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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도망간 신부 (3/15)
  • 2장 도망간 신부

    엘로디의 생일 축하연이 끝난 뒤 애론과 리암은 기사들의 감시 아래에 철저한 격리 생활을 해왔다.

    후작은 결혼 날 아침까지 둘을 감시했고, 애론은 그때쯤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얌전하게 지냈다. 엘로디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 그가 의심스러웠지만 조금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한 달 남짓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이 행사를 축하하듯 날씨는 눈이 부실 정도로 좋았다.

    소설 원작의 시작이었다.

    * * *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유모가 엘로디를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단장을 위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그녀는 한참 지나서야 본격적인 결혼식 치장을 받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다시 빗고 양옆을 땋아 내린 것을 하나로 묶어 올렸다. 거기에 얼마 전 황실에서 내린 선물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장식된 머리핀을 올렸다.

    ‘저것만 팔아도 혼자서 평생 먹고살 수 있겠지.’

    그러나 선물들은 황실의 보물이었기에 파는 순간 잡힐 것이다.

    엘로디는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준비가 끝났다는 사용인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생각만 같아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아직 이 세계의 사진은 흑백에 불과했고 같은 흰색 옷을 입었다간 애론과 비교될 것을 알았기에 금세 포기했다.

    몇 달 전에 애론의 예복을 맞추면서 함께 맞춘 드레스가 꺼내져 나왔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고, 화려하게 장식된 연한 색의 드레스를 입기 위해 결혼식 몇 달 전부터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애론과 리암의 관계를 알게 되고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엘로디는 바싹 말라갔다.

    “아가씨, 잠시만요.”

    옷을 입혀주던 사용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분명 저번 주에 몸에 맞춰서 줄여두었는데 그새 살이 또 빠져서 더 헐렁해져 버렸다. 그녀는 엘로디가 바늘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다시 옷을 급하게 몸에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 마르셨어요.”

    “그러게…….”

    엘로디는 불현듯 마른 자신을 보고 하객 중 누구라도 애론이 장가가서 슬퍼하는 거라고 생각할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귀족 중 나바르 후작가의 남매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론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엘로디를 면박 준 것은 두 손으로 세어도 부족했다.

    “리암 다를랑 경이 왔습니다.”

    집사가 엘로디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들어오라고 하자 자신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리암이 어두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리암은 정말 애론을 사랑할까.

    엘로디는 문득 궁금해졌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기계적으로 그의 에스코트에 맞추어 천천히 밖으로 나아갔다. 애론은 이미 후작의 손에 이끌려 결혼식장에 끌려간 뒤였다.

    엘로디와 리암은 아직도 대외적으로 약혼 관계였기 때문에 같은 차에 올라탔다.

    근대 정도가 배경인 듯한 이 소설 속에서 차는 요 몇 년 전에 등장한 신문물이었다. 비싸기도 하고 유지비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나바르 후작가의 부와 명예를 한 번에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결혼식이 열릴 대성당으로 향했다.

    리암은 딱딱한 표정으로 엘로디에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평소에도 멀미하는 엘로디를 위해 그가 항상 준비해 주던 것이었다.

    엘로디는 그것을 받아 들고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껍질을 까고 알맹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엘로디의 취향에 맞춰서 만든 탓에 씁쓸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긴 침묵 끝에 식장 앞으로 차가 도착했다.

    아직 내리기도 전부터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고 그 와중에 도어맨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리암이 먼저 내려서 에스코트하기 위해 엘로디에게 손을 뻗었다.

    번쩍이는 플래시를 배경으로 두른 그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엘로디는 그 손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자신의 손을 올리고 말없이 내렸다.

    능숙하게 가짜 웃음을 지으며 레드 카펫 위로 발을 내디뎠다. 다정하게 리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취재진 없이 조용하게 이루어질 결혼식이었기에 엘로디는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리암의 손에서 손을 빼버렸다. 리암은 그런 그녀를 잠깐 내려다보고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쫓아가 하객석에 앉았다.

    엘로디는 오랜만에 요양하고 있던 별장에서 나온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엘로디! 어서 오렴.”

    마리아 부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엘로디를 끌어안았다.

    “요즘 뭘 먹었길래 이렇게 말랐니?”

    “으음, 사진에 잘 나오려고 다이어트 좀 했어요.”

    엘로디는 재빨리 얼버무렸다. 뒤에 서있던 리암이 그런 엘로디를 알아차린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암, 오랜만이구나. 여전히 잘생겼는걸.”

    손을 뻗어 리암의 손을 잡으며 마리아가 웃었다.

    그녀는 아들의 결혼에 조금 흥분한 듯 창백했던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버진 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작이 멀리서부터 리암을 말없이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후작 부인과 엘로디, 리암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리아, 힘들게 서있지 말고 앉아.”

    “여보, 이 정도는 서있을 수 있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했지만 후작은 그녀가 앉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했고, 후작 부인은 리암이 가져온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내가 애론이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구나.”

    마리아가 감격한 듯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옆에 앉은 엘로디의 손등을 쓸었다.

    “이제 곧 엘로디도 결혼하겠지.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할 텐데.”

    “당연하죠. 어머니는 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엘로디는 불편한 기분을 삼키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예전 같았으면 옆에 있는 리암이 한마디 해주었겠지만, 지금은 차라리 조용히 있어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들고 결혼을 알리는 성가곡이 높은 성당의 내부를 울렸다. 성스러운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려 그동안 날카롭게 서있던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 기분이 들었다.

    신랑의 입장을 알리는 추기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엘로디는 고개를 돌려 불행한 결혼의 주인공을 마주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황태자는 그린 듯한 미남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온 색색의 빛깔이 내려앉은 은발을 왁스로 정리해서 뒤로 넘기고, 엘로디가 있던 세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기묘한 보라색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 금욕적인 느낌의 연미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나른하고 섹시해 보였다.

    이 소설 속의 설정상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남자의 외모는 생각 이상으로 파괴적이어서 엘로디는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엘로디는 원작에서의 그녀가 왜 황태자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엘로디는 애론을 황태자비로 맞이해야 할 그의 운명을 조금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안함을 느꼈다.

    엘로디는 애론이 운명의 상대 말고 다른 상대에게 욕정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쩌면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도중에 알파인 리암을 먼저 끌어들여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황태자의 행진을 바라보며 이야기의 향방에 대한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자 리암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엘로디는 신경질적으로 그에게 잡힌 손을 떼어내고는 다시 결혼식에 집중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단상까지 온 황태자가 몸을 돌려 버진 로드를 걸어올 신부를 기다렸다.

    잠시 후 웅장한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애론이 나타났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조금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흰색과 보라색 바이어스로 장식된 정장을 입은 애론은 굳은 표정으로 버진 로드 끝에서 후작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아가 작게 웃으며 엘로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천하의 애론도 긴장을 하는가 보구나.”

    “글쎄요. 제가 보기엔…….”

    어머니는 굳은 그의 표정이 긴장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엘로디가 보기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표정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기에 말을 아꼈다.

    애론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의 앞을 지나가려 하고 있을 때였다.

    “미안해.”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리암이 엘로디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리암은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앞을 지나가던 후작과 애론에게 걸어갔다. 애론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엘로디는 그의 웃는 모습이 짧은 순간 꽃이 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같이 가자.”

    리암의 말에 애론은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옆에 서있던 후작은 당황하며 애론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그 자리에는 애론의 마력이 붉게 빛나다 사라졌다.

    엘로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그의 표정이 고위 마법을 부리기 위해 집중하던 때의 표정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리암과 애론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사랑의 도피를 했다.

    엘로디는 자신이 걱정하던 일이 최악의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일에 놀라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어머니의 몸을 받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엘로디는 그대로 넘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마리아를 힘주어 잡았다. 후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엘로디는 차마 고개를 돌려 황실 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만 굴려서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황제는 얼굴을 가린 채로 고개를 저었고 황후는 눈을 감은 채로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이대로 황태자의 얼굴을 봐도 될까, 고민하던 엘로디를 뒤에서 군인들이 잡아챘다.

    “잡아라!”

    황제의 말이 시발점이라도 된 것처럼 기사들이 몰려와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로디를 결박하듯 잡고는 앞으로 끌고 갔다.

    엘로디는 스스로 걸어가려 애썼지만 강제로 빠르게 끌고 가는 기사들 때문에 계속해서 넘어질 뻔했다. 오늘을 위해 몸에 딱 맞게 재단된 드레스의 끝자락이 밟혀서 찢어지기까지 했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황제의 앞까지 끌려와 무릎을 꿇은 후작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엘로디는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엘로디는 공포라는 압도적인 감각에 짓눌려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후작!”

    비명처럼 지르는 황후의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좌중이 고요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세요.”

    단호한 목소리에 알파의 힘이 담겨있었다. 후작은 그 위압감에 몸이 짓눌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이 일에 변명할 거리가 생길 리가 없었다.

    “당장, 애론 나바르를 잡아와서―”

    “아니오, 황후.”

    “폐하!”

    “이제 이 결혼은 끝났소.”

    “하지만, 애론은 운명의…….”

    “그만하시오, 황후.”

    황제가 말을 잘라내자 황후는 분노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엘로디는 이 결혼에 생각보다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황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창백해져 버린 황제가 손짓으로 뒤에 물러나 있던 기사들을 불러왔다.

    “데려가라.”

    황후의 고함 소리와 군인들의 발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들…….

    엘로디는 정신이 멀어버릴 것 같은 와중에 무표정한 얼굴로 이 일을 관망하는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연한 보라색 눈 너머에는 체념과 평온함 같은 것이 보였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을 보는 것 같은 무기질의 느낌에 엘로디는 심장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로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울음소리, 아버지의 구둣발 소리, 끌려 나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배경으로 남자 주인공이 고개를 숙이며 눈을 돌렸다.

    아름답다.

    우습게도 그 순간, 엘로디는 원작처럼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 * *

    그 자리에서 나바르 후작 일족은 황실 모욕죄로 잡혀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엘로디는 지하 특유의 서늘함을 느끼며 누구보다 몸이 약한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걱정했다.

    그녀는 애론의 결혼식 당일에 겨우 참석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만일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다가 몸이 악화된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걱정은 금방 현실이 되어 모녀를 덮쳤다.

    지하여서인지 습하고 바닥이 차가웠다. 엘로디는 연구실이 이런 지하여서 그래도 조금 익숙했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괜찮으세요?”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겨우 일어난 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입술에 색이 거의 없었다. 엘로디는 자신이 입고 있던 숄을 벗어 어머니의 몸에 감쌌다.

    “엘로디, 너도 춥잖니.”

    마리아는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엘로디보다 더 떨고 있었다. 엘로디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올라 이마가 뜨거운데도 그녀는 추위에 떨고 있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고는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애론이… 리암과 그런 사이라는 것 알고 있었니? 엘로디, 너는 괜찮은 거고?”

    마리아는 열로 정신이 없어 혼미한 가운데에도 애론과 엘로디 걱정을 했다.

    엘로디는 속으로 애론과 리암을 수천 번은 죽인 참이었다. 그 분노를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 애쓰면서 손바닥으로 마리아의 드러난 맨살을 비벼주었다.

    “우리 엘로디… 어떡하면 좋니.”

    흐느끼는 듯한 어머니의 말을 듣자 엘로디는 입 안이 썼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체온으로 위로받길 바랐다.

    그러나 그날 새벽이 되어도 마리아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열이 심하게 오르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엘로디는 그런 그녀의 곁에서 땀을 닦아주고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면서 밤을 정신없이 보냈다.

    엘로디는 다음 날 밤도 이렇게 보냈다간 정말로 마리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애론은 명백하게 황실을 모욕했다.

    그것도 각국의 사절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말이다.

    이대로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엘로디는 불덩이 같은 마리아의 몸을 끌어안으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만일 자신이 후작에게 그들의 밀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둘이 자연스럽게 헤어졌을까.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 버린 내용에 머리가 복잡했다.

    품에 안긴 마리아가 거칠게 기침을 하는 소리에 엘로디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대로 어머니를 죽게 둘 수 없었다.

    비록 자신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기억은 있었다. 엘로디가 아무리 그녀의 체온을 지켜주려 해도 그녀의 몸은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했다.

    고민하던 엘로디는 자신들을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사정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전생을 기억한 후의 엘로디는 이 세계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낮은 신분의 남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매달리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로디는 몸을 일으켜 감옥 앞에 서있던 기사에게 다가갔다.

    “저…….”

    입을 열어 말을 걸려 하는 순간 저 멀리 복도에서 불빛과 함께 낯선 이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노란 등이 차례로 켜지면서 가까워지고 흐릿했던 사람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보기 드문 은발이 등불에 반짝여 금발처럼 빛났다.

    엘로디는 그 사람이 황태자라는 것을 알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황태자는 가벼운 말로 엘로디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에게 인사를 한 뒤, 지하 감옥 옆에 마련된 취조실에 엘로디만 따로 불러들였다. 어머니와 함께 갇혀있던 감옥보다는 밝았지만, 지하라 그런지 여전히 어두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법으로 밝혀둔 불 몇 개와 커다란 탁자, 딱딱해 보이는 나무 의자 몇 개가 전부인 방 안에 단둘만이 남았다.

    그는 딱딱한 나무 의자를 끌어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나바르가의 엘로디가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엘로디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예법을 보이며 납작 엎드렸다. 그는 밖을 지키던 기사들보다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엘로디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흐음. 그래, 내 전 약혼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게 네 약혼자라고 들었어.”

    버림받은 약혼자들의 모임 같아서 조금 입 안이 썼지만 엘로디는 짧게 그렇다는 말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이 일을 빨리 마무리 짓기를 원하신다.”

    엘로디는 자신이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황태자인 그가 직접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삼켜서는 안 되는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전하.”

    “무엇이든, 이라.”

    엘로디의 눈앞에 검은색의 구두 끝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주먹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내게 무엇을 바라지?”

    “저희… 가문을 살려주세요.”

    “미안하지만 너와 내 전 약혼자들은 발견 즉시 사살이야.”

    “그 둘은 이제 저희 가문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나바르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후작가가 거느리고 있는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황족 모욕죄다.

    이제는 범죄에 있어서는 귀족과 평민 구분 없이 재판으로 형량을 정하지만, 황족과 관련된 죄는 다르다. 특히 황족 모욕죄의 경우 당사자의 기분에 따라 벌금형에서 멸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벌을 받아왔다.

    근래에 들어서 멸족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결혼 전도 아니고 결혼식 당일 외국 대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황태자의 약혼자가 사랑의 도피를 하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

    황태자의 말에 엘로디는 엎드려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나른한 표정의 황태자의 손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볼 것처럼 내려다보았다.

    그거다.

    그녀가 리암에게도 느끼던 그것, 그건 약한 짐승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리암은 자신과 대등한 관계였기에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달랐다. 엘로디는 그 눈빛을 피하지도 못한 채로 멍하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저 눈빛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꼬고 있던 발끝을 까닥이며 말했다.

    “자위해 봐.”

    붉은 입술이 열리며 천박한 것을 요구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엘로디는 얼굴을 갸웃거렸다.

    “무엇이든 하겠다며. 애론 때문에 지금 내 사이클이 제멋대로거든.”

    그제야 그가 원하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엘로디를 보던 황태자가 채근했다.

    어쩐지 엘로디는 그와 천박한 말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서.”

    체념한 엘로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론의 결혼식에 맞춰 화려하게 디자인되어 몸에 잘 맞게 재단된 드레스는 끌려오면서 여기저기가 찢어져 하얀 종아리가 반 이상 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현대 사회를 살다 왔다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엘로디는 머뭇머뭇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안에 입은 속옷에 손을 걸었다. 손끝에 걸리는 천의 감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황태자의 눈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닿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로디는 살고 싶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눈을 꽉 감고 속옷을 천천히 끌어 내렸다. 지하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다리 사이의 비부에 스치자 몸을 떨었다.

    “벗지 않아도 돼.”

    “전하! 제가…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엘로디는 지금 살 수 있을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하얗게 질려 그의 발밑에 엎드리며 매달렸다.

    보라색의 눈에 기묘한 빛이 스쳤다. 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일을 시킬 정도로 변태는 아니야.”

    “…네.”

    미심쩍은 듯 대답이 늦어지자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피곤했다.

    일은 너무 많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짓밟는 건 정신력을 너무 많이 깎아 먹는 일이었다.

    그는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을 계속했다.

    “폐하께서 너에게 침실 시녀가 되는 것을 권하셨다.”

    엘로디는 침실 시녀라는 단어를 듣자 입을 다물었다. 말이 침실 시녀였지, 그 역할은 창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역할은 100년도 전에나 있었던 직책이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전 황제나 황태자의 발정기 때 그의 성욕을 받아주는 역할이었다.

    침실 시녀가 되면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황후는커녕 하다못해 정부나 코르티잔조차 되지 못했다.

    평생을 황궁에서 살며 그의 반려가 나타날 때까지 몸을 내어주는 역할이었다. 상대가 반려를 받아들이고 나서도 궁 안에 갇힌 채로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로 살아가던 그녀들은 대부분 황후에 의해 독살당했다.

    “하지만 그전에 네가 이런 치욕을 감내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라고 하시더군.”

    “그…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었지만 엘로디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수십여 년 전 억제제가 만들어지면서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직책이었다.

    이 명이 애론이 벌인 일의 수습을 위해 내려진 최종 결정이었다.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살기 위해 이런 치욕까지 당해야 한단 말인가. 엘로디는 그 두 놈을 잡아다가 화형을 시켜버리고 싶었다.

    “나도 그대에게 이런 자리를 권하는 게 편하지는 않아. 차라리 거절하기를 바랐는데…….”

    “거절하면, 살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은 입을 다물고 조금 말을 고르고 있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엘로디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폐하의 마음에 달렸지만, 적어도 직접 목숨을 거두는 일은 내가 막을 거야.”

    여기서 그녀가 거절하면,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들고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엘로디는 그의 말 속에서 지금 내려진 명령이 황제의 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일이 가문과 자신에게 최선임을 알았다.

    어쩌면 길게 옥살이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엘로디나 후작의 건강이 그사이에 악화될 수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어머니였다. 고작 며칠 사이에 급격하게 나빠진 건강은 이미 그녀의 생명을 위협했다.

    후작이 엘로디에게 관심을 충분히 주지 못한 건 엘로디를 낳고 건강이 크게 악화된 후작 부인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엘로디는 자신에게, 설화에게 다시 한번 삶을 쥐여준 마리아만 생각하기로 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신이 개발하던 약이 완성만 된다면 금방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있다. 그리고 황실에 특허권을 넘기고 자신은 멀리 떠나서 살면 될 것이다.

    몸을 팔았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들이 없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대는 애론과 많이 다르군.”

    “칭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로디의 목소리에 불만의 기색이 느껴지자 아드리안이 작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

    엘로디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간 붉게 상기된 예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발정기가 다가와서일까.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색기 같은 것이 느껴져 엘로디는 얼굴을 붉혔다.

    황태자는 애론의 의지에 따라 그가 버틸 수 있는 최대의 나이까지 기다려주었는데 정작 반려가 도망가 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약을 먹고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렸다.

    방금 전 자신에게 자위를 해보라는 변태 같은 명령을 한 남자와 같은 사람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정하게 서류를 넘기는 모습은 성직자처럼 신성해 보였다.

    엘로디는 알파들은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성관계는?”

    “한 적 없습니다.”

    아니, 그는 변태가 맞는 것 같다.

    “흐음, 약혼한 지가 오래됐다고 했는데.”

    그 약혼자가 자신이 성인이 된 이후 오라버니랑 붙어먹었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다가 말았다.

    엘로디는 황태자가 혹시 마음을 바꿀까 봐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물기 어린 눈을 잠시 보다가 바깥에 서있을 사용인을 불렀다.

    문이 열리고 보좌관이 황명이 적힌 종이를 들고 들어왔다. 보좌관은 종이를 펼치며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힐끗 보고는 큰 소리로 황명을 읽어 내렸다.

    “나바르 후작가는 자작가로 직위를 강등한다. 또한 향후 5년간 수도 입성을 금한다. 자작가의 장자, 애론 나바르는 평민으로 격하시키고 재판에 올릴 것이며, 그와 함께 도주한 리암 다를랑은 발견 즉시 사살한다.”

    엘로디는 살았다는 생각에 힘이 풀렸다.

    “자작가의 딸 엘로디 나바르는 침실 시녀로 임명하고 앞으로 자작가의 죄를 씻기 위해 봉사할 것을 명한다.”

    “명을 받들어 목숨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엘로디는 다시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남녀 모두에게 결벽적으로 성적 순결을 강조하는 황실이었다. 엘로디라는 존재가 없었거나 결혼을 했었다면 분명 마리아는 죽고 후작가는 멸문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론이 도망가고, 엘로디가 침실 시녀로 들어간다면 나바르 후작가는 끝이었다. 방계의 사람을 들여 가문을 이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의 직계 일족 외에 알파나 오메가가 태어난 적은 없었다.

    바닥에 앉은 자세 그대로 복잡한 표정을 한 엘로디는 이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고민했다.

    황태자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엘로디는 그가 나가고도 한참을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운명에 한숨이 나왔다. 일단 어머니부터 밖으로 나가 진찰을 보게 하는 것이 급했다.

    그녀는 머리 장식을 빼서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쥐여주며 어머니를 부탁했다. 애론의 도주로 정신없는 상황일 테니 황실에서도 이걸 추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침실 시녀가 되었으니 자신은 이제 나바르가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만날 수 없다.

    엘로디는 기사에게 어머니에게 의사를 불러달라 이야기하고 부모님에게 자신은 잘 지낼 테니, 제 걱정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전해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황태자가 올라간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며칠 만에 본 빛에 잠깐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을 적응해야만 했다. 문밖으로 발갛게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붉고 아름다운 하늘이 엘로디의 비참한 상황을 모르듯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높게 서있는 나무들 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해를 가만히 보던 엘로디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황태자의 보좌관을 쫓아서 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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