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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85)화 (185/190)
  • 185화

    납치해도 되겠나?

    해령의 말을 듣자마자 목부터 얼굴 끝까지 열이 오르며 신부의 표식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20대한테 결혼은 무슨. 난 그렇게 일찍 결혼할 생각 없거든?”

    난 손으로 푸른색 빛이 새어 나오는 목덜미를 가리며 해령의 시선을 피했다.

    “성년이 되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한 약속을 무를 생각인가?”

    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점차 거리를 좁혀오며 집요하게 나와 눈을 맞춘 해령이 손끝으로 내 목덜미에 있는 표식을 쓸었다.

    “여기에. 우리가 한 약속의 증표가 남아 있는데.”

    해령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온몸의 감각이 민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은 또 왜 이렇게 크게 뛰는 거야? 없던 병이라도 생긴 건가?’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해령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나만 유난스럽게 반응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해령이 내게 다가오는 게 기분이 나쁘다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알고 보니까 잘생긴 얼굴 좋아했나?

    그렇다면 온천의 성좌들이나 베카에게도 가슴이 뛰어야 맞았다.

    그들도 해령만큼이나 대단한 미모를 가진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장이 뛴 적은 없는데? 나 설마 해령을…….’

    뒤이은 생각을 부정하듯 나는 고개를 힘껏 좌우로 저었다.

    ‘에이, 내가 해령을 좋아할 리가. 그냥 어릴 때 기억이 떠올라서 반가운 마음이겠지.’

    해령에게 신부의 표식은 무척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달랐다.

    ‘어릴 때 멋모르고 한 약속으로 무턱대고 결혼할 수는 없다고.’

    “해령, 그때 우리가 한 약속은…….”

    해령에게도 내 뜻을 전달하려는 그때였다.

    “박수온!”

    온천 1층에서 박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옷에 핏자국이 묻은 그가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 * *

    “그러니까……. 현정우가 버그 성좌가 나타난 걸 보고 포털을 열어서 널 대피시켰다는 거지?”

    나와 박시우는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해령이 자연스럽게 나와 박시우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쑥 라테를 내어준 뒤 눈치껏 자리를 비켜줬다.

    ‘딱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해령은 늘 내 뒤에서 이런 식으로 조용히 나를 챙겨주고는 했지.

    ‘굳이 티를 내지 않아서 크게 의식한 적 없었는데.’

    나는 쑥 라테를 담아왔던 쟁반을 들고 응접실을 나가는 해령의 넓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피를 토하는 걸로 봐서 정우도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어. 어쩌면 정우도 자신의 성좌에게 잡혀 있는 걸지도 몰라. 각성자는 함부로 성좌와의 계약을 무를 수 없으니까.”

    현정우 이야기를 하는 박시우의 낯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박시우는 원래 자기 길드원을 가족처럼 생각하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박시우의 말대로라면 현정우가 버그 성좌를 포획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그런데 현정우가 너한테 아트를 넘겨줬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정우가 아트 길드장이었다고 하더라고.”

    “아트 길드장이 왜 집필 길드원으로 들어와? 그거 스파이 아냐?”

    “다 김패금이 한 짓 때문에 생긴 오해로 시작된 거였어.”

    ‘현정우가 사과의 의미로 아트를 넘기기라도 했다는 건가?’

    박시우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버그 성좌가 있는 한, 현정우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오늘만 해도 현정우의 성좌가 나를 죽이려고 했어.”

    “너를?”

    나를 살피는 박시우의 눈길이 바빠졌다.

    “베카가 대신 막아줘서 나는 무사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베카가 많은 걸 잃었지.”

    “그럴 리가. 현정우는 오늘 내내 나랑 같이 있었어. 정우가 나를 쫓아낸 직후에 내가 바로 여기로 온 거고.”

    일반적으로 성좌는 계약자 없이 단독으로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게 원칙이었다.

    ‘역시 날 공격한 건 버그 성좌가 혼자 벌인 일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

    ‘바나나 던전에서 죽었을 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온천의 성좌들의 힘이 하나도 먹히지 않았잖아.’

    원래는 현정우의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스킬을 사용할 때 항상 카드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때와 이번 두 가지 경우는 카드가 없었어.’

    현정우의 성좌가 우발적으로 벌인 일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현정우의 성좌를 베카를 대신할 탑의 보스로 만들어서 가둘 생각이야. 영원히 그곳에서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도록.”

    “그게 가능해?”

    “가능하게 만들려면 현정우의 성좌를 생포해서 탑 46층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응접실로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방법이 있다.”

    바로 운수였다.

    향료를 만들다가 온 건지 그의 흰 꼬리와 귀에는 꽃잎이 묻어 있었다.

    “계약자가 있으면 내 소환부를 이용해서 그의 성좌까지 소환할 수 있다.”

    “소환부?”

    “너한테는 내 각인이 있으니까. 봉인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물론 상대가 가진 것 이상의 힘을 쏟아야겠지만.”

    ‘맞아! 나한테 운수의 각인이 있었지?’

    해령의 힘을 주로 써서 운수의 각인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 성좌는 강제로 소환된 거기 때문에 과하게 날뛸 수 있다. 되도록 계약자 쪽에서 자연스럽게 탑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좋지.”

    운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우는 포털을 열 수 있으니까 잘만 하면 성좌를 데리고 오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시우도 운수의 말에 동감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전에 현정우가 우리와 같은 뜻을 가졌는지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는 거지. 뜻이 맞다고 해도 성좌의 눈을 피해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성좌는 계약자를 상시 지켜볼 수 있다.

    ‘현정우가 자신의 성좌가 보는 앞에서 박시우를 구출시켰으니 감시가 삼엄해졌을 거야.’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니 직접 만나는 것도 위험했다.

    “혹시나 해서 챙겨둔 건데 잘됐군.”

    운수가 주머니에서 반쯤 시든 황금색 꽃잎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게 뭔데?”

    “내 꽃밭에 있던 현정우의 꽃잎이다. 악한 성좌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 시들어버렸지만, 꽃잎 몇 장 정도는 건졌지. 이 꽃잎을 베게 밑에 두고 잠들면 상대의 꿈속으로 찾아갈 수 있다.”

    “그럼 성좌의 눈을 피할 수 있겠네?”

    “그렇지!”

    “운수야, 넌 천재 여우야!”

    “새삼스럽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쑥스러운지 귀를 꼼지락거리던 운수가 내게 넉넉하게 꽃잎 다섯 장을 쥐어줬다.

    “운수 스승님, 향료 상태를 좀 확인해주시겠어요?”

    그때 응접실 문 너머로 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큼큼, 내 임무는 끝난 것 같으니 돌아가 보겠다.”

    운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박시우, 너도 갈 거야?”

    “당연하지.”

    “그럼 꿈에 찾아가는 건 오늘 저녁으로 하자. 현정우한테 일찍 자라고 문자 보내놔. 우리가 잠든다고 해도 그쪽이 깨어 있으면 만나는 게 불가능하니까. 성좌가 볼 수도 있는 거 알지?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런 건 내 전문이니까 맡겨둬라.”

    유난히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박시우를 보니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현정우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내가 문자를 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 믿어보기로 했다.

    ‘오늘만 해도 별의별 일이 다 있었네.’

    다른 건 몰라도 잠은 잘 올 것 같았다.

    ‘꿈에서도 현정우를 만나서 버그 성좌를 잡을 논의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편히 쉴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다른 때보다 하루가 길다고 느끼며 응접실을 벗어나는데 때마침 계단을 오르려던 염라와 마주쳤다.

    ‘웬일로 강림차사가 없네.’

    “염라, 요즘도 일이 많나 봐? 얼굴 보기가 힘드네.”

    인사치레로 말을 건넸지만 염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심란해 보였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내 물음에 염라가 한걸음에 성큼 내 앞으로 가까워졌다.

    별다른 장식 없이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수수한 옷차림을 해서인지 염라의 수려한 외모나 위엄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온천에서의 숙박을 마치고 저승의 집무실로 돌아가려 한다.”

    어쩐지 손님방이 비어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더니 염라의 일이 바빠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나한테 묻고 싶다는 건 뭔데?”

    ‘숙박 비용인가?’

    그 문제라면 강림차사가 제때 계산해줘서 문제없었다.

    내 물음에 염라의 커다란 손이 내 팔을 감싸 쥐었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올곧게 내게로 향했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불그스름한 입술이 열렸다.

    “내가 그대를 납치해도 되겠나?”

    남은 손으로 내 긴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쥔 염라의 눈빛이 비장했다.

    “저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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