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새로운 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탄생합니다.]
[!!히든 퀘스트!!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천둥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운수가 천둥을 무서워했다니.
그제서야 문득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운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온천 꽃밭에도 바깥 날씨의 영향이 미친다고 했으니까 그곳에도 천둥이 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운수,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도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설마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귀여운 여우 귀와 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 편히 온천을 즐길 수 없었다.
탕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해령이 챙겨둔 옷을 주섬주섬 걸치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히든 퀘스트!!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를 수락합니다.]
[‘오래된 기억 : 천둥을 무서워하는 운수(EX)’]
[눈가리개 벗기기 (0/1)]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과거 기억의 일부(트라우마)가 흘러들어옵니다.]
알림창을 보는 순간, 내 것이 아닌 기억들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순식간에 내게 흘러들어왔다.
“말도 안 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걸 보고 난 뒤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지금 당장 운수에게 달려가야겠다는.
그때였다.
온천 마스터키가 환하게 빛나더니 주변으로 바람이 일며 작은 꽃잎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를 데려가줘. 운수가 있는 꽃밭으로.’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꽃잎들은 한데 모여 원을 만들더니 꽃밭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포털을 만들어냈다.
급한 마음에 목에 걸친 수건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포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넓은 꽃밭이 펼쳐졌다.
꽃밭에는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운수의 결계가 바람을 막아준 덕분인지 꽃들은 놀랍게도 안전해 보였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런데 운수는 어디에 있지?’
꽃들이 빽빽하게 자라 있는 데다 넓어서 운수가 있는 곳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에 시야마저 흐려졌다.
‘안 되겠다, 부채!’
난 해령의 각인을 사용해 부채를 불러내 빗방울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폭풍처럼 몰아치던 비바람이 일시적으로 잦아들었다.
그 틈을 타 목을 두리번거리며 운수를 찾고 있는데 성이 난 하늘이 또 한 번 큰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꽃밭의 한 부분이 크게 들썩이는 게 보였다.
‘저기다!’
본능적으로 그곳에 운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높게 자란 꽃 무더기를 가르고 들어가자 커다란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운수가 보였다.
“운수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나는 곧장 운수에게 다가가 두 팔로 힘껏 그를 안았다.
차게 식은 운수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운수야.”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의 운수는 괜찮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운수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운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뺨을 타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너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같이 있을게. 그러면 무섭지 않을 거야.”
나는 운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아내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웃으려고 노력해도 눈물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계속해서 떠올랐다.
운수의 숨이 멎는, 죽음의 순간이.
* * *
운수는 여우인 어머니와 인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수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정말 사랑했지만, 운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인간 아버지는 어머니가 여우라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붉은색과 푸른색 눈의 오드 아이에 여우의 귀와 꼬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을 때 둘의 관계에도 큰 위기가 닥쳤다.
하지만 둘은 정말 서로를 사랑했다.
단, 그 사랑엔 조건이 있었다.
운수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운수야, 어머니랑 같이 시장 구경하러 갈까?”
그 말을 할 때 운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가 자신을 보며 웃는 것을 봤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웃어줬어.’
제대로 눈길을 받은 것도, 얼굴을 본 것도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운수는 가슴이 뛰었다.
자신을 보며 저주받은 눈이라 떠들던 사람들도 매일 돌을 던지며 괴롭히던 동네 아이들도 다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기뻤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날 어머니는 운수에게 비싼 비단옷도 사주고 간식으로 엿도 사줬다.
엿이 이렇게나 달콤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달콤한 건 기분 좋은 어머니의 웃음을 보는 것, 그리고 그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고향을 네게도 보여주마. 언젠가 한 번은 너와 함께 가보고 싶었다.”
“좋아요. 어머니!”
운수는 어머니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산길을 올라갔다.
“이곳이 네 고향이다.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
어머니가 걸음을 멈춘 곳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이었다.
“우와!”
운수는 바로 앞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곳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성인 남자 넷이 팔을 뻗어도 다 두르지 못할 만큼 두꺼웠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운수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운수는 그 침묵마저도 좋았다.
잠시 뒤,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기어코 비가 내리는구나.”
비가 내리는 걸 본 어머니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비를 좋아하시는가 보다.’
운수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웃는 어머니를 보며 축축해서 싫어했던 비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구나. 넌 이 안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도록 해라.”
어머니는 나무의 뒤로 운수를 데려갔다.
나무의 뒤편에는 운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어머니는요?”
구멍 안으로 들어간 운수는 비를 맞고 있는 어머니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난 괜찮다. 추울 테니까 입구를 막아주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바위로 구멍을 막았다.
“어머니, 안이 어두워요! 바위를 치워주세요!”
“아니다, 찬 바람을 맞으면 고뿔에 걸릴 수도 있으니 얌전히 있거라. 어미는 다른 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오겠다.”
나무 구멍 안을 비추는 건 바위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의 불빛뿐이었다.
운수는 덜컥 겁이 났지만 무섭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 어리광을 부리면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더는 웃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운수는 여우의 몸으로 변했다.
확실히 어둠 속에 적응하는 건 여우인 편이 빨랐다.
운수의 곁에는 노란색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오실까?”
운수는 두려움을 잊으려 꽃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홀로 피어 있는 그 꽃이,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마음이 갔다.
운수는 바위를 타고 떨어지는 물을 받아 꽃에 뿌려줬다.
그때, 천둥소리가 들렸다.
쿠와왕!
지대가 높은 산이라 그런지 천둥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어머니…… 무서워요. 제발 절 빨리 데리러 와주세요.”
몸을 웅크린 운수가 파르르 떨며 울부짖었지만 그 두려움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위를 밀어보려고도 해봤지만 어린 운수의 힘으로 큰 바위를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이틀하고 사흘, 닷새를 넘어 일주일이 지났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운수가 버림받았음을 깨달은 건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을 때였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운수는 몸에 아무런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운수는 힘이 없는 몸을 일으켜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받아 노란색 꽃에 물을 줬다.
“어쩌면 이게 네게 마지막으로 주는 물일지도 모르겠다. 나와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몸을 일으킬 힘도 없이 나무에 기댄 운수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신비로운 은발에 새벽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
“이제 괜찮아. 내가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태어나 처음으로 운수의 편이 되어주었던 건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도 괴물로 취급받는 것 같았는데……. 세상의 그 누구도 나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나처럼 버림받지 않고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운수는 언젠가 동네 아이들에게 돌멩이를 맞고 있는 자신을 구해준 수온의 행복을 빌었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남은 힘을 다해서.
그때였다.
“……괜찮아. 운수야.”
눈앞에 은발을 한 수온이 나타나 운수를 감싸 안은 것은.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같이 있을게. 그러면 무섭지 않을 거야.”
자신을 향해 따뜻하게 미소짓는 수온을 보는 순간, 강이 범람하듯이 운수는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수온의 온기와 미소에 차츰 녹아내렸다.
하지만 이내 수온의 형상이 사라지며 운수의 앞에 성스러운 빛을 내는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가엾은 소년이여, 그대에게 세상은 차가웠지만 그대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뜻함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난 그대의 삶에 깊게 감동 받았다. 그래서 그대에게 같은 슬픔을 안고 있는 아이들을 구원하는 성좌가 되는 것을 제안한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방금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지만 운수의 정신은 온통 수온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 아이 또한, 너와 같이 어린 나이에 죽음이 드리운 자. 성좌가 된다면 그녀도 구원할 수 있다.]
[결심이 선다면 성좌의 문을 넘어서라.]
동시에 운수의 앞에 환한 빛을 내는 문이 생겨났다.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한다는 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운수는 주저 없이 문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새로운 별,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탄생합니다.]
그를 감싸주던 따뜻한 손길을. 그를 향하던 환한 미소를 꼭 지켜주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