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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15)화 (115/190)

115화

아니, 이 맛은!

“레시피가 너무 많아…… 흐억!”

밀물처럼 불어나는 레시피 더미 속에 묻힌 나는 눈을 번쩍 뜨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을 살피자 익숙한 집무실의 풍경이 보였다.

‘꿈이었나?’

밤새 무영의 비법서를 집중해서 읽은 탓인지 악몽을 꿨다.

‘가위도 아니고 레시피에 눌리다니…….’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내 등을 무언가 덮고 있는 게 느껴졌다.

붉은색 문양이 새겨진 검은 비단옷.

염라가 걸치고 있던 옷이었다.

‘염라가 덮어준 건가?’

“깨어난 건가?”

등을 덮고 있던 옷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옷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집무실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염라가 보였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아주 곤히 자던데.”

‘저건 누가 봐도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이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염라는 한눈에 봐도 즐거워 보였다.

잘은 몰라도 세상모르고 퍼질러 잔 건 확실했다.

‘침을 흘리지 않은 게 다행인가?’

“대왕님, 오늘 새로 들어온 상소문입니다.”

뒤이어 강림차사가 돌돌 말린 김밥 모양의 상소문을 산더미처럼 들고 들어왔다.

“거기 놔둬라.”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지만 염라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염라도 참 대단해. 가만 지켜보니까 잠깐 눈 붙일 시간도 없는 것 같던데……. 잠깐만, 그런데 나 뭔가 잊고 있지 않나?’

무영의 비법서를 돌아보는 순간,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침에 해령의 수업을 듣기로 했었잖아!’

“지금 몇 시쯤 됐을까?”

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저승은 밤이든 낮이든 어두워서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승의 시각으로 오전 7시 5분입니다.”

강림차사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해줬다.

“저승에도 그런 게 있어?”

“예, 이래 보여도 엄연한 와이파이 존이랍니다.”

강림차사가 자랑스럽게 소매를 걷어 갓 뽑은 듯한 스마트 워치를 뽐냈다.

‘……그렇구나, 와이파이 존이었구나!’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하긴 21세기의 저승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7시 5분이면 아직 늦지 않았어. 해령에게 들통나기 전에 빨리 온천으로 돌아가자.’

빠르게 비법서를 챙겨 든 나는 염라에게 겉옷을 건넸다.

“이거, 빌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깨지 않고 잘 잤어.”

“돌아가려는 건가?”

느린 동작으로 겉옷을 받아든 염라가 내게 물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꼭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응, 아침에 해령이 온천의 요리를 가르쳐주기로 했거든.”

“잠깐.”

서둘러 가려는 내게로 염라가 성큼 다가왔다.

내 얼굴로 팔을 뻗은 그가 소매로 나의 왼쪽 뺨을 문질렀다.

‘세수라도 시켜주려는 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황당한 눈으로 염라를 올려다보자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왼쪽 뺨을 가리켰다.

“뺨에 글자가 새겨져 있기에. 레시피를 얼굴로 외우는 건 처음 봐서.”

아…… 얼굴에 글자가…….

어젯밤 무영의 비법서를 펼쳐놓은 채로 그 위에 누워 잠든 것이 떠올랐다.

걸어 다니는 레시피가 된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필요해서 새겨둔 거라면 이미 내가 지워버려서 다시 새겨야 할 듯한데, 조금 더 자리를 빌려줄까?”

염라가 내가 앉아 있던 자리로 다시 와서 앉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가만 보면 그는 놀리는 것에도 능숙한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게 되는 걸 보면.

“됐어, 지금 바로 온천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눈을 내리감으며 옅은 미소를 띤 염라가 내 뺨을 닦아내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래도 자리는 늘 비워두도록 하겠다.”

다시 날 지그시 바라보는 염라의 눈동자가 루비처럼 붉고 아름답게 빛났다.

“그대가 언제든지 찾아와 쉴 수 있도록.”

* * *

“폐쇄!”

온천으로 돌아온 나는 저승으로 통하는 문을 닫자마자 잠자리부터 확인했다.

이불은 내가 떠나기 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간밤에 해령이 다녀가진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난 안도하며 이부자리에 벌러덩 대자로 뻗어 누웠다.

“그래도 자리는 늘 비워두도록 하겠다.”

“그대가 언제든지 찾아와 쉴 수 있도록.”

문득 이승으로 오기 전 염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왠지 저승에 비밀 아지트가 생긴 기분이네.’

조용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생긴 것에 흡족해하고 있는데 때마침 배꼽시계가 울렸다.

밤을 꼬박 새워 비법서를 읽느라 기운을 뺀 탓에 배가 고플 수밖에.

‘수업 듣기 전에 간단히 뭐라도 먹어야겠다.’

곧장 복도로 걸어 나온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빈 부엌 안을 어슬렁거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부엌에는 먹을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요란을 떨듯 다시 배꼽시계가 요란히 울릴 때쯤, 어제 무영의 비법서에서 봤던 쑥 라테 레시피가 떠올랐다.

‘레시피 중에 쑥 라테가 제일 간단하니까 한번 시도해볼까?’

밤새워 공부한 탓인지 묘하게 자신감이 샘솟았다.

연습 삼아 쑥 라테를 만들기로 한 나는 냉장고와 찬장에서 재료들을 꺼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 손에서 냄새가 난다고 난리를 치던 냉장고와 찬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들어오자마자 야단법석을 부렸을 텐데……, 별일이네.’

의아한 것도 잠시, 나는 쑥 라테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먼저 쑥 가루를…….’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쑥 라테 레시피를 떠올렸을 뿐인데 손이 알아서 재료를 정해진 양만큼 집어넣고 요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에서 자동 사냥 기능을 켜놓으면 이런 기분일까?’

뜨거운 물을 부어 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쑥 라테 한 잔이 완성됐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산뜻한 쑥 색깔을 띠고 있는 쑥 라테는 겉보기에도 해령이 끓여준 것과 똑같았다.

‘좋아, 왠지 느낌이 나쁘지 않아! 한번 먹어볼까?’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쑥 라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인기척이 난다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부엌에 나와 있었나?”

쑥 라테를 맛본 내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해령이 부엌으로 걸어 들어왔다.

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그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해령, 잠깐 거기 앉아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해령은 얼떨결에 내 손길에 이끌려 식탁 앞에 앉았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기다려봐. 아주 잠깐이면 돼.”

난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온천표 돈가스 레시피를 떠올렸다.

‘역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이번에도 레시피를 떠올리자마자 몸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해령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온천표 돈가스를 완성해 그의 앞에 내놓았다.

“자, 한번 먹어봐.”

접시와 함께 젓가락을 내어주자 해령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돈가스를 바라봤다.

“보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그사이에 혼자 연습이라도 했나?”

“일단 먹어보고 얘기하라니까. 다 식겠어.”

접시를 밀어주자 재촉에 못 이긴 해령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젓가락으로 돈가스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돈가스를 먹자마자 그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맛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해령은 급기야 눈까지 촉촉해져 있었다.

“할아범이 처음으로 내게 해준 바삭한 식감이 살아 있는 추억의 돈가스의 맛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해령은 좀처럼 돈가스 맛의 감동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선대 온천 사장님의 비법서를 읽은 뒤부터 레시피를 떠올리면 몸이 저절로 요리를 하고 있더라고.”

무영의 요리에 익숙한 온천의 성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편의점과 배달 음식이 일상이었던 내가 느끼기에는 감히 천상계라 칭할 수 있는 맛이었다.

“할아범의 비법서라…… 그런가?”

돈가스를 맛본 해령은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앗!”

지난번, 해령에게 무릎을 빌려줬을 때처럼 목 뒤가 타오를 듯이 뜨거운 게 느껴졌다.

“왜 그러지? 무리하더니 몸이 안 좋아진 건가?”

놀란 해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상태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목의 통증이 사라졌다.

‘지난번도 그렇고…… 왜 자꾸 이러는 거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잠깐 느끼다 마는 통증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별것 아니야. 책상에서 엎드려 잤더니 목이 결렸나 봐.”

“책상에서 엎드려 자?”

무심결에 내뱉은 답을 해령이 예리하게 짚으며 되물었다.

해령과 나 사이에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온천 할아범의 손맛을 욕보이지 말라”며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감상을 비판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성좌 ‘온천의 지배자’에게 “지금이라도 죽을 것 같으면 젓가락을 흔들라”고 합니다.]

‘못 믿겠으면 직접 와서 먹어보든가?’

“냄새만 맡으면 군침이 절로 돌긴 하네.”

내 말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다렸다는 듯이 샤레니안이 부엌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너도 먹어봐.”

해령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긴 했지만 샤레니안 덕분에 화제를 돌릴 수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돈가스의 자태에 못 이긴 샤레니안이 돈가스를 크게 베어 물었다.

“진짜 맛있잖아? 주인, 이 정도면 장사해도 되겠는데?”

샤레니안도 돈가스 맛에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이미 네가 단골인 온천의 사장이거든?”

“……그렇군, 암살 쑥 라테를 만들긴 했어도 사장이긴 했지.”

잊고 있었다는 듯 샤레니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쩔 수 없지. 내가 제대로 된 쑥 라테의 맛을 보여주도록 하지.”

“주인, 제발 그것만은…….”

샤레니안이 나를 말리기가 무섭게 나는 가뿐히 쑥 라테 한 잔을 만들어냈다.

처음보다 현저히 빠른 속도였다.

“자, 마셔봐.”

“진짜 평범한 쑥 라테 같잖아?”

용기를 얻은 샤레니안이 조심스럽게 쑥 라테를 한 모금 머금었다.

“……맛있다. 산뜻한 쑥의 향, 우유의 부드러움……. 내가 그리워했던 쑥 라테의 맛이야!”

샤레니안이 온천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료가 쑥 라테라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던 건지 그는 단숨에 쑥 라테 한 잔을 비웠다.

“이 정도면 시중에 팔아도 문제없겠지?”

“당연하지! 온천 할아범의 손맛을 따라올 자는 이승과 저승을 통틀어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갑자기 지옥에서 천상계로 올라온 게 믿기지 않긴 하다만 이제 주인의 손맛을 따라올 자는 없다는 거지.”

내가 만든 쑥 라테에 깊이 감동한 듯한 샤레니안이 내게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힘을 실어줬다.

“앞으로 온천의 요리를 헌터들에게 팔아보려고 해.”

다만 문제가 있다면 판매 글은 헌터 게시판에 올리면 되겠지만 음식을 헌터들에게 전달해줄 배달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지만 온천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을 배달원이 필요한데…….”

일반인이나 헌터를 고용하면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다.

“박……수온.”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자기 머리와 크기가 비슷할 만큼 두꺼운 책을 든 베카가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베카!”

놀란 내가 베카에게 다가가려는 그때였다.

[!!돌발 퀘스트!! ‘피로에 지친 베카(EX)’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 시 베카의 호감도 하락, 퀘스트 성공 시 보상 : 온천의 배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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