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귀신 꿈을 꿔따
“베카, 무슨 일이야? 왜 울어?”
울먹이는 베카를 발견한 난 쏜살같이 식탁에서 일어나 입구로 달려갔다.
“나는 꿈을 꿔따. 귀신 꿈을 꿔따. 무서워따.”
뭐지? 이 어색한데 익숙한 문장은?
꼭 한때 유행했던 ‘나 꿍꼬또! 기신 꿍꼬또! 무떠워써!’(대충 귀신 꿈을 꿔서 무섭다는 뜻)라는 애교를 떠올리게 했다.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또박또박한 발음을 자랑하던 베카가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도 그렇고.
‘지금 나한테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건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는 몰라도 애교를 부리는 베카는 머리에 수건을 얹고 노곤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에 둥둥 떠서 온천욕을 즐기는 오리 인형들만큼이나 귀여웠다.
“그런데 베카, 너도 귀신을 무서워해?”
‘난 귀신보다 마탑의 괴수들이 더 무서워.’
베카는 악명 높은 마탑의 주인이었다.
잔혹하고 괴기스러운 괴수들이 바글거리는 곳의 최종 보스가 귀신 정도를 무서워할 줄은 몰랐다.
“……무섭다.”
묘하게 베카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온 것 같이 들린 건 착각인가?
“마탑의 괴수들이 더 무섭지 않아?”
“마탑의 괴수들과는 가족 같은 사이다.”
‘그, 그렇구나……. 베카는 마탑주니까 마탑의 괴수들이 가족 같을 수도 있겠지.’
내가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걸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괴수들이랑 같이 밥도 먹고 재미있게 놀 수도 있는 거지.’
베카의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문득 47층 석쌍들에게 맞은 주먹의 매운맛이 되살아났다.
‘미안해, 베카. 괴수들이랑 가족처럼 지내는 게 어떤 건지 상상이 안 돼…….’
난 애써 무리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베카와 나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벌써 저녁 시간이네.”
베카가 잠옷 차림인 걸 보고 시계를 들여다본 나는 뒤늦게 창밖이 어둑해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베카는 어르신이랑 자다가 온 거야?”
베카가 호빵처럼 희고 통통한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럼 내가 약방으로 데려다줄게.”
자는 곳까지 함께 가줄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는데 베카가 고개를 돌리며 나를 외면했다.
“약 항아리는 코골이가 너무 심해서 잘 수가 없다. 또 나는 귀신 꿈도 꿔따.”
‘어, 어째서 그 말을 할 때만 혀가 짧아지는 건데?’
그런 애교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여겼다면 오산이다.
오늘만큼은 지친 몸을 편하게 누이고 팔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 자고 싶었기에 웬만하면 베카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토라진 것처럼 팔을 포갠 채 고개를 돌리고 있던 베카가 흘깃 곁눈질하며 내 반응을 살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체리맛 사탕처럼 붉은 눈동자를 황급히 다른 곳으로 돌렸다.
놀란 탓인지 베카의 흰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잘 익은 호빵 같아. 놀란 게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그 모습에 심장을 부여잡은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베카의 애교에 두 손 들었다는 걸.
“나 오늘 피곤해서 잠꼬대가 심하거나 많이 뒤척거릴 수도 있긴 한데, 베카만 괜찮으면 같이 잘까? 미리 얘기하는데 나한테 깔릴 수도 있어.”
“응, 잠버릇은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베카가 기쁜 듯 베개를 더욱 힘주어 껴안으며 보석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조그만 게 자신감은 넘치네.’
들뜬 듯한 베카를 보니 왠지 모르게 흐뭇해졌다.
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냥줍 하게 되는지 알 것 같았다.
베카가 고양이였다면 평생 계획에도 없는 집사 노릇을 하게 됐을지도.
“자, 그럼 이제 자러 가볼까?”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베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누가 이 꼬맹이를 5000살이 넘었다고 생각하겠냐고. 생김새도 하는 짓도 영락없는 어린애잖아.’
부엌을 나서는데 때마침 손님방에서 강림차사와 함께 나오고 있는 염라와 마주쳤다.
염라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내게서 나와 손을 잡고 있는 베카에게로 옮겨갔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디 가?”
“아직 저승의 일정이 남아서.”
“그렇구나. 온천으로 옮겨 와도 바쁜 건 여전하네.”
나 역시 주문을 받고 배달을 하느라 같이 바빴던 탓도 있겠지만 한 지붕 아래에 있으면서 염라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염라에게 할 일이 많다는 거겠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염라대왕은 극한 직업이었다.
“그대는 그 꼬맹이와 어디 가는 중이었나?”
“응! 오늘은 내 방에서 재우려고. 베카가 악몽을 꿨다고 해서.”
“그런가?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그대는 아이를 참 좋아하는군.”
염라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정확히는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거라서.”
버릇처럼 오른쪽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는 나의 머리 위를 염라의 커다란 손이 덮었다.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돼.”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머리끝으로 전해졌다.
“지금이라면.”
날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짓던 염라가 상체를 낮춰 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회의는 금방 끝날 거다.”
‘……그래서 어쩌라고?’
뜻 모를 말을 속삭인 염라가 돌연 베카의 볼을 꼬집었다.
“고작 악몽이 무섭다니 어리긴 하군. 그래서는 미래에 생길 네 연인을 지켜낼 수 없다. 뭐, 상관없나? 아직 어린애니까.”
귀엽다는 듯이 곱슬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염라의 손을 베카가 거칠게 쳐냈다.
“까칠하긴.”
내 다리를 안고 서서 경계심을 보이는 베카와 달리 염라는 가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지.”
내게 인사를 건넨 염라가 저승의 문을 열었다.
일정이 급하긴 한 건지 강림차사가 염라의 뒤를 따라 서둘러 저승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난 저 시체처럼 허여멀건 놈이 싫다.”
‘염라가 너무 창백한 건 맞긴 한데…….’
사실 조금 놀랐다.
이제껏 베카의 입에서 나온 가장 거친 말이었으니까.
……뭐, 욕도 아니고 이 정도는 살아온 기간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긴 하지만.
염라가 볼을 꼬집은 것 때문인지 베카의 심기가 꽤 불편해 보였다.
“좀 사납게 생기긴 했어도 그렇게 성격이 나쁘지는 않아. 다음에 제대로 소개해줄 테니까 일단은 자러 들어갈까?”
“소개는 됐다.”
뚱해진 베카가 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쥐었다.
‘삐진 것도 이렇게 귀여울 일이야?’
난 숨죽여 웃으며 베카의 고사리 같은 손에 이끌려 내 방으로 들어갔다.
* * *
저승의 회의장에 도달하자마자 염라는 강림차사를 돌아봤다.
“지금 당장 온천으로 돌아가라.”
“예? 방금 온천에서 함께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갑자기 온천에는 왜 돌아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회의장 중앙에 자리한 의자에 걸터앉은 염라가 강림차사를 향해 명령했다.
“내가 묵고 있는 방에 이부자리를 깔아둬라. 되도록 잠 잘 오게 푹신하고 포근한 것으로.”
“잠도 주무시지 않으면서 이부자리는 또 왜요?”
“오늘따라 질문이 너무 많군. 회의도 온천에서 하고 싶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당장에라도 회의 장소를 옮길 듯한 염라의 엄포에 강림차사가 마지못해 온천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
강림차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면서도 염라가 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 * *
염라가 귓속말을 한 이유를 아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번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기)]
[6번 오더 의뢰자 정보: 저승의 염라/오더 장소 : 저승의 염라 손님방]
[오더 내용 : 오늘 안에 쑥 라테 한 잔 전달하기 (0/1)]
[6번 오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 시 사유를 작성하세요. 단, 사유가 타당하지 않은 경우 자동 수락 됩니다.)]
회의가 금방 끝난다고 말한 게 오늘 안에 쑥 라테가 먹고 싶다는 뜻이었어?
피곤하다는 것도 거절 사유가 되려나?
거절 버튼을 누르려던 나는 또 문제의 오더 보상을 보고 멈칫했다.
[오더 완료 시 보상 : 150만 골드, 특수 보상 : 저승의 염라 질문권 1개]
‘질문권은 또 뭐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질문권을 사용한 질문에는 뭐든 답해주겠다”고 합니다.]
‘명부에 관한 질문도 괜찮은 거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질문권을 사용한다면 가능하다”고 답하며 미소를 짓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건 무조건 해야지!
어차피 오늘 안이라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 안에는 염라가 온천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됐다.
‘만약에 네가 늦어서 오늘을 넘기면 성공한 걸로 치는 거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알겠다”며 고개를 까딱입니다.]
확답을 얻은 난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베카가 누워 있는 쪽을 확인했다.
악몽에 시달린 탓인지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깨지 않게 조용히 나가자.’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방을 빠져나왔다.
* * *
수온이 오더를 수행하기 위해 방을 빠져나가고 난 직후, 어둠 속에서 감겨 있던 베카의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