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남겨진 사람들
보좌관을 쫓아서 간 곳은 황태자에게 내려지는 장미의 궁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궁전의 외곽에는 장미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정원에는 온갖 종류의 장미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경으로 유명한 궁이었다.
그러나 엘로디에게는 그것들을 천천히 감상할 여유 따위 없었다. 이제는 그것이 아름다운 새장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입구가 화려하게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마치 감옥 입구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녀는 두 번 다시 이 밖으로 나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잠깐 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나 곧 자신이 쫓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 돌아보는 보좌관의 눈길에 발을 디뎠다.
“앞으로 엘로디 님을 돌봐주실 보나파르트 부인입니다.”
엘로디는 공손히 인사를 한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엘로디를 쳐다보며 혀를 작게 찼다.
“여기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보좌관은 보나파르트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엘로디를 위아래로 훑고는 휙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엘로디 나바르는 없습니다. 침실 시녀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성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나바르 영애가 아닌 엘로디 님으로 부르겠습니다.”
“네.”
보나파르트 부인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궁 내부로 들어갔다.
“엘로디 님이 하실 일은 주로 아드리안 님의 잠자리 시중입니다. 아드리안 님이 원하시면 엘로디 님에게는 거부권이 없습니다.”
엘로디는 자신의 처지가 짐승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생각했다.
“이곳이 엘로디 님이 지내실 곳입니다.”
방은 엷은 아이보리색의 벽에 황금으로 치장이 되어있고 천장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가구들은 누가 봐도 고급품이 분명한,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바로 옆방이 아드리안 님의 침실입니다. 엘로디 님의 방과 문이 연결되어 있지만 엘로디 님이 문을 잠글 수 없습니다. 또한 전하의 러트 사이클에 맞춰서 엘로디 님께서 약을 먹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약…이요?”
“예. 아무래도 베타의 몸으로 러트 사이클을 버티는 건 무리가 있으니까요. 발정기 때는 오메가 페로몬을 만드는 약을 드셔야 할 겁니다.”
엘로디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원작에서는 저 약을 먹고 아드리안을 유혹해서 벌을 받았는데, 우습게도 이제는 먹으라고 권유를 받고 있었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짓으로 구석에 서있는 여자 둘을 불렀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엘로디 님을 보살펴줄 겁니다. 나나와 쥴리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로디 님. 나나입니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쥴리아입니다.”
둘은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엘로디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초야를 치렀어야 했는데 어그러졌으니, 아마 오늘 전하께서 침실에 드실 겁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
엘로디는 보나파르트 부인이 말하는 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티를 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보니 황태자도 결혼식 일정대로 사이클을 맞춘 듯했고, 꽤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 감옥 안에서의 일을 막 당했을 때는 저질에 상종 못 할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재 그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엘로디는 하녀들이 이끄는 대로 목욕을 시작했다.
몸 위에 따뜻한 물이 부어지고 살을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크림이 듬뿍 발라졌다. 겨우 며칠이었지만 감옥에서 제대로 관리받지 못해 조금 푸석해졌던 얼굴이며 머리카락이 나나와 쥴리아의 힘으로 매끈하게 변했다.
엘로디는 속이 거의 다 비치는 얇은 슬립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 속옷은 주지도 않았기에 맨몸에 걸칠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설마 주어진 옷들이 전부 이런 것들뿐일까 봐 조금 걱정했다.
그러나 곧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다. 속옷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면 궁에서는 엘로디가 항상 헐벗고 있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엘로디 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쥴리아가 와서 묻자 엘로디는 잠깐 고민하다가 가벼운 수프를 청했다.
며칠을 추운 곳에서 떨면서 지낸 데다 내내 굶기까지 했다. 갑자기 진수성찬을 먹는다고 몸에서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맑은 야채 수프를 먹고 진하게 내린 밀크티를 마시며 황태자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속옷을 입지 않고 몸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이 어색했지만 어느새 조금 익숙해졌다.
엘로디는 둘이 자기에도 지나치게 넓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너무 피곤했다.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지난 며칠간 마리아를 간호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하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엘로디는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 * *
눈을 뜨자 창밖은 어느새 밤이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몸을 일으키자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엘로디는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지만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엘로디가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개를 들어도 좋다.”
아드리안의 말에 엘로디는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있자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제 와서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닐까.
엘로디도 미인이었고 볼륨감 있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어디 내어놓아도 충분히 눈길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애론이 있을 때는 달랐다. 예쁘게 생긴 것과 미의 집합체같이 생긴 것은 다른 것이었다.
듣자 하니 황궁에도 알파나 오메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혹시 자신의 얼굴이 싫어진 것일까.
엘로디는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아드리안이 손짓으로 그녀를 부르자 그의 곁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그의 은발이 더 하얗게 빛나서 천사처럼 보였다.
엘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보라색의 눈이 달빛에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렸다.
엘로디는 그제야 자신이 속옷조차 입지 않고 속이 훤히 보이는 슬립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이리로.”
아드리안의 말에 엘로디는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앞에 천천히 다가가 섰다.
아드리안은 그녀를 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엘로디는 온몸이 묶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의 상태는 아주 안 좋아 보였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엘로디는 낮에 그가 러트 사이클에 돌입했으며 거의 한계까지 약을 먹고 억제시켰다는 것을 기억했다.
“약은……?”
아드리안의 물음에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가 탁자 위에 있는 유리병을 집어서 능숙하게 뚜껑을 열고 안에 있던 약을 꺼내 들었다.
파랗게 빛나는 알약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가 엘로디의 입술 위로 꾹 눌려졌지만 엘로디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오메가 페로몬을 만드는 약이라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엘로디는 저 약을 먹고 그를 유혹했을 것이었다. 비록 행하지는 않았으나 원작에서 실패했던 일이었다. 그것이 싫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드리안은 입술을 짓이기며 눈을 돌렸다.
“전하…….”
어쩐지 한껏 가라앉아 버린 목소리가 나왔다. 엘로디가 손을 뻗어 돌아간 그의 얼굴을 다시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더니 곧 엘로디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엘로디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술을 가볍게 물고 떨어질 듯하자 이번에는 엘로디가 조르듯 그에게 매달렸다.
그것이 마치 기폭제가 된 것처럼 키스가 시작되었다.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고 그녀의 혀를 천천히 더듬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엘로디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모르는 듯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 안을 가볍게 훑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그녀의 치열과 입 안 곳곳을 더듬었다.
도망치는 엘로디의 혀를 끌어내고 가볍게 농락하는 모습이 능숙해서 엘로디는 그의 정조를 의심해 보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건지 아드리안의 웃음에 의한 진동이 입 안으로 전해졌다.
“처음이야, 그대가.”
“안 물어봤어요…….”
엘로디가 고개를 피하자 이번에는 그가 손을 뻗어 얼굴을 돌렸다.
다시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가슴 위로 올라왔다.
“침대에서요, 전하.”
엘로디는 적어도 침대에서 하기를 바랐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침대를 향했다. 당황해서 품 안에 굳어있는 엘로디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눈에서 욕망과 후회 같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엘로디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뒤쪽 벽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이 다시 천천히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귀와 목에도 짧은 키스들을 해주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엘로디는 목을 조금 움츠렸다. 어느새 슬립 안으로 들어오는 손이 체온보다 높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밑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
“예…….”
놀란 듯한 그의 말투에 엘로디는 볼을 붉혔다. 그의 손길에 얇은 슬립이 벗겨지고 순식간에 나체가 드러났다.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엘로디의 가슴에 닿았다. 꽤 큰 편이라고 생각하던 그녀의 가슴이 손 안에 다 들어갔다. 아드리안은 한 손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만지다가 그 끝의 유두를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아!”
처음 느끼는 감각에 짧은 신음 소리를 내자 아드리안은 고개를 숙여 다시 키스해 오기 시작했다. 혀가 얽혀오고 서로의 타액이 섞였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귀를 괴롭히고 그가 손끝으로 가볍게 긁고 만지작거린 유두는 딱딱하게 서있었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떼고 웃더니 계속해서 괴롭히던 가슴의 반대편 유두를 입으로 물었다. 놀란 엘로디의 몸이 튀어 올랐으나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집요하게 혀로 끝을 굴리고 이로 깨물기도 했다.
“하… 읏.”
커다란 공간 안에 엘로디가 간간이 내는 신음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 같았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허리와 등을 타고 내려가 배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후의 일을 생각하자 엘로디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서웠다.
“괜찮아.”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작게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천천히 혀로 귓바퀴를 핥아 올렸다.
“으읏.”
천천히 그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더 밑으로 손이 내려가 허벅지 부분을 매만졌다.
그가 다시 한번 입술을 찾아들었고, 엘로디가 잠시 그의 혀에 신경 쓰던 사이, 음모를 헤치고 그의 손이 음부에 닿았다.
딱딱한 손가락의 끝이 갈라진 부분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한 번도 타인의 손이 닿아본 적 없는 곳의 직접적인 접촉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혀가 귀에서 목을 타고 가슴으로 다시 내려왔다. 손가락이 살을 헤집고 작게 돌출된 살덩이를 쓰다듬었다.
“아!”
갑작스러운 자극에 몸이 떨렸다. 그 감각에 가슴에 닿아있는 아드리안이 웃는지 진동이 느껴졌다. 몇 번이고 음핵이 문질러지면서 아프기까지 한 쾌락이 몸을 덮쳤다.
“전하! 잠깐… 잠…깐만요…….”
“나도 이제 한계라 기다려달라는 말은 못 들어줘.”
엘로디는 입을 열려다가 곧 포기하고 다물었다. 아드리안이 상체를 일으켰다. 문득 그는 옷을 다 입고 있는 것을 알고 얼굴을 붉혔다. 몸을 파는 여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미 맞지 않나. 침실 시녀인 자신은 본인과 가문의 생존을 걸고 황실 남자에게 몸을 제공한 것이다.
어느덧 아드리안의 손엔 은색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이 들려있었다. 잠깐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가 능숙하게 뚜껑을 따고 엘로디의 성기에 병에 담긴 액체의 반절 정도를 부었다.
“읏, 차가워요.”
“참아.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거야.”
“예?”
그러고는 액체를 손가락에 능숙하게 묻히더니 그녀의 몸 안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아, 아파.”
처음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엘로디의 몸이 굳었다. 아드리안의 손이 잠깐 멈칫했으나 곧 천천히 내벽을 긁어내렸다.
마주친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느껴졌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엄지로 음핵을 문지르자 속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자 그는 곧 손가락으로 거침없이 그녀의 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조금 뒤 엘로디는 그가 부어둔 것이 최음제임을 알아차렸다.
하체에서부터 느껴지는 뭉근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아랫배 근처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린 그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남은 액체를 그녀의 가슴에 다 부어버렸다.
“으응. 전하, 싫어요.”
“쉬이, 괜찮아.”
부어진 액체를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다른 손으로 펴 바르며 유두를 자극했다. 잡아당기고 문질러지는 감각에 엘로디는 제대로 생각을 말하지 못할 수준까지 달아올랐다.
짙어진 신음 소리와 손가락이 그녀의 질을 들락거리며 내는 질척한 마찰음이 방 안을 채웠다.
아드리안은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엘로디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귀 끝을 살짝 물고는 혀를 내밀어 귓바퀴를 건드리다가 거칠게 귀 전체를 핥았다.
질 안쪽으로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오면서 엄지로 음핵을 긁어내렸다.
“아… 아!! 아아!”
순식간에 찾아온 절정에 엘로디의 몸이 튕겨 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고 두 다리가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벌벌 떨렸다. 전생에서도 이런 경험은 없었다.
알지 못한 감각에 엘로디는 서서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하얗게 변해가는 그녀를 모르는 건지 아드리안은 손가락을 뽑아내고는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느슨하게 벌어진 셔츠 사이로 가슴이 드러나고 바지 사이로 그의 거대한 성기가 흉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디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큰 크기에 몸이 긴장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넣을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 그가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구멍에 맞춰 귀두를 조금 문질렀다. 그러고는 올바른 위치를 찾은 듯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이미 그 역시 한계까지 참아왔기에 더 이상의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천천히 손가락이 내어둔 길을 따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무리 최음제를 발랐어도 첫 관계여서인지 너무 아팠다. 엘로디는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시트를 잡고 고통을 뱉어냈다.
“아파… 아파요! 잠깐만. 잠깐만요, 전하! 아파!”
“하아, 미안. 나 더는.”
엘로디는 몸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에 아프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 때문에 엘로디는 키스에 집중하지 못하고 울며 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아드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에 맞춰둔 러트 사이클을 강한 약으로 며칠을 눌러두었고, 그의 몸은 약의 부작용으로 예민하고 약해져 있었다.
조금만 자극이 와도 페로몬을 누르지 못하고 아무나 덮쳐버리려 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시간을 들여 엘로디의 몸을 풀어주는 것까지가 그가 해낼 수 있던 최대의 배려였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의 몸을 그대로 쳐올렸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울먹이는 소리가 섞여 마치 짐승들의 교합 같았다.
고통에 물러나려는 허리를 붙잡고 쭉 성기를 빼었다가 다시 깊숙이 처박았다. 그 감각에 엘로디가 퍼덕였으나 아드리안은 그대로 무시했다.
그리고 길들이듯 그녀의 몸 안을 천천히 들락거렸다. 엘로디는 제 몸 안에 거대한 이물질이 들락거리는 감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응… 으응!”
시간이 지나면서 피와 애액으로 조금 움직이기 원활해지자 엘로디는 고통에 가려져 있던 쾌감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리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프고 불편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아. 흐.”
눈물로 부옇게 변한 시야에 신음 소리를 씹으며 열에 들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들어왔다. 제 몸 위에서 매체에서나 보던 황태자가 거칠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을, 열등 생물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이 짐승처럼 허덕이는 엘로디를 꿰뚫는 것 같았다.
순간 긴장감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게 자신의 깊은 내부를 들킬 것 같은 감각에 등 뒤로 소름이 돋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엘로디, 좀 더 힘을 빼야……!”
아드리안은 제 물건을 끊어먹을 것처럼 달라붙는 내부의 압박에 아찔함을 느꼈다. 몸이 굳은 그녀를 위로해 주려 손을 뻗어 닿아있던 음핵을 만져주었다.
다시 몰려오는 쾌감에 엘로디의 몸이 뒤로 꺾였다. 어느새 힘이 빠지고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엘로디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고 버티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등을 받치고 그 밑을 옆에서 나뒹구는 베개로 받쳐주었다. 작은 몸을 쳐올릴 때마다 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아드리안은 입술을 핥았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슴 근처의 부드러운 살을 빨아올리며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그에게 박히면서 서서히 익숙해지는지 엘로디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성기를 길게 빼내었다.
“흐읏.”
내부를 긁어내리며 빠지는 감각에 엘로디가 몸을 떨었다.
귀두만 걸친 채로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다시 세게 밀어 넣었다. 엘로디의 양발을 어깨에 올린 채로 부드러운 둔부에 음낭의 형태가 뭉개지도록 강하게 쳐댔다.
“아… 으읏!”
몸 안에 들어와 있던 그가 순식간에 부피감을 더하고는 따뜻한 무언가가 몸 안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남자의 성기를 뽑아내자 그녀의 다리 사이로 피와 정액이 섞여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을 내려다본 엘로디는 안도감에 몸의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내쉬고는 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주치자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러트 사이클에 들어선 알파는 며칠이고 상대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게다가 상대방은 오랜 시간 본능을 억제하는 약을 먹어왔던 상태였다.
“자…잠깐만요, 약을… 약을 먹어야.”
엘로디는 이제 와서야 보나파르트 부인이 왜 약을 알려줬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알파인 아드리안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성욕에 맞춰서 엘로디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약이었던 것이다.
마법을 쓴 것인지 분명 테이블 위에 있었을 파란색의 알약이 담긴 약병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병 안에서 약을 꺼내고는 엘로디의 입술 위에 올려주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침을 삼키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아드리안은 만족한 듯 웃더니 고개를 비틀고 누워있는 엘로디에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와 능숙하게 엘로디의 혀를 휘감았다.
입 안에서부터 아까와 다른 고양감에 둘은 서로를 정신없이 더듬기 시작했다. 혀가 얽히고 질척한 소리가 커졌다.
어느새 상의를 벗어버린 아드리안이 양손으로 엘로디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그녀의 머리와 턱을 고정하고 잡아먹을 듯이 키스를 해왔다. 입 안 전체가 성감대가 된 것 같았다. 아드리안의 혀가 훑고 지나간 자리가 화끈거리고 볼이 달아올랐다. 몸 안쪽에서의 열기가 밖으로 흘러내렸다.
어디선가 나는 꽃향기에 엘로디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제 앞에서 눈을 감고 키스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점점 진해지는 향기와 아까 바른 최음제의 효과인지 다시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몽롱한 기분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입술을 뗀 아드리안이 물었다.
“나한테 어떤 향기가 나?”
입술을 떼고 자신을 보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황태자가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장미 향기가 나요, 전하.”
“나한테 알려준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야.”
그가 웃었다. 그의 은발이 웃음소리에 맞춰 흔들리고 예쁜 제비꽃 색의 눈이 곱게 접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사람이다.
엘로디는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드리안은 그 작은 힘에 이끌리듯 고개를 숙여서 목 근처의 살을 입으로 훑었다. 아픈 듯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를 어르듯 그의 손이 등을 부드럽게 훑었다.
“엘로디, 엎드려 봐.”
그의 말에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뒤집었다. 정신은 없고 몸이 그가 시키는 대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엉덩이 들고, 그렇지.”
엘로디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들고 무릎으로 하체를 지탱했다. 자신의 성기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세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베개에 묻었다.
아까의 섹스로 살짝 부었는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드리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대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질구가 훤히 보이게 고정시켰다.
찬 공기가 닿자 엘로디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랫부분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 소리가 커지는 것과 함께 애액이 흐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만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아까처럼 엉망진창으로 박히고 싶다는 욕망이 떠올랐다.
마치 그것을 안 것처럼 아드리안의 손가락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내벽을 더듬어주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쾌감이 몸을 뒤덮었다.
“으…으응!”
이미 한 번의 관계 이후 예민해지고 부어있던 질이 자극에 반응하여 그의 손가락에 들러붙었다. 엘로디는 시트를 쥐고 쾌감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엘로디의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는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구부려서 질 내에 부산물들을 긁어내리면서 질벽을 훑었다.
하얀 다리를 타고 진한 정액과 피가 엉겨서 흘러내렸다. 아드리안은 시트를 들어 올려 그녀의 다리를 닦아냈다.
그 느낌만으로도 엘로디는 가볍게 가버렸다.
‘말도 안 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쾌감이 아니었다. 몸 내부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어서 그 갈망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선을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상태를 모르는 듯 정액과 애액이 흐르는 곳에 혀를 대고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놀란 엘로디가 갑작스러운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의 혀가 키스하듯 음핵에 닿았다. 혀에 감겼다가 쪽쪽, 소리를 내며 짧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몸을 지탱하던 엘로디는 눈앞이 안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그…그만!! 전하, 너무… 아앙.”
따뜻한 살덩이가 예민한 부분에 닿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에 제대로 버틸 수가 없었다. 추잡한 소리가 귀에 걸리고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과한 쾌감에 눈물이 배어들었다.
“으응! 싫어……!”
“거짓말, 다른 걸 더 해주길 원하잖아.”
엘로디는 이성을 지키려는 머리와 그를 원하는 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서워하지 마.”
그가 안정시키려는 듯 엘로디의 몸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의 혀가 허벅지 안쪽에 닿았다. 쪽쪽, 소리가 나면서 예민한 안쪽에 표식을 남기며 내려갔다. 그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질 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 따라 다리 사이에서 들리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보며 발끝을 웅크렸다. 단정한 신의 사제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욕정하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의 행동은, 배덕감과 동시에 기묘한 기분이 들면서 등이 저릿했다.
허벅지를 탐하던 그의 혀가 어느새 올라와 뾰족하게 질 내부의 얕은 부분과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다 다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감각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쾌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녀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신음 소리가 높아지고, 어느새 다리 아래는 그가 핥아내지 못한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베타로서는 겪어볼 일 없는 알파의 페로몬에 엘로디의 견고했던 이성은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손끝으로 아까 그가 해주던 것처럼 유두를 당기고 긁어내리면서 더한 쾌감을 원했다.
“아응… 기분… 좋아……. 전하! 더……!”
“하아… 엘로디…….”
엘로디가 그대로 가버렸는지 허리를 뒤틀며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바지를 벗어버리기 위해 그녀의 비부에서 입을 떼었다.
엘로디가 휑해진 다리 사이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벅지를 비벼댔다. 무언가 부족했다.
그러더니 곧 자신의 손가락으로 그가 핥아준 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보고 있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 잠깐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는 음핵을 문지르고 다른 손으로는 질 내를 문질렀다.
아드리안은 엘로디에게 다가가려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몸 안으로 들락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아 거칠게 손가락이 들락거리고 살을 누르는 모습이 어설프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동작에도 절정을 느끼는 건지 엘로디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엘로디는 그가 자신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것보다 쾌락을 원했다.
“하읏… 전하… 빨리요!”
엘로디의 재촉에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옆으로 치웠다. 그의 손길에 따라 빠져나온 손가락 끝으로 길게 애액이 딸려 나왔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성기를 쥐고 귀두를 입구에 맞추고 가볍게 문질렀다. 엘로디는 엉덩이를 비비며 그가 어서 넣어주기를 재촉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바람에 부응하듯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아읏!”
이미 길이 들여져서인지 수월하게 들어갔지만 그래도 아팠는지 엘로디의 눈가가 발개졌다. 아까의 성행위로 발갛게 부어오른 곳이 쓰라렸다.
그러나 곧 방금 전의 섹스로 예민해진 질 내가 그의 페니스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약을 먹어서인지 그의 모양이 살갗 너머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느긋하게 질 내를 왕복하는 그의 움직임에 엘로디는 부족함을 느꼈다. 좀 더 아까처럼 세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머릿속이 이성적 사고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오로지 본능만을 좇으며 쾌락으로 탁해진 목소리를 울리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가 질의 중간쯤을 사선으로 찌르자 엘로디의 신음 소리가 커졌다.
“여기가 좋아?”
높아진 신음 소리에 웃으며 아드리안은 그 부분을 귀두로 눌러서 천천히 문질렀다. 세게 문지를 때마다 발작적으로 진득하게 달라붙는 질벽에 머릿속이 마비될 만큼 짜릿해졌다.
“네에… 거기요……. 거기 더 해주세요.”
“원하시는 대로.”
엘로디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내려놓고, 아드리안이 시키는 대로 좋은 부분을 말하고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드리안 역시 그녀의 몸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는 목에서부터 등으로 키스 자국을 남기며 핥아 내렸다. 등이 예민한지 입술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이 작은 동물 같아서 재밌었다.
어느새 그녀를 놀리는 것에 집중해 움직임이 느려지자 엘로디가 허리를 틀고 그의 물건에 자신이 잘 느끼는 부분을 문지르기 위해 애썼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천천히 물건을 뽑아내서 얕은 곳만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엘로디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응…응! 모르겠, 히이익!”
입구 부분을 세게 문지르자 엘로디의 몸이 튕겨져 올라왔다.
좀 더, 깊은 곳을 원했다. 애태우는 몸짓에 엘로디는 그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말해줘야 알지.”
“하읏! 전하 더, 더 주세요!”
이제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그를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성기에 달라붙은 질벽이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며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더! 더 깊게에―”
그녀의 귀에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아드리안이 웃었다.
그러나 엘로디는 자신의 몸 안에 아플 정도로 빠듯하게 들어찬 성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까보다 더 커진 듯한 부피감에 이제는 기쁘기까지 했다.
아드리안은 작게 웃고는 그대로 끝까지 박아 넣고 피치를 올렸다. 빠르게 뒤에서 쳐오는 힘에 엘로디의 몸이 앞쪽으로 가는 것을 크고 뜨거운 손이 허리를 붙잡고 다시 그에게 잡아당겼다.
“아!!”
엘로디가 시트를 꽉 쥐고 있다가 그대로 가버리면서 무너지려는 것을 그가 한 손으로 잡아 올리고 허벅지 위에 앉혔다.
자신의 무게가 더해져서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것에 놀랐는지 엘로디가 거의 잡아먹을 듯이 압박하기 시작했다.
“윽! 엘로디, 힘을… 빼……!”
“아… 읏…….”
너무 과한 쾌감에 눈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아드리안이 뒤에서 부드럽게 안아서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혀로 핥아 올려주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유두를 매만지고 다른 한 손은 이어져 있는 부위의 조금 위에 위치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
엘로디는 남자의 가슴에 뒷머리를 대고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의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온몸에 열이 나는 것처럼 뜨겁고 음부는 쓸려서 화끈거렸다.
그러나 기분이 너무 좋았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좋아서 이 순간이 계속되길 바랄 정도였다.
“더. 하응… 전하, 더요.”
“읏… 하… 하읏.”
아드리안은 다리에 힘이 빠져 자꾸 쓰러지려는 그녀를 다시 엎드리게 하고 거칠게 뒤에서 박아대기 시작했다. 아까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들락거리던 비부에 두껍고 단단한 성기가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신음 소리가 높아지고, 엘로디 몸에서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 나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그 향을 알아차리자 그의 물건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벽이 그 감각에 환희를 느끼듯 그를 더 압박했다. 엘로디는 이제 거의 흐느끼듯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스스로 손가락으로 음핵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절정에 질벽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하으… 전하!”
압박감에 몇 번 더 움직이고는 몸 안으로 아드리안이 파정을 했다. 엘로디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하아…….”
아드리안이 한숨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에서 아직 죽지 않은 성기를 빼내었다. 단단한 귀두의 끝이 엘로디의 예민한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허벅지를 타고 정액과 애액,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아드리안도, 엘로디도 서로의 페로몬으로 이성을 날려버렸다.
엎드려 있던 엘로디가 몸을 돌려 아드리안을 끌어안았고 아드리안은 그 작은 힘에 끌려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방 안은 신음 소리와 질척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 * *
황후는 천천히 유리 온실의 문을 열었다. 달빛을 받으며 서있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그녀를 맞이했다.
“이자벨.”
“폐하, 대체 왜 그 아이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화가 난 이자벨에게 황제 브느와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손이 황후의 볼에 닿았다. 황후는 브느와의 손길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아이라면 잘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드리안은 반려를 찾았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그리고 제국민들이 얼마나 바라던 일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브느와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황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남자의 품에 속수무책으로 끌려와 안긴 이자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반려가 결혼하기 싫다고 떠난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자벨은 브느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긴 은발을 쓸어내리며 황제는 작게 웃었다.
“들어갑시다.”
“예.”
둘이 떠난 자리에는 고요한 달빛만이 남아있었다.
* * *
아드리안과 엘로디는 일주일 넘게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성욕을 감당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약을 먹고 이성을 날려버렸다. 어떨 때는 식사를 하다가도 몸을 섞기도 하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서 박아대기도 했다.
몇 번이고 몸을 남자의 정액으로 꽉 채우고, 비워내기를 반복했다.
엘로디는 차라리 약을 먹고 이성을 날려버릴 때가 더 편했다. 맨정신이었을 때는 마치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던 시간이 부끄러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약을 먹으면 성욕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서로를 갈망하며, 정신없이 몸을 섞었다. 눈을 뜨자마자 몸을 섞고, 그의 성기를 품은 채로 잠이 들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내부가 그의 성기에 꽉 들어맞는 것만으로도 엘로디는 환희를 느꼈다. 마치 성행위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드리안이 자신을 거칠게 다뤄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 그 감각이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서로가 서로를 침식시키는 것 같아서 어떤 날은 무섭기조차 했다.
그러나 다시 몸을 섞으면 그런 생각조차 오래 할 수 없었다.
약을 먹고 나서부터는 그저 그를 갈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열흘째가 되자 길었던 황태자의 러트 사이클이 끝났다.
궁에 들어오고 나서 자신의 몸 위를 느긋하게 눌러오던 무게감과 질 내를 채우던 부피감 없이 처음으로 눈을 떴다.
“아…….”
엘로디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말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안 보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싸늘하게 식은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탄식이 터져 나왔다. 침실 시녀는 그런 존재였다.
엘로디는 어쩐지 휑하니 뚫린 듯한 가슴 근처를 부여잡았다.
잠자리에서 다정했던 것은 그냥 그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열흘을 보낸 방이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어색했다. 멍하니 고개를 돌려 테라스 쪽을 바라보자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서 침대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다리 사이로 지난밤의 흔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에 물기가 올라오고 녹색의 눈이 일렁거렸다.
고였던 물이 이내 바닥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엘로디는 손을 올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슬퍼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고작 성관계였다.
고위 귀족과 결혼하는 것만 아니라면 혼전 관계 몇 번 하는 것은 흠도 아니었다. 게다가 엘로디가 전생에 살았던 곳은 혼전 성관계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던 세계였다.
그러나 가슴속 한 군데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여름날 같았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엘로디는 그제야 자신이 리암과의 충만한 결혼 생활을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항상 가던 카페에 가서 그는 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마시고, 자신은 늘 마시던 커피를 마시며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는 그 생활이 언제고 이어지기를 원했었다.
“나쁜 새끼.”
햇빛을 받으면 반짝이던 검은색의 머리카락, 종종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들던 황금색의 눈. 그리고 그 눈동자에 움직이지 못해서 굳어버리면 슬며시 돌려주어 보여주던 예쁜 이마, 코, 입술, 턱으로 이어지던 선들을 기억해 냈다.
가끔 저의 짜증을 받아주던 단단한 가슴도, 그녀를 쉽게 들어 올려주던 두꺼운 팔도, 이제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첫 키스조차도.
엘로디는 마침내 그를 완전히 떠올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신과 리암은 두 번 다시 그런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엘로디는 등을 웅크리고 소리 높여 울었다.
애론의 결혼식 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생각해 내지 못한 이 관계의 끝을 다른 남자와 짐승처럼 몸을 섞고 난 뒤 떠올렸다는 것이 더 비참했다.
그와 함께하던 세상은 끝났다.
한참을 울던 엘로디는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아드리안은 10여 년 전 알파로 각성한 이후 처음으로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드리안이 장미의 궁으로 들어간 지 열흘이 넘어가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던 가스파르가 아침부터 찾아와 소리를 질러댔다. 목청이 얼마나 큰지, 한 번 잠이 들면 잘 일어나지 못하는 아드리안이 단번에 눈을 뜰 정도였다.
아침에 유난히 약한 그를 알았기에 가스파르 역시 마법으로 제 앞에 아드리안이 나타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에 몸이 굳었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저 엘로디가 깰 수도 있으니 조용히 기다리지 않으면 다시는 말을 못 하게 해주겠다는 온화한 협박 정도만 하고 돌아가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그러고는 지금 저러고 있는 것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콧노래를 부르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전하, 욕망을 푸니 그리 기분이 좋으십니까?”
“뭐?”
아드리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는 가스파르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여자라고는 손도 못 대고 오메가 약혼자만 25년을 수절하면서 기다렸는데, 다른 알파 손잡고 날아버려서 내내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리셨습니다. 밖에 시종들을 하나 빼고 모조리 바꿔버리신 건 기억하시는지요?”
“그 가증스러운 말투 좀 집어치워.”
“아이고, 미천한 제 말투가 마음에 안 드시는군요. 이제 저는 제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전하.”
“야!!”
아드리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가스파르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기분이 좋다니 다행입니다.”
“기분 좋을 게 뭐가 있나. 이미 내 소문이 안 난 나라가 없을 텐데.”
“뭐… 그렇지요. 그날 각국 축하 사절들이 전부 와있는 곳에서 반려가 도망가 버렸으니.”
아드리안은 애론이 도망가고 나서 거의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려야만 했다.
황제와 황후는 사랑의 도피를 보고 드러누워 버렸다. 피해 당사자이자 황태자인 자신이 각국에 서신을 보내고, 대외적으로 개망신을 당한 황실의 한 자락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일 처리를 모두 혼자서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결혼식에 맞춰둔 러트 사이클을 다시 억제하기 위해 독하게 처방된 약을 먹으면서 몇 날 며칠을 보내야만 했다.
사실 지하 감옥에 처박아둔 나바르 후작가의 처우에 대해서는 그 며칠 동안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황명이 떨어졌고, 황제에게 명을 물러달라 찾아갔다 욕만 먹고 쫓겨나서 억울했다.
“그래서 첫날밤은 어떠셨습니까? 듣자 하니 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붙어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 걸 알아서 뭐에 쓰려고.”
“타블로이드지에 비싸게 팔아먹어야죠.”
아드리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후회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엘로디 님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노골적으로 물어오는 그의 말에 아드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냥 내가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 부분은 제가 뭐라 해드릴 말이 없네요.”
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때 하얗게 질린 사용인이 빠르게 다가와 근처에 있는 시종에게 속삭였다. 시종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엘로디 님이 울다가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아드리안은 얼굴을 구겼다.
가스파르는 황태자를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보아 왔지만 그가 이 정도로 호오(好惡)를 드러내는 것이 드문 일이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의사를 붙여라. 필요한 건 뭐든 사용해도 좋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역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일이 너무 많이 밀려서 아침에 그녀와 얼굴도 마주치지 못하고 급하게 나온 것을 후회했다.
단 한 번도 제정신인 상태로 이야기를 하거나 다정하게 마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인사라도 나누었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을 끌고 나온 가스파르가 얄미워져서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을 느낀 탓인지, 가스파르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엘로디 이야기를 꺼냈다.
“엘로디 양은 몸이 약한가 봅니다.”
“…….”
“아니면 누군가 엄청나게 괴롭히셨든가요.”
“하아…….”
아드리안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하자 가스파르는 얼굴을 잠깐 일그러뜨렸다가 표정을 지웠다. 이 상냥한 황태자는 자신을 두고 도망간 전 약혼자나 그 가문에 대한 미움이 없는 것 같았다.
“황명이니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은 그녀의 오라비가 한 것이잖아.”
“그렇다고 아무 가문 귀족 여식을 데려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엘로디가 만일 황명을 거부했다면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당장 언제고 발정기에 돌입할 기세였고, 빌어먹을 황실은 그놈의 결벽증을 버리지 못해 백작가 이상 가문의 베타이고 처녀이기까지 한 여식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세상에 어느 가문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직책에 제 딸을 내어놓겠는가.
“그래. 결국 내가 알파이기 때문이지.”
아드리안은 이제 당분간 약을 먹어서는 안 된다. 황명이 내려지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약의 부작용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원래대로였다면 후작가를 자작가로 강등시키고 5년간 수도에 입성하는 것을 금지한 뒤, 엘로디를 황후의 시녀로 들여 황실에 봉사하도록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복권시켜 줄 일이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약의 부작용으로 쓰러지자 황후는 그녀를 시녀로 받지 않겠다고 해버렸고, 아들이 더 이상 약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황제가 멋대로 그녀를 침실 시녀로 봉해버린 것이다.
“폐하께서는 속이 시원해 보이시던데요.”
“폐하 본인께서도 이 결혼을 별로 탐탁해하지 않으셨잖아.”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아드리안은 몸을 일으켜 집무실 창가로 다가갔다. 어느새 여름의 한복판까지 와버려서 정원은 온갖 종류의 장미가 가득 피어있었다.
엘로디는 자신에게 장미 향이 난다고 했다.
알파나 오메가에게서는 독특한 페로몬 향이 나는데 평소에는 거의 나지 않다가 러트 사이클이나 히트 사이클에 들어서면 향이 진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엘로디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사탕 향기 같은 게 났다.
“그런데, 엘로디 님께 가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 안 한다고 아침부터 궁전 앞에서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엘로디 님께 제가 죄송해서 그렇지요.”
“이것만 마무리 짓고 가야지.”
그녀의 몸에도 분명 안 좋을 약을 먹이고 열흘 가까이를 안았다.
아드리안은 자신에게 그런 부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거의 나신에 가까운 엘로디의 녹색 눈과 마주치는 순간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애론 쪽은 어떻게 됐지?”
“아무래도 마법사니까요. 의뢰는 넣어두었는데 쉽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옆에서 지키고 있는 리암 경도 만만치 않아서요.”
“능력만으로 그 나바르 후작가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라간 자니 만만치 않겠지.”
가스파르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저 그리고, 이건 상관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뭔데?”
“그게… 리암 경의 가족이 몇 달 전부터 행방불명이라고 합니다.”
“리암은 알고 있었다고 하던가?”
“네. 주변에 수소문해 본 결과 그 가족이 일주일간 보이지 않자 후작저 쪽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가스파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리암 경이 며칠 뒤에 집에 다녀갔다고 하고요.”
“신고도 안 하고?”
“네.”
아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일단 밀어두었다.
“황실 내에 있는 마법사를 하나 보내서 조사시켜라.”
“예.”
말을 마친 둘은 한참을 침묵 속에서 일만 했다. 아드리안은 한시라도 빨리 엘로디에게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몇 시간 뒤 가스파르가 일하느라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아드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정말 잡아다가 죽이실 겁니까?”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가스파르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운명의 반려 아닙니까.”
“그놈의 운명이라느니, 반려라느니 아주 지긋지긋하다. 애론조차도 내가 운명의 반려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가스파르는 어린 황태자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았던 어떤 백작가의 여식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가 울며 스스로의 피를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도망가 버릴 걸 그랬어.”
가스파르가 그때를 기억해 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아드리안도 가스파르도,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쓰러졌던 엘로디가 눈을 떴다는 소식에 한창 일을 하던 아드리안이 장미의 궁으로 찾아갔다.
급하게 의사인 패트리샤를 불러 엘로디를 진찰하게 했다. 조금 뒤 방에서 나온 패트리샤가 과로와 긴장이 갑작스레 풀린 것 때문에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전하, 부디 당분간 엘로디 님을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파렴치한이 된 거 같잖아, 패트리샤.”
“예. 맞습니다. 상대는 올해 막 스무 살이 된 아가씨입니다.”
그녀는 변태를 보는 듯한 눈으로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쉬지 않고 일주일을 넘게 성관계를 맺으니 당연히 몸이 약해지죠!”
“…….”
“게다가 그 오메가 페로몬을 만드는 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패트리샤의 비난을 들은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목덜미에서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맘에 안 드는지 거칠게 쓸어 올려 묶으며 말을 이었다.
“상대는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입니다. 알파나 오메가의 체력 기준으로 그녀를 몰아가지 마세요. 아무리 침실 시녀라지만 전하께서 이런 취급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거침없이 말을 뱉어내던 패트리샤는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옷 정도는 제대로 입혀주세요.”
“옷?”
패트리샤는 그 반응에 다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나가버렸다.
아드리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기 위해 엘로디의 방으로 들어갔다.
엘로디는 침대에 누워있다가 아드리안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쥴리아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들어온 아드리안이 주변을 물리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제야 엘로디가 몸 라인이 다 드러나는 슬립 한 장만 걸치고 있는 것을 알고 볼을 붉혔다. 옷 정도는 제대로 입혀주라는 패트리샤의 말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였다.
너무 얇아서 추위를 막을 기능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보이는 슬립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했다. 적어도 드러난 상의는 그래 보였다.
오한이 들었는지 딱딱하게 일어선 유두의 존재감이 그대로 들여다보여 아드리안은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옷을 왜 그거밖에 안 입은 거지?”
“예?”
그러고 보니 첫날에는 아예 속이 다 비치는 슬립만 입고 있었다.
“몸이 안 좋잖아. 그렇게 얇게 입고 있으면 또 열이 오를 수도 있어.”
“그… 받은 게 이거밖에 없어서요.”
엘로디가 겨우 말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웠다.
아드리안 역시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자꾸만 눈이 그녀의 가슴골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애썼다.
“말해둘 테니 필요한 건 사도록 해. 적어도 제대로 된 옷 정도는 있어야지.”
“예.”
엘로디의 대답에 꺼림칙함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만날 때마다 아드리안 스스로도 민망할 만큼 충분히 짐승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취조실에서 했던 행위나 지난 열흘간 침대 위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녀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 취조실에서 있었던 일은 미안해. 그때 며칠 밤을 새운 데다가 약까지 먹어서 좀 날카로워져서… 변명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저희 가문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으세요.”
아드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오라비인 애론은 가문을 모조리 죽일 수 있을 만한 일을 벌이고 도망갔는데, 오히려 그녀는 그 일을 해결하려 애쓰고 있었다.
꼿꼿이 앉아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자신만을 바라보도록 하고 싶었다.
그때 취조실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올려다보던 그 눈빛을 떠올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아드리안에게 기묘한 가학심을 자극한다는 걸 엘로디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폐하께서도 나바르가를 내치진 않을 거야. 원래는 그대가 어머니의 시녀로 갔어야 했는데… 일이 중간에 꼬여서.”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도 좀 잠잠해지면 나바르가를 후작위로 복권시키실 생각이시다. 아무래도 무기의 대부분이 그 가문에서 나오는 것인데. 자작인 채로는 일 처리가 수월하지 못할 테니까.”
그의 말을 듣자 엘로디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나바르 후작가는 아주 오랫동안 황실에 충성해 왔고, 전쟁이 사라지고 황실과 귀족이 명예직처럼 되어가고 있는 현재에는 독특한 총기류와 마도구의 개발로 많은 부를 쌓아 올린 가문이었다.
“그래도 애론과 리암은 평생 도망 다녀야 할 거다.”
“…죽이지 않으실 건가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아드리안은 웃었다. 아까 패트리샤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아가씨라고 한 것을 기억해 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손가락 사이의 연한 살을 자극했다.
“발견되면 죽이려 들겠지만, 그 둘 다 뛰어난 능력자들이잖아. 적당히 쫓다가 이쪽에서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버리면 다들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저희 가문 사람이 황실과의 오랜 약속을 깨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욕적인 행동을 했잖아요.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관대하신 이유를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운 듯한 그녀의 얼굴에 아드리안은 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몰라도 나는 황실을 모욕했다고 다 죽이고 그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드리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엘로디는 두 놈을 잡아와서 제 앞에서 목을 날려버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워 입을 내밀었다.
아드리안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남자였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내밀고 고민하는 엘로디의 모습이 귀여워 몸을 숙여 그녀의 볼에 입술을 살짝 댔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아드리안도, 엘로디도 놀랐다.
엘로디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원한다면 잡아와 줄게.”
아드리안이 그 상황을 무마하듯 그녀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
“아니요. 그냥 영원히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엘로디가 몸을 틀어 아드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마주한 그녀의 얼굴에서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에게 매달려 더해달라고 울부짖던 모습이 겹쳐 보여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숨기려 고개를 살짝 내리자 꽤 커다란 가슴의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아드리안은 또 그녀를 붙잡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이라도 당장 짓누르고 싶었다.
“그… 내 러트 사이클이 정말 불안정해서 의사 말로는 몇 년간은 약도 못 먹을 거라고 했거든.”
“괜찮습니다, 전하. 전 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거예요.”
큰 소리로 장담하듯 말한 엘로디는 곧 자신이 맡은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얼굴을 붉히고 눈을 피했다.
“으응…….”
둘은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나서 그래도 당분간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당부를 하고 훌쩍 나가버렸다.
그런 그가 나간 자리를 매만지며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본심을 고민했다. 그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죄인 신분인 자신에게도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그가 하는 행동들을 보면 마치 연인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녀가 지하 감옥에서 느꼈던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 앞에서 약을 먹고 몸을 여는 것이 굴욕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대체 이제 어떡해야 하지.”
멍하니 혼잣말을 하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 * *
그 뒤로 아드리안은 한동안 엘로디를 찾지 않았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그녀와 성교를 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처음의 기억이 너무 강했다.
엘로디의 얼굴을 마주하면 당장이라도 눕혀서 옷을 벗기고 울면서 빌 때까지 박고 싶다. 부드러운 가슴을 잡아당기고 그녀의 몸 안에…….
“하아…….”
이쯤 되면 중증이다.
아드리안은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와 동침을 하지 않은 이후로 그는 바짝 날이 서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의 심기를 알아차리고 마치 그를 쉽게 깨질 유리처럼 다루고 있었다.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오늘 약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가 표정을 지우자 더욱 차갑게 보여 시종은 침을 삼키고 머리를 조아렸다.
“보아르네 백작가의 세실 영애라고 합니다.”
“세실이?”
아드리안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고민도 없이 말했다.
“바쁘다고 하고 돌려보내.”
“그게…….”
“전혀 바빠 보이시지 않으십니다, 전하.”
시종의 뒤에 가려져 안 보이던 세실이 말을 꺼내며 앞으로 나왔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제멋대로 구는군. 쫓아내.”
“황후 폐하께서 찾아뵈라고 해서 온 것입니다.”
세실이 부드럽게 웃으며 갈색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겼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드리안을 훑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것이 될 줄 알았던 남자였는데 그가 운명의 반려를 찾고 나서는 그녀의 손을 떠나버렸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알파라면 운명의 반려가 있으니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려가 도망가 버렸으니 이제 그녀는 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실은 강하지 않지만 분명 알파였다.
오메가인 애론이 도망갔으니 그다음 순위는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알파인 자신일 것이다.
그래서 황후가 그녀를 불러 황태자에게 찾아가라고 한 것이었다.
“얼굴을 봤으니 이만 나가줬으면 좋겠군.”
아드리안은 차가운 태도로 세실을 대했다.
세실은 그러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가 앉아있는 집무실 책상 앞에 섰다. 그녀가 미리 말해두어 자신을 데려온 시종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전하.”
세실의 하얀 손이 그의 부드러운 볼에 닿으려 하자 아드리안의 손이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녀를 배려하지 않고 쳐낸 힘에 손이 화끈거렸다. 세실은 내쳐진 제 손을 다른 손으로 쥐었다.
“숙녀에게 너무 야박하신 것 아닌가요?”
아드리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더 깊게 가라앉았다.
“죽고 싶나.”
세실은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중심으로 분노를 타고 그가 가진 마나가 요동쳤다.
분노에 찬 그의 새하얀 얼굴마저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그 감각에 희미하게 웃으며 세실은 환희를 느꼈다.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자신이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신의 자손이다. 베타 같은 천한 것들의 손에 닿아서는 안 된다.
그의 분노도 정염도, 언젠가 모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되뇌며 세실은 웃었다.
“오늘은 얼굴만 뵙고 가는 것입니다, 전하.”
“두 번은 없다, 영애. 만일 다음에 또 내 눈에 띄면 그땐 정말 목을 칠 것이다.”
그의 요사스러운 보랏빛 눈에 새파란 분노가 타올랐다.
세실은 숨이 막히는 기분에 침을 삼키고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뒤돌아서서 나가는 그녀의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영애가 한 일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세실의 몸이 멈추었다.
완벽하게 숨겼던 일이다. 황후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들킨 것일까.
세실은 그의 말에 잠깐 동요했다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집무실을 걸어 나왔다.
조금만 더 하면 그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가 그 일을 용서할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황후와 해야 할 이야기가 생겼다.
아드리안이 엘로디를 찾지 않게 되자 그녀가 하는 일은 한가하게 방 안에서 나나와 쥴리아와 농담이나 하고, 가끔 보나파르트 부인이 어디서 데려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코르티잔들에게 밤 생활 교육을 듣는다거나 하는 것뿐이었다.
전생에 이곳보다 훨씬 성적으로 열린 세계에서 살다 왔기에 놀랄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엘로디가 어리석었다.
세상은 넓고 엘로디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날도 엘로디는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아드리안을 기다리는 일에 사용하기 때문에 그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그녀의 시간은 무의미했다.
오늘따라 다들 바쁜지 엘로디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벼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방치되고 있었다. 심심함을 이기지 못한 엘로디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밖을 나가기로 했다.
‘궁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허락하셨으니 이 정도는 되겠지.’
그동안은 누군가가 막은 것이 아니라 엘로디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밖을 나가지 못했다. 어찌 보면 몸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디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정중하게 대해주었고 이곳은 황태자의 궁이니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 룸을 뒤져서 사용인들이 입을 것 같은 옷을 꺼내 입고 머리를 묶어서 하나로 틀어 올려 리본으로 묶었다. 엘로디의 외모가 눈에 확 띌 정도로 뛰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다행히 무난하게 주변에 스며들 수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엘로디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것 같다는 불안감과 몰래 놀러 나가는 것 같은 짜릿함에 슬쩍 웃음이 나왔다.
누구도 알아보지 않고 자기 일에 바쁜 것을 보고 엘로디는 안도감을 느꼈다.
엘로디는 건물을 나와서 궁의 정원으로 나왔다. 한낮의 뜨거운 시간이 지나서 햇빛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공기는 후덥지근했기 때문에 정원으로 걸어 나가는 엘로디의 얼굴에 땀이 저절로 맺혔다.
황태자가 머물고 있는 궁의 정원은 그 화려함으로 유명했고, 엘로디는 궁으로 들어올 때를 제외하고는 이곳의 이름만 들어봤었다.
천천히 짙은 장미 향이 가득한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자 조금 시원해져서 주변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엘로디가 서있는 근방의 나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녀의 허리까지 오게 잘려있는 나무들이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을 형상화하여 심어져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엘로디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무와 햇빛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나 도망간 애론 같은 것은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들어왔을 때와 같은 모습의 정원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엘로디는 치마를 모은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재빨리 몸을 돌려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그들은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갔다. 엘로디는 천천히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오려다 그들의 말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나 참, 황태자 전하도 너무 무르시더군.”
“아아, 나바르 가문 때문인가? 뭐, 그 딸이랑 한 번 해봤더니 좋으셨나 보던데.”
엘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가문과 황태자를 모욕하는 발언에 몸을 움츠렸다.
“그 집안 딸년도 지 오라비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반반했지. 가끔 연회에 나오면 그 가슴을 주물러보고 싶던데.”
“그 몸을 던져서 황태자와 가문의 목숨을 지켰으니 잘된 거 아닌가?”
“아, 그 여자가 알파나 오메가였으면 한 번쯤 해봤을 거 같은데.”
악의에 찬 웃음소리와 저속한 단어들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엘로디는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입을 막았다.
“황태자도 성인군자인 척하더니 어쩔 수 없나 보던데. 정신 못 차리고 열흘 가까이 박아대서 완전 헐렁해져서인지 요즘은 얼씬도 안 한다고 그러더라.”
“먹다 버리는 건가?”
“그럼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 나바르 가문의 딸이 그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래도 평민 출신이랑 사고 쳐서 약혼한 줄 알았는데 처녀였나 보던데.”
“나는 애론 그 새끼도 잡아왔으면 좋겠군.”
“자네, 몇 년 전에 애론한테 찝쩍거리다 머리가 날아갈 뻔하지 않았나.”
“남자 주제에 그렇게 꼴리게 생겼으면 책임을 져야지.”
“하긴 애론에 비하면 그 딸은 아무것도 아니었지. 걔 이름이 정확히 뭐였지?”
“어… 글쎄 그냥 애론 하급품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해봐서.”
“우리 같은 알파가 베타들 따위에게 관심을 가져서 뭐에 쓰나.”
낄낄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엘로디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 그들이 한 말들이 울렸다. 자신이나 가문에 대한 모욕보다 황태자가 자신을 멀리 하는 이유가 질려서라는 말이 더 깊숙이 박혀왔다.
그때부터 엘로디는 정말로 황태자가 자신에게 질렸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넋이 나간 채로 방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기만 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나나가 부를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쥴리아와 나나는 엘로디가 평소와 다르게 말도 하지 않자 느리게 손을 움직이다가 멈췄다.
“엘로디 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
엘로디는 저녁을 먹던 손을 멈춘 채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왜 그러세요?”
보다 못한 쥴리아가 결국 엘로디에게 물었지만 엘로디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황태자의 침실 시녀이지 연인이 아니다. 그런데 왜 황태자가 자신을 찾지 않냐고 물어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엘로디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한 번 생긴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보나파르트 부인이었다.
“엘로디 님.”
보나파르트 부인은 드물게 늦은 시간에 엘로디를 찾아왔다. 나나와 쥴리아가 급한 업무 때문에 엘로디의 잠자리를 봐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나서게 되었다.
딱히 엘로디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던 그녀는 문을 열고 엘로디와 눈을 마주치자 곧바로 그녀에게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 아마도 그녀가 아니었어도 엘로디의 이상을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손톱을 물어뜯는 그녀를 보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조용히 엘로디의 손을 잡았다.
“아! 오셨어요.”
당황해서 손을 뒤로 숨기는 그녀를 보며 보나파르트 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해도 여성인 그녀에게 이 상황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깨달았다.
문득 황태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핑계로 코르티잔들을 불러들인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불안한 눈을 굴리는 엘로디의 곁에 앉았다.
“안 좋은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여전히 걱정 어린 기색으로 엘로디가 눈을 굴리는 것을 보고 보나파르트 부인은 사람을 불렀다. 들어온 시종에게 부인이 간단한 술과 먹을 것을 부탁했다.
“술… 마셔도 될까요?”
“그럼요. 너무 취하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오래전 자신이 키우던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최대한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주려 애썼다. 정치와 전투에 익숙해져서 딱딱해진 인상의 표정을 풀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곧 시종이 달콤한 아이스 와인과 간단한 과자를 들고 들어왔다. 엘로디는 잘 차려진 상을 보며 어쩐지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음주 면접을 보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놓으면 안 돼.’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엘로디는 잔에 담기는 술을 보며 다짐했다.
* * *
“전하.”
조금 늦은 시간, 일을 끝내고 들어온 아드리안을 시종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왜?”
“그게… 엘로디 님 방에 좀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안은 그의 말에 인상을 썼다. 아마 이 황궁에서 자신이 고의로 엘로디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가보시면 알 겁니다.”
시종장의 표정을 보고 아드리안은 말없이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기 전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전하가 그 따위로 행동하신다고요?”
“세상에, 전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별로다.”
“엘로디 님, 제가 한 대 쳐드릴게요!”
시끄러운 소리에 깔깔거리는 웃음을 들으니 방 안에 한두 명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안에 누구누구 있어?”
“보나파르트 부인, 엘로디 님과 나나랑 쥴리아가 있습니다.”
“…나보고 저기를 들어가라고?”
아드리안은 문 너머로 자신을 신나게 욕하고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불안감을 느꼈다.
“안 들어가셔도 분명 찾으러 나오실 것 같은데요.”
“하아…….”
긴장감에 땀이 흐르는 손을 비비며 아드리안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힘을 주어 돌리려는 순간 문이 열려서 그대로 끌려 들어갈 뻔했다. 문을 연 사람과 살짝 부딪힌 덕에 겨우 그 꼴은 면했다.
엘로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평소보다 볼과 눈가가 발갰다. 조금 풀린 듯한 눈이 자신을 보더니 휘어지면서 웃어 보였다.
“저 잠깐 술 좀 깨러 나갔다 올게요.”
그녀가 뒤를 보며 말을 내뱉고는 재빨리 아드리안을 밀고 손을 붙잡아 끌고 나갔다.
아드리안은 작은 그녀의 힘에 말없이 끌려갔다. 엘로디가 붙잡은 손에서 온기와 심장 소리가 느껴져서 자신의 심장 소리도 커지는 것 같았다.
장미의 정원까지 쉬지 않고 그를 데리고 나온 엘로디가 아드리안의 손을 놓고 조용히 서있었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붙잡고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왜…왜 울어?!”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 채로 울음을 참으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아드리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엘로디는 그대로 그의 옷을 부여잡고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결국 아드리안은 그녀를 어색하게 끌어안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한참을 안고 있어주었다.
엘로디의 울음이 거의 끝나갈 때쯤 그녀의 손을 끌고 구석에 마련된 벤치에 앉혀주었다. 한참을 울어서 눈이 부었을 거라는 생각에 엘로디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드리안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엘로디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서 내렸다. 그러나 부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엘로디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무슨 일 있었어?”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 엘로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왜 안 찾는지, 정말로 자신에게 질린 것인지를 물어야 할까.
자신이 그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질렸다면 자신의 가문은 어찌 될지 따위의 걱정이 뒤따랐다.
엘로디는 자신이 애론보다 예쁘지 않다는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으면서 자라왔다. 종종 그것으로 자신을 모욕하는 남자나 여자들도 수도 없이 만났었다.
그녀 자신도 애써 억누르긴 했어도 애론에게 어느 정도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더 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리암마저 자신을 배신한 순간 마음속 깊이 자리한 열등감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엘로디를 몰아붙였다.
그날 정원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열등감이 모두 해부되어 밖으로 끌려나온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만나서 섹스밖에 하지 않은 사이인 아드리안에게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엘로디는 인상을 쓴 채로 그의 손을 꽉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엘로디를 한참을 보던 아드리안이 붙잡힌 손의 엄지를 이용해 그녀의 손등을 문질렀다.
“엘로디.”
“네. 전하.”
아드리안은 가볍게 엘로디를 잡아당겨 양손에 힘을 꽉 주고 끌어안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엘로디 네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가문을 위해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라면 절대 못 했을 거야.”
“전하.”
아드리안은 일부러 엘로디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알았기에 힘을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널 믿고, 곁에 두기로 한 거야.”
엘로디는 좀 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드리안은 웃으면서 그녀를 꽉 붙들었다. 숨소리가 섞이고 온기가 섞여 들어갔다.
엘로디는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아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가 말하는 엘로디는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전하.”
“그냥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야. 그대가 어떤 사람이건 가족과 가신들을 위해 몸을 던진 것은 맞으니까.”
아드리안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엘로디가 잠이 든 것을 보고 그녀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보다 마른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간 아드리안은 얼굴에 긁힌 자국이 있는 시종장을 보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엘로디 님은 전하 방에서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방은 지금 난리거든요.”
그쪽에서 비명과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아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살며시 문을 열고 엘로디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를 방 안 침대에 눕히고 침대 가에 앉아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붉어진 눈가와 볼을 쓰다듬었다.
“하아, 젠장.”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아무래도 다른 방에서 자야 할 것 같았다.
그 뒤로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하루에 한 번은 꼭 황태자가 엘로디를 찾아왔다. 둘은 함께 정원을 거닐거나,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는 했다. 의외로 이것저것 많이 읽었는지 엘로디도 황태자와 책 취향이 잘 맞아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가끔은 그가 어디서 사 왔는지, 매번 다른 상자에 담긴 케이크를 내밀기도 했다. 다양한 케이크와 홍차를 마시는 시간들도 좋았다.
엘로디는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면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와, 전하. 그런 내용 좋아하세요?”
서로 장난스럽게 말을 나눌 정도로 친해지면서 엘로디는 그가 편해졌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웃어주는 사람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안도감을 주었다.
이 넓은 궁 안에 적어도 자신의 편이 있다는 것에 엘로디의 불안 증세는 서서히 사라졌다. 리암을 잃고 가족마저 멀리 떠나버린, 주위에 누구도 없던 엘로디에게 유일하게 기댈 만한 사람이 생긴 것뿐인데 눈에 띄게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은 안도했다.
아드리안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엘로디는 웃어 보였다. 여전히 체온이 높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문득 아드리안에게라면, 다시 한번 더 속는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로디는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무심결에 얼굴을 붉혔다.
* * *
세실은 어느새 동백의 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 안에 위치한, 화려함의 정점을 보여주는 정원에는 겨울 꽃인 동백과 전혀 상관없이 ‘여름 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인지 그곳은 동백의 궁 내에서 가장 이상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눈이 내려 하얗게 유지되는 대지 위에 온갖 여름 꽃들이 잔뜩 피어있고,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짙은 녹색 나무들이 제 잎사귀들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위로는 한겨울 같은 눈이 쌓여있어 기이함을 더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여름도, 겨울도 아닌 것 같아서 인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계절 내내 여름 꽃을 피워내야 했기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들었다. 조성비, 유지비조차 최강을 자랑하는 그 정원은 전대 황제가 황후에게 미쳐서 만들어줬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제 와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전설처럼 변해버렸다.
그러나 현 황제도 황후를 위해 국화의 궁에 거대한 유리 온실을 만들어 바친 걸 보면 틀림없이 팔불출은 유전이리라.
세실은 그 정원의 한가운데에 있는 눈 덮인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이 괴이한 모습이 세상의 종말 같아 보인다고 했던 여자가 떠올라 기분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거기, 누구냐.”
마침 궁을 경비하는 기사가 세실을 보고 소리를 쳤다. 세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그를 꿰뚫었다.
기사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갔다.
세실은 그를 돌려보내고 나무 아래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었던 여자를 떠올렸다. 처음 가졌던 친구, 믿었던 사람은 칼날이 되어 세실의 심장을 찢고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하.”
매번 기분이 나빠질 것을 알면서도 이곳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세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멍청했던 거야.”
세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되뇌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