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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29)화 (129/190)

129화

욕해봐

“집무실을 온천으로 옮긴다니……. 재판을 보거나 하려면 저승에 있는 편이 낫지 않나?”

예상하지 못한 장기 투숙 손님의 등장에 얼떨떨해하자 처음과 같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염라가 지친 듯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휴식이 필요해서.”

나른한 표정과 달리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선명하고 또렷했다.

“저승에 있으면 온천에 오기 어려우니까.”

온천에 자주 오지 못하는 게 염라에게 꽤 고역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 그의 얼굴에 잠시나마 아쉬움이 드리운 것을 보면.

확실히 염라는 저승 밖으로 한 번 나오기도 힘들어 보였으니까 아예 집무실을 이곳에 두는 편이 휴양하기에는 좋을지도 모른다.

나는 염라가 장기간 머물러주는 것만으로 큰 수입이 생기는 거니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고.

“듣자 하니 조만간 온천 사업을 인간들에게까지 넓힐 계획이라던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기억하기로 내가 사업 계획을 말했던 건 샤레니안과 해령 둘뿐이었다.

온천에 CCTV라도 설치해두고 돌려보는 거 아냐?

저승국에 나와 박시우의 사사로운 다툼까지 녹화되어 있던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나 도청 장치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샘솟은 나는 입고 있던 옷의 소매 안이나 목 뒷부분을 구석구석 살폈다.

“다 아는 수가 있다.”

‘잠깐, 언젠가 해령도 지금의 염라처럼 말한 적이 있지 않았나?’

알고 보니까 온천 손님들끼리 따로 단톡방도 있고 막 그런 거 아냐?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온천 음식도 배달시킬 생각이다. 온천 사업을 확장하면 직접 손님을 상대하게 될 테니까 예행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군.”

해령의 말대로라면 성좌는 굳이 식사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온천의 음식을 주문하겠다는 걸 보면 염라는 자기 나름대로 나를 신경 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온천 사업이 잘되면 따로 알바생을 쓸 생각이지만 사장으로서 먼저 본보기를 보이긴 해야겠지.’

염라가 머무는 것을 기회로 삼아 손님을 대하는 매뉴얼도 만들어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 너도 온천에 온 김에 적당히 쉬어가면서 일해. 아, 혹시 지내다가 온천욕하고 나오는 오리 인형들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고. 내가 고용한 온천 배달원들이거든.”

나는 계단을 마저 올라가 염라의 앞에 섰다.

그러자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돌아서며 눈을 맞췄다.

“알고 있다. 이름이 덕택이라고 했던가?”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거냐고.”

사실 성좌가 계약자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염라는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존재가 아니었다.

“업무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거 아니었어?”

“그대도 만만찮게 피곤해 보이는군.”

연달아 질문을 쏟아내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염라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며 엄지로 내 눈 아래를 쓸었다.

“눈 밑이 까맣다.”

아마도 어제 운수와 같이 꽃밭에서 밤을 새운 탓에 다크서클이 생긴 것 같았다.

“너에 비하면 피곤할 일도 아니지.”

그러고 보니 염라가 잠든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매번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지.

새삼스럽게 밤새우는 걸 밥 먹듯이 하는 염라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참, 주문! 하마터면 잊을 뻔했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어제 박시우의 의심을 피하려고 쓴 비장의 카드가 오늘의 똥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정말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수가 없다니!’

하지만 온천표 돈가스가 많은 관심을 받는 만큼 일을 뒤로 미룰 수도 없었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했어.

나는 빠르게 일을 해치우고 자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염라, 나도 빨리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필요한 게 있으면 오더로 넣고.”

‘오늘은 넣지 마라.’

형식적인 인사치레 겸 경고를 마친 나는 비틀비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염라대왕님, 이대로 저자를 보내실 겁니까? 온천 사장을 보겠다고 그 난리를 피우시면서 여기까지 오신 게 아닙니까?”

저승에서 염라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자인 만큼 그에게 따르는 제약도 많았다.

그렇기에 이번처럼 온천으로 집무실을 옮기는 것에도 대신들과 큰 마찰이 따랐다.

하지만 염라는 꼬박 하룻밤을 새우면서까지 실랑이를 벌이며 끝내 대신들이 지쳐서 백기를 들게 했다.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강림차사로서는 방금 전 미적지근한 염라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무실을 온천으로 옮기게 만든 추진력이 있었다면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나눈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보지 않았나? 얼굴.”

“……예?”

얼어붙은 강림차사와 달리 염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제는 집무실이 된 손님방으로 돌아섰다.

그가 손님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끝난 강림차사가 경악했다.

“지금 고작 온천 사장의 얼굴을 보겠다고 염라대왕님께서 집무실 이동까지 감행하셨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염라가 그 물음에 답해줄 리 없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은 들었어도 하물며 염라대왕님께서 이러실 줄은…….”

한탄하던 강림차사가 수온이 떠나자마자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한 염라를 찬찬히 살폈다.

집무실에서는 저승의 하늘만큼이나 어두침침하던 얼굴이 온천에 오고 난 뒤로는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래, 대왕님께서도 웃을 수 있는 분이셨지.’

근래에 들어 강림차사는 염라의 새로운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건 아마도 온천 사장 덕분일 거다.’

강림차사는 저승이 처음 생겨난 때부터 줄곧 염라를 모셔왔다.

염라대왕이라는 직책은 누구보다 인간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함과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자리.

염라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자리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처럼 규율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왔다.

‘한 번도 그 틀을 깨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라 사사로운 감정은 일찍이 잊으신 줄 알았는데…….’

특히 저승의 일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 보였기에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줄로만 알았다.

강림차사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 같은 긴 혼잣말을 쏟아냈다.

“이것 참, 저승의 하늘이 두 쪽 날 일이군…….”

* * *

부엌으로 들어온 나는 식탁에 앉아 수십만 개의 댓글 중 선착순 30개를 추려냈다.

익명 헌터 게시판에 업로드된 글에 의하면 내 첫 게시글이 올라간 뒤에 해외까지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국까지 원정을 와서 대기를 탄 외국인 인원도 있었다고 했다.

그 탓에 내가 두 번째 게시글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익명 헌터 게시판 서버가 터져버렸다고.

전례 없는 일에 수습이 늦어져서 게시판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복구가 됐다고 했다.

└쓰니 : 온천표 돈가스 주문이 접수되었습니다. 게시글에 있는 온천 판매 데스크 계좌로 입금을 해주시면 최종 주문이 완료되고 덕택이가 돈가스 도시락을 배달해드립니다. 꽉!

선착순 댓글 30개에 미리 써놓은 답글을 복사해서 붙여넣은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온천 판매 데스크는 여러모로 편리했다.

이용권이나 온천 물품이 판매될 때나 오더를 수행했을 때는 물론이고 퀘스트 완료 보상도 자동으로 온천 판매 데스크에 저장됐다.

온천 판매 데스크 전용 계좌도 있어서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돈가스를 판매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슬슬 돈가스를 만들어볼까?”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또라이

또 박시우였다.

“또 뭔데?”

잠결에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받는 그때였다.

―우아아아악! 오아아악!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함성은 한마디로 축제의 장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멀찍이 떼어냈다.

―돈돈아! 이 오라버니가 해냈다!

“뭘 해냈는데?”

―내가 이번 온천 사장님의 온천표 돈가스 11번째 주인공이라 이 말이야!

박시우가 30명 안에 들었다고?

입금이 완료되기까지는 주문자를 확인하지 않는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독한 놈.’

내 호적 메이트지만 정말 징하다.

―이 돈가스 맛이 천상계라는데 특별히 이 오라버니가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네게도 맛을 볼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몸 안에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그 천상계 돈가스를 만드는 게 난데?’

“됐거든.”

―어째서?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당혹스럽게 들렸다.

“돈가스가 맛있어봤자지. 네 아량을 받느니 난 그냥 시켜 먹을래. 할 말 다 했으면 끊는다.”

―잠깐! 딱 하나만 더.

“지금 나 한창 잘 시간인 거 몰라? 자꾸 짜증 나ㄱ…….”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너 온천 사장 욕해봐.

* * *

잠잠하던 ‘온천 손님 단체방’이 오랜만에 움직였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강림차사가 왜 온천으로 책상을 옮기고 있냐”며 의문을 품습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누가 보면 저승에서 온천으로 이사 오는 줄 알겠다”며 장난스럽게 웃습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맞다”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제기한 이사 의혹에 수긍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 : ???]

[성좌 ‘온천의 지배자’ : ???]

마탑의 도서관에서 ‘온천 손님 단체방’을 지켜보던 성인 베카가 흰색 체스 말을 든 손으로 날렵한 턱선을 매만졌다.

“염라가 온천에 이사를 왔다라…….”

단체방의 내용을 읊조리며 체스판으로 눈을 돌린 베카가 흰색 킹으로 검은색 킹을 쓰러뜨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검은색 킹을 바라보는 장밋빛 눈동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처럼 빛났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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