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내 모든 걸 줘도 좋을 만큼
“샤레니안, 자네의 뜻도 에르시온과 같은가?”
황제의 물음에 샤레니안은 잠시 답하기를 망설였다.
“샤레니안, 잊지 마. 넌 항상 생명을 지키는 검이 되어야 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얻은 힘은 피를 묻히는 순간 산산조각 나 파국에 이르게 될 거야.”
낮에 데이스타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전장에 나가면 원하지 않아도 피를 묻히게 되겠지.’
하지만 샤레니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제 뜻도 에르시온과 같습니다.”
황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샤레니안은 살기 위해 사랑도 없는 혼인을 해야만 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샤레니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여자는 데이스타가 유일했다.
전장에 나가 죽게 된다고 해도 그녀 외의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척하는 거짓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좋다, 페르시온 제국의 땅을 내게 가져와라. 그러면 너희 형제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도록 하마.”
황제는 황녀의 사랑 때문에 대의를 져버릴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샤레니안 형제의 출정을 허락하고 제국의 기사단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셰르니엘 제국이 쳐들어왔다!”
“모두 방어진을 만들고 중앙 수도에 전보를 보내도록 해라!”
샤레니안과 에르시온 형제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에르시온이 미리 페르시온 제국 동부에 사람을 심어 입수한 정보로 만든 전술이 잘 먹힌 탓도 있었지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장을 누비며 적들의 목을 베어내는 샤레니안의 전투력은 페르시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전쟁은 셰르니엘 제국의 승리다! 이제 내 발밑에 있는 이 땅은 셰르니엘 제국의 것임을 선포한다!”
샤레니안의 외침과 함께 셰르니엘 제국의 문양이 담긴 새하얀 깃발이 페르시온 동부의 땅에 꽂혔다.
‘이제 에르시온도 나도 자유의 몸이다.’
샤레니안은 전쟁이 끝나면 에르시온과 함께 셰르니엘의 한적한 마을에 작은 저택을 구해서 전쟁도 정치도 잊고 소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꿈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면 다시는 검에 피를 묻힐 일도 없겠지.’
피로 물든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샤레니안의 낯빛에 일순간 무거운 죄책감이 일었다.
“형!”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에르시온의 밝은 목소리에 샤레니안은 죄책감을 감추고 그가 있는 편으로 눈을 돌렸다.
“에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에르시온을 바라보던 샤레니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셰르니엘 제국의 기사단장이 검을 뽑아 에르시온을 향해 휘두르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 돼!”
샤레니안이 빠르게 달려가 막아보려 했지만 기사단장의 검은 이미 에르시온의 심장을 꿰뚫은 뒤였다.
“에르시온!”
에르시온이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낙마하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샤레니안이 황급히 달려가 그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이게 무슨 짓이지? 어째서 에르시온을……!”
눈에 벌건 핏발을 세운 샤레니안이 잔뜩 화가 난 맹수가 포효하듯 고함을 내질렀다.
에르시온에게 칼을 꽂은 기사단장은 분노하는 샤레니안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이셨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너희들에게 죽음을 선사해 영원한 자유를 주라고.”
이제야 황제가 흔쾌히 에르시온의 제안을 받아준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들에게 준다는 영원한 자유가 그런 뜻이었나? 에르시온과 내 청춘을 셰르니엘 제국에 바친 결과가 이거라고?’
“안 그래도 빈민가 출신의 형제가 황제 폐하만 믿고 제 분수를 모르고 날뛰어서 못마땅하던 차였는데 아주 잘 됐지. 너도 곧 동생을 뒤따르게 해주마.”
제국의 기사단장이 샤레니안에게 다가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샤레니안의 검이 번개같이 그의 목을 날렸다.
샤레니안의 검이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단장님! 네 놈이 감히……! 누구든 저놈의 목을 베어와라!”
방금만 해도 자신의 뒤를 따르던 기사단원들이 한꺼번에 검을 뽑아 들고 샤레니안을 덮치려 했다.
하지만 칼날의 끝이 샤레니안에게 닿기도 전에 모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샤레니안의 검이 그들보다 몇 배는 더 빨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전장을 활보할 때 이상으로 샤레니안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형…….”
“에르시온, 의원에게 가자. 형이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에르시온이 자신을 부축해 일으키려는 샤레니안을 힘없는 손으로 붙잡아 말렸다.
“형……. 난 형이 내 형이라서 참 좋았어.”
“에르시온, 왜 떠날 것처럼 말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형 동생으로 태어날 거야. 그때는…….”
에르시온이 붉은 핏덩이를 왈칵 쏟아냈다.
“말하지 말라니까!”
“그때는……. 조용한 마을에 작은 집을 짓고 전쟁도 책략도 모두 잊고 행복하게 살자. 데이스타도 같이.”
에르시온의 얼굴로 샤레니안의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비로소 형제의 꿈이 다르지 않다는 걸 샤레니안도 알게 됐다.
‘우리가 바란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 그러자. 에르시온, 사랑해.”
샤레니안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힘겹게 이어지고 있던 에르시온의 옅은 숨이 멎었다.
“에르시온…….”
“겁먹지 마라! 돌격해!”
오열하는 샤레니안을 지켜보던 기사단이 그 틈을 노려 샤레니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굳어버렸다. 이윽고 환한 빛과 함께 누군가 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내가 검에 피를 묻히는 일은 없게 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결국에는 파국을 맞다니…….”
샤레니안 형제에게로 다가온 것은 데이스타였다.
신비로운 은발에 루비빛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기운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에는 얼음같이 투명한 결정으로 된 커다란 봉 같은 것이 들려 있었는데 기다란 봉 부분을 푸른 용 장식이 휘감고 있었고 봉의 윗부분에는 보라색 나비와 황금색 꽃, 붉은색 장미가, 가장 높은 부분에는 검은색 칼날이 꽂혀 있었다.
금으로 장식된 새하얀 원피스에 봉을 든 데이스타는 의심할 것 없는 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샤레니안은 가슴에 사무치게 깨닫게 됐다.
‘모든 게 내 욕심 때문이었구나.’
닿지 못할 것을 넘본 것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당신이 진짜 신이라면 제발 내 동생을 살려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에르시온만큼은.”
샤레니안은 데이스타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애원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에르시온과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에르시온과의 너의 가족애는 내가 지켜야 할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에르시온과 함께 성좌가 되어 이 세상에서 가족애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라.”
“그러면 에르시온을 살릴 수 있어?”
“그렇다. 단, 너는 성좌가 되기에는 전장에서 너무나도 많은 피를 묻혔다. 그에 대한 대가로 넌 불사의 몸이 되어 다른 이의 소중한 사람을 죽인 만큼 너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사랑하는 이를 죽인 대가로 너와 사랑을 느낀 연인은 죽게 될 거다. 그래도 하겠느냐?”
“할게. 에르시온을 살릴 수만 있다면.”
가혹한 조건들이었지만 샤레니안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에르시온도 죽지 않았을 테니까.’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겠다.”
“뭐지?”
“내가 성좌가 된다면 전생의 기억을 모두 지워줘. 에르시온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만 남도록.”
‘더는 당신을 향한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들어줄게. 그래도 한때는 사제의 정을 나눈 사이니까. 단, 사람을 죽이는 계획을 세운 에르시온 또한 죄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 평생 얼어붙은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거야. 마음의 준비는 됐나?”
“그래.”
에르시온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샤레니안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안도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당신이 누군지 물어도 될까? 그래도 한때는 사제의 정을 나눈 사이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넌 한결같구나. 난 태초의 신, 초성이다.”
‘태초의 신.’
그래서 셰르니엘을 수호하는 여신이 아니라고 말했던 건가?
데이스타의 정체를 알게 되자 샤레니안은 그녀가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너에게 성좌의 힘을 주겠다. 이 검을 받아라.”
초성이 손에 쥔 봉을 샤레니안에게 기울이자 그의 검과 그에게로 흑색의 빛이 전해졌다.
그러자 샤레니안이 전쟁에서 다친 상처들이 단숨에 아물고 가늘었던 그의 검이 거대해졌다.
에르시온에게는 투명한 얼음 결정이 전해지며 검었던 머리가 희게 변했다.
“이제 네 기억을 지우도록 하겠다.”
초성이 전생의 기억을 거두기 위해 다시 한번 봉을 샤레니안에게 기울이는 그때였다.
샤레니안이 그녀의 손을 쥐었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그래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초성의 봉에서 흘러나온 빛은 이미 샤레니안을 감아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어. 당신을.”
샤레니안의 입술이 초성의 손바닥에 닿았다.
“너…….”
샤레니안을 바라보는 초성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렸다.
그의 애절하고도 슬픈 마음에 반응하듯 입술이 닿은 자리에 검은색 빛이 스며들었다.
초성의 손에 입을 맞춘 샤레니안의 눈길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사랑한 상대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 샤레니안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 모든 걸 다 내어줘도 좋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