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30)화 (130/190)

130화

닦아줘

뜬금없이 온천 사장 욕을 해보라고?

‘아직도 나를 온천 사장으로 의심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도 중요했다.

내가 온천 사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국위 선양하고 있는 분을 왜 욕해? 정치인들보다 훨씬 나은데. 박시우, 할 일 없어?”

―넌 나한테 할 말 없냐?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태연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왜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잘 알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박시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까 박시우가 먼저 끊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주문자 명 ‘박시우’가 ‘온천 판매 데스크’에 100만 골드를 입금했습니다.]

[주문자 명 ‘박포션’이 ‘온천 판매 데스크’에 100만 골드를 입금했습니다.]

왠지 모를 찜찜함을 느끼던 중에 눈앞으로 온천표 돈가스 결제를 알리는 시스템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우선 주문부터 쳐내자. 장고야, 입 벌려! 손 들어간다!”

내가 냉장고로 손을 넣는 순간이었다.

[‘굴복한 온천 냉장고(S)’ : 이렇게 향기로울 수가……!]

[금손의 기운을 받은 ‘굴복한 온천 냉장고(S)’가 ‘행복한 온천 냉장고(SS)’로 변경됩니다.]

[‘행복한 온천 냉장고(SS)’에 넣은 식료품들의 유효기간이 30일 연장됩니다.]

“손만 넣었을 뿐인데……. 냉장고가 SS급이 돼?”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때였다.

[‘행복한 온천 냉장고(SS)’의 ‘온천 식재료 판매대’가 열립니다.]

[온천표 돈가스 전용 고기 10개 (10만 골드)]

[발그레 바나나 10개 (5만 골드)]

:

:

: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 * *

“하……! 박돈돈이 돈가스를 거부한다고?”

수온과의 통화를 끊은 시우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혼잣말을 했다.

그의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온천 사장을 욕해보라고 말했을 때.

‘평소의 박돈돈이었다면 그때 통화를 끊었을 텐데…….’

수온은 자신의 관심 밖의 이야기가 나오면 가차 없이 시우의 전화를 끊었다.

‘그건 25년을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박수온 불변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설마 그때 체력이 올랐던 것도…….’

시우는 그것 외에도 짚이는 부분이 있는 듯 생각에 잠겼다.

‘……이건 혼자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사색에 빠져 있던 시우가 모니터에 뜬 익명 헌터 게시판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온천의 배달부, 덕택이와 주문자의 인증 사진이 있었다.

‘그렇지,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

덕택이를 보는 시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박지호.”

“왜? 누나 지금 온대?”

오랜만에 수온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피로에 젖어 있던 지호의 눈이 반짝였다.

“박수온, 여기 안 와. 그것보다 긴급 공지가 있다.”

“뭔데?”

수온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눈에 띄게 침울해진 지호가 영혼 없이 되물었다.

시우는 주위에 앉아 있는 집필 길드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집필은 온천 사장님을 찾는 모든 활동을 멈춘다.”

“예? 아니 길드장 형님, 온천 사장님 찾는 걸 왜 멈춘다는 거죠?”

“다른 길드들이 먼저 온천 사장님을 포섭하면 어쩌려고요?”

긴급 공지라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집필 길드원들이 모처럼 거세게 항의했다.

“……알겠어.”

잠시 침묵을 지키던 지호가 순순히 시우의 뜻에 응하자 집필 길드원들은 황당함에 실소를 터뜨렸다.

“길드장 형님! 갑자기 온천 사장님을 찾는 걸 멈추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세 번은 말 안 해. 우리는 이제부터 온천 사장, 안 찾는다.”

국내 랭킹 1위 헌터이자 집필의 길드장임에도 한 번도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일이 없었던 박시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확연하게 위압적이고 날이 선 것처럼 보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시우의 분위기에 압도된 길드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심란함을 감추지 못한 그가 이내 PC방을 빠져나갔다.

시우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가 지나간 자리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시우의 성좌 ‘겨울의 왕’ 속성이 얼음이라 그의 기분에 따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방금 전까지 시우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집필 길드원 중 하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의문을 표했다.

“나 참, 온천 사장님을 못 찾으면 못 찾는 거지, 안 찾는다는 건 또 무슨 소린지 원…….”

“형님의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지켜주자!”

길드원들이 시우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그때,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호의 얼굴이 시우와 뜻이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서히 굳어졌다.

‘잠깐,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다고……?’

* * *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검붉은 피들과 바닥에 산처럼 널브러진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한 불사의 전장.

그들은 쓰러지기가 무섭게 검에 베인 상처를 회복하며 좀비처럼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살아난 불사의 병사는 이내 샤레니안의 불사검에 단숨에 반으로 갈리며 쓰러졌다.

사방으로 퍼진 붉은 핏방울이 샤레니안의 새하얀 얼굴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몇 번을 베고 또 베어도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한 수온이 샤레니안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를 괴롭게 했다.

‘갑갑해,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든다.’

[불사의 병사 처치하기 (890/1000명)]

[불사의 병사 처치하기 (900/1000명)]

샤레니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시스템창의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났다.

샤레니안은 성좌가 되기 전의 기억이 없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샤레니안의 쌍둥이 동생인 에르시온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샤레니안과 같은 날에 성좌가 되었다는 에르시온의 말에 의하면 그는 엘리시움이라는 제국의 기사로 평민 출신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공작의 지위까지 오른 유명 인사였다고 했다.

샤레니안이 타고난 힘과 체력이 좋았고 이론으로 배우지 않아도 몸이 먼저 기억하는 천재였다면 에르시온은 타고난 책략가 타입이어서 쌍둥이임에도 둘은 판이하게 달랐다.

샤레니안은 에르시온과 함께 황제에게 충성했다.

그러다 당시 엘리시움을 경계하던 다른 제국의 자객들에게 급습을 받았고 끝까지 목숨을 바쳐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그런데 왜 난 성좌가 된 당시의 기억조차 없는 거지?’

샤레니안은 성좌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동생인 에르시온을 통해 들어서 알게 됐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영웅이라는 명목으로 불사의 몸을 얻고 성좌가 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살생을 저질렀기에 평생을 불사의 전장에서 매일같이 불사의 병사를 죽여야만 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처음에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내가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불사의 몸을 얻으려고 했을까?’

전생의 샤레니안에게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에게 불사의 몸은 끝나지 않는 고통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으니까.

오죽하면 시스템에게 성좌의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미 대가를 받고 성좌의 별이 된 이상, 선택을 무를 수 없다.]

‘대차게 거절당했지만.’

지루함과 고통의 연속이던 샤레니안의 삶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건 수온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제까지의 것과 달랐다.

단순한 흥미보다 더 깊은.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턱 끝까지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차오르는.

덧 그린 유화같이 오랜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것처럼 짙은 감정에 샤레니안은 몇 번이고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조만간 에르시온을 만나봐야겠어.’

샤레니안이 회심의 일격을 날리듯 커다란 검을 한 손으로 휘둘렀다.

[불사의 병사 처치하기 (1000/1000명)]

그러자 거센 바람과 함께 벼락같은 황금빛 섬광이 일며 불사의 병사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병사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가 벗겨졌다.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샤레니안의 눈동자가 공허해졌다.

병사는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샤레니안과 똑같은 얼굴로.

* * *

샤레니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온천의 입구로 들어섰다.

이제는 무뎌질 법도 한데 곳곳에 난 상처들이 만들어내는 통증이 족쇄라도 된 것처럼 그의 몸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

“악, 깜짝이야! 샤레니안, 왜 오늘도 피투성이야?”

휘청이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샤레니안을 발견한 수온이 부산스러운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말했지? 맞을 바에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오라고.”

자신을 향한 걱정스러운 수온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 샤레니안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아픔을 잊게 됐다.

“자, 일단 피부터 닦아.”

수온이 들고 있던 온천 수건을 샤레니안에게 건넸다.

가만히 수건을 바라보던 그가 힘줄이 선 큼지막한 손으로 수온의 손을 쥐어 제 얼굴로 가져갔다.

“닦아줘. 주인이.”

샤레니안은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제게 더 붙잡아두고 싶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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