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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76)화 (176/190)
  • 176화

    나의 신부였다

    지금 돈가스 먹다가 졸아서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해령이 내게 장가를 오겠다고 한 것은 실제 상황이란 뜻이다.

    혹시나 해서 한쪽 뺨을 짝 소리 나게 때려도 봤지만 전과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해령, 혹시 너무 울어서 판단력도 흐려진 건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기다려봐. 내가 지금 당장 약 항아리 어르신한테 가서 치료제를…….”

    “그만둬라. 아무리 약 항아리라 해도 그런 약은 못 만든다.”

    심각해진 내가 어르신에게 가려 하자 해령이 나를 붙잡아 앉히며 진정시켰다.

    “그럼 어떡해? 이대로 영원히 정신줄을 놓은 채로 살아야 하는 거야?”

    “내가 너에게 장가가겠다고 한 게 내 정신 건강까지 의심할 정도로 심각한 일인가?”

    호들갑을 떠는 나와 달리 정작 말을 꺼낸 장본인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차분했다.

    “너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이야?”

    “그렇다.”

    “어째서? 날 성가셔하던 게 아니었어?”

    그도 그럴 것이 해령은 내게 손이 많이 간다던가 불안해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번 던전 브레이크 소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를 위로해줄 때도 비슷한 말을 하기에 당연히 나는 해령에게 귀찮은 존재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것도 맞다.”

    역시나 해령은 내가 성가신 존재라는 것에 깊게 공감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성가신 나한테 장가를 오겠다고 하셨을까?”

    “내가 각인한 이상 너에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으니까. 그게 습관이 된 건지 어느새 널 지켜보는 게 일상이 되어 있더군.”

    ‘그러고 보니까 해령은 내가 힘들거나 혼자 있는 게 버거워졌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지. 내가 아플 때도 마찬가지고.’

    온갖 사건에 휘말리며 살다 보니 해령의 존재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해령은 엄연히 내가 계약한 성좌고, 내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각인이라면 다른 성좌들 것도 가지고 있는걸.”

    해령의 논리대로라면 다른 성좌들도 내게 장가를 와야 했다.

    ‘남편이 넷?’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온천의 성좌들이 모두 내 남편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는 내가 온천 사장을 그만두는 편이 편할지도.’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다른 성좌들과 같은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듯 해령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같은 각인이라도 위험도가 다르지. 내게는 온천도 있으니까.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또 죽기라도 해서 쇠고랑을 차거나 내 소중한 온천이 폐쇄되느니 혼인을 해서 옆에 딱 붙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하지 않나? 널 지킬 명분이 더 확실하게 되는 셈이고.”

    ‘그러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천을 지키기 위해서 혼인하겠다는 거잖아.’

    난 대체 해령한테 뭘 기대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호들갑을 떤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미안한데, 나 아직 파릇파릇한 25살이거든. 지금 결혼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더군다나 난 아직 연애 경험도 없었다.

    딱히 이성에 관심이나 연애 대한 로망이 있는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결혼이라는 고리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령처럼 조신하고 가정적인 남자면 생각해볼 가치는 있지.’

    손맛도 좋지만 얼굴도 맛집이지 않은가?

    “지금 날 보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지?”

    “억, 억울하네. 생사람 잡지 마.”

    난 그저 얼굴 맛집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인데.

    고작 그걸로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날 보는 눈빛이 상당히 변태 같았는데.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실례다. 혼인한 사이면 모를까.”

    해령은 주의를 주면서도 은근슬쩍 끝말을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티가 났나?’

    “하하, 다 먹었으니까 접시를 치워야지.”

    나는 해령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애써 외면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옮겨 담았다.

    그때, 전체 헌터 대화방에 알림이 떠올랐다.

    [‘아트 길드장’ 현정우가 ‘집필 길드장’ 박시우에게 아트 길드를 위임합니다.]

    시스템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싱크대 앞에 굳은 듯이 멈춰 섰다.

    아트 길드장이 현정우였어?

    그런데 현정우가 왜 집필 길드원으로 있었던 거야?

    현정우가 아트 길드를 박시우한테 넘긴 건 또 뭐고?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박시우에게 직접 이 상황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터치를 해도 스마트폰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뭐야? 설마 배터리가 다 된 건가?’

    나는 뒤늦게 시스템이 온천 별관이 열릴 예정이라는 스포를 뿌린 뒤에 스마트폰이 쉴 새 없이 울리던 걸 떠올렸다.

    ‘아…… 배터리가 남아 있는 게 더 이상하지.’

    현정우가 아트 길드를 통째로 박시우에게 위임했다는 소식이 전체 헌터 대화창으로 전해졌다.

    ‘지금 박시우의 상황도 방금 전의 나와 다르지 않겠구나.’

    내 스마트폰이 켜진다고 해도 통화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현정우가 아트 길드를 위임한 걸 보면 박시우한테 해코지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지?’

    다행히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이제 돈가스도 다 먹었으니까 베카한테 다녀올게!”

    “너무 경계를 풀지 마라.”

    돈가스와 어르신의 주먹밥이 든 도시락을 챙기는 내게 해령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마탑 꼬맹이, 은근히 음흉한 구석이 있으니까.”

    “베카는 그냥 나이가 조금 많은 귀여운 꼬마일 뿐이거든!”

    해령에게 반박하고 있는 그때, 오랜만에 개나리색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오늘 너의 운수가 불길하니 주변을 잘 살피고 방심하지 마라”고 예언합니다.]

    ‘왜 내가 나가려고만 하면 운수가 불길한 거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만큼 널 노리는 자가 많다는 거겠지”라고 해석을 덧붙입니다.]

    ‘날 노리는 자라…….’

    이미 한 번 운수의 예언을 무시했다가 저승에 다녀온 전적이 있던 터라 나는 신중해졌다.

    ‘지금으로서는 현정우랑 그의 성좌 정도인가?’

    하지만 방금 전체 헌터 대화창에 현정우가 길드 위임을 하는 알림이 뜬 걸 보면 박시우와 같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베카! 잘 지내고 있는 것 맞아?’

    이틀 전만 해도 부르는 대로 답이 돌아오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베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베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라.’

    [가이드 ‘영계’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에게 ‘탑의 주인’의 점사도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운수에게 점사를 부탁하는 걸 보니 영계도 내심 베카를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마탑의 꼬맹이의 운수도 불길하다”고 말하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합니다.]

    [가이드 ‘영계’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점사에 걱정스러워합니다.]

    ‘영계야, 걱정하지 마. 내가 베카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올게.’

    오늘 꼭 베카를 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다녀올게.’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잠시도 방심하지 마라”고 경고합니다.]

    ‘알겠어.’

    나는 마지막까지 운수의 충고를 들으며 온천의 입구를 열어 베카가 있는 마탑으로 향했다.

    * * *

    수온이 마탑으로 떠난 뒤, 해령은 설거짓거리가 가득한 싱크대를 들여다봤다.

    “요리 실력은 늘어도 청소 실력은 도통 늘지 않는군.”

    못마땅한 듯이 말하면서도 해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수온이 돌아오기 전까지 설거지를 해둬야겠다고 마음먹은 해령이 익숙하게 싱크대 앞에 섰다.

    그때 부엌 안으로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수온이라면 마탑에 갔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염라라는 것을 알겠다는 듯 해령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수온을 보러 온 게 아니다.”

    염라는 수온이 앉았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범한 의자일 뿐인데도 염라가 앉으니 여느 황제의 옥좌처럼 위엄이 느껴졌다.

    “의외군, 그럼 날 보러 왔다는 건가?”

    “그래. 그대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게 있어서.”

    “저승의 왕이 직접 행차해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 그게 뭔지 들어나 볼까?”

    대충 수건에 손을 닦은 해령이 염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 사이에 전에 보이지 않던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수온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다.”

    “수온의 전생이 어땠는데?”

    염라의 입에서 수온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딱히 감흥이 없어 보이던 해령의 눈동자에 흥미가 일었다.

    “수온의 전생은 태초의 신이다.”

    “……뭐? 태초의 신이라면……!”

    해령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태초의 신은 온천의 성좌들을 탄생시킨 존재이니 그들에게는 조물주나 다름이 없었다.

    “수온의 전생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태초의 신의 이름은 초성.”

    염라의 검붉은 눈동자가 다소 매서운 기세로 해령에게로 향했다.

    “나의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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