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쉽게 잊긴 어려운 몸인데
“자기 혼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라면 발을 담그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예 옷을 벗고 탕에 들어가야 할 텐데 내가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나?”
해령의 말에 나는 내게 기대어 있는 베카에게로 눈을 돌렸다.
젖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렵한 턱선, 말랑한 마시멜로 같은 작은 몸이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탄탄한 몸과 골격.
순진무구하다고 느꼈던 붉은색 눈동자도 지금은 이성을 유혹하듯 매혹적으로 보였다.
‘베카, 지금은 누가 봐도 장성한 성인 남자잖아?’
시스템에게서 베카를 구해내야 한다는 것에 꽂혀서 베카의 외관이 변한 걸 딱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베카가 나한테 소중한 친구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맨몸을 보는 건 좀 아니지.
“난 괜찮다.”
내가 해령에게 넘겨주려 하자 베카가 내 어깨에 머리를 붙인 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박수온, 네가 나의 벗은 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마! 내가 안 괜찮으니까.”
내가 질겁하자 베카가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미 많이 봐놓고. 새삼스럽군.”
덩치가 커졌어도 어떤 상황이든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내가 언제 네 맨몸을 봤다고 그래?”
“……설마 잊었다고 말할 생각인가?”
‘왜 그렇게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데?’
한 것도 없는데 꼭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잖아!
“쉽게 잊긴 어려운 몸인데.”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보이자 베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베카, 덩치가 크고 나더니 많이 능글맞아진 것 같다?”
“이게 원래의 나다. 네가 바라던 꼬맹이의 모습이 아니어서 별론가?”
“귀여운 꼬마 베카를 볼 수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내가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베카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삐뚤어지게 말하지 마.”
[히든 스킬 ‘온천 사장표 사랑의 매’의 효과로 온천 사장의 매를 맞은 순간, 깨달음을 얻습니다.]
내 손맛이 제대로 먹힌 건지 베카가 자신의 볼을 매만졌다.
덩치만 컸지 베카는 아직 감정 표현에 서툰 것 같았다.
“베카, 그런데 너 방금까지 혼자 못 걸을 정도로 어지럽다고 하지 않았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흠칫한 베카가 이마를 짚으며 급하게 내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미 늦었거든.”
“못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내상을 입은 건 사실이다. 모든 힘을 잃기도 했고 심장도 없는 상태니까.”
심장이 없다고?
나는 황급히 인벤토리창을 켰다.
황당하게도 그곳에 베카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젠되면 심장도 몸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심장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여? 이거 어떻게 해야 돌려줄 수 있는 건데?”
경악하는 날 진정시키듯 베카가 내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을 얹으며 나를 마주 봤다.
“심장이 없어도 움직일 수 있다. 몸 밖으로 나와 있어도 심장이 살아 있으면 내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돌려주는 법은 나도 모르겠군. 나는 주기만 해봐서.”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나는 졸지에 베카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됐다.
“애초에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평생을 함께 해?”
또 내가 모르는 이야기였다.
‘베카도 전생의 나와 엮여 있는 걸까?’
“내 심장일 거야.”
생각에 잠겨 있는 나의 이마를 베카가 가볍게 톡 쳤다.
내가 자신이 한 말의 의미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 봉화의 징표 말이다. 내 스스로 바친 거거든. 전생의 너에게.”
‘그러고 보니 인연의 신전에 베카의 봉화도 있었지.’
대체 어떤 사이여야 목숨과 같은 심장을 스스로 바칠 수 있는 걸까?
베카가 내 호위 기사이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 이상의……?
하지만 내게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좋은 걸 알려줬으니 온천탕은 역시 너와…….”
“해령, 베카를 온천탕까지만 좀 부탁할게.”
그 사이, 내게 자연스럽게 엉겨 붙으려는 베카를 떼어내 해령에게 넘겼다.
“은색 뱀은 딱 질색인데.”
“누구는 좋아서 하는 줄 아나?”
탐탁지 않아 하던 베카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해령과 짧은 신경전을 벌였다.
“베카.”
내가 부름에 베카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의 앞에 미처 전해주지 못했던 도시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이건 내가 너 주려고 싼 온천표 도시락이고 이건 약 항아리 어르신이 널 위해 싸준 주먹밥이야. 온천욕하고 나오면 어르신이랑 같이 먹자.”
“뭐, 슬슬 이곳의 음식이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도시락을 본 베카의 기분이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베카가 해령을 돌아보는 순간 평화가 깨졌다.
둘은 서로의 몸이 맞닿아 있다는 것만으로 불쾌하다는 듯 서로를 사이좋게 헐뜯으며 온천탕이 있는 쪽으로 멀어져 갔다.
* * *
수온의 시야에서 해령과 베카가 완전히 벗어났을 때, 베카가 탕 입구에서 해령에게 걸친 팔을 거둬들였다.
그는 혼자 서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역시 꾀병이었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묻는 해령의 물음에 베카는 언짢은 얼굴로 그에게 닿았던 부분을 툭툭 털어냈다.
“완전히 꾀병은 아니지. 내 심장을 가진 사람에게 붙어 있을수록 몸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니까 이제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된 거지.”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답변이군.”
해령의 타박에 베카가 상관없다는 듯이 탕의 입구를 바라봤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 수 있다. 나머지는 영계에게 따로 부탁하도록 하지. 너보다는 그쪽이 훨씬 믿음직스러우니까.”
“그러시든지.”
영 못 미더운 눈길로 해령을 보고 있던 베카가 그에게서 돌아섰다.
“너도 기억하고 있는 건가?”
해령의 물음에 앞으로 나아가던 베카의 걸음이 멈췄다.
“수온과의 전생을.”
“기억한다면?”
해령이 있는 편으로 고개를 돌린 베카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입가를 올려 미소 지었다.
“들을 텐가? 내가 전생의 수온과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지.”
“됐다.”
해령은 고민 없이 베카의 제안을 거절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나와 수온의 전생을 알게 되면 네가 가진 마음이 흔들릴까 봐 듣지 않으려는 건가?”
베카가 해령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내가 네게 전생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분명해졌다.”
해령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미련이 남은 쪽은. 전생의 수온이라는 것이.”
해령의 답을 들은 베카의 눈빛이 일렁이는 호수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네가 전생의 수온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 내가 관심이 있는 쪽은 지금의 박수온이라서 말이다.”
해령이 탕 입구 근처에 있는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베카에게 던졌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베카가 날아오는 수건을 잡았다.
“원래 1인당 수건은 2장씩 쓰는 게 원칙이지만 네게는 특별히 한 장 더 주도록 하지. 내 기분이 좋으니까.”
베카에게 수건 서비스를 준 해령은 한결 후련한 표정으로 탕의 입구를 벗어났다.
* * *
나는 다시 인연의 신전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레니안의 각인과 베카의 심장이 인연의 징표가 맞다면 나머지 봉화 두 개를 켤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온천 별관을 열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징표가 맞았을 때 이야기지만.’
이제 막 준비를 마치고 온천의 입구로 향하려는데 해령이 조용히 내 앞으로 나타났다.
“해령, 왜 벌써 와? 베카는?”
“탕 입구까지 무사히 데려다줬다. 회복이 빠른지 금세 혼자서도 잘 걷던데? 나머지는 영계가 챙겨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긴 베카는 원래 영계랑 사이가 좋았으니까.’
투닥거리는 둘을 더 붙이기보다 그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인연의 신전에 가려고?”
“응, 이제 징표를 다 모아서 나머지 봉화 두 개를 켤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겠다.”
“네가 왜?”
의외의 제안에 내가 의문스러운 눈길로 해령을 바라보자 그가 옷소매 안에서 청소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온천 별관이 열리면 청소가 필요할 거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니까. 온천수도 채워야 할 거고.”
버그 성좌의 위험이 있고 박시우와 현정우의 관계가 가까운 이상 온천 별관은 빨리 열수록 좋았다.
‘온천이 있다면 위험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으니까.’
“좋아. 가자!”
나는 해령과 함께 온천 문을 넘어 인연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오, 오랜만이다. 뀨!”
인연의 신전에 들어서자 양머리 수건을 쓴 눈토끼가 여느 때처럼 우리를 맞아줬다.
“오늘은 주먹밥이 없는 건가? 뀨?”
약 항아리 어르신의 주먹밥이 눈토끼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는지 눈토끼는 계속해서 내 주변을 맴돌며 킁킁거렸다.
“미안해, 오늘은 바빠서 주먹밥을 가지고 오지 못했어. 다음에 올 때는 약 항아리 어르신한테 부탁해볼게.”
“뀨웅,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눈토끼가 눌린 찹살떡처럼 몸을 늘어뜨리며 아쉬워했다.
‘말랑할 것 같아서 만져보고 싶지만 지금은 봉화가 먼저야.’
나는 애써 눈토끼를 외면하며 샤레니안의 봉화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봉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흑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와의 인연이 봉화에 담깁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와의 봉화가 불타오릅니다.]
“됐다!”
다행히 샤레니안의 추측대로 각인이 인연의 징표가 맞는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나는 곧바로 베카의 봉화로 다가섰다.
베카의 봉화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붉은색의 불꽃이 피어오르는 그때,
[성좌 ‘탑의 주인’과의 인연이 봉화에 담깁니다.]
[성좌 ‘탑의 주인’와의 봉화가 불타오릅니다.]
다섯 개의 봉화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신전의 중앙에 있는 벽을 뒤덮더니 곧 커다란 문이 생겼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나무로 된 문이 열렸다.
[‘온천 별관(EX)’이 개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