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77)화 (177/190)

177화

다시 만났군

“태초의 신의 이름은 초성.”

“나의 신부였다.”

염라의 말을 들은 해령의 눈동자가 일순간 동요하며 흔들렸다.

하지만 곧 처음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내게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염라, 수온이 전생에 네 신부였던 게 나와 큰 상관이 있나?”

염라에게 그렇게 되묻는 걸로 보아 해령은 수온이 염라의 신부였다는 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보였다.

“해령, 그대도 수온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었나? 내 눈에는 단순히 계약자를 챙기는 성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던데.”

“네 눈에도 내가 박수온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나?”

해령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식탁에 팔을 댄 채 염라에게 물었다.

“그렇다. 넌 마음에 없는 것에는 관심을 쓰지 않으니까. 수온이 오기 전에도 영계나 무영을 신경 쓰는 게 전부였지 않은가?”

염라는 온천의 첫 손님인 만큼 해령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긴 했지.”

그때를 회상하던 해령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염라가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무영이나 영계와는 달라.”

염라를 바라보는 해령의 눈빛이 전과 달리 확신에 차 있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글쎄, 나도 그걸 정의하기가 어려웠지. 무영은 내게 다정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영계는 내가 아끼는 수하이니 이들보다 소중하다고 느낄 존재는 평생 없을 거라고 여겼거든. 그런데 박수온이 나타났어.”

해령은 수온이 각성했던 그날, 온천수에 휘말렸던 수온을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

“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을 때 그 아이에게 각인했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각인한 것이.”

‘그뿐인가?’

수온이 바나나 던전에서 사망했다고 했을 때, 해령은 무영을 잃은 것 이상으로 큰 슬픔에 빠졌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달까.’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다는 건가?”

묵묵히 해령의 말을 듣고 있던 염라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검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염라를 향해 해령은 오히려 미소 지어 보였다.

“염라, 네 말은 전생의 수온이, 그러니까 태초의 신인 초성이 네 신부였으니 내게 수온을 연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순순히 물러나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건가?”

“부탁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가늠하고 싶었을 뿐.”

만약 해령이 자신만큼이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염라는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해낼 생각이었다.

마음이 크게 깊지 않다면 저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접고도 남았을 테니까.

“어느 쪽이든 네가 틀렸어. 내가 보기에는 네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해령은 처음으로 염라가 틀렸다고 말했다.

해령이 느끼기에 염라는 온천의 손님 중 가장 지혜롭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평소 굳이 따로 지적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내 어느 부분이 틀렸다는 말이지?”

눈치가 빠른 염라였건만 이 순간만큼은 해령의 의중을 아주 약간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수온이다.”

염라에게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고 느낀 것인지 해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전생의 신부, 초성이 아니라.”

해령의 말에 탁하던 염라의 눈동자가 안개가 걷히듯 차츰 맑은 기운을 되찾았다.

“보아하니 이제 내 말을 좀 알아들은 것 같군.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자리를 피해주도록 하지.”

아직 다 해내지 못한 설거짓거리를 찜찜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해령이 이내 부엌을 빠져나갔다.

“……초성이 아니다.”

해령이 복도로 나간 뒤, 염라는 자신의 품에서 태초의 신의 단검을 꺼내 가슴 아프게 바라봤다.

구슬픈 눈길로 한참이고 단검을 보던 염라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슬픔이 어린 눈빛을 감추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 없다. 내가 사랑한 초성은.’

* * *

“어라?”

오랜만에 온 46층의 입구. 평소대로라면 문지기 할아범이 있어야 했는데 오늘은 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마실이라도 나가셨나?’

문 앞으로 다가서니 온천 사장과 베카의 사진으로 범벅된 선물들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베카가 피곤했을 만도 하네.’

또 누가 선물을 전하러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빠르게 탑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탑 46층의 문이 열립니다.]

나는 이미 탑 46층을 클리어했기 때문에 문이 개방된 것 외에 다른 설명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느낌인가? 탑이 전보다 더 서늘하고 어두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차가운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손으로 팔을 매만지며 안으로 들어섰다.

“베카.”

“이 목소리는…… 온천 사장인가?”

어둠 속에서 베카의 이름을 부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

목소리를 따라 움직이니 박쥐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루카의 모습이 보였다.

루카를 보는 순간, 운수가 말했던 점괘가 떠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마탑 꼬맹이의 운수도 불길하다”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합니다.]

“루카, 왜 이래? 혹시 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최근에 베카 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베카님의 마력이 불안정해지면서 나도 힘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럴 수가…….”

루카의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 베카의 손이 투명하게 변했던 것이었다.

‘탑으로 돌아가면 회복될 줄 알았는데…….’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던 적이 있어?”

“아니, 처음이다. 베카 님의 기운이 이토록 미약해지신 것은.”

루카도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베카한테 연락이 되지 않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아는 베카는 누구에게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이렇게 약해질 거라는 생각을 해보질 않았던 게 후회됐다.

“루카, 베카는 어디에 있어?”

“베카 님은 저곳에…….”

루카가 힘겹게 길고 까만 손톱을 뻗어 신전의 중앙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베카가 기대 누워 있는 게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나는 루카를 두고 베카가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베카! 정신 차려봐. 베카!”

난 눈을 감고 있는 베카를 흔들어 깨웠다.

내 손길에도 그는 작은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늘 따뜻하던 베카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대로 베카가 영영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떡하지?’

가슴 졸이고 있는 그때,

“박수온…… 인가?”

베카가 가늘게 눈을 떴다.

“베카! 정신이 들어?”

“아무래도 내가 잠을 좀 오래 잔 모양이군.”

심각한 나와 달리 베카의 목소리는 방금 잠에서 깬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나른했다.

“이건 그냥 잠을 좀 오래 잔 수준이 아니잖아. 몸이 이렇게나 차가운데…….”

“기분 좋은 꿈을 꿨거든. 깨고 싶지 않은 꿈을.”

자신의 몸이 아픈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베카는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네가 꾼 꿈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온천에 가자. 마탑에 있어도 회복이 안 된다면 온천수를 써보는 수밖에 없어.”

“꿈에서 박수온, 네가 나왔다. 아니, 그런데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도 같이 온천욕을 했는데 너무 행복해서 거기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시간이 멈추면 안 되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베카, 넌 평생 온천에서 우리랑 오래오래 살아야 하니까.”

나는 인벤토리 창에서 온천 가운을 꺼내 베카의 몸을 둘둘 감쌌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루카도 가운 속에 챙겨 넣었다.

“내가 온천에 데려다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영계야, 베카가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온천수에 회복에 좋은 향료를 타서 준비해줘.’

[가이드 ‘영계’가 “알겠다”며 부산스럽게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꽃밭으로 향합니다.]

“시…….”

상황이 급한 만큼 곧바로 마스터키의 주문을 외치려는데,

“멀쩡하게 돌아가는 건 안 되지.”

괴기스러운 기계음과 함께 마탑의 바깥쪽에서 뾰족한 검은 손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나의 심장을 겨누며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때 손에 들려있던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베카가 내 앞을 막아섰다.

“베……카!”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뾰족한 검은 손이 정확하게 베카의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베카의 심장’을 얻습니다.]

내 손에 어느새 심장 모양의 묵직한 붉은색 보석이 들렸다.

[!!히든 퀘스트!! ‘판도라의 열쇠 만들기(EX)’를 클리어합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립니다.]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는 문구와 함께 베카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그가 점차 성인의 형체로 변했다.

어느새 나를 돌아보는 베카는 장성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촉촉이 젖은 그가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만났군.”

“베카……!”

본능적으로 위태로움을 느낀 내가 다급히 베카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카의 모습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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