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사랑해, 베카
[태초의 신의 지팡이로 ‘마탑주 베카(???)’를 해방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뭘 물어보고 있어?’
나는 한쪽 입가를 올려 웃으며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었다.
“해방!”
내 주문과 함께 커다란 마나 폭풍이 일대를 휩쓸더니 베카를 묶고 있던 족쇄가 나가떨어졌다.
[‘베카’가 해방됩니다.]
[‘시스템’이 ‘베카’에게 부여된 마탑주의 힘을 완전히 거둬들입니다.]
족쇄가 끊기자 베카가 탑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쓰러졌다.
[‘시스템’이 “약속된 조항을 이행하라”고 경고합니다.]
‘재촉하지 않아도 할 거라고.’
베카를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됐다.
‘아직 버그 성좌가 남았어! 그런데 그 녀석을 어떻게 이곳으로 불러내지?’
계약자가 있으면 운수의 각인으로 버그 성좌를 불러낼 수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현정우가 없었다.
‘그렇다고 불러낼 수도 없고.’
그때 옷 주머니 속에서 황금빛 꽃잎 몇 장이 나왔다.
‘이건 현정우의 꽃잎?’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꽃잎에는 소통하는 기능도 있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습니다.]
‘나이스, 운수!’
“현정우씨, 내 말 들려요?”
“온천 사장님?”
내 물음에 꽃잎에서 현정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됐다!’
“포털을 타고 탑 100층으로 올라와요. 난 계약자를 통해서 버그 성좌를 불러들여서 봉인할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현정우씨가 필요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탑 100층으로 포털이 열리며 현정우가 나타났다.
“실행력이 빠른 것 하나는 마음에 드네요.”
[‘성좌 버그010023!@#$’ : 현정우, 네가 거기에 가서 뭘 어쩌려고?]
내가 현정우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지 버그 성좌가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넌 닥치고 당하기만 하면 돼. 버그 성좌.”
버그 성좌에게 경고를 날린 나는 태초의 신의 지팡이를 거둬들였다.
“운수 각인.”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각인을 자각합니다.]
운수의 각인을 사용하자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대리석으로 된 신전의 벽이며 바닥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오드아이가 된 채 금빛 도포를 휘날리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소환부!”
내 외침에 마법진이 그려진 노란색 종이가 나타났다.
손가락 사이에 소환 부적을 끼운 채 손끝으로 마나를 모으자 부적이 환하게 빛나며 현정우의 주변으로 부적에 있는 것과 같은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탑으로 오기 전에 운수에게 속성으로 배워둔 스킬이었다.
[스킬 ‘소환부(SSS)’가 계약자의 성좌를 소환합니다.]
동시에 거센 바람이 일며 마법진에서 버그 성좌가 나타났다.
“현정우, 이 자식이!”
소환된 버그 성좌가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더 날뛰기 전에 저 녀석을 탑에 봉인해야 해.’
나는 손가락으로 삼각형을 만들며 그 안에 버그 성좌를 담은 채로 봉인의 진을 펼치는 주문을 외웠다.
“봉인!”
그러자 두꺼운 황금색 실이 버그 성좌의 몸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어디 네 마음대로 얌전히 당하고 있을 것 같으냐?”
[‘성좌 버그010023!@#$’가 독기를 뿜어냅니다. 장시간 노출시 상태 이상으로 호흡이 어려워집니다.]
버그 성좌가 발악하며 검은 독기를 뿜어냈다.
동시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내 정신을 흔들겠다는 건가?’
이대로 독기를 맞고 있다간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 해.’
봉인에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독기가 가면 갈수록 강해져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 탓인지 버그 성좌의 몸을 감고 있던 봉인이 느슨해져갔다.
그럴수록 버그 성좌는 속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대로는 안 돼……!’
위기를 직감하는 그때였다.
“온천 사장님, 지금입니다!”
현정우가 버그 성좌를 온몸으로 감싼 채 봉인의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당장 저리 꺼지지 못해?”
그러자 어째서인지 버그 성좌의 독기가 약해졌다.
“왜? 계속 독기를 내뿜어서 내 숨통을 끊어놓지 그래? 아니다. 그렇게 못하겠구나?”
현정우가 버그 성좌에게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점차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온천 사장님, 어서요!”
“지팡이!”
버그 성좌를 잡을 기회는 지금뿐이라는 예감에 태초의 신을 지팡이를 불러들인 나는 봉인의 진으로 다가가서 힘껏 지팡이를 내리꽂았다.
“봉인!”
[성스러운 태초의 힘에 독기가 정화됩니다.]
[탑 100층에 새로운 보스 ‘성좌 버그010023!@#$’가 봉인됩니다.]
환한 빛이 독기를 정화하자 암흑으로 덮여 있던 탑 100층이 밝아졌다.
‘버그 성좌를 봉인하는 데 성공했어!’
기뻐하는 것도 잠시, 족쇄에 묶인 버그 성좌를 막아내고 있던 현정우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의 몸이 베카처럼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현정우씨, 몸이…….”
“미안해요. 저와 같은 아픔을 겪게 만들어서. 온천 사장님께도, 지호에게도, 그리고 시우 형에게도.”
현정우는 점차 희미해지는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다 나를 향해 진심으로 사죄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아마도 버그 성좌와 금지된 계약을 한 것 같다”며 “그 경우 계약자나 성좌 중 하나가 죽으면 같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버그 성좌는 봉인이 되었을 뿐 살아 있잖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러니까 영혼이라도 해방된 것”이라며 “소멸한 영혼은 존재도 없이 사라지지만 자유를 얻은 현정우의 영혼은 무사히 저승으로 갈 수 있을 거다”라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현정우씨, 왜 제게 말하지 않은 거예요?”
“사죄하고 싶었으니까요. 저도 김패금처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잖아요. 용서는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진심으로 사죄하게 해주세요. 저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슬픈 미소를 짓는 정우가 너무나 홀가분해 보여서 나는 그를 더는 탓하지 못했다.
“부디 다음 생에는 누구보다 행복하세요.”
나는 빛이 되어 사라지는 정우의 영혼을 향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온천 사장’이 탑 100층을 클리어합니다.]
[‘온천 사장’이 헌터 최초로 성좌의 경지에 오릅니다.]
[‘온천 사장’이 태초의 별, ‘태초의 신’으로 부활합니다.]
[‘베카’가 성좌 ‘수호사자’로 부활합니다.]
탑을 클리어했다는 시스템 창과 함께 나와 베카는 탑을 벗어나 다른 시공간에 떨어졌다.
대낮인데도 별이 뜨는 신전이 있는 세계.
‘베카와 내가 함께 지냈던 공간이구나.’
기억을 되찾은 덕분에 이곳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시스템’이 “태초의 신이여, 버그를 잡아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인사합니다.]
[‘시스템’이 “처음 시스템이 그대를 공격했던 것을 지휘했던 것이 버그였다”며 “그는 시스템을 지배했던 인간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며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합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너도 시스템이잖아? 인간들을 미워하는 거 아니야?”
[‘시스템’이 “잘 생각해보면 인간들과 시스템은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로 아주 사적인 정보까지도 공유해왔다”며 “난 시스템들의 지휘자로서 인간과 공생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지금 시스템은 인간들에게 호의적인 것 같았다.
‘다시 전쟁할 일은 없겠네.’
[‘시스템’이 “태초의 신이여, 난 당신이 전처럼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주길 바란다”며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악수를 청합니다.]
“악수는 됐고, 언제 한번 온천에 쑥 라테 마시러 와. 내가 맛깔나게 타줄 테니까.”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린 ‘시스템’이 “바쁜 일이 생각났다”며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아무래도 내가 억지로 쑥 라테를 먹이려고 했던 기억이 시스템에게 강렬하게 남은 것 같았다.
“이곳에 오고도 놀라지 않는 걸 보니 기억을 되찾은 것 같군.”
내 전생의 기억에서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하얀색 로브를 걸친 흑발의 베카가 내게로 다가왔다.
“맞아. 태초의 힘을 되찾았을 때 기억도 함께 돌아왔거든.”
나는 베카에게 내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기억을 되찾아도 네 답은 전과 같은 건가?”
날 바라보는 베카의 장밋빛 적안이 구슬프게 일렁였다.
‘물론 전생의 나는 베카를 누구보다 사랑했어. 하지만 지금은…….’
베카와 같이 있는 중에도 다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까칠하기는 새로 산 때수건 같아도 언제든지 내가 기댈 수 있도록 늘 내 곁에서 조용히 나를 지키는.
“내 마음은 기억을 찾기 전과 같아. 지금의 난 초성이 아니라 박수온이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나를 지켜보던 베카의 얼굴이 감출 수 없이 슬프게 무너졌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전생의 나에게 묶여 있을 수는 없어.’
난 과거에 매이지 않고 초성이 아닌, 오로지 박수온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난 온천으로 돌아갈 생각인데, 같이 가겠어?”
“나는 잠시 들를 곳이 있다. 천천히 따라가도록 하지.”
베카도 더는 나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먼저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흔들리지 마! 박수온, 정신 차리고 온천으로 돌아가자!”
저릿한 마음을 뒤로하고 난 마스터키를 꺼내 들었다.
* * *
베카는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겨 초성과 함께 지냈던 신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초성과 차를 마시던 테이블, 초성과 목욕을 하며 휴식을 취하던 온천, 매일 아침 나란히 누워 눈을 뜨던 침실.
“이렇게나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초성만이 이곳에 없었다.
그리움에 사무친 베카가 괴로운 얼굴로 초성과 함께 잠들던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였다.
침실에 있던 모래시계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초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모래시계는 베카가 초성에게 선물했던 물건으로 실제에 가깝게 영상을 담을 수 있는 마도구였다.
“베카, 결국 난 널 찾지 못할 것 같아. 지금 내가 신전에 있다는 게 시스템에게 들통난 것 같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네가 선물해준 모래시계에 남겨.”
“초성…….”
영상 속에 초성을 본 베카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사랑했던 초성이 그곳에 있었다.
“베카, 이번 생에서 난 누구보다 널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모래시계에 담겨 있는 초성이 베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랑해, 베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초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베카가 아무리 손을 뻗어봐도 초성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도 사랑해…….”
모래시계 앞에 주저앉은 베카의 굵은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성.”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베카의 구슬픈 목소리와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베카’의 XX이 ????? 상승합니다.]
XX는 이내 지지직거리며 완전한 단어로 변했다.
[‘베카’의 초성에 대한 사랑이 ?????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