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너 지금 어디야?
‘설마…….’
눈앞의 수온은 운수가 죽음을 맞이하던 그 순간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기억 속 장면을 반복하듯이.
달라진 건 힘없는 어린 여우였던 운수가 성좌가 되었다는 것과 장소가 습하고 썩은 나무 구멍이 아닌 온천의 꽃밭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그때 내가 봤던 은발 머리 여자가 지금의 박수온이었던 거였나.’
운수는 수온이 처음으로 해령의 각인을 사용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랐다.
변한 모습의 각인한 수온은 운수의 기억 속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여자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외모만 똑같을 뿐 수온은 운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때의 운수는 어리고 작았지만, 지금은 엄연한 성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꽃잎을 통해 운수를 구해줬던 기억을 보았을 때도 수온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박수온은 환생한 걸지도 몰라.’
운수는 수온이 자신이 구원한 첫 꽃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와 같은 외모를 가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 아이 또한, 너와 같이 어린 나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 성좌가 된다면 그녀도 구원할 수 있다.]
운수가 성좌가 되기 직전, 떠오른 창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까.
만약 수온이 그녀의 환생이라면 운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수백 년이 지나도 같은 얼굴인 것도 설명이 됐다.
운수는 수온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슬펐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수온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성좌가 된 게 아니었다.
그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을 뿐.
그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었다.
‘박수온이 그녀의 환생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문득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에 운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게 아니었다.
운수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전생에도 미래를 보고 예언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은발 머리 여자가 박수온으로 환생한 게 아니라…… 내가 미래의 박수온을 미리 본 거였어!’
운수가 비에 젖은 채로 자신을 안고 있는 수온을 바라봤다.
‘위기에 빠진 날 일으켜줄 너를. 그것도 내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고 그것이 운수를 살게 했다.
‘그렇다면 그때 날아간 꽃잎은 수온에게 과거의 기억을 보여준 게 아니라 미래의 수온과 과거의 나를 이어준 건가?’
드물긴 하지만 간혹 성좌의 꽃잎에서 시공간을 넘나드는 힘이 발현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운수도 말로만 들었지 직접 겪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다.”
“응? 뭐가?”
“미래를 보는 눈을 가진 것을 저주가 아닌 행운이라고 느낀 건.”
혼잣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던 운수가 한 손으로 수온의 뒷머리를 감싸 푹신한 잔디로 눕혔다.
방금만 해도 수온의 품에 안겨 있던 운수는 어느샌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수의 넓은 등이 수온을 향해 떨어지는 세찬 빗줄기를 막아줬다.
고개를 낮춘 그가 비 내리는 풍경을 뒤로하고 수온을 바라봤다.
파도처럼 흐트러진 은발에 보석처럼 맑게 빛나는 수온의 바다색 눈동자를 마주한 운수가 결심한 듯 자신의 얼굴을 가린 눈가리개로 손을 뻗었다.
‘난 널 지키기 위해 성좌가 됐다.’
“운수야?”
‘네가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한 수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날 구원해준 너를 다시 만나게 된 지금, 네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운수는 멈추지 않고 눈가리개의 매듭을 풀어냈다.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눈가리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에 가려져 있던 운수의 진실한 얼굴이 드러났다.
‘진짜 나를. 숨김없이, 당당하게.’
* * *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
[눈가리개 벗기기 (1/1)]
[히든 퀘스트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를 클리어 합니다.]
‘와……!’
운수가 눈가리개를 벗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붉은색과 푸른색의 오드 아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예쁘다, 꼭 눈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우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아.’
운수의 오드 아이에는 여우 귀와 꼬리조차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담겨 있었다.
홀린 듯이 운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있던 그가 몸을 낮춰 내게 다가왔다.
막아낼 틈도 없이 가까워진 운수의 입술이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이마에 닿았다.
[히든 퀘스트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 완료 보상으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각인을 획득합니다.]
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퀘스트 보상이 각인이었어?
성좌가 각인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운수는 너무 의외라서 놀랐다.
“보상으로 각인이라니……. 너무 뜬금없지 않아?”
내 말에 정신이 든 것처럼 화들짝 놀란 운수가 내게서 멀어졌다.
난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같이 있어준 보답이라고 해두지.”
자두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된 운수가 내게서 돌아앉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눈가리개를 벗은 모습을 보이는 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귀엽긴, 아직은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모르는 척해주자.’
운수가 기껏 용기를 내서 눈가리개를 벗어 던졌는데 과도하게 관심을 줬다가 다시 이전처럼 숨어버리면 곤란했다.
난 자꾸만 운수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하늘로 돌렸다.
“다행히 천둥은 그친 모양이네.”
조금 전만 해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번쩍거리던 하늘이 잠잠해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운수야, 비가 너무 심하게 내리는데 온천으로 들어가 있는 게 어때?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운수가 쳐놓은 결계 덕분에 바람이 꽃밭까지 들이치지는 않았지만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비에 젖어 있다가는 몸살을 앓을 것 같았다.
“내 몸은 인간들처럼 허약하지 않다. 이깟 비를 맞는다고 상하지 않아. 너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는……. 빨리 온천으로 돌아가도록 해.”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단호한 눈빛으로 말하는 운수를 보니 고집을 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도 온천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지만 운수 혼자 두고 갔다가 또 천둥이라도 치면…….’
지금은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한 하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마스터키를 쓰면 바로 온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도 난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빗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운수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렇다고 계속 비를 맞고 있자니 내 몸이 성하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운수의 여우 귀와 꼬리가 안쓰러워 보였다.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난 꽃밭의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운수를 밀어 넣고 목에 걸치고 있던 온천 수건을 그의 얼굴에 두르며 말했다.
“운수야, 여기서 딱 기다려!”
“난 분명히 돌아가라고 말했다!”
난 곧장 운수에게서 돌아섰다.
‘각인 해제!’
그의 외침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 * *
시우는 눈이 피로한 걸 느끼며 잠시 집 주변 PC방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나왔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PC방 고 카페인 음료가 떨어질 게 뭐냐?’
다른 길드원에게 자리를 맡기고 오긴 했지만 그는 그사이에 다른 게시글이 뜰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층 퀭해진 얼굴로 회색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긴 시우가 고 카페인 음료를 박스로 챙겨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때, 시우의 눈에 익은 검은색 생머리의 여자가 우비와 우산을 바리바리 사 들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어라? 박수온?”
‘박수온이 왜 여기에 있지? 그 해순이라는 친구 집이 이 근처인가?’
만약 동네 친구라면 마당발인 시우가 모르는 얼굴일 리 없었다.
‘이 근방에서 해순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긴 내가 근래에 박수온한테 너무 무심하긴 했지.’
어디서 지내는지 물어볼 겸 시우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편의점의 문으로 빠져나가는 수온의 뒤를 따라 나왔다.
“박수…… 어라?”
문을 열고 나온 시우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그는 퀭한 눈을 비비고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여기로 나가는 걸 봤는데?’
길이라고는 쭉 뻗어 있는 인도 하나인데 그 어디에서도 수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박수온이었는데…….”
그 순간, 시우의 머릿속에서 곤란하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온천 사장의 모습과 수온이 다시금 겹쳐졌다.
‘그러고 보니까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렸을 때, 온천 사장님이 던전을 클리어 했다는 시스템 문구가 떠 있었지? 그때도 박수온이 같이 있었다. 그렇다는 건…….’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시우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이 멈추고, 전화를 받은 상대방을 향해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박수온, 너 지금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