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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BL소설의 악역이었습니다 (2/15)
  • 1장 BL소설의 악역이었습니다

    엘로디는 나바르 후작가의 막내딸이다.

    굽이치는 탐스러운 적갈색 머리와 열대 우림처럼 짙은 녹색의 눈을 가진 그녀는 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불행히도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바르 후작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장자인 애론 나바르였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검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는 대륙에 많지 않은 마법사 중 하나였으며, 황태자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그 당시 태어난 오메가는 오라버니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교회에서 인정한 상대라고 하시더라고.”

    엘로디는 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투덜거렸다. 웃으면서 한 손에 들린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문에는 자신의 혈육인 애론의 사진과 황태자의 얼굴이 크게 박혀있었다.

    ‘세기의 결혼식! 황태자 아드리안과 천재 마법사 애론의 결혼에 관한 모든 것!’과 같은 타이틀이 적혀져 있었다.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결혼식에 대해 시시콜콜 늘어놓은 기사들은 둘의 의상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결혼반지는 어느 회사 것을 쓸지, 신혼여행지로 낙점받은 황실 소유의 남쪽의 리조트 섬에 대한 것 따위가 적혀있었다.

    “너는 어떤데? 애론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글쎄.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 게다가 애론은 황태자와 나이가 맞는 유일한 오메가이기도 해서, 아마 부모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걸.”

    “흐음.”

    엘로디는 맞은편에 앉아 어마어마하게 단 커피를 별생각 없이 마시며 다른 신문을 읽고 있는 약혼자 리암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투과하는 햇빛에 그의 매끈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자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황금색 눈을 보면 엘로디는 그에게 사냥당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에 종종 휘말리곤 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리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엘로디는 얼굴을 붉히고 다시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는 데 신경 썼다.

    엘로디는 베타였다. 아름답고 능력도 있는 데다가 후작가의 딸이지만 그 모든 건 화려한 애론의 후광에 가려졌다.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베타치고 우월한 것이었지, 알파나 오메가와 비교할 수 없었다.

    방금도 그렇다. 그저 알파인 리암과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정말 치사해.”

    “뭐?”

    “종족이라는 거 말이야.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애론의 발끝도 못 쫓아가겠지.”

    리암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 역시 우월한 종족이었기에 엘로디가 느끼는 열등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엘로디는 일부러 그의 앞에서 애론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리암, 너는 배신하지 않을 거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데?”

    “우리 가문이나, 약혼자인 나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

    대답이 없는 리암에게 초조함을 느낀 엘로디가 남은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사람이 몇 없는 조용한 카페에 음료가 빨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 나바르의 기사.”

    엘로디는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자리에 커피 값을 대충 던지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버렸다.

    리암은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한참을 내려보다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져 상기되어 있었다.

    엘로디가 알고 있다.

    * * *

    엘로디의 기억은 현재에 있지 않았다.

    그녀가 철이 들기 시작한 무렵, 아마도 열 살쯤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애론의 괴롭힘을 피해 후원 구석에 있는 자신의 작은 아지트 안에 숨어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전생을 기억했다.

    평범한 대한민국의 대학생이었던 설화는 교통사고로 짧은 삶을 마감했었다.

    설화의 다양한 취미 중 하나는 BL소설을 읽는 것이었다. 그녀가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오메가버스가 엄청나게 유행하면서 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넘쳐 났다.

    그중 이 소설 『당신과 나의 각인』은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오메가버스 소설이었다.

    주인공인 오메가 애론 나바르는 알파인 황태자 아드리안 샤를 발루아와 운명의 상대였다.

    둘은 어렸을 때 약혼한 사이였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게 됐다. 큰 트러블 없이 평탄하게 서로와 사랑에 빠지게 된 둘의 평온함에 돌을 던진 것은 당연히 악역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 둘의 사이에서 악역으로 활약한 사람이 애론의 동생 엘로디였다.

    원작의 엘로디는 베타로서, 오메가인 애론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차별과 관심의 부족은 엘로디가 삐뚤어진 인성을 소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결혼식장에서 아드리안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었다. 그렇게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유혹하기 위해 온갖 추접한 짓을 하고 애론을 괴롭히는 악역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최후는 평민 출신의 알파, 리암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정말 하찮은 배역이었다.

    사실 재미로 읽은 3천 원도 안 하는 짧은 소설 속에서 엘로디는 별 의미 없는 캐릭터였다.

    전체 내용에서 그녀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작은 시련이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당신과 나의 각인』은 무언가 심오한 스토리가 있거나 전개가 드라마틱한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설화는 오로지 욕망에 충실해 잠자기 전 침대 위에서 작은 위안거리용으로 야하고 신(scene)이 많은 19금 소설인 『당신과 나의 각인』을 샀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당연하게도 악역인 엘로디의 활약은 거의 없었고,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설화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그녀의 최후 정도는 기억해서 다행이라고, 엘로디로 빙의한 설화는 생각했다.

    전생을 기억하고 난 뒤 엘로디는 애론의 괴롭힘에도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가 하는 행동들은 하나같이 유치했고, 엘로디는 이미 전생에서 스무 살이 넘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애론의 행동을 비웃고 넘어갔다.

    소설 속에서의 자신의 운명을 피하기 위한 그녀의 몇 안 되는 계획 중 하나는 원작의 남편이었던 리암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고위 귀족인 알파나 오메가의 삶은 완벽에 가깝지만 신분이 낮을수록 그들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가장 최악은 오메가였지만, 알파의 삶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신분이 낮은 알파의 삶은 알파를 낳기 위한 귀족들의 수단으로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거나 노리개가 되는 것이었다.

    비록 신분제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온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엘로디의 최후가 비참했던 건, 평민 알파인 리암의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 영애들의 노리개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로 살아갔었다. 그런 리암은 한평생을 고위 귀족으로 살아온 엘로디에게 만족스러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리암은 결혼하기 전 이미 수많은 귀족들의 밤 상대였기에 엘로디의 평판은 바닥으로 처박혀야만 했다.

    소설에서 엘로디는 아드리안을 유혹하려다가 리암을 만나게 되었다. 원래 그녀는 베타에게도 오메가 페로몬이 나올 수 있는 약을 먹고 황태자 아드리안을 유혹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아드리안이 아닌 애론이 보낸 리암이 나타나고, 그 장면을 애론이 목격하면서 강제로 결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엘로디가 된 설화는 아드리안을 유혹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인생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아닌가. 안전한 인생을 얻기 위해 엘로디는 아버지를 졸라 알파인 리암을 후원하기로 했다.

    리암은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전부터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로 알파일 것이라고 주변의 모두가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 한 명도 다른 성향이 태어난 적이 없었기에 엘로디의 부모님은 반신반의했고, 그녀가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엘로디는 집안에서 그렇게 눈에 띄는 존재도 아니었다. 애론에 치여서 무엇 하나 뛰어난 것 없는 둘째는 가끔 신경 써주는 존재 정도였다.

    엘로디는 리암을 후원하기 위해 애론보다 뛰어난 것을 보여주어 관심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전생에 꽤 공부를 잘해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화학과 학생이었기에 이 세계에서 화학과 비슷한 연금술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고, 부모님은 혹시 엘로디도 알파나 오메가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 점이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엘로디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갖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리암의 후원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부모님도 엘로디의 끊임없는 요구에 결국 그를 후작가로 들여주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알파인 리암은 가르쳐주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

    리암과 엘로디는 순식간에 친해졌고 둘은 친구처럼, 가족처럼 서로를 아꼈다. 서먹한 부모님과의 관계, 점점 더 안 좋아지는 애론과의 관계 속에서 리암의 존재는 엘로디에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엘로디는 이대로 원작대로 진행되면 리암과 결혼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를 부숴버리듯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쪽으로 튀어 나갔다.

    * * *

    여름이 코앞인데도 어쩐지 한기가 흐르는 것 같다. 엘로디는 몸을 가볍게 문지르며 흘러내리는 안경을 매만졌다. 벌써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면서 옆에 잔뜩 쌓여있는 책을 향해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엘로디.”

    “으악!”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튕겨져 올라온 엘로디는 곧 리암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잖아!”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또 저번처럼 쓰러진 줄 알았지.”

    “그땐 특별한 경우였어.”

    “그래, 맞아. 내가 아는 연금술사 중에 감기 걸렸을 때 약 먹고 일하면 더 잘된다며 즐거워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무언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맞는 말이기에 엘로디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너 여기 별로 안 좋아하잖아.”

    후작이 지하에 엘로디만을 위해 만들어준 연구실은 어둡고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리암은 이곳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유는 통 말해주지 않아 몰랐다.

    “곧 애론이 온대.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

    올해 스무 살이 되어 설화가 엘로디에 빙의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갔다.

    불행하게도 엘로디로 살아남기 위해 실행했던 계획 중 가장 처참하게 끝난 것은 애론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애론은 한마디로.

    “오라버니가 왔으면 빨리 올라와서 인사드려야지. 베타 주제에 인사도 제대로 못 해?”

    재수 없는 사람이다.

    “일이 있어서요. 늦게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엘로디는 억지로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원작에서 왜 엘로디가 애론을 그렇게 미워했는지 알 법했다.

    “또 신규 억제제 만든다고 처박혀 있었나 본데. 어차피 넌 필요도 없으면서 그런 걸 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엘로디가 하는 연구를 모두 폄하한다거나.

    “필요하면 다 알아서 만들어 먹을 텐데.”

    그녀의 노력 정도는 쉽게 무시하는 저 말투는 전생을 포함해 저치보다 20여 년을 더 오래 산 엘로디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짜증으로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봤는지 리암이 뒤쪽에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아왔다.

    엘로디는 그 손길에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손히 인사를 하고 리암과 함께 그 자리를 후다닥 떠났다.

    그래서 엘로디는 리암을 끈적한 눈길로 훑어 내리는 애론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진짜 재수 없지 않아?”

    엘로디는 적갈색의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리고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하늘색 원피스와 부츠 차림으로 카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

    “필요하면 다 알아서 만들어 먹기는 개뿔.”

    귀여운 인상에 꽤나 몸매가 좋은 엘로디였지만 카페 내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한 남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연금술사들은 이런 일에 관심도 없으면서.”

    열을 내며 열변을 토해내는 엘로디를 보며 리암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슬쩍 웃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단단한 체형에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황금색의 눈이 그가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모양 좋은 손에는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가 들려있었다.

    “그들한테 알파나 오메가라는 건 자부심의 일부니까.”

    엘로디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놀란 것은 그들이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계급이 높아질수록 알파이거나 오메가인 것을 권력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휘두르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힘을 무기로 베타들을 지배하고 짓밟았다. 엘로디는 수년 전 알파와의 관계에 휩쓸려서 죽은 자신의 친구를 떠올리고는 침울해졌다.

    “내가 하는 일이 혹시 쓸모없는 일은 아닐까. 그들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귀족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하지만 평민인 알파나 오메가들에게는 싼 억제제가 필요해.”

    “응. 나도 알아.”

    리암의 말에 엘로디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웃었다.

    “일은 많이 진척됐어?”

    “음, 이제 거의 다 된 거 같아.”

    컵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한 엘로디를 보며 리암은 잠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엘로디의 현재 목표는 부작용이 없는 사이클 억제제였다.

    이 일은 원작 소설에서도 언급된 적 없는, 설화가 엘로디로서 행한 몇 개의 일들 중 하나였다.

    현재 이 세계의 억제제에는 부작용이 있었고, 그럼에도 그 가격이 굉장히 비쌌다.

    부작용 때문에 각성 이후 10년 이상 억제제를 먹어서는 안 됐다. 그나마 이 약이 개발된 것은 수십 년조차 되지 않았다. 매년 부작용으로 인한 사고가 일어났지만, 이 사업을 개발할 재력이 있는 연금술사들은 대부분 무관심했다.

    이 약이 개발될 수 있었던 것도 오메가였던 현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베타 남자와의 행복을 위해 만든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결국은 약의 부작용으로 말년이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꼭 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꼭 끝내고 싶어.”

    엘로디가 웃었다. 시끄러운 카페 안에서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리암이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어느 날 엘로디는 오메가가 유부남 알파를 덮쳤다는 기사를 읽고 리암에게 주의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래에 애론이 엘로디를 괴롭히는 일이 늘어났고, 그 수법 역시 점점 교활해지고 있어서 그에게 경고를 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파에게는 러트 사이클이 있고 오메가에게는 히트 사이클이 있었다. 두 사이클 모두 힘이 약하고 표적이 되기 쉬운 엘로디에게는 위험한 기간이었다. 비록 억제제가 있다고 하지만 발정기를 맞이한 애론과 리암에게 가까이 다가가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기간에는 그 둘이 있는 구역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엘로디의 불문율이었다.

    가문에서 그들의 사이클 주기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엘로디였다. 엘로디는 서랍 속에서 얼마 전에 온 사이클 기간에 대한 주의가 적힌 서류를 찾아냈다.

    “어?”

    둘의 사이클이 묘하게 비슷했다.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일주일 정도 되는 기간 중 5일 정도가 서로 겹쳤다.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생리 기간이 비슷해지는 것처럼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클이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엘로디는 말이 통할 리암을 만나러 가기 위해 후작저의 동관으로 향했다.

    동관 4층의 제일 끝에 있는 리암의 방으로 가는 동안 엘로디는 기묘한 분위기가 복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끈적한 신음 소리와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두꺼운 갈색 문의 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엘로디는 홀린 듯이 그 앞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으응…….”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침대 위에 앉아서 서있는 애론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남자의 방임에도 엘로디는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없었다.

    애론이 남자를 밀어서 넘어뜨리고 그 위로 올라타면서 문가를 바라보았다. 엘로디는 순간 놀라서 자연스럽게 몸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애론과 눈이 마주쳤다.

    욕정과 희열에 번들거리는 검은색 눈이 기묘하게 휘어졌다.

    엘로디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문을 열어놓은 채여서 그들의 신음 소리가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오는 그녀의 뒤로 쫓아왔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거의 뛰어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리암과 애론이었다. 자신의 오빠와 약혼자가 만나고 있었다.

    엘로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로 뛰어나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기 위해 그대로 후원으로 달렸다.

    배신당했다.

    머릿속에서 둘이 뒤엉켜 구르던 장면이 사라지지 않았다.

    엘로디는 그렇게 한참을 힘이 없어져 걷지 못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며 울다가 결국은 그것마저도 그만두고 멍하니 앉아 눈물만 흘렸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기 시작했으나 꿈쩍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대로 가만히 한참을 앉아있었다. 누군가 찾으러 와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문틈으로 보았던 그 장면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치 머릿속에 문신을 새겨둔 것처럼 잊을 수 없었다.

    “멍청아.”

    주저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엘로디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게 주제를 알았어야지.”

    하얀 나신을 얇은 시트로 대충 감아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남자가 어스름한 햇빛을 받으며 눈앞에 서있었다.

    “닥쳐, 개새끼야.”

    자신을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것을 참으며 엘로디는 이를 갈았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 정말 건방져.”

    애론의 말에 엘로디는 입가를 삐죽였다. 현대에서 온 설화는 인종차별 같은 이 시스템이 싫었다. 그냥 소설로 읽을 때는 남자들끼리도 임신을 할 수 있는 낯선 시스템이 그저 재밌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세계에 들어와 하나부터 열까지 비교당하자 그녀는 열등감을 참기 어려웠다.

    소설에 가끔 등장해서 알파를 넘보는 베타 악역들을 보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베타면서 말이야.”

    애론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그가 더 싫었다. 마치 자신의 징그럽고 더러운 모습을 예쁘게 빚어 눈앞에 전시해 둔 것 같았다.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너도 그냥 관심을 끌고 싶은 병신일 뿐이잖아.”

    “진짜 입은 잘 놀리네.”

    애론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청아한 목소리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곧 표정을 굳히더니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력의 폭풍이 엘로디의 몸을 짓이기듯 바닥에 밀어붙였다.

    들고 있던 고개가 흙 속에 파묻히고 입과 코로 흙이 흘러 들어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넌, 나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잖아. 심지어 여자면서 나보다 못생겼잖아.”

    애론이 몸을 숙여 엘로디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엘로디가 뭐라 말하려 입을 우물거리자 애론이 짓누르던 마력을 잠깐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하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틀어쥐고 잡아 올려 눈을 마주쳤다.

    녹색의 눈동자 너머로 증오의 감정이 넘실거렸다.

    “유치한 새끼.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그거뿐이야?”

    “역시. 아닌 척해도 네가 시건방진 멍청이인 건 알고 있었지.”

    “닥쳐, 별 병신 같은 게 아는 척 지껄이지 마.”

    엘로디의 말에 애론은 빙글거리며 웃어 보였다.

    “너, 멍청한 것뿐만 아니라 입도 거칠어졌구나. 맨날 평민 남자애랑 놀아나니까 품위조차 없는 거 아냐.”

    “그러는 너도 그 평민 남자랑 자는 주제에 말이 많네.”

    한마디도 안 지려는 엘로디의 행동에 애론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엘로디는 살기 위해 웬만하면 애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왔다. 그가 던지는 독설에도 웃으며 무조건 복종하는 척하면서 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다.

    어쩌면 애론 역시 그것을 알고 엘로디를 괴롭힌 것이리라.

    들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자 엘로디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애론은 시트를 다시 꼼꼼히 살피더니 어느새 뜬 달빛을 받으며 하얗게 웃어 보였다.

    “그래봤자 걔는 내 거야. 길거리의 돌만도 못한 계집애 주제에 알파를 넘보려 하다니, 진짜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엘로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유일한 그녀의 편은 리암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리암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자신의 사람도 아니다.

    엘로디는 그냥 평범한 베타일 뿐이다. 후작가의 딸이라는 게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할 수는 있어도 애론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애론이 웃었다.

    하늘 높이 맑은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시원한 바람이 엘로디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멀리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쓰르라미가 우는 소리가 커져왔다.

    그러고는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엘로디는 그제야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이 세계에서 혼자만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저택에서 그녀를 찾으러 나온 듯 손전등 불빛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디는 대답조차 할 수 없어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가씨!”

    자신을 안아오는 유모의 손길을 느끼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을 잊기 위한 것처럼 며칠을 고열과 싸우며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꿈을 꾸는 족족 리암과 애론이 나와서 엘로디를 괴롭혔다.

    잠을 자지 않으려 애썼지만 속수무책으로 강하게 처방된 약 기운에 휩쓸려 꿈쩍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열이 떨어져 제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황금빛의 눈이 있었다.

    “정신이 들어?”

    엘로디는 말을 하려 입을 벌렸지만 목이 갈라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 줄까?”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 오던 친구였다.

    이제는 귀족이 명예직이 되어가는 세상이지만 나바르 후작가 정도 되는 가문의 딸이 평민인 남자와 약혼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엘로디는 리암을 후작가로 데려오기 위해 애론에게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성인으로서의 능력을 비쳤다.

    무심한 부모님의 관심을 얻기 위한 일이었으나 사사건건 엘로디를 무시하던 애론이 한순간이라도 그녀에게 뒤처졌다는 사실을 알자 괴롭힘의 농도는 순식간에 짙어졌었다.

    엘로디는 연금술에서마저 다시 애론에게 뒤처졌을 때 자신을 보며 비웃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리암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맑은 눈을 하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다.

    “나 피곤한데 나가줄래?”

    자신도 모르게 차갑게 나간 말에 리암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보이다가 물을 가져와 침대 옆에 올려다놓고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두고 간 물에 엘로디가 즐겨 마시는 말린 보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엘로디는 다시 한번 소리 죽여 울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엘로디 역시 리암을 절절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동반자로, 친구로 인생을 함께 걷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쩌면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특별한 무언가가 그 둘을 서로 끌어당겼을 수도 있었다.

    엘로디는 자신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특별한 종족인 둘 사이에 끼어든 이물질이 돼버린 것 같은 감각에 절망했다.

    오랫동안 울던 엘로디는 한기를 느끼며 생각을 다듬었다.

    그리고 곧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해야만 했다.

    둘은 이루어질 수 없다.

    리암이 자신의 약혼자여서가 아니었다.

    애론은 황태자의 약혼자였다. 게다가 둘의 결혼식은 1개월도 안 남았다.

    엘로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마련된 책상의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둘이 언제부터 저런 사이였는지 알기 위해 둘의 사이클 기록을 모두 확인했다.

    아마도 몇 달 전부터, 그러니까 둘의 사이클이 비슷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으리라.

    애론이 이제 와서 파혼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런 위험한 관계를 계속하게 둘 수 없었다.

    만일 잘못해서 애론이 리암의 아이를 임신하고 황태자와 결혼하기라도 한다면, 아니 결혼한 뒤 애론과 리암의 사이를 황실이 알게 된다면.

    “죽을지도 몰라.”

    방금 전까지의 배신감에 치를 떨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황실과의 결혼을 엎어버리기엔 너무 늦었다.

    엘로디는 애론을 잘 알고 있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척하고 있었지만 그는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며, 무엇보다 엘로디를 혐오했다.

    리암은 어떨지 몰라도, 애론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이런 짓을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서 이 일을 엘로디가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며 질질 끌고 와서 이렇게 되어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둘은 깊은 사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관계였다면 결혼 한 달 전에 이렇게 후작저에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애론은 갖고 싶은 것은 끝까지 손에 쥐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원작대로라면 애론과 아드리안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될 사람들이었다.

    운명의 상대. 반려 혹은 각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구조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원래 엘로디는 계획된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만 버티고 후작가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장사로 벌어둔 돈은 평생을 먹고살 정도로 쌓이고 있었고, 억제제의 개발도 곧 끝날 것이다.

    스무 살이 되고 천천히 독립을 준비하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돼버린 마당에 황후가 된 애론이 자신을 살려둘 리 없었다.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정식으로 연금술사가 되어 제국을 벗어나버리면 애론도 곧 흥미를 잃을 것이다.

    엘로디는 문득 황실과의 치정 싸움에 휩쓸려 허망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를 떠올렸다. 이미 약혼자가 있던 그녀는 황태자와 사적인 만남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잘못된 날에,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당했다.

    엘로디는 그것이 사실상 사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베타가 알파를 유혹하려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목을 매달았던 친구 크리스타를 떠올리며 엘로디의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자신이 벌이지도 않은 일로 죽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죽을 거였다면 원작대로 황태자를 유혹하고 나서 죽을 각오를 했을 것이다.

    일단은 늦지 않게 후작에게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일은 엘로디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일이었다. 가문과 관련된 일이었고, 무엇보다 애론은 엘로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은 가주인 아버지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었다.

    어느새 창밖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엘로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로 쏟아져 내려오는 아침 해를 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평소처럼 브런치를 먹겠다며 카페에 나온 엘로디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리암은 얼마 전에 심하게 앓은 엘로디가 나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나왔다.

    이 카페는 전생에 설화였을 때 즐겨 마시던 커피를 먹고 싶어서 엘로디가 만든 곳이었다.

    아직 귀족들은 홍차, 평민들은 커피라는 이 세계의 사고방식 때문에 처음 카페를 연다고 했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할 수 있다며, 함께 창업하자며 웃어주던 사람이 리암이었다.

    다행히 사업은 잘 굴러갔고 2년이 지난 지금, 망하지는 않을 정도의 가게가 되어있었다.

    엘로디는 착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시켜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차가운 얼굴을 한 주제에 리암은 단 음식을 좋아했고 그의 커피는 항상 시럽과 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엘로디는 늘 자신을 위해 올라와 있는 신문을 펼쳤다.

    “얼마 안 있으면 드디어 애론이 결혼하네.”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머릿속에서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초조함에 입 안이 마르고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리암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의 신문에만 집중하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드디어 괴롭힘에서 벗어나겠어.”

    “뭐… 그렇지.”

    엘로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리암이 자신이 알고 있는 순하고 남을 속일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상대라니. 로맨틱한 이야기야.”

    “그 당시 태어난 오메가는 오라버니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교회에서 인정한 상대라고 하시더라고.”

    빙빙 도는 이야기에 리암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너는 어떤데? 애론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글쎄. 어차피 정략결혼이잖아. 게다가 애론은 황태자와 나이가 맞는 유일한 오메가이기도 해서, 아마 부모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걸.”

    “흐음.”

    엘로디는 맞은편에 앉아 어마어마하게 단 커피를 별생각 없이 마시며 다른 신문을 읽고 있는 약혼자 리암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가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엘로디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리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엘로디는 얼굴을 붉히고 다시 빨대로 음료를 빨아들이는 데 신경 썼다.

    “정말 치사해.”

    “뭐?”

    “종족이라는 거 말이야. 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애론의 발끝도 못 쫓아가겠지.”

    리암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계속해서 애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이 불편해서일까.

    엘로디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리암, 너는 배신하지 않을 거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데.”

    “우리 가문이나, 약혼자인 나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

    “내가 걱정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 나바르의 기사.”

    엘로디는 그에게 예의를 다했다. 설령 그가 저지른 짓이 그녀를 기만하는 것이었을지라도 그가 있었기에 그녀가 이 저택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니 사고가 터지기 전에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카페를 나간 엘로디는 아버지를 찾아 저택 최상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짓을 한 게냐!”

    애론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그 옆에 리암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엘로디는 아버지의 몇 발자국 뒤에서 그런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애론은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이용하여 슬픔에 젖은 얼굴로 후작에게 간절하게 매달렸다.

    “아버지, 저는 리암을 사랑해요.”

    “거짓말하지 마라!”

    후작 역시 애론이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교묘하게 엘로디를 괴롭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고, 후작 자신이 나서서 그것을 막은 적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가 알지 못한 괴롭힘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연결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사랑하는데 이제 와서 파혼을 이야기한단 말이냐? 둘이 만난 지 몇 달은 되었다면서!”

    애론은 무릎을 꿇고는 애처롭게 후작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제발이요. 리암과 함께하고 싶어요. 제 소원이에요.”

    “만일 엘로디가 말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

    애론은 입을 다물었다.

    후작의 말대로 결혼이 한 달도 안 남은 시기였다. 만일 엘로디가 리암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엘로디도 황태자도 약혼자의 밀회를 알지 못한 채로 결혼했을 것이다.

    후작은 애론의 행동과 표정에서 이 일이 단순히 애론이 엘로디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둘의 관계는 가문이 위험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될 만한 관계일 것이다.

    “제프, 애론에게 마력 구속구를 채워라. 애론, 결혼식 전날까지 서관에서 생활해.”

    후작은 집사 제프에게 이야기하고 눈을 내려 무릎을 꿇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암을 내려다보았다.

    “리암, 너는 동관에서 생활해라. 적어도 우리 가문에 충심이 남아있다면 그곳을 빠져나와 애론을 만나지는 마라. 엘로디와의 약혼은 이 결혼이 끝나고 나서 다시 생각하지.”

    “아버지!”

    애론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후작은 집사인 제프를 다그쳤다.

    집사는 들고 있던 금속으로 만들어진 얇은 팔찌를 애론의 양손에 채우고, 마지막으로 초커를 거는 것으로 마력 구속구를 모두 걸어두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해요?”

    “애론, 이 일은 네 목숨만 걸린 게 아니다.”

    후작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며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다.

    엘로디는 울고 있는 연기를 멈춘 애론을 바라보았다.

    “이제 속 시원해?”

    “뭐?”

    “이렇게 우릴 갈라놔서 속 시원하냐고! 넌 항상 나한테 열등감을 느꼈잖아. 네 약혼자가 날 사랑한다니까 질투 나서 아버지에게 말한 거 아니야?”

    엘로디는 뻔뻔하게 리암 앞에서 자신을 질투에 미친 여자처럼 몰아세우는 애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아니. 아직 속이 덜 시원한데?”

    “뭐?”

    “너 리암을 진짜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 따위가 사랑을 말해?”

    “입 닥쳐!”

    애론은 화가 나서 평소처럼 마력을 움직이려 하다 구속구와의 반발력 때문에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애론을 보며 엘로디는 비웃음을 참지 않았다.

    “잘 들어, 애론 나바르. 너희 둘이 천 년의 사랑을 하건 말건, 관심 없어.”

    “웃기지…….”

    “내 말 끝까지 들어. 난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아.”

    엘로디는 고개를 돌려 경멸과 분노에 찬 눈으로 리암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너만 입 다물고 있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거 아냐.”

    “그렇게 죽고 못 살겠으면 결혼 한 달 전에 내 입에서 둘의 관계가 나오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저 인간이 자신의 혈육이라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가 귀한 오메가이고, 마법사이기에 보호받을 것을 알고 이 일을 벌인 것이 보였다.

    만일 이 일을 황실이 알게 된다면 애론은 기껏해야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나바르 후작가나 리암은 다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 사고를 쳤을 애론에게 욕설이 치밀어 올라왔다.

    엘로디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애론을 밀쳐내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리암에게 다가갔다. 자신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본 것인지 리암의 몸이 움찔거렸다.

    엘로디는 몸을 숙여 그런 리암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더러워.”

    신음 소리처럼 비수가 될 말을 뱉어내고 그대로 방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애론이 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에서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 * *

    며칠 뒤, 엘로디의 생일 연회 날이 다가왔다. 애론의 결혼식이 멀지 않아 가까운 가신들과 친구들 몇 명만 불러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애론과 리암의 처분이 결정되고 난 뒤에도 엘로디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기껏 애론의 결혼식을 배려해 주었더니 돌아오는 것은 결국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입 안이 썼다.

    게다가 아직 리암과의 파혼을 알리지 않았기에 오늘은 그가 엘로디를 에스코트할 것이다.

    그날 이후, 그에게 그런 폭언을 퍼부은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엘로디는 화려하게 치장한 채 준비실에 앉아서 자신을 데리러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엘로디와 맞춘 듯한 정복을 입은 리암이 들어왔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의 금빛 눈에는 어떠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기분 안 좋겠지만, 난 더 엿 같으니까 아무 말 하지 말아주길 바라.”

    리암에게 차갑게 쏘아붙인 엘로디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길게 이 침묵을 유지했다.

    “아가씨, 리암 경. 시간 되었습니다.”

    시종이 문밖에서 재촉하자 리암이 앉아있는 엘로디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낀 커다란 그의 손을 잠깐 노려본 엘로디는 결국 그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올려야 했다.

    예전 같으면 저 손에서 느껴지는 조금 높은 체온에 그녀는 안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분 나빠.”

    엘로디는 그 손으로 제 오라비의 몸을 더듬던 장면이 떠올라 토기가 올라올 것 같은 것을 참았다.

    리암은 그러나 아무런 동요 없이 평소처럼 그녀를 부드럽게 에스코트해서 방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면서 엘로디는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애론의 결혼까지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저 멍청한 작자들이 나바르 후작가를 망치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엘로디는 살고 싶었다. 전생에서도 20여 년 남짓 살았는데 이 생에서도 겨우 20년 살고 다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표정 관리해. 나도 할 테니까.”

    후작저 내의 연회장 문 앞에 서서 시종에게 눈짓을 하며 엘로디가 속삭였다.

    시종이 자신과 리암의 이름을 크게 호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까의 표정을 순식간에 지우고 엘로디는 활짝 웃으며 리암의 손을 살짝 제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웃었다.

    그렇게 둘은 빛의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건너에 후작이 초조한 표정으로 저와 리암을 보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 근처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리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드려요, 영애.”

    “이렇게 훌륭한 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로디는 하나하나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호스트로서 최선을 다했다. 힐끗 바라본 리암은 엷은 미소를 짓고 그에게도 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전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인사를 주고받고는 둘은 후작에게 다가갔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살짝 떨어져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일 축하한다, 엘로디. 그리고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알아요.”

    엘로디는 그렇게 말하고 리암을 올려다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 리암?”

    “…그렇습니다, 후작님.”

    그런 리암을 후작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더니 엘로디에게 부드럽게 인사를 하고 잔을 들었다.

    “자아, 오늘 이렇게 제 사랑스러운 둘째, 엘로디 나바르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목하자 그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시종이 서빙하던 샴페인 잔을 들어 엘로디와 리암에게 건네주었다.

    “제게는 항상 아기 같기만 하던 엘로디가 이제 벌써 성인이 되었고, 이제 후작가의 일원으로 나바르를 위해, 제국을 위해 피어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후작은 몸을 살짝 엘로디 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제 딸, 엘로디가 앞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건배합시다.”

    반짝이는 유리잔들이 동시에 올라왔다. 엘로디 역시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엘로디 나바르의 행복을 위하여!”

    그의 말을 따라서 제창한 사람들이 샴페인 잔을 비웠다.

    엘로디 역시 웃으며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러나 술맛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이 창가에서 자신과 리암을 분노에 떨며 바라보고 있는 애론의 시선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엘로디의 얼굴이 굳자 리암은 그녀가 응시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역시 놀라 얼굴이 굳었다.

    애론은 천천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주변으로 곧 황태자비가 될 사람에게 말 한 번 붙여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애론은 그런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며 둘에게 다가왔다.

    이상을 알아차린 후작이 화가 난 표정으로 엘로디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엘로디는 손을 들어 후작이 다가오는 것을 멈추었다.

    엘로디는 오히려 웃으며 잡고 있던 리암의 손을 놓고 부드럽게 그의 앞으로 나섰다.

    “오라버니.”

    “엘로디, 생일 축하해. 그런데 올해 생일 연회는 참 소박하네?”

    그는 치명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엘로디를 바라보았다. 그 미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볼을 붉혔다.

    엘로디는 그런 그를 차갑게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의 더 큰 행사가 남았는걸요. 황태자님과의 결혼이 코앞인데 제 생일을 크게 벌일 것은 없지요.”

    애론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그랬다. 사람들의 관심이 엘로디에게 가는 것을 싫어했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운명의 반려인 알파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했던 남자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자신이 받는 사랑에 만족하지를 못했다.

    그는 엘로디가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을 싫어했다. 응당 자신이 받아야 할 사랑을 나눠 갖는 것처럼 그 사실을 증오했다.

    말을 마친 엘로디가 몸을 돌렸다.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곧 당연한 듯 애론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정말 결혼이 얼마 안 남으셨군요, 애론 경.”

    한 영애가 꿈에 취한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평소 같으면 덜떨어진 베타가 걸어오는 말이라고 무시할 법도 했으나 어쩐 일인지 그가 진심을 담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말을 나누었다.

    “예. 저는 아주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가 웃자 마치 주변에 꽃이 피어나듯 화사해졌다. 애론은 자신의 외모를 잘 이용하는 남자였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결혼식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우실지 너무 기대가 돼요.”

    어떤 영애의 몽롱한 말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제 동생이 이 연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달고 와 제일 눈에 띄지 않습니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지껄이는 그를 보고 엘로디는 질린 표정을 짓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표정을 추스르고 리암에게 다가갔다.

    “나 머리 아파.”

    리암은 그런 그녀와 애론을 번갈아보다가 곧 엘로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원으로 갈까?”

    “응.”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었다. 오늘 그가 유난히 노골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엘로디도, 리암도 알고 있었다.

    엘로디는 항상 애론의 빛에 가려 무엇 하나 눈에 띄지 않은 영애였다. 방금 애론이 말한 장신구가 알파인 리암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엘로디가 그저 리암 때문에 빛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엘로디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둘은 항상 가던 정원 구석의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매번 엘로디가 애론 때문에 속상해할 때 리암과 함께 오던 곳이었다.

    순간 엘로디는 이제 이곳에 더는 그와 함께 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잡고 있던 손을 떨어트리고 혼자서 정자 안으로 들어갔다.

    “우욱.”

    스트레스와 긴장 때문에 조금 먹은 음식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리암은 그녀보다 한 발짝 늦게 쫓아 들어갔다.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는 손을 엘로디가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바람에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엘로디의 등을 한참을 내려보던 리암이 입을 열었다.

    “엘로디.”

    “말도 하지 마.”

    “…….”

    힘을 주어 꽉 쥔 주먹을 타고 긴장과 분노가 흘러내렸다.

    엘로디는 몸을 돌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리암을 올려다보았다. 뿌옇게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에 리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돌아가. 돌아가서 오지 마.”

    “엘로디, 나는…….”

    “말했잖아. 아무 말 하지 말고 가!”

    리암은 엘로디를 오래 봐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주 울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엘로디는 애론의 악의가 가득한 괴롭힘에도 열세 살이 넘고 나서는 거의 울지 않았다. 그의 기억에 그녀가 운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장 최근에 운 것은 몇 년 전, 그녀의 친구가 자살을 당했을 때였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마. 그럴 거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어.”

    엘로디의 말에 리암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나와 자신이 머무는 건물로 가버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로디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서 이 모든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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