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74)화 (174/190)

174화

온천 사장이 죽는다면

“어떻게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냐?”

정우는 전화 한 통에 자기 집까지 찾아와서 부엌의 선반과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 시우를 황당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내 정체에 관해서 물을 줄 알았는데.’

수온이 폭주하려고 했을 때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위험을 감지한 몸은 반사적으로 포털을 생성하고 있었다.

시우는 집필 길드원 중에서도 정우의 포털을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이었다.

‘내 포털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챘을 텐데, 어째서 묻지 않는 거지?’

시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도 정우에게 수상한 조짐을 느낀 시우가 그에게 몇 번 정체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기억 삭제 스킬을 사용해서 정체를 들킬 위기를 넘겼지.’

하지만 이번에는 기억 삭제 스킬은 쓰지 않기로 했다.

‘시우 형이 부모님을 잃게 된 건 내 오해 때문이었으니까.’

시우가 자신을 원망하고 죽이려 든다고 해도 정우는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우의 반응이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먹을 것도 잔뜩 사 왔지!”

시우는 오는 길에 장까지 봐 온 건지 양손 두둑이 식재료와 갖은 먹거리들이 든 커다란 봉투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사 왔어요?”

“매일 마른 멸치처럼 힘없어 보이길래 제대로 밥도 안 챙겨 먹는구나 싶었지. 오늘 저녁에는 내 요리 솜씨를 보여주도록 하지! 거실에 얌전히 앉아 있기나 해!”

시우는 비장하게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그의 위풍당당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성가신 존재는 없애버리면 더 좋지 않냐며 시우를 제거하길 바랐던 성좌 버그의 요구를 무시한 가장 큰 이유도 이런 섬세하고 다정한 면 때문이었다.

“정우야, 밥 먹자! 아빠가 오늘은 특별히 정우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였단다!”

“우와! 김치찌개 좋아! 우리 아빠 최고야!”

정우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시우를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깊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그 순간에 자신의 숨통을 틔워준 것도 시우였다.

그럴수록 정우의 죄책감은 짙어져만 갔다.

‘내가 그날 성좌의 유혹을 뿌리치고 각성하지 않았다면…… 시우 형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한다고 한들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책임지고 끝내야지. 시우 형이 가족을 잃은 건 나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까.’

정우가 거실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부엌에서는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재료를 손질하는 건지 조리도구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리더니 앞치마를 두른 시우가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어느 틈에 앞치마까지…….’

노란색 앞치마의 중앙에는 돈가스 도시락을 배달하는 덕택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와중에 온천 사장 굿즈냐?’

정우가 봐도 시우의 온천 사장 사랑은 못 말렸다.

“이제 찌개도 다 끓었으니까 식탁에 수저 놓고 앉아!”

시우의 말에 정우는 언제 꺼내봤는지도 모를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닦아 식탁에 가지런히 놓았다.

마주 보고 놓인 두 쌍의 수저.

정우의 아버지가 김패금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에는 한 번도 꺼내본 적 없었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자, 오늘 저녁은 박시우 특제 김치찌개다! 밥도 많이 먹고.”

시우는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정우의 앞으로 김치찌개와 밥 한 공기를 가져다 놓았다.

“자, 어서 먹어봐! 너무 맛있다고 감동의 쓰나미에 익사해도 모른다.”

“……잘 먹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시우를 지켜보던 정우가 힘없이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맛있어.’

시우가 만들어준 김치찌개는 그리운 맛이 났다.

그 때문에 정우는 목이 매여 밥을 삼키기 어려웠다.

“야, 현정우. 너 설마 진짜 울어?”

“아니거든요. 고춧가루를 잘못 삼켜서 그래요.”

“에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거 봐. 내가 그랬지? 내 김치찌개를 맛보면 무조건 감동하게 된다고.”

시우는 자신이 만든 김치찌개의 맛을 쉴 새 없이 칭찬했다.

그것이 정우가 민망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배려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김치찌개는 아버지가 제일 자주 해주시던 요리였어요. 제가 김치찌개를 좋아했거든요.”

“그랬구나.”

시우는 나긋한 목소리로 답하며 정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루는 아버지랑 같이 마트에 갔다가 새로 나온 로봇 장난감이 너무 가지고 싶어서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하급 헌터라서 벌이가 좋지 못한 상태라 장난감을 사주지 못하셨죠.”

집안의 살림살이를 알기에 너무 어렸던 정우는 로봇을 사주지 않는 아버지가 마냥 밉게만 느껴졌다.

“정우야, 내가 오늘 김패금 헌터와 같이 던전에 가기로 했다. 상급 던전이니까 분명 수당도 많이 받을 거야. 오늘 다녀오면 네가 가지고 싶다고 했던 장난감도 사올게.”

아버지가 김패금과 던전에 가기 전, 아버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토라진 정우는 등을 못 들은 척 돌리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 정우야. 늘 못난 아버지라 미안하다. 다녀올게.”

아버지가 문을 나서고 난 뒤에야 정우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일을 나가신 뒤였다.

뒤따라 나가볼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아버지는 내 생일에도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으시는걸.’

그래도 정우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래서 집 앞까지 나와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날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김패금의 계략으로 상급 몬스터의 미끼가 되어서…….”

다시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는 듯 정우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형, 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김패금의 짓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정우는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형은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 나이 때에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죽이려고 했을 거야.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했었고.”

“잘됐네요. 형도 던전 브레이크에 부모님을 가둔 게 저라는 걸 아시잖아요. 이제 저를 죽이세요.”

어차피 정우는 스스로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우의 손에 죽는다면 그 끝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현정우. 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마지막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정우가 시우의 말에 감았던 눈을 떴다.

“꼭 살아남아서 평생 내 옆에서 그 죄를 갚아.”

“형……. 저는.”

“안 그래도 박지호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부길드장 자리가 비어서 일이 많아졌단 말이야. 대신 일이 많다고 월급 올려주고 그런 건 없다?”

“죄송하지만 그 일은 못 해요.”

시우의 옆에 있는 한 정우의 성좌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이미 계약자의 힘을 빌려 멋대로 바나나 던전에서 수온을 죽인 전적도 있었다.

‘그건 보통의 성좌들과 달리 계약자의 의지 없이도 타인을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계속 집필에 있는 건 위험해.’

다시 생각해보니 시우가 자신을 죽인다고 한들 정우의 성좌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성좌의 힘을 꺾고 소멸시킬 만큼 강한 사람이 없을까?’

그때 정우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온천 사장이라면…….’

폭주하는 온천 사장의 위력은 같은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멈출 만큼 강력했다.

‘그때만큼은 내 성좌도 부리나케 도망쳤으니까. 방법을 찾아보자.’

“형, 잠깐만 손을 내밀어보세요.”

생각을 정리한 정우가 시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손은 왜?”

정우는 시우의 손에 자신의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아트 길드의 상징인 흰색 꽃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트 길드장’ 현정우가 ‘집필 길드장’ 박시우에게 아트 길드를 위임합니다.]

“현정우, 너…….”

“사실 저 스파이였어요. 원래는 길드원으로 숨어들어서 내분을 일으킨 뒤에 집필까지 집어삼킬 계획이었거든요. 어디까지나 진실을 몰랐을 때 이야기지만.”

전체 헌터 게시판으로 알림이 떠올라서인지 정우와 시우의 폰으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전 형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현정우!”

시우의 부름에도 정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방 안에서는 정우의 성좌가 잔뜩 화가 난 듯 시꺼먼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습구나. 박시우에게 사죄하면 네가 저지른 죄가 모두 사라질 것 같으냐?”

“용서받으려고 한 적 없어. 박시우, 건드리지 마. 내 경고를 어기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버릴 테니까.”

“가소롭긴. 좋다. 박시우는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그렇다고 해도 넌 박시우에게 평생 용서받을 수 없을 거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정우의 얼굴이 불안감에 일그러졌다.

그런 정우를 보며 그의 성좌는 검은 입을 귀 끝까지 찢어 올리며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네 성좌가 온천 사장을 죽였다는 걸 알면 박시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이 무척 기쁜 일이라도 되는 듯이 괴기스럽게 웃으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