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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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은 셰르니엘 제국의 빈민가 출신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아.
“샤레니안, 일이다!”
샤레니안은 태어날 때부터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아서 마을의 가게에서 일을 하고 끼니를 때울 빵이나 수프를 받아오고는 했다.
“형, 설마 하루 종일 일하고 받아온 게 이게 다인 건 아니지?”
“이게 다인데?”
에르시온은 몸은 약했지만 계산이 빠르고 영민했다.
“형이 오늘 혼자 나른 우유 수레만 해도 열 대가 넘는데 말라비틀어진 빵 두 조각이랑 무른 감자 수프 한 그릇이 전부라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샤레니안이 일을 한 것에 비해 받아온 대가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았다.
“이건 어리다고 형을 이용한 거나 다름없어!”
에르시온은 원래도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유일한 가족인 샤레니안의 일에는 더 민감하게 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샤레니안에게 우유 수레를 나르게 한 가게의 우유에서 벌레가 나와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필이면 그날 가게를 방문한 귀족 손님이 자신에게 벌레가 든 우유를 팔았다는 이유로 난동을 피웠고 우유 가게는 얼마 안 되어서 망해버렸다.
“에르시온, 이거 네가 한 일이지?”
“뭐가?”
샤레니안의 물음에 에르시온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빌리 아저씨네 우유 가게 일 말이야.”
“그러게 누가 어린애한테서 노동 착취하래?”
샤레니안이 확신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에르시온도 못내 수긍했다.
“넌 그날 귀족 손님이 올 것도 알고 있었던 거지?”
“그 귀족의 보좌관은 보름마다 우유 가게에 주문을 넣고 가. 사교계에서 유명한 디저트 사업을 한다고 들었거든. 그 귀족은 명성이 높은 만큼 재료를 선별하는 것에도 까다로워서 오랫동안 거래한 가게지만 매번 같은 날에 와서 우유의 신선도를 확인하지.”
“넌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어른들은 보통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눈과 귀가 있으면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어른이든 아이든 다를 게 없는데.”
에르시온은 관찰력이 좋은 만큼 마을의 사정에 밝았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정보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에 능했다.
“그래도 우유 가게를 망하게 하면 어떡해? 그나마 일을 주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먹을 것을 구할 곳도 마땅하지 않잖아.”
“그렇다고 지켜볼 수만은 없잖아. 형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에르시온은 자신이 굶으면 굶었지 샤레니안이 궂은일을 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형, 샤레니안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래, 잘했어. 먹을 걸 구할 방법은 또 찾아보면 되지.”
그건 샤레니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 슬슬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에르시온도 힘이 없어 보이고.’
샤레니안이 먹을거리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노란색 과일을 싣고 지나가는 수레가 보였다.
“열대우림에서 배를 타고 넘어온 바나나, 한 개당 1000골드! 아주 싱싱하고 맛이 좋습니다!”
“바나나?”
수레에서 나는 달콤한 바나나 향에 에르시온이 꿀꺽 침을 삼켰다.
‘에르시온이 먹고 싶은 것을 죄다 안겨줄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샤레니안이 사랑하는 동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하고 있을 때, 누군가 두 형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자, 여기.”
두 형제에게 바나나를 건네 오는 건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다.
기다란 은발에 루비 빛 눈동자를 가진 그 여자는 두 형제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름답다. 마치 우유 가게 아저씨가 보던 신문에 그려져 있던 여신 데이스타의 조각상 같아.’
샤레니안은 그녀의 눈이 부신 미소를 잠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
“누구세요?”
그사이 경계심이 강한 에르시온이 여자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 나이에 낯선 이를 경계할 줄 알다니 영리한 아이구나.”
“그래서 누구냐니까요?”
에르시온은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이 기분 나빴는지 여자를 향해 쏘아붙이듯 물었다.
“초…… 아, 여기서는 데이스타라고 불리던가?”
“당신이 셰르니엘의 수호 여신 데이스타라고요? 아무리 우리가 어린애라지만 이런 거짓말에 속지 않아요.”
에르시온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샤레니안은 잠깐이지만 그녀가 진짜 데이스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나?’
샤레니안은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정확히 셰르니엘을 수호하는 여신은 아니니까 거짓말한 게 되는 건가? 하지만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역시 사기꾼이었어. 저 바나나에도 독을 묻혀뒀을지도 몰라.”
‘데이스타가 아니었구나. 하긴 신이 진짜 있을 리 없지. 그런 건 전부 미신이야.’
샤레니안은 신을 믿지 않았다.
강추위에 제대로 먹지 못한 에르시온이 죽을 만큼 아팠던 날이 있었다.
샤레니안은 매일 같이 신에게 기도했다.
“에르시온과 제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함께하게 해주세요.”
‘에르시온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세요.’
하지만 하루아침에 없던 힘이 생겨나는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열이 많이 나는구나. 일단 안으로 들어오렴.”
에르시온을 도운 건 신이 아니라 마을에서 의원 일을 하고 있는 나이 든 노파였다.
그가 보살펴준 덕에 에르시온은 위기를 넘기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샤레니안은 신이 아닌 사람을 믿었다.
정확히는 자기 자신을.
“나 진짜 데이스타 맞는데, 무슨 수로 증명해야 좋을까. 어떻게 하면 믿어줄래?”
“좋아요. 당신이 진짜 데이스타라면 뭐든지 알겠죠? 이 자리에서 우리 이름을 맞춰봐요.”
에르시온은 여자가 당연히 답을 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마을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너희 샤레니안, 에르시온 맞지?”
여자는 정확하게 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을 손으로 짚으며 이름을 말했다.
“어, 어떻게 우리 이름을 알아요?”
“너희를 만나러 왔으니까.”
‘거짓말.’
에르시온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샤레니안은 그녀가 여신 데이스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싫어서 가명을 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의 이름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바나나를 먹고 싶어 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미리 이름을 물어봤을 수도 있지.’
“이제는 이 바나나 받아줄래?”
데이스타는 에르시온에게 바나나를 안겨주고는 샤레니안에게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샤레니안, 쪽지에 적힌 대로 움직여. 그리고 넌 네가 바란 대로 생명을 지키는 검이 되도록 해.”
“내가 바란 대로……?”
쪽지를 바라보던 샤레니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을 데이스타라고 소개하던 여자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바나나, 맛있어! 다행히 독은 없는 것 같네! 형도 먹어봐!”
배가 많이 고팠는지 바나나 하나를 꿀꺽 삼킨 에르시온이 샤레니안에게 바나나를 건넸다.
샤레니안은 그날 바나나의 맛을 난생처음 알았다.
‘달콤해.’
그리고 그 바나나의 단맛만큼이나 샤레니안의 기억 속에 데이스타의 존재가 강렬하게 새겨졌다.
데이스타가 준 쪽지에는 시간과 장소가 쓰여 있었다.
장소는 마을에서 가까운 시내의 골목이었다.
샤레니안은 속는 셈치고 에르시안과 함께 그곳에 갔다가 무뢰배들에게 포위된 또래의 소녀를 구해냈다.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구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황실에 초대를 명하셨습니다.”
황녀를 구한 사건으로 샤레니안과 에르시온은 황실에 초대받아 황제를 만나게 됐다.
그때 샤레니안은 나이에 맞지 않는 근력과 힘, 그리고 타고난 검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훗날 황녀의 호위기사가 되고, 에르시온은 기사단에서 훈련을 받다가 전술에 비상한 능력을 보여 훗날 제국의 책략을 도맡게 됐다.
특히 샤레니안은 검술 대련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샤레니안, 자네도 검을 든 기사로서 제국을 위해 공을 세울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때로는 황제가 샤레니안에게 전장에 출정할 것을 넌지시 제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샤레나안은 생명을 지키는 검이 되라는 데이스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폐하, 저는 피를 묻히기보다는 누군가를 지키는 검이 되고 싶습니다.”
“자네…….”
“아버지, 저도 샤레니안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호위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샤레니안이 계속해서 저를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럴 때마다 황녀가 나서서 샤레니안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황제는 지극한 딸바보였기에 황녀의 말대로 샤레니안에게 더는 출정을 권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샤레니안은 자신이 황녀의 호위기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힘을 실어 주었기에 데이스타의 뜻을 지킬 수 있었으니까.
“샤레니안, 제가 당신을 지켜주었으니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제게 명령하실 게 있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황녀의 호위기사라는 본분에 맞게 착실하게 일했다.
“이쯤 되면 눈치챌 때도 되지 않았나요? 제가 바라는 건 물건이 아니라 샤레니안, 당신이라는 것을요.”
문제는 황녀가 샤레니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샤레니안, 평생 내 곁에서 나만을 지키는 검이 되어주지 않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높은 신분을 가졌음에도 그에게 먼저 청혼했다.
“황녀님, 제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지만 저는 그 마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샤레니안은 황녀의 청혼을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째서 내 청혼을 받을 수 없다는 거죠?”
황녀에게 고백을 받는 순간, 샤레니안은 깨달았다.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
때때로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져버리는 데이스타의 미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