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79)화 (179/190)

179화

파사삭

버그 성좌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난 뒤, 멍하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정우는 버그 성좌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네 성좌가 온천 사장을 죽였다는 걸 알면 박시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녀석……. 온천 사장을 죽이러 간 거야. 더는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해서는 안 돼.”

정우는 오랜 시간 버그 성좌의 계약자로 살아왔기에 그의 성정이 본래 사악하고 잔혹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사실을 시우 형한테 알려야 해.’

두 사람은 가족이니까, 그러면 온천 사장에게도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우는 걸어 잠갔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다행히도 시우는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정우를 돌아봤다.

“시우 혀……. 컥!”

온천 사장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하려는데 정우는 심장에 날카로운 바늘이 꽂힌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냈다.

“현정우!! 너 갑자기 왜 이래?”

“기이익……. 분하다……. 그 X을 갈기갈기 찢어놔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 커헉!”

그때 정우의 방 안에서 일그러진 검은 형체가 나타나더니 정우처럼 각혈을 토해냈다.

‘온천 사장을 죽이겠다고 나갔던 성좌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렇다는 건…….’

정우의 추측대로라면 온천 사장은 무사한 것 같았다.

‘버그 성좌한테 이 정도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람은 박수온밖에 없으니까.’

안도하기가 무섭게 그의 시야에 시우가 들어왔다.

온천 사장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버그 성좌가 그녀의 혈육인 시우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도 몰랐다.

‘이대로 버그와 시우 형을 같은 공간에 두면 위험하다.’

[‘현정우’가 포털(S)을 생성합니다.]

“형,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마.”

“뭐?”

정우가 슬프게 웃으며 시우를 포털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현정ㅇ……”

방심하고 있던 시우는 속절없이 포털 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정우는 버그 성좌가 시우의 뒤를 쫓지 못하도록 빠르게 포털을 닫았다.

“뭐지? 아직도 그놈과 가족 놀이 따위를 하고 있었던 건가?”

“……누가 저 자식을 가족으로 생각했다는 거야?”

정우가 버그 성좌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벌써 우리의 목표를 잊은 거야? 네가 온천 사장을 죽이자고 했잖아.”

정우의 낯빛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시우와 있을 때, 눈물을 보이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얼굴이었다.

그런 정우를 보는 버그 성좌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아마도 어떤 게 내 진짜 모습인지를 고민하는 거겠지.’

지금 정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목표가 버그 성좌와 같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뿐이었다.

신용을 얻게 되면 버그 성좌도 오늘처럼 충동적으로 온천 사장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온천 사장을 무너뜨리려면 계획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시간을 버는 것.’

그게 정우가 버그 성좌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다.

“네가 바라는 건 부모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나? 거기에 온천 사장의 가족들은 관련이 없다는 걸 알았잖아. 그래서 스스로 죽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고. 그런데 갑자기 온천 사장을 죽이겠다고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뭐지?”

예상대로 버그 성좌는 정우를 의심스러워했다.

‘이 위기를 잘 넘겨야 한다.’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난 모든 걸 잃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렸는데……. 온천 사장이나 박시우는 여전히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잖아?”

정우는 절망에 빠져 실성한 사람처럼 버그 성좌에게 광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이유가 필요해?”

참혹한 정우의 얼굴을 마주한 버그 성좌가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그 이유면 충분하고도 넘치지.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오늘 네가 한 것처럼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온천 사장을 이길 수 없어. 내가 온천 사장의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서 마땅한 계획을 세워볼 테니까 그때를 기다려.”

“그래서 박시우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던 거군.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던데?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마음이 맞는 것 같군. 그래, 널 믿어보도록 하지.”

정우의 몇 마디에 버그 성좌는 완전히 그에게 넘어갔다.

문제는 버그 성좌가 오랜 시간 정우의 계획을 기다릴 정도로 얌전한 성격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버그 성좌를 제거할 수 있는 건 온천 사장뿐이다. 이 이상의 희생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온천 사장에게 버그 성좌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어.’

버그 성좌의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방으로 이동하는 정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머릿속이 복잡한 남자는 온천에도 있었다.

“태초의 신의 이름은 초성.”

“나의 신부였다.”

‘수온이 전생에 태초의 신이었다고?’

그렇다면 해령도 전생의 수온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를 성좌로 만들어준 것도, 이 온천을 있게 해준 것도 모두 태초의 신이었으니까.

솔직히 전생의 수온이 어쨌든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전생의 수온이 염라의 신부였다는 것을 들은 이상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염라는 아직 태초의 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

해령은 지금껏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포커페이스 염라가 방금 전엔 미련이 온천수처럼 넘쳐 보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수온은 어떻지?’

해령이 본 바로 수온은 염라와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과거를 떠올리면 수온도 염라와 똑같은 표정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박수온을…….’

의식하지 못했던 마음을 깨닫는 순간, 해령의 얼굴은 불이 난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한 게 더 놀라울 따름이다.’

수온이 온천 사장이 된 이후로 해령의 하루는 그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박수온이 장가오라고 할 때 간다고 할 걸 그랬나?’

해령은 자신이 만들어준 온천표 돈가스 맛에 감동한 수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왜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을까?’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던 해령이 수온이 없는 온천에 허전함을 느꼈다.

‘마탑에 다녀온다고 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야?’

성좌의 눈으로 수온이 뭘 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려던 참이었다.

“……바!”

마스터키의 암호를 외치는 수온의 목소리가 1층 중앙에서 들려왔다.

‘수온이 돌아온 건가?’

계단에 서 있던 해령이 들뜬 표정을 감추고 빠른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왔다.

“박수…….”

오늘만큼은 다른 때보다 다정하게 수온을 반겨주려고 마음먹은 해령의 다짐은 눈앞의 광경에 1초도 되지 않아서 무너졌다.

“베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더 걸을 수 있겠어?”

베카가 수온의 어깨에 기대 부축을 받으며 온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성인의 모습으로.

순간 해령의 이성이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파사삭.

* * *

“베카를 풀어줘. 내가 마탑의 위상을 높여줄 만큼 사악한 존재를 잡아다줄게.”

[‘시스템’이 “그런 존재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서도 관심을 가집니다.]

“버그 성좌.”

난 버그 성좌로 시스템에게 딜을 걸었다.

‘버그 성좌는 시스템한테도 성가신 존재라고 했으니까 아쉬울 게 없겠지.’

무엇보다 나는 바로 전 버그 성좌와의 전투로 그를 제거할 가능성을 봤다.

‘워낙 재빠르게 달아나서 생포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아, 싫어? 그러면 딜은 없던 걸로 하고 족쇄가 깨질 때까지 불사검으로 두드려보지, 뭐!”

[‘시스템’이 “그만두라”며 “온천에 있는 자들은 협박하는 게 특기냐고” 묻습니다.]

“네가 먼저 베카를 감금했잖아.”

[‘시스템’이 “그건……!”이라며 반박하려다 더 상대할 힘도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쉽니다.]

“더 할 말 없지? 그럼 난 하던 일 마저 한다?”

내가 불사검을 탑 천장까지 높이 들어 올리자 시스템 창이 다급하게 떠올랐다.

[‘시스템’이 “알겠다! 네 제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당장 그것부터 내려놔!”라며 소리칩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나는 못 이긴 척 불사검을 내려놓았다.

[‘시스템’이 “네 말대로 베카를 탑 밖으로 나가게 해주겠다. 대신 버그 성좌를 잡아 오기 전이니 완전한 해방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스템은 베카가 마탑에서 떠나 있는 동안, 마탑주로서 그에게 부여된 모든 힘을 빼앗겠다고 말했다.

‘베카는 탑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강한 힘이 없다고 해도 온천으로 가기를 택할 것 같았다.

‘족쇄에 묶여서 탑에 감금되어 있는 것보다는 온천에서 어르신과 주먹밥을 먹는 게 몇만 배는 행복하겠지.’

“좋아, 이제 베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할게.”

[‘시스템’이 “46층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기에 많은 시간을 주지는 못한다”고 “제한 시간 내에 버그 성좌를 잡아 오지 못한다면 다시 베카를 데려가겠다”고 경고합니다.]

나는 시스템의 말에 답하지 않고 베카를 부축했다.

시스템도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베카의 족쇄를 풀어줬다.

“수온……인가?”

다행히 베카에게 의식이 있어 부축해서 온천까지 오는 것은 가능했다.

“베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더 걸을 수 있겠어?”

하지만 하루 만에 모든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베카가 걱정됐다.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고.”

귓가에 나지막하게 내려앉는 베카의 중저음이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의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지러워? 안 되겠다. 내가 바로 온천까지 데려다줄게.”

내가 베카를 데리고 온천탕으로 향하려는 그때였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해령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 녀석은 내가 온천에 데려다주도록 하겠다.”

해령이 나에게 베카를 내어달라는 듯이 양팔을 펼쳤다.

아주 온화하게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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