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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70)화 (170/190)
  • 170화

    나만 애타지

    “여기 빈틈!”

    데이스타는 종종 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을 찾아왔다.

    샤레니안을 찾아올 때면 데이스타는 그와 대련을 벌였다.

    제국에는 마땅한 대련 상대가 없던 샤레니안이 누구보다 빠르게 멈추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데이스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샤레니안이 제국의 호위기사가 되고 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샤레니안, 이제는 제법 봐줄 만한 실력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나타난 데이스타는 어김없이 샤레니안에게 기습으로 검을 뻗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고 급소를 내어주던 그도 이제는 능숙하게 데이스타의 검을 받아냈다.

    “누가 시도 때도 없이 내 목을 노려준 덕분에.”

    “제자한테 감사 인사를 듣다니 기쁜데?”

    “그게 감사 인사로 들려?”

    “아니야?”

    데이스타의 기다란 은발이 봄바람에 살랑였다.

    봄볕처럼 따스한 데이스타의 미소에 샤레니안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봐, 말 못하잖아. 날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으면서 솔직하지 못하긴.”

    “요즘 잘 오지도 않으면서 스승이라고 생색은.”

    샤레니안은 슬쩍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가 안정적인 실력과 직위를 갖추기 전에는 일주일에 서너 번도 찾아왔으면서 황제의 인정을 받고 황녀의 호위기사가 되고 난 후로부터 데이스타가 나타나는 일이 드물어졌다.

    “이제는 가르칠 것도 많이 없잖아. 제국에서 알아주는 실력자가 됐고. 그래도 날 이기는 건 무리겠지만.”

    짧은 순간, 데이스타의 검이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 순식간에 샤레니안의 칼날을 감고 돌더니 그의 검을 튕겨내고 목을 겨눴다.

    ‘사실이다. 내 실력으로는 데이스타를 이길 수 없어.’

    샤레니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소드마스터가 온다고 해도 자신과 결과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데이스타가 가진 위력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됐다.

    ‘어쩌면 그녀가 진짜 여신 데이스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샤레니안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길이 많아봤자 자신의 또래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데이스타의 앳된 외모로 향했다.

    ‘그때로부터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아.’

    꼭 샤레니안이 살고 있는 세상의 시간 흐름이 데이스타에게는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데이스타를 수상쩍게 여기거나 그에 관해 묻지 않았다.

    자신이 의심을 드러내는 순간, 데이스타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마치 손에 쥐려 하면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환상처럼.

    “스승이 제자를 이겨놓고 즐거워하다니 악취미야.”

    샤레니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리자 데이스타가 그를 겨누고 있던 검을 거둬들이며 웃었다.

    “악취미도 취미지. 그간은 잘 지냈어?”

    “순서가 이상한 것 같은데. 보통은 안부부터 묻지 않나?”

    “기사끼리 안부를 묻는 건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당신은 기사가 아니잖아.”

    “기사의 스승이니 기사나 다름없지.”

    샤레니안은 데이스타의 능글맞음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앞에 서면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또래의 영애들과 달리 그녀는 편안하게 샤레니안을 대했다.

    어린 시절의 그를 대할 때와 조금의 변화도 없는 모습이었다.

    샤레니안은 그게 불만스러웠다.

    ‘난 말 한 번 꺼내는 게 어렵고 조심스러운데.’

    데이스타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아이 때와 다름없이 대하는 것이.

    “청혼을 받았어.”

    그래서 괜히 황녀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진 걸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그때처럼 연약하고 작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네가 청혼을? 누구에게?”

    “내가 호위하고 있는 황녀님에게서.”

    “청혼이라, 그렇구나. 이곳의 시간은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아. 바나나 한 송이에 행복해하던 그 꼬맹이가 벌써 결혼을 할 때가 되었다니.”

    “누가 들으면 당신이 할머니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그래, 황녀에게 장가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죽을 때까지 에르시온과 새로운 가정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한 가정을 꾸리고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장성한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데이스타의 반응에 샤레니안은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삶이 아니야. 황녀님에게는 호위기사 이상의 마음을 품은 적도 없고.”

    “그럼 네가 바라는 삶이라는 건 뭔데?”

    ‘당신을 지키는 검이 되어 사는 것.’

    마음은 확고했지만 샤레니안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지금의 자신은 데이스타과 겨우 견줄 수 있는 실력인데다 황녀에게 묶인 몸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 데이스타를 지키는 검이 되겠다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크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황녀에게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말하는 게 좋겠지.’

    샤레니안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어 허리춤에 차며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검이 되어 사는 것.”

    “오, 그때 그 꼬맹이가 어느 틈에 자라서 저렇게 기특한 생각을.”

    “당신! 날 애 취급하는 건 그만두라니까!”

    발끈한 샤레니안이 데이스타의 양옆을 손으로 짚으며 은하수를 담은 것처럼 빛이 나는 흑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또렷한 이목구비, 오른쪽 눈 밑에 있는 매력점은 또래 영애들의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직도 내가 그때의 어린아이 같나?”

    “많이 자라긴 했구나. 그때는 내 턱에도 닿지 않는 크기였는데 지금은 네가 나를 한참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으니까.”

    데이스타가 높이를 가늠하듯 자신의 손을 샤레니안의 머리 위로 올리며 새삼스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항상 나만 애타지.’

    샤레니안의 입술 사이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샤레니안, 잊지 마. 넌 항상 생명을 지키는 검이 되어야 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얻은 힘은 피를 묻히는 순간 산산조각 나 파국에 이르게 될 거야.”

    데이스타는 부드러운 손길로 샤레니안의 흑발을 쓸어내리며 충고했다.

    “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매번 와서 하는 말이 잔소리뿐이군.”

    “그만큼 소중한 존재니까. 너와 에르시온은.”

    샤레니안은 처음으로 에르시온의 이름이 밉게 들렸다.

    그만큼 데이스타에게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고 싶었다.

    “오늘은 이 말을 전하러 온 거야. 샤레니안, 그 어떤 순간에도 내가 한 말을 잊지 마.”

    데이스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 * *

    그날 저녁, 황제가 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을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샤레니안, 자네에게 황녀와 혼인할 영광을 주겠다.”

    식사를 하던 중 황제가 던진 말에 하마터면 샤레니안은 식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폐하, 그 일에 관해서는 황녀님께 이미 제 뜻을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명령이다! 샤레니안, 감히 그대가 황명을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나 다름없었다.

    샤레니안은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혼인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은 이미 데이스타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황녀가 들어올 자리 같은 건 존재하지도 만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거절하지 못한 건은 에르시온 때문이었다.

    샤레니안이 황녀와의 혼인을 거절하면 에르시온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것이 뻔했다.

    “폐하, 부디 그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고귀한 황녀님의 짝으로 형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형님이 황녀님의 남편으로 궁에 갇혀 지낸다면 제국에 큰 손실이 될 겁니다.”

    샤레니안이 고심하는 사이 에르시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샤레니안이 말리는 눈빛을 보냈지만 에르시온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샤레니안을 황녀와 혼인시키는 게 제국의 손실이라는 거지?”

    “폐하께서도 일찍이 느끼셨겠지만 형님은 황녀님의 호위무사에 머물러 있을 실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국의 부귀와 영광을 위해 나서야 마땅하지요.”

    황제는 에르시온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서론이 길군. 그래서 그대가 진짜 내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지?”

    “폐하께서 제국의 기사를 쓰는 것을 윤허해주신다면 제가 정교한 전술과 전략을 설계해 형님과 함께 전장에 나가 페르시온 제국의 동부를 점령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페르시온 제국의 동부라.”

    페르시온 제국의 동부는 광산이 많아 자원이 풍부하고 기름진 평야가 많아 농사를 짓기에도 좋아 황금의 땅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군사력이 강한 국가인데다가 지리적인 정보도 많지 않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제안에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우는 때였다.

    “대신.”

    에르시온이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황제를 마주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승기를 들고 돌아오게 되면 샤레니안 형님께 자유를 주십시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이때까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이 말 한마디가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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