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내가 잡아다줄게
성인의 모습으로 변하긴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알던 베카라는 것을.
하지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베카는 내 눈앞에서 산산이 조각나 사라져버렸다.
베카가 사라져서인지 그의 수하였던 루카도 자취를 감췄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가고 싶다. 네가 있는 세상으로, 함께.”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저승을 부숴버리겠다.”
“네가 있어서다.”
“내가 웃을 수 있는 이유.”
순식간에 베카와 함께했던 무수한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자식이야?”
온몸에서 차가운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과 함께 푸른색 마나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빗나갔나? 아쉽게 됐군.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는데 말이야.”
마탑 안으로 누군가의 괴기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는 것으로 봐서 그의 목표는 베카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날 노린 거였으면…… 제대로 날 노렸어야지!”
분노에 찬 내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 성좌의 부채가 온천 사장의 폭주에 반응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의 저승의 눈이 온천 사장의 폭주에 반응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황금 꽃잎이 온천 사장의 폭주에 반응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불사의 검이 온천 사장의 폭주에 반응합니다.]
동시에 각인을 외치지 않았는데도 내 왼손에는 이미 성좌의 부채가 들리고, 오른손에는 저승의 눈이 감겨 있었다.
어느새 내 주변에는 황금색 꽃잎이 보호막을 만들 듯이 나를 휘감고 있었고 등에는 샤레니안의 불사검이 든 검집이 매여있었다.
하지만 처음 불사검을 들었을 때처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무게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베카를 잃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그 외의 것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본능적으로 느낄 뿐이었다.
베카를 죽인 놈이 문 너머에 있다는 것과 그게 현정우의 성좌라는 것.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이번 던전 브레이크 때, 근원에서 느껴졌던 불쾌한 기운.’
그것이 이번에는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라. 두 번의 실수는 없을 테니까.”
현정우의 성좌가 마치 악령처럼 성별과 나이가 구별되지 않는 목소리를 내며 커다랗고 뾰족한 검은 손톱으로 나를 사방에서 공격했다.
“날 죽이려면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지.”
나는 날 덮쳐오는 공격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현정우의 성좌를 깔보듯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온천 사장(SSS)의 힘이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수의 황금빛 마나와 샤레니안의 불사검에서 흘러나온 검은색 마나, 그리고 염라의 보랏빛 마나가 부채에 감돌고 있는 해령의 푸른색 기운 위로 뒤엉키더니 거대한 섬광이 되어 폭발하듯 현정우의 성좌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아직 인간의 힘에 불과할 텐데…… 이렇게 강할 수가!”
현정우의 성좌는 부서지기 직전에 줄행랑을 쳐버렸다.
‘끈질긴 자식!’
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왜 계속 내게 소중한 존재들을 앗아가는 거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이제 와 이유를 찾는다고 뭐하겠어?’
그런다고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이미 사라진 베카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허망함에 이를 악문 채 자리에 주저앉아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그때 탑이 흔들리며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버그010023!@#$’가 탑 46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탑 46층 ‘기억을 잃은 베카(SS)’가 리젠됩니다.]
베카가 리젠된다고?
잊고 있었다.
베카가 마탑의 최종 보스라는 사실을.
나는 황급히 베카가 있었던 신전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성인의 모습을 한 베카가 피투성이가 된 채 차가운 마탑의 벽에 기대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베카……!”
난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베카를 향해 달려갔다.
베카의 몸은 처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빨리 베카를 온천으로 데려가야 해.’
베카를 부축해 일으키려는데 그의 팔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게 보였다.
“어째서 베카에게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거지?”
처음 베카를 탑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팔에 족쇄가 채워진 경우는 처음 봤다.
‘족쇄가 두꺼워서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아.’
그렇다고 성좌의 부채를 쓰자니 베카에게까지 타격이 갈 것 같았다.
‘족쇄만 끊어내기에 좋은 도구가 없나?’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등에 메고 있던 불사의 검을 떠올렸다.
‘불사의 검을 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베카를 살릴 거야.’
결심을 굳게 한 나는 비장하게 어깨에 메고 있던 검집에서 불사의 검을 뽑아들었다.
‘어라? 이게 이렇게 가벼웠나?’
당장 바닥으로 꼬꾸라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전과 다르게 불사의 검이 가볍게 들렸다.
‘전에는 커다란 바위를 들고 있는 것 같았는데…….’
[‘불사의 검’이 온천 사장을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불사의 검’ 사용 권한을 획득합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검의 마음을 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희소식이었다.
나는 검으로 베카의 두꺼운 족쇄를 겨눴다.
‘집중하자. 잘못하면 내 검이 베카에게 독이 될 수도 있어.’
내 실수로 베카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검을 높게 들어 베카를 묶고 있는 두꺼운 족쇄를 내리쳤다.
단단한 족쇄에 부딪힌 검을 통해 묵직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지직-
족쇄는 작은 스파크를 일으킬 뿐 처음의 모습과 같아졌다.
‘한 번은 타격이 작을지 몰라도 반복하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계속해서 불사의 검으로 족쇄를 가격했다.
그러자 족쇄에서 전보다 큰 스파크가 일기 시작하더니 족쇄에 미세한 금이 갔다.
“됐다!”
베카를 구해낼 수도 있겠어!
희망을 본 내가 불사의 검을 높이 치켜들어 족쇄의 금이 간 부분을 내리치려는 그때였다.
[‘시스템’이 탑 46층의 족쇄를 회복시킵니다.]
알림창과 함께 금이 갔던 베카의 족쇄가 새것처럼 돌아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어떻게 만들어낸 수확인데……!’
“시스템,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이거 권력 남용이야. 당장 족쇄를 금이 간 상태로 돌려놓지 못해?”
나는 당당하게 시스템에게 항의했다.
[‘시스템’이 “먼저 규율을 어긴 것은 베카”라고 주장합니다.]
“베카가 무슨 규율을 어겼다고 그래? 베카는 버그 성좌에게서 나를 구해주려다가 공격당한 것밖에는 없어!”
[‘시스템’이 “내가 말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라며 “베카는 애초에 탑의 보스이기 때문에 탑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 규율”이라고 말합니다.]
‘베카가 탑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그러고 보니까 베카와 루카를 제외한 탑의 마물들이 탑 밖으로 나오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단순히 베카가 탑의 주인이라서 받은 혜택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베카는 어떻게 탑을 나온 거야?”
[‘시스템’이 “규율을 무시하고 멋대로 나간 거지. 나는 이 전에도 여러 번 경고했다. 그걸 지키지 않고 무시한 건 베카였다”라고 냉정하게 판단합니다.]
“그럼 베카가 계속해서 그 경고를 무시해 왔다는 거야?”
[‘시스템’이 “그렇다. 계속해서 탑을 벗어나면 소멸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베카는 듣지 않고 네가 운영하는 온천으로 갔지. 어디 그뿐인가? 몬스터들과 싸워서 인간들을 지켜내기까지 했다”며 마탑 최종 보스의 위신이 다 떨어졌다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확실히 베카가 그동안 해온 일들은 마탑의 최종 보스라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어.’
하지만 베카에게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달라거나 보호해달라고 말한 건 전부 나였다.
‘어쩌면 베카는 내 부탁을 지키기 위해서 시스템의 경고와 규율을 무시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베카를 이 지경까지 오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은 풀이 죽어 있을 때가 아니야. 시스템이 먼저 나타났다는 건 내가 불사의 검으로 족쇄를 끊어내는 게 자신에게도 곤란한 일이라는 말이잖아.’
“그래, 베카는 마탑의 보스로 남기에는 인간들에게 너무 좋은 이미지야. 팬클럽이 있을 정도라고. 너도 탑 앞에 놓인 선물들을 봤을 것 아냐?”
[‘시스템’이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냐”며 경계합니다.]
“베카를 풀어줘. 내가 마탑의 위상을 높여줄 만큼 사악한 존재를 잡아다줄게.”
[‘시스템’이 “그런 존재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서도 관심을 가집니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버그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