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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39)화 (139/190)
  • 139화

    떨어져라

    “어우, 술 냄새! 박시우, 갑자기 웬 술이야?”

    바닥에 뒹구는 술병은 언뜻 봐도 서너 개는 되어 보였다.

    ‘술도 싫어하면서 혼자 저걸 다 마셨다고?’

    내가 잠들기 전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잠깐 사이에 박시우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박시우, 야! 일어나서 저녁 먹어.”

    “으어어…….”

    침대에 누워 있는 박시우를 흔들어 깨우자 그가 좀비 같은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하지만 좀처럼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게 갑자기 과하게 음주를 하니까 그렇지.

    심지어 소주를 병째로 마신 건지 근처에 술잔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실연이라도 당했나?’

    문득 익명 헌터 게시판에서 박시우가 종일 이별 노래만 들었다는 글이 떠올랐다.

    ‘누군지 몰라도 박시우가 많이 좋아하긴 했나 보네.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술인데 병나발을 불 정도면.’

    하지만 내 호적 메이트의 연애사에 대한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저녁은 나중에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하지, 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박시우를 두고 다시 방을 나서려는데 벽 한편을 장식한 온천 사장 브로마이드와 온천 가운 같은 굿즈들이 보였다.

    심지어 매일 청소한 건지 굿즈 주변만큼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지독한 놈.’

    박시우의 첫 덕질 상대가 나라는 것을 재차 실감하게 되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여기는 정신 건강에 안 좋아. 나가서 밥이나 먹자.’

    지호가 있는 부엌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때 바닥으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푸른색에 반짝이는 은색 장식이 된 편지지였다.

    아마도 박시우가 손에 쥐고 자다가 떨어뜨린 것 같았다.

    ‘저 편지, 박시우 취향 같지 않게 지나치게 하늘하늘한데?’

    혹시 실연당한 여자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시우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죽인 채 종이를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온천 사장님, 온천 회원장입니다. 이번 47층에서 석쌍을 상대하시는 온천 사장님의 모습 감명 깊게 지켜봤습니다. 특히 석쌍의 주먹에 맞고 쓰러지셨을 때는 저도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달려갈 수 있다면 회복 물약을 잔뜩 사 들고 갔을 겁니다. 온천 사장님이 끝내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일어나셨을 때 저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몇 번 레이드에 실패하더라도 온천 사장님처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서 마탑 꼭대기까지 오르겠다고요. 지금의 저는 한없이 부족해도 다시 만났을 때는 진심으로 제 동료가 되고 싶다 느끼실 정도로 강해져 있겠습니다. 제게 희망과 꿈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온천 회원장—

    연애편지가 아니라 팬레터였어?

    심지어 박시우가 온천 회원장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투다 싶었지.

    하여튼 박시우, 한 번 꽂히면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니까?

    이제는 하다 하다 팬클럽 회장까지 하냐?

    그렇다면 베카한테 온천 가운이랑 현수막을 보낸 것도 박시우였다는 건가?

    원래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호적 메이트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창피하게 느껴졌다.

    일기나 독후감도 이렇게 길게 쓰는 걸 못 봤는데 아주 정성을 쏟아부었네.

    그런데 편지의 내용 중간중간이 물에 젖은 것처럼 번져 있었다.

    술 먹으면서 썼나?

    누가 보면 운 줄 알겠어, 아주.

    “야……. 너 지금 뭐 하냐?”

    어째 갑자기 술 냄새가 짙어지는 것 같더니 바로 뒤에서 박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본…….”

    “……당장 나가.”

    일기를 훔쳐 보다 걸린 것 같은 꼴이 된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박시우가 내 손에서 거칠게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거참, 닳는 것도 아닌데. 좀 보면 어때?”

    “잔말 말고 나가! 이 성스러운 온천 사장님의 굿즈들이 있는 곳에 발도 들이지 말라고!”

    “아, 나가면 되잖아! 더러워서 나간다! 기껏 같이 저녁 먹으려고 깨우러 왔더니…….”

    이제껏 내가 박시우를 쫓아내는 쪽이었는데 오늘은 쫓겨나는 쪽이 되어서 떠밀리듯 거실로 나왔다.

    “박돈돈, 잘 들어. 우리 온천 사장님은 영원히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로 세상에 남을 거야! 아무도 온천 사장님을 망가뜨릴 수 없어!”

    내게 선전포고를 하듯 소리친 박시우가 쾅 소리 나게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는 굳게 닫힌 그의 방문을 황당하게 바라봤다.

    “……진짜 또라이인가?”

    * * *

    현정우의 오피스텔.

    그는 컴퓨터 모니터로 기사 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왔네?”

    추억의 영웅 S급 헌터, 김패금 15년 만에 한국으로 귀환!

    * * *

    한국에서 활발한 기부 행진과 헌터 활동을 이어가던 추억의 영웅 김패금이 15년 만에 한국으로 귀환한다고 헌터 협회가 전해왔다. 그는 짧은 인터뷰에서 “한국에 들어온 김에 온천 사장님이 만드신 온천표 돈가스가 먹어보고 싶다”며 지금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온천 사장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유년 시절, 그의 기부금으로 도움을 받은 팬들의 미담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패금은 일주일 뒤인 ㅇㅇ일에 ㅇㅇ동 ㅇㅇ백화점 1층 홀에서 팬 사인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해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기사에 뜬 이름을 본 정우가 손톱이 살을 파고들 듯이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의 온몸이 짙은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본 그날부터 단 한 번도 당신의 얼굴을 잊어본 적이 없어.’

    “D급 짜리 헌터는 던전에서 미끼로 쓰이는 게 사회에 공헌하는 거지. 빌빌대는 식충이로 사는 것보다 낫잖아?”

    그 말을 하면서 웃는 김패급을 회상하던 정우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의 눈빛에 전에 없던 살기가 어렸다.

    “살인자 XX.”

    ‘내 아버지를 죽인.’

    “일주일 뒤, ㅇㅇ백화점이다.”

    정우의 말에 그의 뒤로 모자이크 같은 형체가 나타났다.

    “죽일 건가?”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현정우의 성좌 ‘버그010023!@#$’가 되물었다.

    “그래, 죽일 거야.”

    정우는 줄곧 기다려왔다.

    김패금이 정체불명의 이유로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실종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홀로 미국으로 튀어버린 그때부터. 계속.

    그가 한국으로 귀환하기를.

    “좋다. 오랜만에 재미있겠군.”

    정우의 성좌가 킬킬거리며 웃는 그때, 진동이 울렸다.

    정우의 휴대폰 화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시우 형

    한숨과 함께 화를 억누른 정우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정우야, 저녁은 먹고 다니냐?

    “아직요.”

    —그러니까 목소리에 기운이 없지.

    “형은 당장 죽을 것 같은 목소리인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별일 없어, 아직 저녁 전이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이나 한잔할까?

    시우의 제안에 정우는 온기 하나 없는 식탁을 바라봤다.

    “그럴까요?”

    —형이 데리러 갈게. 오피스텔 앞에 나와 있어.

    “네, 도착하면 전화 주세요.”

    —오케이.

    통화를 끊은 정우의 뒤로 성좌가 다가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불만스러운 이모티콘을 만들어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박시우를 살려두는 이유가 뭐지? 매번 기억을 지우는 것도 번거롭지 않나? 그냥 죽여버리면 좋을 텐데. 그 참에 아예 집필을 먹어버리면 더 좋고.”

    그것이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성좌에게 정우의 싸늘한 시선이 꽂혔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다음 목표는 김패금이라고.”

    매서운 정우의 눈초리에 성좌가 이를 갈다가 말고 꼬리를 내렸다.

    ‘몸만 묶여 있지 않으면 당장에 죽여버리고 새로운 계약자로 갈아타는 건데, 쯧.’

    버그로 생긴 성좌이긴 해도 일단은 성좌이기에 계약자가 없이는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계약자가 죽기 전까지 계약을 파기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정우와의 계약은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이라 그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으면 페널티로 버그 성좌도 같이 소멸하게 되어 있었다.

    성좌의 목줄이 정우에게 잡혀 있는 셈이었다.

    ‘뭐, 이 녀석만큼 악과 분노로 들어찬 그릇을 본 적이 없으니까. 답답하게 굴어도 참는 수밖에.’

    마음만 먹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단독 행동 벌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내 허락 없이 박시우한테 손대면 너 죽고 나 죽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싱겁긴.”

    정우의 경고에 그의 성좌가 불만을 토로할 뿐 별다른 조치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냥 포털을 열고 오라고 하면 될걸. 굳이 태우러 온다니.’

    정우의 직업은 ‘카드술사(S)’, 직업 특성상 카드 마술을 하면 많은 양의 마나를 한꺼번에 소모하게 됐다.

    언젠가 시우의 요구로 포털을 열었을 때, 마나가 한계에 도달해서 코피가 난 적이 있었다.

    그걸 본 이후로 시우는 레이드나 던전처럼 공식적인 길드 활동이 아니면 포털을 열어달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

    사적인 약속이 생길 때면 길드원들을 직접 태우러 오고 대리나 택시를 불러서라도 책임지고 집까지 귀가시켜줬다.

    ‘랭커들은 다 헌터를 도구 취급하는 거 아니었나?’

    시우를 만나고 난 뒤로 정우의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하여간 박시우, 이상한 놈.’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겉옷을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서는 정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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