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키스하고 싶어
“난 이 결혼을 반대한다.”
“염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다가오는 염라를 바라보는 해령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사납게 반응하는 해령을 보며 얄밉게 미소 지은 염라가 당당하게 답했다.
“전생의 남편으로서.”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염라의 신부였던 적이 있었지.’
그래도 염라가 그때의 이야기로 농담하며 웃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나도 반대한다. 전생의 연인으로서.”
염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색 온천복을 입은 꼬마 베카가 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와 내 무릎을 차지하고 앉으며 작은 손을 뻗어 들며 해령을 향해 소리쳤다.
“넌 어째서 아직도 꼬맹이 모습인 거지?”
“난 꼬맹이 베카로 수온과 친구가 되었으니까 쭉 이렇게 지내기로 했다.”
“박수온, 이 녀석의 실체를 알면서도 아이처럼 대하는 건가?”
해령은 내가 전처럼 베카를 대하는 것이 무척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베카가 말했잖아. 우리는 이제 완전한 친구가 됐다고.”
“질투 많은 뱀 같으니라고.”
베카가 영계가 내어준 과자를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해령을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 꼬맹이가……!”
“나도 이 결혼은 반대다! 전생의 수온에게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해령은 너무 질투가 많…… 윽!”
해령의 심기가 한껏 불편해져 있는 차에 샤레니안이 끼어들려다가 또 복부를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아무래도 샤레니안은 해령을 놀리는 데에 제대로 맛이 들린 것 같았다.
그때 웃고 있는 샤레니안의 뒤로 새하얀 여우 귀와 포슬포슬한 꼬리가 솟아나며 운수가 나타났다.
“나는 수온의 선택에 맡기겠다. 물론 수온이 무척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니까.”
운수는 네 성좌 중에 유독 나의 행복을 빌어줬다.
‘내가 운수를 성좌로 만들었을 때 운수가 행복하길 바랐던 것처럼.’
나는 그런 운수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 날 부케는 내가 만들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뭔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인다 했더니 부케를 만들어주고 싶은 거였어?’
긴장한 얼굴의 운수가 귀를 쫑긋 세운 채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언제 결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케는 운수만 믿고 있을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케를 들게 해주겠다!”
내 부케를 만들게 된 것이 기쁜지 운수는 보석같이 반짝이는 눈망울을 빛내며 즐거워했다.
“이럴 게 아니다. 꽃밭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와야지.”
운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온천의 꽃밭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럼 주례는 내가 맡으면 되겠구나. 내 손녀의 결혼식이니까.”
이에 뒤질세라 눈토끼에게 가져다줄 주먹밥 도시락을 든 약 항아리 어르신이 한술 더 떴다.
“어르신, 아직 먼일이라니까요. 언제 누구랑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고.”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내게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해령이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방금 한 말 때문에 토라진 건가?’
“왜 그렇게 봐?”
나는 해령이 어떤 생각인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물어봤다.
“용은 죽을 때까지 신부의 표식을 새긴 여자만을 사랑한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넌 그걸 알면서 그때 덥석 나한테 표식을 새긴 거야?”
“확신이 있었으니까. 너라면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요즘 해령은 전의 그 까칠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했다.
‘완전 직진남이었잖아.’
“실제로 그렇게 됐고.”
해령은 날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차갑게만 느껴졌던 벽안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왔다.
그 변화가 당혹스럽게 느껴졌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좋아.’
전과 달라진 내 감정을 자각하는 순간, 지호가 온천에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혹시 지금 본관 식구들 다 계신가요?”
“응, 운수는 꽃밭에 있고. 다 있는 것 같은데? 왜?”
지호가 내게 카메라를 들어 보이며 답했다.
“온천에 걸어둘 사진을 한 장 찍어두고 싶어서. 이제 다들 가족이나 다름없잖아.”
“그거 좋은 생각이군! 사진을 찍어서 온천에 대문짝만하게 걸어두자고!”
샤레니안이 지호의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운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럼 다들 나란히 서볼까요?”
지호의 말에 우리는 삼각대가 설치된 카메라 앞에 보기 좋게 모였다.
“아, 맞다. 시우 형은 어쩌지?”
“지금 탑일 텐데……. 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래도 가족사진인데 박시우가 빠지면 섭섭했다.
나는 지호의 스마트폰으로 한창 탑 레이드 중인 박시우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뭐야. 왜 박돈돈, 네가 나와?”
“지금부터 가족사진을 찍는다. 김치 해.”
“뭐? 누가 레이드 중에 가족사진을 찍어?”
“얼굴 잘 보이게 화면 확대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웃어!”
고함을 지르는 박시우를 무시한 나는 그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영상을 확대했다.
“자, 그럼 시우 형이 레이드 중이니까 빨리 찍을게요! 다들 하나, 둘, 셋, 하면 김치! 하시는 거예요.”
지호가 카메라의 버튼을 누르고 자연스럽게 나와 해령의 사이에 들어와 섰다.
“하나! 둘! 셋!”
나는 그 틈에 지호의 뒤로 해령의 손을 잡았다.
내 손이 닿자 놀란 건지 그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날, 지호가 찍은 온천 가족사진 속의 해령은 보기 드물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볼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채로.
* * *
사진을 찍은 뒤, 나는 박시우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피로해진 몸을 풀기 위해 간단하게 족욕을 하기로 했다.
지호가 만든 향료는 효과가 좋아서 발만 담그고 있어도 피로가 풀렸다.
‘내 동생이지만 손재주가 좋다니까.’
흐뭇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온천탕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들어가도 되나?”
해령의 목소리였다.
“응, 들어와.”
족욕만 할 생각으로 온천 가운을 갖춰 입고 있어서 딱히 해령이 들어와도 상관이 없었다.
‘잠시 얼굴을 못 본 것뿐인데, 허전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도 그럴 것이 해령이 과장을 조금 붙여서 24시간을 붙어서 나를 챙겨주다 보니 잠시라도 그가 자리를 비우면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나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령한테 조련당하고 있었나?’
그때 탕의 문이 열리고 해령이 바구니 하나를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족욕하는 동안 입이 심심할 것 같아서 귤을 가져왔다.”
해령은 바구니를 내 앞에 내려두고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나는 왠지 그를 붙잡고 싶어졌다.
“가지 마.”
내 말 한마디에 해령은 발이 굳은 듯 걸음을 멈췄다.
“같이 들어와 있다가 가.”
“탕에 같이 들어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 해령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구보다 솔직한 그의 귀는 이미 붉어져서 터질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전에도 같이 족욕한 적 있잖아. 이리 와.”
“……그랬지.”
내 손길에 해령은 홀리듯 내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자리에 앉은 해령은 어느샌가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 껍질을 벗겨서 먹기 좋은 크기의 알맹이를 내 입 앞으로 가져왔다.
‘이 정도면 내가 고양이고 해령이 집사인 수준 아니야?’
나는 익숙하게 해령이 주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쉬지 않고 날 챙겨주는 해령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어깨도 딱 벌어져 있고 몸도 좋네.’
본인도 온천을 할 생각이었던 건지 해령은 온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얇은 천 위로 잘 다듬어진 몸의 굴곡이 드러나서 심장이 철썩 파도를 일으키며 잘게 뛰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도는.
“같이 온천탕에 들어오는 것도 부끄러워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해? 내가 신부라면서.”
“그 말은…….”
해령이 바구니에서 새로 꺼내든 귤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나를 돌아봤다.
“그래, 내가 하겠다고. 네 신부.”
놀란 듯한 해령에게 다가가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감격스럽다는 듯 웃으며 해령이 나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해령을 보는 건 처음이야.’
기분 좋은 해령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지어졌다.
“고맙다. 수온.”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해령이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부끄러워했던 게 아니다.”
“응?”
“조심했던 것뿐이다. 너와 함께 온천탕에 들어오게 되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다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힌 해령이 내게 짧게 입을 맞췄다.
“이런 것. 또…….”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기도 전에 해령의 입술이 다시 한번 내게 포개어졌다.
말랑한 감촉과 함께 전보다 진득하게 서로의 숨결이 얽혀 들어갔다.
“하아…….”
숨 쉴 틈도 주지 않을 만큼 격렬하게 이어진 키스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결이 흩어졌다.
그 작은 숨결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해령이 다시 내 입술을 가르고 더 깊숙이 들어왔다.
그동안 해령이 얼마나 많은 욕망을 참아냈는지가, 나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열렬하고 뜨거운지가 온전히 느껴져서 나는 피하는 대신 두 팔로 해령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이런 것, 그 이상도.”
커다란 손으로 나의 등을 안은 채 나와 눈을 맞춘 해령이 아직도 갈증이 난다는 듯 애타는 얼굴을 했다.
눈을 맞추자 해령을 끌어안았던 용기가 사라졌다.
‘거기다 해령이 쉽게 놓아줄 것 같지가 않다고.’
“족욕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까 이만 나갈ㄲ…….”
모르는 척 해령에게서 벗어나려는 나를 그가 붙잡아 안았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건가?”
해령이 순진하고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그의 청량함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대신 아주 조금만이야.”
“그래.”
내 허락을 얻어낸 해령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신부의 표식이 새겨진 내 목덜미에 닿았다.
“사랑해. 박수온. 내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탕 속에 있던 나를 끌어올린 탓에 물에 머리카락부터 상체까지 잔뜩 젖은 해령이 물방울이 맺힌 채로 내게 나지막이 고백했다.
“나도 사랑해. 이 온천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맞아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이마를 맞댄 채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키스하고 싶어.”
나는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해령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럼 하면 되지.”
미소 짓던 내가 해령에게 살며시 입 맞췄다.
다시 한번 두 입술이 맞물렸다.
맞닿은 몸으로 심장의 떨림이 온전히 전해졌다.
해령의 애틋함이 느껴질수록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의 해령은 뜨거웠다.
우리가 몸을 담그고 있는 EX급 온천보다도 더.
* * *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위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XX이 ????? 상승합니다.]
마지막 XX가 지지직거리며 선명한 글자로 나타났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수온에 대한 사랑이 ????? 상승합니다. !!측정 불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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