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왔다. 그 자식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쑥 라테가 놓인 쟁반을 들고 염라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 회의가 끝나지 않은 건지 염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12시니까 곧 오겠지. 오더만 끝나면 후딱 돌아가는 거야.’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지금 내 몸은 머리만 대면 꿈나라로 직행할 수 있을 만큼 피로한 상태였다.
서류가 앉은키만큼 높게 쌓인 진한 나무색 탁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런데 어쩐지 바닥이 푹신했다.
‘어라? 이건 솜이불?’
자세히 살펴보니 염라의 방바닥은 온통 솜이불로 덮여 있었다.
거기다가 뜨끈하기까지 해서 피로한 몸이 절로 햇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딱 잠들기 좋은 환경이네.’
이 방에 발을 들인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자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수면제가 따로 없네. 대체 염라는 이런 방에서 어떻게 밤새워 일하는 거야?’
새삼 염라가 뼛속부터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안 되겠다.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잠들겠어. 다른 생각이라도 해보자.
자꾸만 이불에 가까워지려는 몸을 애써 일으켜 세워 앉은 나는 해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라.”
그렇게 뛰쳐나간 이후로 쭉 해령을 보지 못했다.
쑥 라테를 만드는 김에 해령이 묵는 방에 들러도 봤지만 아무도 없는 방 안에는 찬 기운만 맴돌 뿐이었다.
‘해령, 지금 어디 있어?’
혹시나 해서 해령을 불러도 봤지만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해령은 왜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던 걸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해령을 생각하니까 슬픈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해령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상처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건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비늘과 연관이 있는 걸까?
해령의 비늘은 한여름의 바닷가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덕분인지 머릿속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것도 꽤 예뻤는데…….
그때,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또 뭐야?
이번에는 전화가 아니라 깨톡이었다.
―박시우 : 언제 옴?
―박시우 : 집에.
통화할 때도 집에 오라고 했다가 말라고 했다가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깨톡이야?
―모름. 짐 쌀 때까지 좀 걸림.
―박시우 : 아니다.
―박시우 : 오지 마.
기껏 답해줬더니 이 XX가?
매일 박시또라고 불리더니 진짜 돌아버렸나?
박시우의 어이없는 깨톡에 뒷골이 뻐근해졌다.
어째 이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철이 들기는커녕 똘기만 더해지는 것 같았다.
됐다, 됐어.
박시우랑 정상적인 대화를 기대한 내 잘못이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박시우의 깨톡을 씹으며 휴대폰을 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열까지 오른 탓인지 부쩍 노곤해졌다.
어느새 내 몸은 벽에 기댄 채로 늘어져 있었다.
‘아……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잠을 깨기 위해 볼을 때려도 봤지만 좀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차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 * *
잠든 수온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희고 얇은 목이 드러났다.
그때 환한 빛이 일며 수온의 목에 비늘 한 조각이 생겨났다.
해령의 것과 같은 신비롭게 반짝이는 푸른색의 비늘이…….
* * *
한편, 해령은 온천을 벗어나 자신이 처음 탄생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무영이 숨을 거둔 뒤, 그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야심한 시각인 데다 던전 브레이크가 생겨난 이후로는 SSS급 던전이 나타나버린 탓에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해령의 눈에는 던전으로 이어진 길게 늘어진 길이 오래된 마을의 풍경과 겹쳐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시퍼런 바닷가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해령이 물가에 주저앉아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것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해령이 자신의 얼굴을 옷소매로 가린 것은 단순히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만이 아니었다.
소매 너머의 수온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가 더 두려웠다.
“이제 전과 같이 지내긴 어렵겠지.”
바닷물에 자신을 비춰 보던 해령이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이렇게나 추악한데…….”
슬픈 눈을 한 해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에 비친 얼굴의 반은 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보고 싶어.”
해령은 허전한 볼의 한 부분을 매만졌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만 비늘이 비어 있었다.
“자!”
“내게 주려고 만든 건가?”
“응, 늘 네가 만들어주는 것만 먹은 것 같아서 한 번은 뭔가 해주고 싶었거든.”
해령은 자신을 향해 따뜻한 쑥 라테를 건네며 쑥스러워하던 수온을 떠올리며 슬프게 웃었다.
“설령 미움받게 되더라도.”
* * *
정확히 12시.
손님방의 문이 열리고 염라가 돌아왔다.
수온은 이미 솜이불 위에 대자로 뻗어 누워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박수온, 일어나라.”
잠든 그녀를 깨우려던 염라의 손이 멈췄다.
여유로운 척했어도 베카와 같이 잠자리에 들 수온이 신경 쓰여서 회의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베카는 겉모습만 꼬맹이일 뿐이라는 걸 염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원래는 꼬맹이가 잠들 때까지만 떼어둘 계획이었는데.’
전날 운수와 밤을 새우고 잠깐 눈 붙일 틈도 없이 돈가스 주문을 받은 탓인지 수온은 염라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오는 길에 수온의 방에서 그림자가 뒤척이고 있는 것으로 봐서 베카는 아직 깨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수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꼬맹이가 잠들 때까지만 더 자게 둘까?’
베카가 깨어 있을 때 수온을 돌려보낸다면 밤새 염라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순진무구한 어린애인 척 수온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마탑의 음흉한 꼬맹이가 또 무슨 꿍꿍이속을 꾸미고 있을지 몰랐다.
염라는 집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겉옷을 벗어 수온에게 덮어주고 맞은편 탁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탁상에는 그녀가 끓인 쑥 라테가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른 탓에 차게 식어 있었지만 염라는 쑥 라테 한 잔을 깨끗이 비웠다.
띠링―
[오더 내용 : 오늘 안에 쑥 라테 한 잔 전달하기 (1/1)]
[6번 오더를 성공적으로 클리어 합니다.]
[6번 오더 완료 보상으로 15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특수 보상으로 성좌 ‘저승의 염라 질문권’을 획득합니다.]
“으음…….”
시스템 알림음 때문인지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수온이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덕분에 수온은 탁상에 앉아 있는 염라와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잠꼬대였나?’
잔을 든 자세로 잠시 굳어 있던 염라가 조심스럽게 탁상에 잔을 내려놓으려는 때였다.
“염라, 이 자식……!”
수온의 입에서 다소 거친 단어가 흘러나왔다.
“……자는 게 맞나?”
“왜 이렇게 안 와……. 음냐.”
염라가 수온의 찰진 발음에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수온은 이내 염라의 겉옷을 껴안은 채 고른 숨만 내쉬었다.
뜨끈한 방바닥 때문인지 양 볼이 붉어진 채로 잠든 그녀에게로 염라의 다정한 눈길이 내려앉았다.
“왔다. 그 자식.”
모처럼 염라의 입가에 그려진 은은한 미소 위로 시스템창이 겹겹이 떠올랐다.
[2단계 스킬을 개방할 때까지 필요한 염라의 ‘소중한’ 기억 : 3/3]
[저승의 눈 2단계 스킬 개방 퀘스트를 완료합니다.]
[저승의 눈 2단계 스킬이 개방됩니다.]
[2단계 스킬 개방 완료로 저승의 명부 열람 권한을 획득합니다.]
* * *
수온이 돌아오기를 목 놓아 기다리던 베카는 불안한 마음에 책을 펼쳤다.
그가 들고 있는 책은 지난번 루카에게서 받은 『키웠더니 잡아먹혔다』였다.
베카는 책을 들여다보던 도중에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읽고 있는 부분은 남자 주인공이 서브 남주와 함께 있는 여자 주인공을 불러들이기 위해 다른 인물을 포섭해 계략을 꾸미고 끝내는 여자 주인공의 관심을 되찾는 데에 성공하는 장면이었다.
“계략이라…….”
책의 한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베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군.”
어둠 속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 * *
수온이 2단계 스킬 개방에 성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고요함을 뚫고 온천의 2층 복도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통……. 통통…….
그것은 빠른 속도로 염라와 수온이 있는 방으로 다가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꽈악!!!”
[‘장난감 오리 인형(S) 7’ : 박수온!!!]
요란한 울음소리에 잠들어 있던 수온이 눈을 떴다.
소리가 나는 곳에는 낮에 자신이 쓰레기라고 칭하던 덕택이 7번이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꽈아아악! 꽈악!”
[‘장난감 오리 인형(S) 7’ : 내가 다 말할게!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