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파업을 선언합니다!
어제 낮부터인가 온천이 미친 듯이 바빠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온천의 성좌들이 들이닥쳐서 마구 오더를 넣기 시작한 것이다.
[99번 오더를 성공적으로 완료합니다.]
얼마나 쉬지 않고 오더를 넣었으면 어제 한 자릿수였던 오더 번호가 하루 사이에 두 자리 숫자의 마지막까지 와 있는 거냐고…….
간밤에는 오더를 수행하고 급하게 수건을 개느라 쪽잠을 잔 것이 전부였다.
쓰러지듯 온천의 마룻바닥에 널브러지는 그때였다.
“자, 여기 수건 배달 왔다.”
영계가 짤막한 등에 짊어지고 온 수건을 바닥에 쏟아냈다.
내 앞으로 볕에 바싹 마른 수건이 우수수 떨어져 산을 이뤘다.
‘내가 왜 여기서 수건이나 개고 있는 거지?’
원래 편하게 살기 위해 온천 사장이 되려던 거 아니었나?
문득 현타가 왔지만, 이를 악물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수건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처음 온천의 주인으로 각성했을 때는 내게도 드디어 꽃길이 열리는구나 싶었는데 말이야…….
어디서 잘못된 걸까?
나는 찬찬히 내가 밤잠을 설치며 일하고 있는 이유를 되짚어 보았다.
문제는…….
‘그 넷이 보통 손님이 아니니까 그렇겠지!’
꼬박 하루하고도 절반을 지독하게 시달린 탓인지 그들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넷은 미친X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루에 오더를 20번도 더 넣냐고.
“주인, 내가 등을 조금 다쳐서 그대가 약을 좀 발라줬으면 하는데…….”
샤레니안은 피범벅이 된 옷을 팔에 걸친 채 자신의 탄탄한 등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내가 의사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다쳤으면 병원을 찾아가.”
“아, 피를 많이 흘렸더니 현기증이…….”
샤레니안은 할 말이 없어질 때면 현기증이 온다며 휘청이다 쓰러졌다.
게다가 쓰러질 때는 꼭 내게 기댔다.
“수온, 오늘의 운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운수가 이제 막 목욕을 끝낸 건지 촉촉이 젖은 황금색 머리카락에 이슬이 맺힌 채로 대충 가운을 걸치고 내게로 다가와 앉았다.
바로 전날만 해도 순진무구한 여우,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밤에 깨달았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서 틈을 보이면.
“예를 들어 연애운이라든가…….”
어느새 내게 귓속말을 하며 성큼 가까워져 있다.
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내 운수를 봐주겠다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물론 복슬복슬한 꼬리는 여전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지만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나는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응? 이 흉물스러운 시체는 갖다 버리고 나와 운을 보자니까.”
운수가 내 반대쪽 팔에 붙어서 나를 조르기 시작했다.
‘그냥 다 때려치울까?’
이를 바드득 갈며 수건을 들어 올리던 나는 눈앞에 떠오른 창에 굳은 듯이 멈췄다.
[온천 수건의 자존심은 살아 있는 각!]
[각 맞춰서 수건 개기 (50/100)]
[완료 보상 : 200만 골드]
수건 백 개를 개서 한 달 월급을 번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입맛을 다실 정도로 달콤한 조건이었다.
‘이제는 온천표 돈가스 두 개만 팔아도 그 정도 벌긴 하지만…….’
큰돈을 만지다 보니 간이 커지긴 했나 보다.
‘아니야, 티끌 모아 티끌……. 아니, 태산이라고 했어. 초심을 잃지 말자.’
어차피 온천 사업을 확장하려면 깨야 하는 필수 퀘스트이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냥 즐거운 것만 생각하자.
그래, 이제 반만 더 개면 200만 골드다.
때려치우더라도 이것까지는 마무리하는 거야.
난 즐겁다. 난 즐거워.
“수온,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응?”
51번째 수건을 개고 있는데 운수가 나의 팔을 잡고 흔드는 바람에 애써 공들여 잡아놓은 모양이 흐트러져버렸다.
[현재 수건의 각(45도)이 이탈하였기 때문에 카운팅 되지 않습니다.]
하루하고 반나절째 휴식도 없이 온천 일만 한 나는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아, 진짜 못해먹겠네!”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한 나는 수건을 바닥에 팽개쳤다.
내 포효를 들은 건지 저승탕의 문이 열리고 염라가 나타났다.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있던 그가 안개처럼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불그스름한 입술을 열었다.
“여기에 써라.”
그는 내게 기다란 두루마리 일부를 내보이며 붓을 건네줬다.
“뭘 쓰라는 건데?”
“널 화나게 한 놈의 이름.”
“이 두루마리가 뭔데 이름을 쓰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는 내게 염라는 담배 연기처럼 가볍게 말을 뱉어냈다.
“저승 명부.”
‘두루마리형 명부도 있었어?’
무엇보다 거기에 이름 쓰면 죽는 거 아니야?
“생년월일까지 쓰면 더 정확하게 죽일 수 있고.”
아니, 무슨 한국판 데스노트냐고!
“모른다면 내가 대신 알아봐줄 수도 있다.”
“됐어. 나 화 안 났으니까 그건 넣어둬.”
난 출생 기록지까지 꺼내드는 염라의 팔을 붙들어 말렸다.
아쉽다는 듯 염라는 펼쳐진 두루마리를 되감았다.
자, 침착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나는 새 마음, 새 뜻으로 뭉개진 수건을 펼쳐 다시 개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손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수건을 앗아갔다.
“그러게 애초에 이곳은 너처럼 작고 엉성한 데다가 속물 덩어리이기까지 한 꼬맹이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건 해령이었다.
온천 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온천을 한 번 뛰쳐나가고 돌아온 뒤로 처음 만났던 때처럼 까칠한 사포로 돌아가버렸다.
그때, 나보다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수건을 갠 그가 내 품에 완성품을 안겨줬다.
[타인의 손을 빌려 완성된 칼각(90도) 수건은 카운팅에서 제외됩니다.]
[타인의 손을 빌리려다 발각되었기 때문에 페널티로 쿨타임이 적용됩니다.]
[페널티 쿨타임 : 12시간 00분 00초]
아…….
매정하게 굴 거면 아예 돕지를 말든가!
페널티 쿨타임은 무려 반나절.
하루에 나오는 수건은 정확히 50장이었다.
수건 한 장이 부족해서 이틀이면 끝날 걸, 하루 더 끌게 되었다.
무엇이든 빠른, 빠름의 민족 피를 이어받은 난 분노와 광기에 불타올랐다.
이번만큼은 나도 못 참아!
약삭빠른 머리가 회전하는 지구본처럼 재빠르게 돌아갔다.
“염라, 이 두루마리랑 붓 좀 빌려도 될까?”
염라는 흔쾌히 내게 두루마리와 붓을 넘겨줬다.
그것들을 건네받아 두루마리를 펼치고 앉은 나는 어느 때보다 열중해서 힘차게 붓을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온천으로 들어오는 나무 문에 두루마리를 펼쳐 걸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난 어느 때보다 환하고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손 인사를 건넨 나는 온천의 출구를 열고 사라졌다.
“이게 뭐지?”
족자를 들여다본 염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를 선두로 네 명의 성좌들이 모두 두루마리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늘부터 무기한 영업을 쉽니다. ―온천 사장 박수온 백’
그날, 내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그 미친 성좌X들이 광적으로 내게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 * *
온천 일을 내던지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파업 후 내 첫 계획은 확실했다.
‘집에 들어가면 침대로 직행이다.’
곧장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온천에서 입고 있던 옷을 걸친 내 모습이 눈에 걸렸다.
‘이 차림……. 박시우가 분명 의심할 텐데…….’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안 그래도 나를 주시하고 있을 박시우에게 싱싱한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인간에게 트집을 잡히기 시작하면 꿈나라로 가는 골든 타임을 놓칠 수도 있었다.
‘난 지금 잠이 필요하다. 잠들지 않으면 과로사할 것 같단 말이다.’
나는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집 근처 옷 가게에서 대충 후드티와 헐렁한 바지를 사 입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 현관의 도어락을 눌렀다.
그런데 어째 경고음만 나올 뿐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 수리 이후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 같았다.
‘비밀번호를 바꿨으면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드는 그때 인터폰에서 박시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냐?
더 빨리 잘 수 있게 됐다.
모처럼 박시우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난데.”
내 목소리에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박시우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서둘러 나온 건지 박시우는 맨발이었다.
‘내가 부른다고 이렇게 맨발로 달려나와서 반길 놈이 아닌데…….’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그때, 얼떨결에 박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왔ㄴ……셨습니까?”
“뭐야? 그 고장 난 로봇 같은 말투는?”
박시우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보자 그는 새삼 현타가 온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 없으면 비켜.”
나는 현관을 막고 선 박시우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그래세요? 아, 여기 신발.”
알 수 없는 외계어를 구사하던 박시우가 고개를 숙여 내 발 앞으로 손수 실내화를 내어주었다.
이 오피스텔에 처음 들어올 때 귀한 손님이 올 때 대접하자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실내화였다.
‘난 밤을 새워서 제정신이 아니라 치자. 박시우는 오늘 왜 이러지?’
어릴 때는 박시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마다 어린 마음에 진심으로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땐 어릴 때고…….
“이건 웰컴 드링크.”
냉장고에서 급하게 자신의 최애 음료 콜라를 꺼내서 와인 잔에 담아 웰컴 드링크랍시고 내오는 박시우를 난 의아하게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너 오늘 탑에 보스 레이드 다녀왔지?”
“아니. 오늘 쉬는 날이라 집에만 있었는데?”
“아닌데. 지금 너 보스한테 머리 세게 한 대 맞고 다친 것 같아. 아니면 상태이상이라도 걸린 거 아냐? 지호한테 전화해서 힐러라도 부르자.”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지호의 연락처를 누르려는데 박시우가 그런 나를 저지했다.
“나 멀쩡하다니까? 아, 나도 몰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박시우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거실의 소파에 몸을 내던져 얼굴을 묻었다.
“와, 못 본 사이에 증세가 더 심해졌네.”
상태이상에 걸렸으면 약이라도 있지.
저건 약도 없었다.
하지만 박시우에게 줄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너무 피곤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다.
그때 거실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박시우가 불쑥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박돈돈, 잠깐만 일어나봐.”
박시우가 이불 속에 파묻힌 나를 잡고 흔들었다.
“나 잘 거니까 좋은 말할 때 건드리지 마라. 어제 밤새워서 곧 과로사로 죽을 것 같으니까.”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박시우를 향해 경고했다.
“밤은 왜 샌 건데?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냐?”
평소에는 내가 이틀 밤을 새워도 관심이 없던 작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질문이 많았다.
한껏 예민해져 있는 내게는 박시우의 목소리가 꼭 공사장의 소음처럼 들려서 잠들 수가 없었다.
“아, 밤새워서 넷X릭스 봤다! 왜? 시끄러우니까 당장 나가!”
결국 박시우의 성화에 못 이겨 몸을 일으킨 나는 발로 그를 밀어 거실로 내보내려고 했다.
꿋꿋하게 내 발길질을 버텨내던 박시우가 습관적으로 오른쪽 머리카락을 넘기는 내 손을 절망적인 표정으로 지켜봤다.
“설마 진짜…….”
박시우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네가 온천 사장이냐?”
* * *
갑작스러운 수온의 파업 선언에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온천의 손님들인 네 명의 성좌들과 베카에 영계까지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베카를 제외한 그들의 표정은 먹구름 낀 하늘보다 침울해 보였다.
“주인은 왜 갑자기 온천을 뛰쳐나가버린 거지? 돈을 많이 버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샤레니안이었다.
그는 피 묻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수온이 남기고 간 파업 문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이 떨어져버릴 만한 이유가 생긴 걸지도 모르지. 이 온천에.”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해령은 상심한 듯한 얼굴로 그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건 우리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 토마……. 아니, 수온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빠르지.”
“그걸 누가 물어볼 건데?”
염라가 제시한 해결책에 운수가 질문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뭐,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박수온이 온천이 싫어졌다고 하면 떠나면 되는 거지.”
다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베카였다.
그는 수온이 온천을 떠난 것이 전혀 슬퍼 보이지 않았다.
“너는 박수온이 이곳에 더는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냐?”
울컥한 운수가 베카를 향해 소리쳤다.
“상관없다. 그게 박수온이 원하는 거라면. 내가 박수온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면 되니까.”
베카는 수온이 온천을 떠난 것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바깥으로 통하는 온천의 문손잡이를 쥐었다.
“네가 박수온을 찾아가면 애써 숨긴 정체가 들통나고 말 텐데. 이기적인 생각 아닌가?”
문을 열기 전, 염라가 던진 가시 박힌 물음에 베카가 그를 돌아봤다.
염라를 보는 베카의 표정이 여유로웠다.
“박수온은 정체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날 더 숨기려고 하겠지.”
차분한 목소리로 답한 베카가 문손잡이를 돌려 통로를 열었다.
“내게 더욱 집중하고 신경을 쓸 테고.”
오히려 그것이 기회라도 된다는 듯이 입가를 올려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