었구나.”

울음을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한 그가 손을 뻗어 나무를 쓸었다.

“전하, 저는 크리스타가 전하를 유혹하려 했다는 걸 믿지 않아요.”

“…….”

“크리스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고, 그 바로 전날만 해도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며 이야기한 걸 제가 알고 있는걸요.”

엘로디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이 세계에 와서 리암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귄 자신의 친구 크리스타를 기억해 냈다.

상냥하고 어여쁜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그 까칠한 애론조차 마음에 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제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했던 엘로디를 다독여주고 열 살이나 어린 그녀를 자신과 동등하게 봐주던 유일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결혼을 몇 달 앞두고 옷을 벗고 러트 사이클에 돌입한 아드리안을 유혹했다는 죄명으로 잡혀갔을 때, 엘로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와 약혼자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그들의 지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그들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며칠 뒤 그녀의 집으로 황후가 보낸 무명천이 도착했다고 했다.

함께 온 편지를 읽은 뒤, 크리스타는 그 천으로 목을 매고 자살했다.

엘로디는 그것을 자살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건 명백한 사형이었어요. 아니, 분명 그녀를 그런 식으로 살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엘로디는 오랫동안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했다.

크리스타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에게 누가 살의를 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크리스타에게는 잘못이 없어.”

아드리안은 나무에 이마를 기댔다. 닿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서 포기했던 여자였다. 그저 바라만 보고 행복해지기만을 기원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해서… 망설였기 때문에 죽은 거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뱉어낸 고백과 눈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 * *

열여덟 살의 아드리안은 슬플 것도, 괴로울 것도 없이 그야말로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한량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칭송받으며 자라왔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컸다. 종종 황제는 그런 제 아들을 보며 저 녀석이 안하무인으로 자라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투덜거릴 정도로 축복받은 인생이었다.

그날은 황궁에 자신의 약혼자를 찾아온 애론을 피해 관료들이나 의원들이 주로 모이는 동백의 궁에 숨어들어 갔었다. 애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를 만나러 올 때마다 입고 오는 그 이상한 옷 때문에 주목받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황태자의 외양이었으나 아드리안 본인은 옷이 남들과 같고, 안경을 썼으니 못 알아볼 것이라며 싱글벙글 웃으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날도 아무렇지 않게 동백의 궁 내에 있는 도서관에 발을 디뎠다.

좋은 의도로 전대 황제가 만들었지만, 평민들은 굳이 책 한 권을 보러 황궁에 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귀족들은 평민들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도서관은 한산했다.

아드리안은 그곳에서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책들을 몰래 읽고는 했었다.

그때 당시 읽고 있었던 책은 부서지지 않는 반지를 없애기 위해 주인공이 동료들과 함께 화산을 등반한다는 내용이었다. 책장들 사이에 주저앉아 책을 읽으며 거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내용에 집중해 있어서 뒤에 누가 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당황해서 올려다본 곳에 서있던 것은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던 크리스타였다.

“아, 『반지 등산회』 좋아하시나 봐요.”

아드리안이 들고 있는 책등을 보더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 아! 아니, 그냥 있길래 읽는 것뿐이야.”

당황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커지자 크리스타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주의시켰다. 그것이 마치 열 살짜리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아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가르치는 아이가 있어서요. 자꾸 그 아이를 대하듯 사람들을 대하게 되네요.”

미안해하며 들고 있던 책을 능숙하게 제 위치에 꽂아 넣은 그녀가 몸을 돌려 아드리안을 보았다.

“그 책이 마음에 드신다면 이쪽에 있는 이것도 읽어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종종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아드리안은 곧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애론이 나타난 것을 보고 후다닥 도망갔다.

그 뒤 아드리안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도서관을 찾아갔었다. 그녀가 추천해 준 책을 읽고 가끔 그 책 내용에 대해 이야기도 했었다.

그녀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몇 번 해주었는데, 그녀가 예법을 가르친다는 속 늙은 꼬마 여자아이의 이야기는 퍽 재밌었었다.

그렇게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드리안이 도서관을 들락거린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크리스타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저…….”

아드리안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녀 역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을 모르는 기묘한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제가 다음 해에 결혼을 할 예정이라서요.”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가끔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서 책을 읽다 보면 어김없이 그녀를 데리러 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서로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달까지만 일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로 아드리안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말을 마치고 그 자리를 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횡설수설하며 결혼을 축하한다든가 혹시 선물이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계속 나와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아드리안의 첫사랑은 그렇게 고백 한 번도 없이 도서관에 일렬로 나열된 책들의 분류표 중의 하나가 되어 그대로 책꽂이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아드리안은 단 한 번도 도서관을 찾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도 몰랐던 사랑은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래서 도저히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자신을 불러서 알파와 오메가의 비밀을 말해주었던 황제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한단다, 아드리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고, 모든 것을 네가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그 말을 한 황제가 웃으며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아드리안의 모후이자 자신의 아내인 황후를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아직 어린 그에게 속삭여주었었다.

“네 마음을 함부로 빼앗기지 마라. 잘못되면 상대도, 너도 모두 파멸시킬 수도 있으니.”

아드리안이 물었었다.

“아버님도 그렇게 되신 적이 있나요?”

그때 그는 그저 웃기만 했었다.

마음을 빼앗긴 알파와 오메가는 상대에게 광기를 품게 된다.

그가 들은 비밀의 일부였다.

아드리안은 크리스타의 행복을 바랐다.

한 번 더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부서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아마 엘로디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타는 자신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정체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음을 알고 평범하게 대해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을지 모른다.

* * *

둘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왜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도 몰라.”

아드리안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군가가 크리스타를 강제로 그곳에 보냈을 거라고 생각해. 단순한 사고도 아닐 거야.”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엘로디에게 손을 뻗었다.

“그날, 내 약이 바꿔치기 당했어.”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울어진 어둠에 가려진 그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돌아와 은색으로 반짝였다.

엘로디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손에서 올라오는 따뜻함이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내가 그때 망설여서…….”

그의 울음에 뒷말이 삼켜졌다.

그날, 약을 먹었음에도 제 상태가 이상한 것을 안 아드리안은 당황했었다. 방 안으로 겨우 들어가 문을 잠그고 다시 약을 찾고 있을 때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크리스타가 있었다.

아드리안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제 앞에 옷을 벗고 서있는 크리스타를 보며 번민했다.

아주 짧은 순간 이대로 그녀를 갖는다면 저 여자를 제 옆에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쓸렸다.

그리고 바로 직후 황후가 들이닥쳐 그녀의 뺨을 내리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엘로디가 틀렸다. 크리스타는 자신이 죽인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알파라는 사실을 좋아한 적 없어.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진화가 덜 된 짐승이라고 생각했지.”

그저 손짓만으로 그녀를 집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도 자신이 욕심을 부려서, 욕정에 눈이 멀어서 그녀를 죽인 것이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손바닥을 뒤집어 그곳에 입술을 내렸다.

엘로디는 그가 왜 자신을 피하고 찾아오지 않았는지 그 원인을 알게 되자 마음이 쓰라렸다.

“전하 잘못이 아니에요.”

엘로디의 손바닥 위로 그의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손을 뻗어 제 손을 쥐고 웅크리고 있는 그의 등을 쓸었다. 엘로디는 한 번도 알파가 스스로를 혐오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에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둘은 한참을 서로를 안고 있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이 좋았다.

이제는 이 억제제가 자신이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가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약이 완성되면 그런 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많이 줄어들 거예요.”

엘로디의 말에 아드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

반짝이는 빛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자 다시 장미의 궁의 정원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이제 끝나가는 여름처럼 많이 시들어버린 장미가 눈에 보였다.

아드리안이 몸을 굽혀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 마치 고백하는 것 같은 모습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내가 도와주게 해주겠어?”

눈물 젖은 얼굴로 올려다보며 속삭이는 그의 약속에 엘로디가 웃었다.

그날 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첫사랑 이야기를 캐물었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기 위해 엘로디와 키스를 하거나 끌어안았다. 그럴 때마다 엘로디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둘은 크리스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애론의 못된 짓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특히 애론에 대한 아드리안의 첫인상을 들은 엘로디는 거의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음… 처음 본 애론은 공작 털을 두른 수탉?”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 너무 잘 보이고 싶었는지 과한 옷을 입고 나왔거든. 솔직히 말해서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 한다고 해서 수업도 며칠 동안 안 들었어.”

“그 옷! 저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엄청 말렸거든요. 근데 그거 아세요? 애론은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하지 말라는 건 꼭 했거든요.”

“…….”

“그래서 일부러 입지 말라고 말린 거예요.”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궁에 들어온 뒤 엘로디가 지금처럼 소리를 내며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아서인지 아드리안은 마음에 들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폭닥한 감촉에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고 숨을 들이켰다. 방금 씻고 나와서 비누 향이 배어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대자 엘로디가 몸을 웅크렸다.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쓸었다. 엘로디는 몸을 뒤로 기댔다. 체중이 실리면서 그가 웃었다. 엘로디와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아직도 섹스를 배제하고 함께 자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둘 다 서로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둘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서로를 비껴 보았다.

그의 손이 엘로디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귀에 걸어주었다. 엘로디는 부끄러움을 감추려 아드리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엘로디는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휘어 감았다. 깍지 낀 손 너머로의 체온과 등에 닿은 손의 부드러움, 이마가 닿은 단단한 가슴에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며칠 뒤 아드리안은 패트리샤와 가스파르를 장미의 궁으로 불렀다.

평민 출신 의사인 패트리샤는 수도에서 유명한 여자였다.

제일 유명한 것은 그녀의 뛰어난 의사로서의 자질이었다. 특히 스스로가 알파였기 때문에 알파나 오메가들의 체질이나 페로몬에 관한 연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유명한 것은 역시 그녀의 미모였다. 알파이기에 누구나 아름답다고 생각할 만했지만, 그녀는 조금 특별했다.

대부분의 귀족 출신 알파는 도도한 사람들이었고, 평민 출신일 경우에는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 피폐하게 자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달랐다. 평민인데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것이 그녀의 독특한 매력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녀의 성 편력이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부작용이 언제 생길지 모르는 억제제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화려한 연애사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 아래서 예쁘거나 잘생기면 모두 그녀의 손에 한 번쯤 닿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패트리샤는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 길어진 금발을 목 근처에서 묶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에게 짜증이 나서 몸을 쭉 늘리며 하품을 했다.

패트리샤의 동작이 꽤 큰데도 가스파르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패트리샤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이며 옆자리에 꼿꼿이 앉아있는 가스파르의 몸을 훑었다.

가스파르는 황태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온 오랜 친구이자 명실상부 현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몇 년 전인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태자에게 결투를 요청하고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인 그를 죽지 않을 만큼 패줬다는 건 전설 아닌 전설처럼 알려져 있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에 햇볕에 그을려 살짝 어두운 피부색이 잘 어울렸다. 검을 쥐는 남자답게 단단하고 근육 잡힌 몸도 마음에 들었다.

꽤 오래전부터 공을 들여 그를 유혹해 보려 하고 있었지만 가스파르는 선을 긋고 절대 그 너머로 오지 않았다.

가스파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외면하며 황태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스파르 경, 오늘은 도망가지 않네요.”

“도망간 적 없습니다.”

“전하 앞에서는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으시잖아요.”

“전하와는 친한 사이이고, 패트리샤 님하고는 그런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친해지는 건 어때요?”

“죄송합니다.”

“…….”

패트리샤는 자신에게 선을 긋는 가스파르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언젠가 저 콧대를 꺾고 자신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가스파르는 종종 아드리안에게서 느꼈던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앞만 바라보았다.

“가스파르 경.”

“말씀하십쇼.”

“이야기를 하려면 제 쪽을 보셔야죠.”

“그렇다면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가스파르는 그녀의 지나친 관심이 귀찮았다. 그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었고, 무엇보다 알파와 엮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드리안 하나로도 그의 머리는 충분히 아팠다.

자신이 황궁에서 지내면서 많은 알파와 오메가를 만났지만, 그들과 엮인 베타들의 최후는 거의 비슷했다.

불행해지거나 성가셔진다.

가스파르가 생각하기에는 엘로디는 그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는 여자였다.

오메가인 애론과 알파인 리암과 엮인 그녀는 불행해졌고, 아마도 이것은 추측이지만 아드리안과 엮인 그녀는 성가셔질 것이다. 불쌍한 그녀의 인생을 떠올리며 그는 잠시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패트리샤는 자신을 옆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이 남자가 신기했다.

그리고 가스파르는 그런 그녀가 성가셨다.

그는 자신의 옆모습을 노려보는 패트리샤의 눈빛을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꼈지만, 아드리안의 것도 이겨낸 그였기에 묵묵히 자리를 버텼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늦어서 미안.”

묘한 분위기를 깨듯 아드리안이 들어왔다. 그 뒤에 간단한 실내복을 입고 있는 엘로디가 함께 쫓아 들어왔다.

“엘로디, 이쪽은 몇 번 만나본 적 있을 거야. 의사인 패트리샤 들롱, 그리고 이쪽은 내 호위 기사인 가스파르 파라디.”

“안녕하세요. 엘로디…입니다.”

엘로디는 스스로를 엘로디 나바르라고 소개하려다가 성을 빼앗긴 걸 알고 재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그런 그녀의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아드리안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만나서 반가워요, 엘로디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로디 님.”

둘은 아무렇지 않게 엘로디에게 인사를 했다. 아드리안은 세 명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앉았다.

“이곳에 부른 이유는 다들 대강 알 거라고 생각해.”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엘로디의 손을 잡았다.

초조함에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불쑥 나타나자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엘로디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난 엘로디와 새로운 억제제를 개발할 거야. 물론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의 말에 둘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약을 개발할 만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알파나 오메가였다. 그들은 자신의 발정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민들에게 필요하지만 고위직 인사들에게 필요하지 않았기에 발전되지 못한 약이었다.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강요는 아니야.”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를 보며 패트리샤가 웃었다. 엘로디 앞이라고 거짓말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제 다짜고짜 찾아와서 자신에게 내일부터 자신의 밑에서 일을 해달라며 협박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부작용이 없다면 저라도 먹고 싶을 거예요. 가격은 어느 정도 생각하시나요?”

부작용이 있는 약을 먹느니 방탕한 성생활을 하겠다고 외쳤던 패트리샤였다. 그녀 역시 개량된 약이 있다면 비싸더라도 충분히 먹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평민 출신들은 달랐다.

기존의 억제제의 또 다른 단점은 비싼 가격이었다. 평민인 알파나 오메가들은 그렇게 비싼 약을 주기에 맞춰서 여러 번 먹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페로몬을 뿌리며 아무에게나 달려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귀족 계급의 씨받이나 노리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 억제제의 가격이었다.

“국비로 만들어서 뿌릴 예정이다. 이미 폐하와 이야기를 끝내둔 상태이고, 황실에서 진행하는 복지 사업의 일부로 삼을 생각이야.”

그의 옆에서 듣기만 하던 엘로디가 입을 열었다.

“알파나 오메가는 육체적, 지적 능력이 뛰어난 편이에요. 귀족들 중에 고위직을 그들이 대부분 차지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죠.”

엘로디는 리암을 떠올렸다. 원작대로라면 귀족가에 팔려 억제제를 얻기 위해 자신의 씨를 뿌리는 노리개였다. 그러나 엘로디가 억제제 문제를 해결해 주고 교육의 기회를 주자 그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했다.

“평민인 그들이 더 이상 사이클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면 분명 제국을 더 발전시킬 원동력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끝까지 들은 가스파르는 이 일을 왜 비밀리에 진행하려 하는지 알았다. 외부에서 이 일을 미리 안다면, 분명 엘로디나 황태자를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밑에서 사람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반길 리가 없었다.

“가스파르, 너는 엘로디와 패트리샤를 지켜줘. 패트리샤의 의학 지식이 분명 엘로디에게 도움이 될 거야.”

엘로디는 허리를 세웠다.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됐다. 드디어 그녀가 바라던 끝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달만 주세요, 전하. 반드시 완성해서 드리겠습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은 그 모습에 얼굴을 붉히고는 웃어 보였다.

* * *

황후 이자벨이 머무는 국화의 궁은 가을을 맞아 형형색색의 국화가 만개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곳의 한쪽에 마련된 유리 온실 안에서 이자벨이 서서 국화들을 돌보고 있었다. 긴 은발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무심하게 손으로 꽃잎과 이파리를 쓸어내렸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는 누가 보아도 홀릴 것 같은 마력을 갖고 있었다. 그 온실 안에는 수많은 꽃들이 가득했지만 이자벨은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세실.”

세실은 자리에 앉아 자신을 [눈]으로 짓누르는 황후의 앞에서 덜덜 몸을 떨었다.

“나는 네가 함부로 나대는 아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단다.”

“황후 폐하! 아닙니다. 전하는 제 [눈]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눈치셨습니다.”

이자벨은 말없이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국화 꽃잎을 매만졌다. 그녀가 만지는 것에 따라 꽃잎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는 세실의 얼굴에 혈색이 사라져갔다. 온몸을 짓누르는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생리적인 눈물과 타액이 섞여 고운 그녀의 얼굴을 더럽혔다.

황후는 그런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곧 그녀를 바라보던 [눈]이 거둬지고 세실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온몸이 후들거려 몸을 일으킬 수조차 없었다.

설마 황후조차 개안했다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자벨은 몸을 돌려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세실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그 아이부터 떨어트려 놓으렴.”

“네.”

어차피 그럴 의도였기에 황후를 찾아간 것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멋대로 행동을 했다가는 정말로 자신도, 가문도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세실은 반드시 일을 제대로 처리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이자벨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세실은 그저 그녀가 이용하는 말 중 하나일 뿐이다.

이자벨이 세실에게 가진 기대라고는, 그녀가 가진 [눈]이라면 이 일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아들 아드리안은 바보가 아니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저 멍청한 아이는 아드리안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자벨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황제도 그렇고 아드리안도 그렇고, 어찌 이리 박복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자벨은 손으로 세실을 물리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곧 늦가을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잎들이 색소를 입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자벨은 한여름의 녹음과도 같은 눈을 가졌던 엘로디를 떠올렸다. 주변에서 이러다가 아드리안이 엘로디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아이가 운명의 반려였으면 좋았을 것을.”

만일을 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자벨이 하얀 손을 올리자 그녀의 손 위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이자벨은 그 새의 머리를 가볍게 쓸고는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새에게 아주 작게 속삭이고는 손을 털어내어 날려 보냈다.

그녀의 행동이 아주 능숙한 듯 새가 바닥에서 위로 날아올라 갔다.

황후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하늘 너머로 날아가는 새를 보다 몸을 돌려 궁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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