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보송한 귀와 꼬리만 있다면!
“하…….”
어두운 표정의 해령이 촉촉이 젖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그는 오랜만에 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이 풀릴까 해서 탕으로 들어온 건데 좀처럼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애초에 수온은 이 온천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쫓아내려고도 했었는데…….’
어디 그뿐인가?
수온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위험한 일에 휘말리거나 사고를 치기 일쑤였다.
쓰러지고 다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온천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나 똥손인지 평범한 쑥 라테를 한답시고 암살 쑥 라테에서 괴물까지 만들어냈으니까.
그래도 요즘은 온천 일을 곧잘 한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파업을 선언하고 뛰쳐나가 버렸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녀석에게 각인한 거지?’
해령은 아직도 수온에게 각인한 자신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입으로 숨을 전달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각인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수온에게 자신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일단 내가 각인을 새겼으니 각인이 나타난 걸 텐데…….’
끊기지 않고 떠오르는 의문 때문에 머리가 아파진 해령은 괴로운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쨌든 지금 해령을 답답하게 하는 건 수온이 온천을 비운 며칠간 씁쓸하고 가슴 한편이 텅 빈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령님, 목이 마르실 것 같아서 마실 것을 내어왔습니다.”
그때 영계가 탕으로 음료가 든 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바로 자리를 떴을 영계가 머뭇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구……. 궁금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물어도 좋다.”
슬쩍 눈치를 살피던 영계가 해령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약자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질문을 들은 해령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계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뭐, 없다고 허전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온천이 평소보다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봤습니다.”
‘……허전해?’
아니라고 말해도 영계에게는 수온의 빈자리가 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시끄럽게 굴던 다른 성좌들도 잠잠해졌군.’
수온이 있을 때는 온천 입구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성좌들이 통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이게 평소 온천의 모습이었다.
수온이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든 소리 없이 찾아와서 그저 온천욕을 하며 휴식을 즐기고 조용히 떠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성좌들과 함께 모여서 돈가스를 먹거나 웃고 떠들거나 온천이 쉴 틈 없이 시끌벅적해진 건 전부 수온이 온천 사장이 되면서 가져온 변화였다.
“너도 봤을 텐데, 박수온이 무기한 영업을 쉰다는 문구를 남기고 떠난 것을.”
“……저도 봤지요. 그렇군요. 계약자는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거군요.”
털이 찐 영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럼 마탑의 꼬맹이도 오지 않는 것입니까?”
“마탑의 꼬맹이…….”
잊고 있었는데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고양이로 변해서 박수온의 집까지 찾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당연히 쫓겨날 줄 알았는데 슬쩍 들여다보니 베카는 새끼 고양이 모습으로 수온의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으니 속에서 용암이 들끓는 기분이 들어서 그만뒀지.’
다시 그 광경을 떠올리니 자신이 불타오르는 장작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해령이 시원한 음료가 든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만 나가야겠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라.”
온천을 하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져버린 해령이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아,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오라를 뿜어내는 해령의 기세에 주춤한 영계가 나갈 준비를 돕기 위해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라…….”
혼잣말을 읊조리던 해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이 가시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속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영계가 챙겨준 옷을 걸쳐 입은 해령은 젖은 머리카락을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터덜터덜 탕을 빠져나왔다.
‘됐다, 온천으로 돌아오기 싫다는데 억지로 잡아둘 필요는 없지. 처음으로 돌아가면 된다. 박수온이 없었던 때로.’
다짐하고 나오기가 무섭게 처음 수온이 온천수에 휩쓸렸던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놀라서 급하게 방으로 옮겨 눕혔지. 그런데 깨어나서는 돈가스를 얼마나 복스럽게 먹던지…… 가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해령이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돌아갈 수 있다. 박수온이 없었던 때로.’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곳에는 온천 데스크가 있었다.
수온이 사우나 통을 되찾기 위해 탑으로 가던 중에 발을 찧은 곳이기도 했다.
그때를 떠올린 해령이 무심결에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다.
‘돌아가야 한다. 박수온이 없었던 때로. 그래야 하는데…….’
1층의 중앙으로 나오자 곳곳에서 수온과 함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온은 해령에게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물음에 대한 답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음을 느낀 해령이 혼란스러워 고개를 숙이는 그때였다.
“너희들은 왜 여기에…….”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자 해령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1층으로 모여든 세 명의 온천 성좌들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그대는 왜……?”
“나는 혹시나 수온이 돌아왔나 해서…….”
염라의 되묻는 말에 운수가 비어 있는 온천 데스크를 보며 힘 빠진 얼굴로 답했다.
“……설마 너희들도?”
샤레니안의 물음에 성좌들은 헛기침하거나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건 그들이 해령처럼 수온의 빈자리를 쫓아 이곳에 도달하게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별일이군. 우리의 뜻이 하나로 모이다니.”
염라가 수온이 파업을 선언한 그날처럼 한곳에 둥그렇게 모인 성좌들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그런 의미에서 작전을 세워볼까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샤레니안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웬 작전이야?”
“일명 박수온 파업 철회시키기 작전! 다들 어때?”
하얀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보이는 운수에게 샤레니안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때 잠자코 있던 해령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샤레니안을 바라봤다.
“큼……. 뭔가 좋은 수가 있나?”
보기 힘든 적극적인 해령의 모습에 샤레니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일단 첫 번째 방법, 주인이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서 온천으로 유인하는 거다.”
“박수온이 좋아하는 게 뭔데?”
샤레니안의 눈길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묻는 운수의 귀와 꼬리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온천 성좌들의 시선 또한 운수에게로 향했다.
“나???”
놀란 운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경악했다.
“정확히는 귀여운 거. 지금만 해도 마탑의 꼬맹이가 새끼 고양이로 둔갑해서 찾아가니까 쫓아내지도 못하고 같이 살고 있잖아. 운수, 네가 귀여움으로 마탑 꼬맹이를 이기면 돼.”
샤레니안이 운수의 어깨에 손을 얹자 당혹스러워하던 그가 자신의 귀를 만지면서 즐거워하던 수온을 떠올리며 다짐하듯 주먹을 쥐었다.
“이 보송한 여우 귀랑 꼬리만 있다면 어디서든 박수온을 데려올 수 있어!”
“좋은 자세다, 제군! 지금의 그 기세, 그대로 출동하도록!”
보석 같은 오드아이를 빛내는 운수에게 샤레니안이 자신감을 실어줬다.
“좋다! 기다려라! 마탑의 꼬맹이! 내 귀여움으로 짓눌러주겠다!”
안 그래도 베카에게 쌓인 게 있던 운수는 전장에 출전하는 장수처럼 당찬 기세로 온천의 문 너머로 뛰어들었다.
* * *
“야, 아무리 그래도 길바닥에서 잠들면 좀 깨워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얼음 속성이라 그런지 따뜻한 정이 없네.”
시우는 오피스텔 입구에서 잠든 탓에 하마터면 입이 돌아갈 뻔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성좌 ‘겨울의 왕’이 “어차피 얼음 속성이라서 춥지도 않지 않냐”며 엄살 피우지 말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런데 나 어쩌다가 잠들었냐? 술을 너무 마셨더니 필름이 끊겼는지 기억이 안 나네. 아직도 알딸딸해.”
[성좌 ‘겨울의 왕’이 “술도 안 마시는 놈이 혼자서 소주 네 병을 깠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자 시우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자신이 사는 층으로 올라온 시우의 눈에 오피스텔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새하얗고 보송한 털 뭉치가 들어왔다.
‘이 중에 어느 곳이 박수온이 사는 곳이지?’
운수는 새끼 여우로 둔갑한 채로 자신의 앞에 놓인 두 개의 문을 바라보며 고심에 빠져 있었다.
난처해하는 운수의 앞으로 시우가 성큼 다가섰다.
“뭐지?”
박시우, 박수온, 박지호.
이 남매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귀여운 것에 환장한다는 것.
시우의 커다란 그림자가 운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