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오늘 헤어졌어요
“설마 진짜……. 네가 온천 사장이냐?”
올 것이 왔구나.
박시우에게 질문을 받는 순간 몽롱하던 정신이 맑아지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말자. 박시우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잖아?’
“박시우, 지금 나한테 온천 사장이냐고 묻고 있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는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리며 헐렁한 후드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을 보라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 입으로 말해놓고 박시우도 이건 아니다 싶은 표정이었다.
“온천 사장 덕질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 말도 안 되는 망상하지 말고.”
“나도 괴로워! 이런 끔찍한 생각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왜 하필 네가 온천 사장님이랑 똑같은 체형을 가지고 있고 버릇까지 똑같은 거냐고?”
“어, 어떤 걸 말하는 건데?”
동일인이니 같은 체형을 가진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나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이 하나뿐일 리 없으니 내가 온천 사장이라는 걸 밝힐 증거는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버릇이 있다는 건 몰랐는데?
박시우가 그런 부분까지 알아차릴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걸 안 것도 처음이었다.
“곤란한 상황일 때 오른손으로 오른쪽 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귀 뒤로 넘기는 거. 어릴 때부터 네 버릇인데 온천 사장님도 난처할 때 같은 행동을 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봤으니까 알지. 자, 봐! 이 움짤.”
박시우가 보여준 움짤은 내가 덕택이에 탄 베카를 구해냈을 때 찍힌 것 같았다.
‘나한테 진짜 이런 버릇이 있었네?’
“에이, 고작 한 번 찍힌 것으로 무슨 버릇까지. 이건 나나 온천 사장이 아니라도 머리가 길면 누구나 하는 거지.”
“그래도 우연이라기에는 싱크로율이…….”
나는 박시우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틈타 내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기억을 떠올렸다.
“왜, 박시우. 너도 해봤잖아. 지난번에 병원에서 긴 머리 가발 썼을 때 머리카락 귀 뒤로 한 번도 안 넘겼어?”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그러긴 했네……!”
다행히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건지 박시우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독백했다.
“거봐,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죄 없는 사람 그만 괴롭히고 나가.”
박시우를 향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거실로 나가라는 신호를 하자 그가 밖으로 나가려는 듯 돌아섰다.
‘이렇게 순순히 나간다고?’
의외라는 듯 박시우의 널찍한 등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돌연 나를 돌아봤다.
“그럼 덕택이는 뭔데?”
그럼 그렇지.
그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덕택이면 온천 사장님네 귀여운 오리 배달부들을 말하는 거야?”
“그래, 맞아. 네가 그걸 알고 있는 것도 수상해! 원래 넷X릭스랑 돈가스 맛집 아니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이 없었잖아.”
박시우는 나에 대해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말할 때가 된 건가?’
언젠가 박시우와 이런 식으로 부딪칠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좋아, 어쩔 수 없지. 계속 실랑이 벌이는 것도 피곤하고…….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왜 덕택이를 알고 있는 건지.”
나는 후드티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 박시우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보면 알아.”
박시우가 내가 건넨 종이를 들고 펼쳤다.
“이건……!”
종이를 들여다본 박시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덕택이 7번의 발도장이 찍힌 종이를 넣어놓은 액자를 가져와 내가 준 종이와 대조해봤다.
“진짜잖아…….”
박시우는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동시에 크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선글라스 쓴 덕택이한테 받은 사인. 7번 덕택이었던가? 해순이랑 밖에 놀러 갔다가 줄이 늘어져 있길래 보니까 웬 오리 인형이 발도장을 찍어주고 있더라고. 귀여워서 가까이에서 보는 김에 하나 받았지.”
내가 박시우에게 준 종이에는 덕택이 7번의 발도장과 부리로 휘갈겨 쓴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진짜랑 대조해볼 줄은 몰랐는데, 박시우. 철저한 놈.’
다른 오리 인형의 발 도장을 받았더라면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을 뻔했다.
길에서 팬 사인회를 연 건 덕택이 7번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덕택이가 박돈돈을 알고 있었던 거였나?”
덕택이가 나를 알고 있다고 말했던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박시우는 급기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박돈돈, 고맙다! 정말 고맙다!”
월드컵 시즌에 대한민국 선수들이 골을 넣는 걸 보았을 때처럼 한껏 격양된 박시우가 내 손을 붙들었다.
“그래,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생각이긴 했어. 어떻게 씻지도 않고 이불이랑 한 몸이 되어서는 넷X릭스나 보면서 배나 벅벅 긁는 박돈돈이 아침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청순함과 악명 높은 마탑의 보스를 혼자 클리어할 정도의 강력함을 가지신 우리 위대한 온천 사장님과 동일인일 수가 있겠어? 세상이 멸망할 일이지.”
‘이런, 곧 세상이 멸망하겠네.’
“혼자 삽질하는 거 끝났으면 이만 나가줄래? 오늘 너한테 쓸 평생 치 너그러움을 다 쓴 것 같거든.”
“아, 그럼요. 제가 말도 안 되는 일로 시간을 많이 뺏었습니다. 이제 나가드리죠. 박돈돈님, 평안한 잠자리 되십시오.”
한껏 홀가분해진 박시우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이 기분 좋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방을 빠져나간 뒤 곧바로 문을 걸어 잠갔다.
‘진작에 잠그고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래도 걱정거리가 해결되어서인지 몸도 마음도 한결 편했다.
‘이제 걱정 없이 잘 수 있겠다.’
안 그래도 저질 체력인데 모든 힘을 소진해버린 몸은 침대에 눕자마자 나른해졌다.
‘웬일로 온천 식구들이 조용하네.’
파업을 선언하고 뛰쳐나오면 온천을 이용할 수 없다고 온갖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조금은 붙잡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서운하네.’
잠드는 순간까지도 난 알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어버려서 그 뒤에 뜬 창들을 보지 못했으니까.
[‘탑의 주인’이 “혼자 자기 무섭지 않냐”며 베개를 안고 돌아다닙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명부를 줄 테니 괴롭힌 놈 이름을 적으라”고 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상처에 약을 발라줄 사람이 없다”며 아련한 눈빛을 보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오늘 온천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불운해질 거”라고 예언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온천수를 깡그리 말려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 * *
“그럼 그렇지! 박돈돈이 온천 사장님일 리가! 온천 사장님, 잠시라도 사람의 가죽만 겨우 뒤집어쓰고 있는 박돈돈과 착각해서 죄송합니다.”
시우가 자신이 수집한 온천 사장의 굿즈들을 향해 정성을 다해 사죄했다.
“그나저나 세상 좁네. 내가 만난 덕택이를 돈돈이도 만나다니…….”
혼잣말처럼 속삭이던 시우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그런데 박수온, 선글라스를 쓴 덕택이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덕택이 7번에게 선글라스를 선물한 건 박시우, 자신이었다.
즉, 수온의 말대로라면 시우가 덕택이를 만나 그녀를 알고 있냐고 물었던 게 더 이전 일이라는 뜻이 된다.
‘박수온이 덕택이를 만난 건 선글라스를 받은 후였는데, 날 만났을 때 덕택이가 어떻게 박수온을 알고 있었던 거지?’
“잠깐만, 정신 차려. 박시우.”
어떻게 되었든 확실한 건 수온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였다.
“어째서…….”
방금만 해도 행복이 극에 달해 있던 시우의 멘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런 일이.”
의심이 확신을 넘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시 눈을 뜨니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정신없이 자버렸어.’
이게 얼마만의 제대로 된 휴식이야?
온천 사장이 된 이후로는 마음 놓고 쉬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휴식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정신이 맑아지자 이번에는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김치찌개다!’
한국인의 집밥에는 빠질 수 없는 요리 중의 하나였다.
나는 군침이 도는 걸 느끼며 홀린 듯이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으로 가자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는 지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김치찌개 하는 거야?”
“어, 누나! 일어났구나? 안 그래도 저녁 준비 다 되어서 깨우러 가려고 했거든. 간 볼래?”
고개를 끄덕이자 지호가 숟가락에 찌개를 떠서 입김을 불어 식혀서 내게 가져왔다.
“음! 맛있어! 우리 지호는 어쩌면 요리도 이렇게 잘할까?”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내 칭찬이 쑥스러웠는지 지호가 순한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그런데 박시우는?”
웬일인지 먹을 때만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는 박시우가 보이지 않았다.
“방에서 자고 있나 본데? 누나가 좀 깨워줄래?”
“알겠어.”
박시우는 일어나면 따로 챙겨 먹게 두자고 할까 고민하다 깨우기로 했다.
‘모처럼 오랜만에 다 같이 집에 모여서 저녁을 먹는 거니까.’
“박시우, 나 들어간다.”
노크 없이 박시우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눈살을 찌푸릴 만큼 진한 알코올 냄새가 확 풍겼다. 수온의 눈에 바닥을 뒹구는 초록색 병들이 들어왔다.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박시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