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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86)화 (186/190)

186화

염라의 계약 신부

“갑자기 날 저승으로 데려가겠다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니 염라가 말을 덧붙였다.

“권유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캐스팅이라고 하던가?”

‘전혀 권유처럼 들리지 않아! 그리고 누가 캐스팅을 하는데 납치하겠다는 말을 해?’

“내 저승에서 내 신부를 맡아주면 내 앞으로 나오는 봉급을 전부 네게 주겠다. 왕비의 업무는 공식 석상에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신경 쓸 것 없게 해주겠다.”

“지금 나한테 계약 신부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 저승의 왕비가 되면 평생 놀고먹어도 된다. 이승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줄 거고.”

염라는 누가 들어도 솔깃할 만큼 좋은 조건들을 계속해서 내걸었다.

‘평생 놀고먹는 건 만인이 꿈꾸는 일이긴 하지.’

나도 한때는 그랬다.

정확히는 온천에 오기 전까지.

“그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내 힘이 닿는 선에서는 뭐든 들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한 번도 말끝을 흐리는 일이 없던 염라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주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내 신부가 되어주지 않겠나?”

계약직 신부를 말한다는 건 알지만 염라의 눈빛이 너무 진중하고 애틋해서 꼭 청혼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염라의 신부가 되면 놀고먹는 대신에 평생 저승에서 살아야겠지? 온천을 떠나야 할 테고.’

왜였을까?

온천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장 먼저 해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난 염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네 신부가 되는 건 곤란해. 나 벌써 해령이 남긴 신부의 표식도 가지고 있고……. 그러니까 아무리 계약이라도 염라의 신부가 된다니 그건 불가능해.”

난 버릇처럼 신부의 표식이 새겨진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진짜 아무리 어릴 때라고 해도 덥석 신부의 표식을 새겨버리다니 해령도 참 무모하다니까?”

염라의 고백에 과거, 해령이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말과 다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지켜보던 염라가 조용히 눈을 내리감으며 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염라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내 머리카락 끝에 살짝 입을 맞추며 날 바라봤다.

“이번 생에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가길 바란다, 수온.”

아련하게 날 바라보던 염라가 입을 맞춘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쓸쓸한 얼굴을 했다.

“염라, 너 어디 멀리 떠나?”

“인간들에게 저승은 이승에서 가장 먼 곳이긴 하지.”

왠지 이별 인사 같은 말에 넌지시 묻자 평소의 엄숙한 얼굴로 돌아온 염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맞지.’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이야기다. 난 계속 온천의 단골로 남을 생각이니 벌써 손님 떨어질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된다.”

꼭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이 말하는 염라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걸 알아차린 건지 염라가 묵직한 손을 내 머리에 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티 났어?”

“그대는 보통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쑥스러우면 토마토 상태가 된…….”

“그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아도 되거든?”

“이제야 평소의 토마토로 돌아왔군.”

오랜만에 듣는 토마토에 발끈하자 염라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왕님, 떠날 채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출발하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때, 짐이 가득 실린 수레를 밀고 온 저승사자들과 함께 강림차사가 나타나더니 염라에게 상황을 전했다.

늘 그랬듯이 염라의 수레에는 일감으로 보이는 서류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군.”

염라가 내 머리에 얹은 손을 거둬들였다.

손길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그의 손이 머물렀던 자리에 여전히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또 놀러 와! 염라.”

“그러지.”

염라는 그의 애장품인 담뱃대를 손에 쥔 채 저승의 문을 넘어섰다.

‘한동안 안 보이길래 끊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저승초를 피우나 보네.’

내가 돈가스를 못 끊는 거랑 똑같은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염라가 저승초를 끊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저승초는 약재니까 괜찮겠지. 누구에게나 힐링은 필요한 법이니까.’

난 저승의 문이 닫힐 때까지 염라를 배웅한 뒤,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9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볼까?’

나는 저녁 9시에 맞춰 현정우의 꽃잎을 베개 밑에 두고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잠이 안 오면 어쩌나 하고 했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버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운수의 꽃밭에 들어와 있었다.

‘정확히는 현정우의 꿈속인가?’

다행히도 그곳에는 현정우가 있었다.

“현정우, 너 괜찮은 거 맞냐? 피를 토했었잖아.”

물론 박시우도.

“박시우, 네 동생을 좀 그렇게 걱정해라.”

“넌 어릴 때부터 돈가스로 단련되어서 워낙에 튼튼하잖냐? 지금도 나보다 강하면서 네가 날 걱정해야지.”

현정우를 살뜰히 챙기는 박시우를 향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긴 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박시우를 보니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주시죠? 저한테 보낸 문자가 진짜 약속 메시지였어요?”

현정우는 지금 우리가 한 공간에 있는 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박시우가 뭐라고 문자를 보냈길래 그래요?”

내 물음에 낯빛이 어두워진 정우가 메시지 내용을 읽어주었다.

“오늘 밤 9시, 우리 꿈속에서 만나자.”

“어우, 박시우. 제발 어디 가서 내 호적 메이트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무슨 삼류 로맨스 소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멘트를…….”

난 민망함에 이를 악물고 박시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쳤다.

“그래서 메시지를 받자마자 잠시 차단할까 고민하긴 했습니다.”

“박돈돈은 그렇다 쳐도 현정우, 너까지 이러기냐?”

“어쨌든 왔으니까 됐잖아요.”

나에게 공감을 표하던 정우가 박시우의 칭얼거림을 외면했다.

“오늘 당신을 여기에 부른 건 같이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안 그래도 잘됐네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참인데 성좌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확실히 정우는 나에 대한 적의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지금을 기다린 사람처럼 안도하고 있잖아.’

“하고 싶었다는 말이 뭔데요?”

“면목이 없다는 걸 알지만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 버그 성좌를 제거해주셨으면 합니다. 온천 사장님, 당신이.”

내가 하려던 말을 정우에게 빼앗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거 봐, 정우는 버그 성좌한테 묶여 있는 게 맞았다니까.”

박시우가 믿고 있었다는 듯이 정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먼저 부탁을 드리고 싶었지만…… 성좌의 감시가 있어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차에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됐네요.”

잠깐 사이 핼쑥해진 정우를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김패금의 기억을 꺼내 보여줬을 때 현정우도 충격을 받은 눈치였지.’

어쩌면 김패금의 피해자는 우리 가족뿐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저 혼자 힘으로는 버그 성좌를 잡는 건 무리예요. 현정우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협조하겠습니다.”

“저는 베카를 대신해 버그 성좌를 탑의 보스로 봉인할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버그 성좌를 탑 46층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저는 현정우씨가 그 역할을 해주셨으면 해요.”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전 포털을 탑 46층까지 연결할 수 있으니까 그럴듯한 구실로 유인하면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정우도 좋은 수가 있는지 흔쾌히 버그 성좌를 유인하는데 공조하겠다고 나섰다.

“계획은 빠를수록 좋아요. 언제쯤 성좌를 유인할 수 있죠?”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성좌가 온천 사장님을 노릴 계획을 세우라고 난리를 부리고 있는 참이라…….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잠에서 깨어난 직후도 괜찮을까요?”

F급 헌터 시절의 나라면 망설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엄연히 SSS급 헌터였다.

‘거기다가 운수가 알려준 스킬들도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좋아요. 그럼 내일 아침 11시에 탑 46층에서 뵙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우리는 한동안 운수의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다 잠에서 깨어났다.

* * *

“온천 사장을 끝장낼 수 있는 좋은 계획이 떠올랐어.”

정우는 잠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척을 하다가 자신의 성좌를 불러들였다.

“오오, 벌써 계획을 세운 건가? 어떻게 온천 사장을 죽일 생각이지?”

“탑 46층의 보스인 베카가 온천 사장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어. 넌 베카 이상으로 강하니까 그를 인질로 삼아서 온천 사장의 손발을 묶고 둘 다 끝장을 내는 거야. 어때?”

“좋다. 안 그래도 둘 다 마음에 안 들던 차였는데 잘됐지.”

“온천 사장이 탑 46층에 자주 드나든다고 하니까 먼저 가서 베카를 잡아두는 게 좋겠어.”

정우는 막 아침 11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로 갈 생각인가?”

“네가 재촉해댔잖아. 빨리 온천 사장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그러긴 했지.”

“46층으로 가는 포털을 열어줄 테니까 도착하면 베카부터 잡아.”

“좋다.”

‘다행히 단순해서 날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군.’

정우는 버그 성좌가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탑 46층으로 연결되는 포털을 열었다.

[스킬 ‘포털(S)’을 사용합니다.]

“자, 그럼 어디 온천 사장을 죽이러 가볼까?”

괴기스럽게 웃으며 포털로 들어서려던 버그 성좌가 갑작스럽게 입을 길게 찢어 웃으며 정우를 돌아봤다.

“……라고 할 줄 알았나?”

“무슨 소리야?”

“나를 너무 얕봤군. 탑에 온천 사장이 미리 와 있다는 걸 내가 느끼지 못할 줄 알았나 보지?”

‘젠장!’

계획이 들통난 것을 알아차린 정우가 포털을 타고 들어가 수온에게 상황을 알리려는 그때였다.

“친히 나를 위한 무대를 만들어줬으니 귀하게 대접해야지. 온천 사장을 끝내기 위한 라스트 쇼를.”

버그 성좌가 포털을 집어삼키며 검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검은 소용돌이는 포털을 통해 수온이 있는 탑 46층까지 집어삼켰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잠시 뒤, 탑 100층으로 이동합니다. 남은 시간 : 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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