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내 모든 걸 줘도 좋을 만큼
전생의 기억을 회상하던 샤레니안이 온천수에 담그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물에 젖은 흑색의 머리카락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처럼 빛났다.
‘이번에도 내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는 건가?’
샤레니안은 온천에서 수온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너 왜 피를 흘리고 다녀? 빨리 119를 불러야 해!”
샤레니안이 성좌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불사의 전장에서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된 탓에 무영이 있는 온천 별관에서 몸을 치유하고 가려고 했는데 웬 인간 꼬맹이가 샤레니안을 보더니 호들갑을 떨어댔다.
‘별관도 던전 깊숙한 곳에 있어서 찾는 인간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하필이면 인간 손님이 묵고 있었다.
“난 괜찮다. 그러니까 쉿!”
더 소란을 부렸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은 기분에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안 돼, 그러다 네가 죽으면 어떡해?”
어린 시절의 수온은 자주 다쳐오는 부모님이 떠올라 샤레니안의 상처를 그냥 넘기지 못하고 울먹였다.
‘내가 죽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다치는 게 뭐라고 네가 울려고 하는 거지?”
“피 나면 아프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고쳐줄게!”
수온이 주머니 속에서 돈가스 모양 반창고를 꺼내 들었다.
“아끼는 거지만 너한테 줄게!”
샤레니안은 신박한 디자인의 반창고를 물끄러미 보다 실소를 흘렸다.
“꼬맹이, 난 불사신이야. 얼마 안 가서 피가 멎고 상처도 아물 테니까 그런 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안 돼! 치료해야 해! 아문다고 해서 상처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 이 바보야!”
그때까지 샤레니안은 자신의 몸에 상처가 나고 다치면서 고통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벌을 받는 거니까 아파도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날 처음 만난 주제에 저 스스로조차 관심 없던 자신의 고통까지 헤아려주는 수온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꼭 그가 힘겹게 버텨온 시간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그럼 어디 해보든지? 그 조그마한 물건으로 날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샤레니안이 툴툴거리며 바닥에 앉자 수온은 그때를 틈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상처에 돈가스 모양 반창고를 붙여주며 입김까지 불어 넣어줬다.
“됐다. 이제 아프지 마.”
“성가시긴……. 꼬맹이, 네 이름이 뭐지?”
“박수온.”
“박수온. 온천이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치료를 받은 보답으로 언젠가 이 온천에 널 다시 초대하도록 하지.”
“진짜? 나 이 온천 진짜 좋아! 약속한 거다?”
수온은 귀엽게 웃으며 샤레니안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샤레니안은 어색하게 수온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날 이후 샤레니안은 불사의 전장을 다녀온 뒤에 꼭 인간계를 들렀다.
“이 돈가스 괴물아!”
“뭐?”
“아악! 방금 돌멩이가 갑자기 움직여서 내 발에 걸렸어! 우앙! 아파!”
그리고 수온을 괴롭히는 인간들에게서 그녀를 지켰다.
그때를 떠올리던 샤레니안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 결국에는 당신을 지키는 검이 됐어.’
샤레니안은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은 수온과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을 수도, 그녀를 지킬 수도 있었으니까.
‘요즘은 수온이 부쩍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라 내가 도울 일이 딱히 많아 보이진 않지만…….’
지금은 그냥 남아 있고 싶었다.
수온이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될 수 있는 온천의 식구로.
물기에 젖은 얼굴로 눈을 내리감는 샤레니안의 뺨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XX이 1000상승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특수 스탯 ‘XX’가 열립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사랑’이 1000 상승합니다.]
특수 스탯이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스템 창에 뜬 XX 부분이 일그러지더니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X자가 하나 더 추가되며 글자의 형태가 변했다.
[성좌 ‘불상의 살인귀’의 ‘충성심’이 1000 상승합니다.]
* * *
우주보다 더 광활한 시간의 샘,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태초의 신전.
그곳은 낮에도 밤에도 별이 떠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쌍둥이 성좌를 구원하고 돌아오는 길.
초성의 낯빛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어. 당신을.”
“내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좋을 만큼.”
기억을 잃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샤레니안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왔어? 초성.”
초성이 신전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그녀를 반기는 어떤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혼란스러워 보이던 초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새 초성을 가리고 있던 기다란 은발과 루비빛 적안은 사라지고 검고 긴 웨이브 머리에 먹물처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수온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자야, 신전은 잘 지키고 있었어?”
검고 긴 머리카락과 검은 눈, 사자를 마주한 지금이 바로 초성의 본모습이었다.
이건 초성이 원한다고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초성의 짝이 될 수 있는 운명을 가진 자만이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지루했다.”
초성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불만스러워하는 수호 사자에게 다가갔다.
“우리 귀여운 사자가 왜 이렇게 토라지셨을까?”
수호 사자는 뜨끈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신전의 탕에 몸을 반쯤 담근 채로 있었다.
물기가 맺힌 그의 다부진 몸은 마치 신이 정성 들여 한땀 한땀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초성이 탕에 발을 담그고 걸터앉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네가 종일 신전을 비웠으니까.”
“그랬구나.”
“다음에는 신전을 지키는 건 관두고 널 따라갈까 싶군.”
“그건 안 돼. 요즘 들어 시스템의 조짐이 수상쩍은 거 잘 알잖아. 잠시라도 틈을 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칫.”
수호 사자의 어리광에 초성은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자신의 머리에 닿는 초성의 손길을 눈을 감은 채 느끼고 있던 사자가 돌연 눈을 뜨며 장밋빛 적안을 번뜩였다.
“또 인간들에게 신의 힘을 나눠 준 건가?”
“이것도 다 미래를 대비해두는 거야. 만에 하나 시스템이 세상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내가 지켜낸 것들이 이 세계를 시스템에게서 지켜내는 힘이 되어주겠지.”
“네가 뭘 하든 좋아. 네가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건 줄곧 곁에서 지켜봐온 내가 제일 잘 아니까. 하지만…….”
수호 사자가 손을 뻗더니 초성의 손목을 쥐어 자신에게로 당겼다.
“네 몸에 다른 놈의 흔적을 묻혀오진 마.”
베카는 샤레니안이 각인한 부위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초성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질투 나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샤레니안의 흔적을 어떻게든 지워보겠다는 듯 수호 사자가 초성의 두 손을 붙잡고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알겠어. 그러니까 그만 심술부려. 내 사자 같은 고양이.”
“고양이가 아니라 사자다!”
탕에 걸터앉아 있는 초성의 양옆을 두꺼운 팔로 짚은 수호 사자가 초성 가까이 다가가며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온천을 잊고 있었네. 신전의 온천수는 치유력이 좋으니까. 온천수를 다룰 수 있는 성좌가 있다면 더 많은 존재를 구할 수 있겠어.”
자신보다 온천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초성에 심술이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수호 사자는 초성의 말을 막듯이 입을 맞췄다.
“일 이야기는 거기까지.”
초성을 향한 수호 사자의 붉은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탕에 걸터앉은 초성을 그대로 안아 든 수호 사자가 잘 익은 과실을 머금듯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즈음, 잔뜩 젖은 몸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초성과 수호 사자는 이내 이마를 맞대며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 * *
“해령……. 괜찮아?”
“괜찮겠…….”
후두둑!
내 물음에 이를 악물고 답하던 해령의 코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내가 온천 바닥에다 불사검을 내리꽂는 바람에 온천 그 자체나 다름없는 해령이 타격을 입고 코피를 흘리게 된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불사의 검을 뽑아볼게!”
검 손잡이를 잡고 빼내려고 애써봤지만 몸체가 어찌나 무거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탕에 몸을 담근 채 “검을 뽑는 것보다 각인을 푸는 게 더 빠를 거다”라고 충고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각인 해제!’
나는 곧장 샤레니안의 각인을 해제시켰다.
그러자 불사검이 자취를 감췄다.
그렇지만 부서진 바닥은 그대로였다.
‘부채!’
“태초의 바람!”
난 일전에 베카가 만든 돈가스 때문에 날려먹은 문짝을 살려냈던 경험을 되살려 온천 바닥을 되돌려놨다.
‘샤레니안! 각인을 얻었는데도 어째서 불사의 검을 들 수 없는 건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우리 불사검은 줏대가 있는 검”이라며 “각인하는 것과 별개로 검의 선택을 받아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무슨 검이 그렇게 까다로워?’
미안함에 괜스레 불사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던 나는 방 한곳에 주저앉아 있는 해령에게로 눈을 돌렸다.
나름대로 빠르게 수습하긴 했지만, 그의 손은 이미 코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령, 일단 피부터 닦자.”
온천 수건을 집어 피를 닦기 위해 코를 막고 있는 해령의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아악!”
나는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후두둑.
잠겨 있던 수도꼭지처럼 해령의 손에 막혀 있던 피들이 그 순간 우수수 쏟아져 내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