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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84)화 (184/190)
  • 184화

    꼼짝없이 가게 됐잖아

    “내가 어때 보이지? 네 눈에는.”

    나는 베카의 매혹적인 붉은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볼을 장난스럽게 잡으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니 지금은 멀쩡해 보이네? 괜찮아져서 다행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안도하는 나를 바라보는 베카의 낯빛이 전보다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베카, 안색이 안 좋아. 역시 시스템한테 힘을 빼앗겨서 그런가?”

    “아니다. 탑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나는 아직 탑에 묶인 몸. 46층에서 인간들을 상대하는 주요 마법들만 가져가고 부차적인 힘들은 남아 있다. 내 몸을 유지하거나 던전 브레이크를 여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거지.”

    ‘그럼 베카의 순간적으로 얼굴이 어두워 보였던 건 착각이었나?’

    확실히 베카의 말대로 베카에게 전처럼 어지러운 기색이 있다거나 몸이 투명해지는 현상은 없었다.

    “그럼 베카가 덕택이들을 조금 더 불러줄 수 있을까?”

    “가능하다.”

    베카가 흔쾌히 덕택이들을 추가로 투입해주겠다고 했다.

    “고마워, 베카. 지호랑 덕택이가 얼마나 필요할지 상의해볼게.”

    “그래.”

    난 지호와 온천 별관의 운영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베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일단 나는 온천에 들어가기 전에 고객이 원하는 향료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야. 메뉴판에 효능을 적어두면 손님들도 취향에 맞춰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지호는 가지고 있는 계획은 생각보다 디테일 했다.

    ‘내가 처음 온천을 개업했을 때랑은 딴판이네.’

    지호 혼자서도 충분히 오픈 준비를 잘하고 있어서 내가 굳이 돕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잠시 베카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대체 언제 응접실을 빠져나간 건지 베카가 자리에 없었다.

    ‘어라? 어느 틈에 사라진 거지?’

    하긴 오늘만 해도 베카에게 많은 일이 있었으니 지쳤을 만도 했다.

    ‘푹 쉬게 두자.’

    나는 다시 온천 별관 운영 계획에 대해 말하는 지호와 운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 * *

    “약 항아리, 주먹밥 만드는 솜씨는 여전하군.”

    베카는 약 항아리의 약방에서 그가 만들어준 주먹밥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드디어 본연의 모습과 기억을 찾은 것 같은데, 그런 것치고 어째 심란해 보이네만.”

    주먹밥을 단숨에 먹어치우는 베카를 지켜보고 있던 약 항아리가 빈 도시락을 정리하며 넌지시 물었다.

    “심란하긴…….”

    사실 베카는 심란한 게 맞았다.

    조금 전 베카가 수온에게 다가갔을 때,

    “내가 어때 보이지? 네 눈에는.”

    수온이 보인 반응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초성과 완전히 달랐다.

    초성이었다면 베카가 다가간 것만으로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주고 입을 맞춰줬을 거다.

    그런 다정한 손길이 좋아서 베카는 초성을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입술이 닿는 곳마다 진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내 커다란 고양이는 은근히 어리광이 많다니까.”

    그럴 때마다 초성은 베카의 숨결이 간지러워서 웃고는 했다.

    “이게 어리광으로 보여?”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자신도 베카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 짧은 키스를 나누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라도 된 양 미소 짓곤 했었다.

    초성과 베카의 일상은 신전에서 내내 붙어 지내는 것밖에 없었다.

    ‘무한한 시간을 그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했었으니까.’

    베카가 시스템과의 전쟁에서 초성을 대신해 공격받고 신전 아래로 추락하며 죽음을 직감했을 때,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진을 펼친 것도 초성을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다.

    ‘어디서든 초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처럼 서로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으니까.’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마법진이었다.

    베카는 마지막까지 초성을 다시 만나는 것만 생각하면서 마법의 빛이 이끄는 시공간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탑 46층의 기억을 잃은 베카로 살기를 수십 년, 초성의 환생인 수온을 만나는 데에 성공했다.

    베카는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온에게 이끌렸다.

    ‘하지만…….’

    “아니, 내가 네게 전생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분명해졌다.”

    “네가 미련이 남은 쪽은. 전생의 수온이라는 게.”

    해령의 말대로 환생한 초성은 베카의 기억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이 아니었다.

    ‘수온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걸 테지만…….’

    베카는 수온에게 자신과의 전생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전생을 알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수온은 베카를 항상 아이처럼 바라봐왔다.

    ‘눈치로 봐서는 내가 성인 남자의 모습을 한 것도 어색해하는 것 같던데…….’

    “하…….”

    어울리지 않게 베카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약 항아리.”

    답답해진 베카가 약 항아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부르지?”

    “내가 요즘 인간 여자들에게 먹힐 상인가?”

    “그러니까 이성으로서 매력을 느낄 만한 얼굴이냐고 묻는 것이지?”

    “그렇다.”

    베카가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처럼 약 항아리를 바라봤다.

    “이 몸보다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자네도 꽤 매력적인 얼굴이지. 그러니 팬들이 선물도 가져다주는 게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나?”

    약 항아리가 약방 한편에 수북이 쌓인 팬들의 선물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청혼하는 여인들도 꽤 되었지.’

    베카는 자신이 받았던 선물 상자에 쓰여 있던 무수한 하트들과 수많은 청혼 문구를 떠올렸다.

    “그래, 까짓것.”

    ‘날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날 사랑하게 만들면 된다.’

    초성이 베카에게 늘 하던 말이 있었다.

    “내 귀여운 사자, 내가 세상을 통틀어서 가장 사랑하는 건 너야.”

    ‘초성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베카는 축 처져 있던 어깨를 펴고 자리를 힘껏 박차고 일어났다.

    “약 항아리, 주먹밥은 잘 먹었다.”

    약 항아리에게 인사를 한 뒤, 베카는 곧장 수온에게 가기 위해 복도를 나서려다 다시 약방으로 들어와 섰다.

    “자네, 나가려던 거 아니었나?”

    “아니, 아무래도 조금 더 쉬었다 가는 편이 낫겠군.”

    아무렇지 않게 답하려고 했지만, 베카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베카는 복도의 난간을 뒤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선 해령과 수온을 봤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였다면 상관없었다.

    ‘내가 끼어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해령을 바라보고 있는 수온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럴 수 없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볼을 붉힌 채 긴 속눈썹을 위로 올리며 상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빛.

    수온은 전생에 초성이 베카를 바라볼 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해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지호가 사업에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네. 쭉 헌터로 살았으면 억울할 뻔했어.”

    나는 온천 별관 오픈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2층 복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출출하니까 뭘 좀 해 먹어 볼까?’

    부엌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바로 그 앞에서 푸른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해령이 나타났다.

    “이, 이제 오는 거야?”

    못 본 척하기에는 너무 늦었기에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렇다. 눈토끼와 그때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그때의 일…….’

    그 말을 듣자마자 해령이 내게 고백하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괜찮나 싶더니 또 심장이 간지러워졌잖아!’

    “그렇구나! 난 회의를 했더니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럼, 이만!”

    해령을 더 봤다가는 심장에 해로울 것 같아 방으로 돌아서려는데 해령이 나를 붙잡아 달아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난간을 짚어 나를 자신의 시야 안에 가뒀다.

    “또 도망가게 둘 수 없지.”

    “내가 언제 도망을 갔다고…….”

    “별관에서 기억을 찾았을 때부터 계속 날 피해 다니는 걸 모를 줄 알고?”

    시큰둥한 표정 너머 해령의 얼음 결정 같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눈동자까지 예쁠 일이냐?’

    예쁜 걸 너무 가까이에서 봐서인지 유난스럽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이대로 있다가는 심장이 터지고 말 거야.’

    나는 손을 뻗어 해령의 귀걸이를 귀에서 빼냈다.

    해령은 몸을 낮춘 채 내 꼼지락거리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내며 내 행동을 지켜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양쪽을 다 뺐는데…….”

    ‘왜 아직도 심장이 뛰는 거지?’

    분명히 귀걸이에 있는 매력 효과는 빠졌을 텐데 해령의 아름다운 외모도@(는 여전했다.

    귀걸이를 빼면 덜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귀걸이가 가지고 싶었나? 네게도 똑같은 게 있을 텐데.”

    “다시 돌려줄게.”

    “아니, 주겠다. 어차피 이제 너와 내 것을 나누는 것에는 의미가 없으니까.”

    귀걸이를 돌려준다는 걸 거절한 그가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속삭였다.

    “이제 네게 꼼짝없이 가게 됐잖아.”

    청량한 줄로만 알았던 해령의 입매가 매혹적으로 말려 올라갔다.

    “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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