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이제 괜찮다
나는 평소처럼 염라를 반길 수 없었다.
‘이 시각에 염라가 왔다는 건…….’
지금의 나에게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애써 감춰두었던 불안함이 한 번 고개를 내밀더니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피어났다.
염라의 뒤를 강림차사가 따랐다.
“시간이 되었다.”
소리 없이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 염라의 입술이 열렸다.
“그럴 리가. 아직 하루가 되려면 멀지 않았어? 나 부모님이랑 저녁 먹고 온천탕에서 이야기한 게 전부란 말이야.”
내 말에 염라는 침묵을 지켰다.
부모님이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건 어느 정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헤어질 때가 되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대의 부모님은 내가 직접 데려가겠다.”
“염라…….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을까? 나 아직 부모님께 못 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헤어져 있는 시간이 같이 있던 시간보다 더 많아서……. 그래서…….”
진짜 부모님을 보내드릴 때가 오면 눈물을 보이기보다는 웃으면서 보내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야 부모님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실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참을 새도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혈관을 타고 독이 퍼지듯이 오랫동안 응어리진 슬픔이 순식간에 내 온몸을 지배했다. 나는 부모님의 두 손을 붙잡고 애원하듯 염라를 바라봤다.
날 보는 염라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지만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염라……! 너는 알잖아! 내가 얼마나 부모님을 찾고 싶어 했는지……. 난 네 각인도 있고 저승에 공을 세운 적도 있잖아! 그리고 넌 내 성좌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내 등 뒤에서 박시우와 지호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이 “약속한 시각이 되었으니 수거한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라”고 성좌 ‘저승의 염라’에게 경고합니다.]
“염라대왕님……. 이제 영혼을……!”
시스템의 경고에 강림차사가 재촉을 하고 나서자 염라가 팔을 뻗어 이를 제지했다.
그때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염라에게 예의를 갖춘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염라대왕님, 실례되는 건 알지만 아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보시다시피 제 딸이 강한 척해도 여린 아이라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엄마의 말에도 염라의 시선은 오열하고 있는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이건 처음의 약속과 다르다. 인간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다가는 끝도 없다”고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을 재촉합니다.]
“그렇게 해라.”
“염라대왕님!”
[‘시스템’이 “자꾸 요구를 들어주니까 내 말이 말 같지 않냐”며 흥분합니다.]
강림차사와 시스템이 동시에 그 결정에 반기를 들었지만 염라는 흔들림 없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단, 마지막 인사가 끝나면 바로 저승으로 인도하겠다.”
“감사합니다. 염라대왕님.”
염라는 잠시 뒤로 물러나 온천의 마룻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 저는 염라대왕님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겁니다.”
“그대가 또 죽을 일이 어디 있다고?”
강림차사가 툴툴거리며 염라의 곁에 다가가 섰다.
“예, 그러니까 이렇게 저승의 법도도 규율도 무시하시고 막사시는 거겠죠. 결국 사건 경위서와 시말서를 쓰는 건 저니까요.”
염라는 잔뜩 화가 난 듯한 강림차사를 향해 무심한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흘렸다.
“넌 어디 못 간다. 평생 내 옆에서 일해야지.”
“그렇게 웃으신다고 제 마음이 풀릴 거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강림차사는 이미 반쯤 마음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염라는 거기에다 보란 듯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야지, 명색이 내 보좌관인데.”
“정말……. 염라대왕님께서는……! 이번 사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이 건이 정리되면 업무나 제대로 보십시오!”
분하다는 듯 열을 올리던 강림차사도 결국에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시스템’이 “얼굴로 다 해 먹는 염라대왕이 어디 있냐”며 재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올라가는 입가를 감추지 못합니다.]
염라가 시스템과 강림차사의 주의를 끌어주는 동안, 우리 가족은 한결 편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먼저 우리 시우, 어린 나이에 동생들 키우느라 고생했다. 네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아빠는 잘 안다. 이제는 동생들도 다 컸으니까 너도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구나. 여동생 덕질은 적당히 하고.”
“아, 그건 박돈돈이 아니라 온천 사장님이라니까!”
아빠의 마지막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간 박시우가 언성을 높이며 내 정체를 강하게 부정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 시우는 어릴 때도 여동생이면 껌뻑 죽은 거 엄마, 아빠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뭐!”
엄마까지 보태고 나서니 박시우도 자포자기한 건지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우리 막내 지호, 어릴 때부터 우리 때문에 자연스럽게 헌터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아서 늘 마음에 걸렸단다. 하지만 다시 만나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정말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라고.”
“……그래도 돼?”
엄마의 말에 지호가 댐이 범람하듯 굵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우리 지호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빠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울던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 수온이.”
날 마주하자 엄마도 감정이 복받친 것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엄마, 아빠를 구해줘서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을 이렇게 다시 보지도 못하고 내내 영혼인 채로 떠돌았을 거야. 우리의 공백이 너에게 작지 않은 상처였을 텐데 씩씩하게 이겨내고 이렇게 멋지게 자라줘서 고마워.”
줄곧 눈물을 보이지 않던 엄마가 나를 감싸 안으며 우셨다.
너무 슬프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 당장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두 팔로 엄마를 부둥켜안을 뿐,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보니까 우리 딸이 엄청 유명 인사인 것 같던데 아빠는 저승에 가서도 내 딸이 온천 사장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거란다! 사랑스럽고 대견한 내 딸, 아들들아. 너희가 있어서 짧았던 우리의 삶이 비로소 행복하고 아름다워졌어. 고맙다.”
아빠는 넓은 품으로 우리 가족 모두를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영예야, 이제 가야지. 저승까지 갈 길이 멀 텐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떠나자는 아빠의 말에 엄마는 까먹은 게 있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엄마는 우리 저녁 식사를 해준 청량한 청년이 마음에 들더라. 돈가스 잘하는 남자가 네 이상형이잖니? 이름이 해령…… 이라고 했나?”
“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해령은 그냥 성좌야.”
“원래 다 그냥 그런 사이부터 시작하는 거야. 네 아빠랑 나도 처음에는 그냥 친구였으니까. 어쨌든 엄마 의견은 그렇다고!”
내 말을 한 귀로 흘린 건지 엄마는 마지막까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내가 못살아.’
“그래도 마지막은 우리 가족이 늘 하던 인사로 마무리하자.”
엄마의 말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 우주보다 더 많이.”
그 인사를 끝으로 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은 전보다 밝은 얼굴로 염라와 강림차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지금부터 망자를 인도하겠습니다.”
강림차사가 저승의 문을 열었다.
염라가 선두에 서서 저승의 어둠을 걷어내고 환한 불빛을 밝히며 나아갔다.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행복해야 해, 엄마. 아빠.”
내 마지막 염원과 함께 부모님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셨다.
* * *
“오늘은 온천에서 묵고 돌아가도록 해라. 영계가 각자 쉬고 갈 방을 안내해 줄 거다.”
“그럼 좀 부탁할게.”
부모님의 마지막 길을 마중하고 온천탕에서 나온 우리는 몸도 마음도 녹초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해령은 따로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박시우와 지호가 지낼 곳을 내어줬다.
“다들 피곤했을 텐데 일찍 쉬어.”
“누나가 제일 고생했지. 누나, 고마워.”
“박돈돈, 그래도 온천 사장님이랑 너는 별개다. 알겠냐?”
내 말에 박시우와 지호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나를 위로하며 순순히 영계를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각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
어쩌다 보니 2층 복도에는 해령과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해령이 잘 대접해줘서 우리 가족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
“해령, 오늘 여러모로 도와줘서 고ㅁ…….”
해령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는 그때였다.
“그런 말은 됐다.”
해령이 내게 팔을 둘러 자신의 커다란 품에 나를 가뒀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이제 괜찮다.”
머리 위로 나지막한 해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음 편히 울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