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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63)화 (163/190)

163화

결국 너였다

내가 신부였다고? 그것도 저승의 최고 권력자 염라의?

“에이, 농담이지?”

난 장난스럽게 웃으며 염라를 바라봤다.

그게 진짜라면 내가 저승에 갔을 때 저승의 관리들이 나를 매몰차게 몰아붙이며 죽이려들지 않았을 거다.

특히 흑두루미는 노골적으로 내게 적의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인연의 증표가 단검이잖아.’

부부 사이의 증표라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의외군. 그대라면 바로 믿을 줄 알았는데.”

내 물음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염라가 나를 향한 눈길을 거둬들였다.

나를 속이는 걸 실패해서인지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반신반의하긴 했다.

나를 바라보는 염라의 눈빛이 꼭 헤어진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너무 애틋하고 슬프게 느껴졌으니까.

‘하마터면 믿을 뻔했네. 표정 연기가 아주 수준급이야.’

“그런데 태초의 신이면 지금의 온천의 성좌들을 있게 한 분 아니야? 그분의 단검이 우리랑 무슨 관계가 있어?”

“태초의 신이 그대와 나 사이를 갈라놓았거든.”

태초의 신이 염라에게서 떼어놓을 정도였다면 난 대체 뭐였던 거야?

“혹시 내가 너한테 접근해서 암살하려고 했다던가? 그런 거야?”

“아니다, 오히려 죽길 바라는 건 나였고.”

‘염라가 스스로 죽길 바랐다고?’

뭔지 몰라도 본능적으로 더는 이 일에 관해 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게 됐다.

‘하긴 지금 안다고 해서 과거나 전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증표만 있어도 봉화의 불꽃은 피어나니까.’

괜히 염라의 불편한 부분을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내가 널 해치려던 존재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더는 묻지 않을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나는 염라가 준 단검을 주섬주섬 인벤토리창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우리한테는 지금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지?”

염라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웃었는데 그가 나를 외면하듯 명부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할 건 없잖아? 사람 민망하게.’

어쨌든 목표를 달성했으니 나도 아쉬울 건 없었다.

“그럼 단검은 봉화를 켠 뒤에 돌려줄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게 염라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대로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 인연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 그런가?”

수온이 나간 뒤, 염라는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애써 감추고 있던 슬픔이 미소와 함께 터져 나와 그를 심해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잊으려고 발버둥 쳤는데…….”

한때는 완전히 잊어버렸다고도 생각했다.

적어도 수온의 전생을 알기 전까지는.

‘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염라의 앞으로 미소 짓는 수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태초의 신, 그대에게서.’

염라의 붓이 춤을 추듯 누군가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초성.

태초의 신이자 염라의 첫 신부.

그리고 전생의 수온이 가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 * *

“염라대왕님, 큰일이 났습니다. 태초의 신께서 시스템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저승의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태초의 신이 패전했다고?”

염라는 지옥으로 가서 피투성이가 된 태초의 신, 초성을 자신의 손으로 구해낼 때까지 그녀가 누군가에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시스템이 스스로 인간들의 통제를 벗어나 시공간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지만…….’

아직 저승에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기에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초의 신은 신들의 신 같은 존재였다.

특히 염라에게는 그 의미가 더 특별했다.

“염라, 모두 저자가 벌인 소행입니다.”

“겉으로는 올곧은 척하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더러운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저승이 생기기 전, 선계의 신선이던 염라의 올곧음을 시기하고 아니꼽게 보던 자들이 그에게 누명을 씌웠다.

“염라, 대나무같이 뻣뻣하게 굴더니 결국에는 너도 별수 없이 꺾이고 마는구나?”

한때는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동료의 비아냥거림을 마지막으로 염라는 홀로 아무것도 없는 어둡고 차가운 땅에 떨어졌다.

‘진정 나의 올곧음이 나를 집어삼킨 거란 말인가?’

그가 억울함과 분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자책하기에 이르렀을 때.

“염라, 너의 올곧음은 틀리지 않았어.”

“당신은……?”

“나? 태초의 신이라고 해!”

따뜻하고 환한 빛을 내며 나타나 염라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준 것이 태초의 신, 초성이었다.

“태초의 신이라면…….”

이 모든 세상의 창시자이자 선계를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염라, 나는 너의 정의로움이 결코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보물이라고 생각해.”

초성은 검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염라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생머리에 마른 장미 같은 적안의 미인.

‘저건 본모습이 아니겠지.’

태초의 신은 자신을 수호하는 사자 앞에서가 아니면 절대 본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그래서 난 널 지킬 생각이야. 앞으로 너의 공명정대함으로 이곳에서 선계의 망자를 심판하고 이로운 자는 선계로, 그렇지 못한 자는 인간계로 보내 다스리도록 해라.”

초성이 자신의 손끝에 바람을 불어넣자 어디선가 보랏빛 나비가 나타나 염라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그녀처럼 염라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어지고 검은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었다.

“이건 저승의 눈이다. 앞으로 네가 저승을 다스릴 때, 네 기반이 되어줄 거야.”

염라는 초성이 주는 붉은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공간이 단숨에 채워지며 저승의 경관이 펼쳐졌다.

“네가 생활할 곳과 수하가 될 자들은 미리 보내두었으니 오늘은 푹 쉬어두도록 해. 앞으로는 바빠질 테니까.”

“어째서 제게 이런 힘을 주시는 겁니까? 저의 뭘 믿고…….”

“염라, 말했잖아. 나는 너의 꺾이지 않는 꼿꼿함을 사랑한다고.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소중히 여겨. 지금의 너를.”

초성의 대답은 염라를 괴롭히던 잡념과 혼란에서 건져내줬다.

동시에 확신을 얻었다.

결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이후로 염라는 저와 같이 선계에서 떨어지는 억울한 선인들을 구제해주고 죄를 지은 선인은 엄격하게 벌했다.

또한 단 한 번도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구원해준 태초의 신, 초성을.

“태초의 신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초성은 꼬박 삼 일을 앓아누워 있다가 정신이 차렸다.

초성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염라는 곧장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새하얀 옷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앉아 있는 초성은 염라가 들어오자마자 그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염라, 나를 지키던 사자는? 어떻게 되었어?”

아주 잠깐 자신을 눈물겨울 정도로 반긴다고 착각했던 염라의 마음이 일순간 차분히 가라앉았다.

“당신을 지키던 사자는 시스템에게 공격당하고 어디론가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안 되겠어. 내가 가야해. 내가 그를 찾으러 가겠다.”

자신을 지키던 수호 사자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초성이 단검을 쥐고 분연히 일어났다.

그 앞을 강림차사가 막아섰다.

“실례되는 행동인 줄 아오나, 태초의 신께서는 지금은 저승의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곳의 창시자가 나인데 내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니.”

“염라대왕님께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태초의 신님을 구해내셨습니다. 이곳의 창시자이시니 이곳의 규율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염라가 날 지옥에서 구해냈다고? 그 말은…….”

초성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바라봤다.

새끼손가락에 붉은 실이 묶여 있었고 그 실은 염라와 이어져 있었다.

강림차사는 초성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저승법 902조 염라는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에 있는 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규율을 어겼을 시 구해진 자는 염라의 신부가 되어 저승의 일을 도우며 공을 쌓아야 한다. 행여나 그게 남자나 신일지라도.”

“말도 안 돼…….”

충격에 빠진 초성이 손에 든 단검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전의 초성이었다면 저승을 모조리 박살 내버리고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과의 전쟁에서 큰 내상을 입은 탓인지 그녀의 힘이 약해져 있었다.

염라에게도 초성의 맥이 위태로운 것이 느껴질 만큼.

“그래, 염라. 너라면 붉은 실을 끊을 수 있잖아. 자, 어서.”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밝아진 초성이 염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붉은 실을 끊는 방법은 단 두 가지, 그중 하나는 염라가 직접 붉은 실을 끊어내는 것이었다.

염라는 낮에 흑두루미 판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스템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태초의 신의 숨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직도 찾아다니고 있다더군요. 이러다 저승도 함락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초성을 바라보고 있던 염라가 이내 냉철함을 되찾았다.

염라가 조용히 그녀와 눈을 맞췄다.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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