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요리왕 온천 사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해령이 탁상에 턱을 괸 채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쑥 라테로 테러를 일으켜서 헌터 업계를 정복하는 게 최종 목표인가?”
“내 말 못 들었어? 헌터들을 ‘위한’ 온천을 만들겠다고!”
나는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특정 단어에 힘을 실어 내 뜻을 강조했다.
침묵을 지키던 해령의 시선이 조용히 내 손으로 향했다.
“알겠어! 뭐가 걱정되는지는 알겠는데 나 예전의 그 똥손이 아니야. 자, 봐!”
나는 해령을 향해 자랑스럽게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귀인 퀘스트 덕분에 똥손 패시브에서 벗어나 평범한 손을 가지게 됐다고!
이제 레시피대로 만들기만 하면 ‘쑥 라테 암살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데, 뭔가 달라진 게 있나?”
해령이 당최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갑갑하네, 시스템창을 보여줄 수도 없고.
“당장 뭐라도 만들어 올까? 잠깐 기다려봐!”
곧장 부엌으로 달려갈 기세로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해령이 붙잡아 앉혔다.
“됐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까.”
해령은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듯 커다란 손 하나로 내 두 손을 꾹 눌러 잡았다.
‘연행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겠지?’
수갑에 묶인 사람을 연행하는 X돌이 짤이 떠올라서 찜찜한 기분으로 있자 해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간들을 위한 온천을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온천 할아범이 있을 때도 종종 인간들을 손님으로 받는 온천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으니까.”
“정말? 사람들을 위한 온천이 따로 있어?”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온천을 운영하려면 그 규모에 맞는 토지가 필요했다.
헌터를 위한 온천을 계획하면서 가장 부담을 느꼈던 부분이기도 했다.
“있었는데, 없어졌다.”
땅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기뻐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토지가 증발했다.
“어쩌다 없어진 건데?”
“그 온천은 사장이 문을 열어야만 인간의 눈에 보였다. 애초에 매일 열지를 않았으니 단골손님도 없었고, 할아범도 나이가 들어 온천을 두 개나 운영하기에는 힘에 부치니 손을 놨다. 그래서 오랫동안 방치됐지.”
“그래도 땅은 있을 거 아니야?”
“땅은 있지만 인근 던전의 악한 기운을 받아서 던전화되어버린 지 오래다.”
“온천이 던전이 되기도 해?”
“그렇다. 그곳은 보통 온천과 다르니까. 주변 기운의 영향을 많이 받지. 너도 가본 적이 있지 않나? 지난번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렸을 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베카가 만든 던전 브레이크, 목욕탕이었지?
“그냥 던전 컨셉이 그런 줄 알았는데 진짜 목욕탕이었어?”
“그렇다. 그곳도 누군가 운영했던 목욕탕이 던전화된 거겠지.”
그렇다는 건, 목욕탕 사장으로 각성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네.
왠지 묘하게 친밀감이 들었다.
“그렇구나……. 그럼 던전화된 땅을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반쯤 포기하고 던진 물음에 의외로 희망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해령에게 냅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떻게 하면 온천을 되찾을 수 있는데?”
한껏 가까워진 내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해령이 손으로 내 이마를 눌러서 밀어내고는 말을 이어갔다.
“던전화된 땅을 정화해야지. 던전 공략이라고 말하면 더 쉽게 이해하려나?”
‘탑을 뚫고 돌아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던전 공략이야?’
“이 정도면 나 애초에 헌터가 될 운명을 타고난 걸지도…….”
어째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던전이나 탑과 자주 엮이는 것 같았다.
‘뭐, 부모님을 찾으러 다니려면 지금보다 경험을 쌓는 편이 좋긴 하지.’
다만 지금은 던전 공략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령, 난 오늘 널 재우지 않을 생각이야.”
흑막 성좌와 그의 계약자가 언제 날뛸지 모르는 지금, 박시우와 지호 같은 무고한 헌터들이 다칠 것에 대비해서 하루라도 빨리 온천을 열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천 요리를 익히는 게 먼저였다.
“적어도 오늘 안에 쑥 라테랑 온천표 돈가스 정도는 완벽하게 만들고 싶거든!”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날 따라와라.”
내가 쉽게 뜻을 굽히지 않을 거라고 느낀 건지 해령이 체념한 얼굴로 응접실을 벗어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마도 부엌으로 가서 정식으로 요리 수업을 해주려는 것 같았다.
“좋아! 해내자! 박수온!”
나는 잔뜩 기합을 넣으며 해령의 뒤를 따랐다.
* * *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잠시 뒤, 나는 이불에 돌돌 말린 채 2층에 있는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엌으로 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해령은 내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몸이 건강해야 머리도 잘 도는 법. 고로 난 널 재울 생각이다.”
“해령……!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네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그렇게 말한 해령은 나를 반강제로 이불에 눕혀 김밥처럼 돌돌 말아놓고는 불 꺼진 방에 나를 덩그러니 남겨두고 가버렸다.
“행여 꾀를 부릴 생각은 마라. 잠들어 있는지 확인하러 올 테니까.”
몰래 휴대폰을 하는 자녀를 단속하는 부모님처럼 잔소리를 덧붙이면서.
“하…….”
레시피를 보고 계량해서 혼자 연습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난 해령이 돈가스를 만들 때 계량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온천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해령처럼 계량하지 않고도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했다.
해령은 쉬라고 했지만, 오늘만 해도 지호가 죽을 뻔했고, 흑막 성좌에게 위협도 당했다.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친 얼굴이 하나 있었다.
“맞아! 무영 할아버지가 계셨지!”
무영이라면 해령 이상으로 온천의 요리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저승에 계시지만 염라에게 부탁하면 만날 방법이 있을지 몰랐다.
지난번 재판에도 나와주셨으니까 말이야.
몸을 굴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나는 저승의 눈을 꺼내 들다 말고 이불 속에 베개를 채워 넣었다.
부피감이 생기니 어둠 속에서는 꼭 내가 이불에 싸여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벽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나는 저승의 눈을 쥔 손을 펼치며 작게 속삭였다.
“개방!”
열린 문으로 고개를 쓱 내미니 늦은 시간임에도 환한 등불로 밝은 염라의 집무실이 보였다.
희미한 등불 속에서도 서류를 살피는 그의 유려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똑똑!”
입으로 소리를 내자 일에 집중하고 있던 염라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옮겨왔다.
“염라, 나 들어가도 돼?”
“안 된다고 하면 돌아갈 텐가?”
‘훗, 그건 아니지.’
“오늘은 다른 날보다 일감이 몇 배는 더 많은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아?”
염라에게 쫓겨나기 전에 자연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일감으로 화제를 돌렸다.
산처럼 쌓인 서류를 들춰보려는 나를 염라의 굵직한 손이 저지했다.
“조금은 피로가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한 얼굴로 뚫어지게 날 바라보던 그가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홍옥이라는 글자를 본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염라의 손을 피해 흘깃 서류의 내용을 살폈지만, 홍옥 열매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오늘 내내 시달려서 헛것을 본 걸지도 모르지.
“곤란하게 됐군. 해령이 오늘은 네가 찾아오더라도 곧장 방으로 돌려보내라고 온천 손님들에게 신신당부했는데 말이야.”
“어느 틈에 그런 말을…….”
해령은 생각 이상으로 치밀했다.
“선대 온천 사장님께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조언을 얻고 싶은 일이 있어서.”
나는 염라가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게 혹시 온천의 요리와 연관된 건가?”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염라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무영의 촉은 예나 지금이나 무시할 게 못 되는군.”
혼잣말하듯 읊조리던 염라는 책상 서랍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이게 뭔데?”
“무영의 온천 운영 비법서다. 오늘 아침에 오더니 곧 필요할 일이 생길 거라며 주고 가더군. 그런데 이렇게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무영의 말로는 그 책에 온천 요리나 향료 제조 비법 같은 온천 운영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기록해뒀다고 했다.”
무영의 비법서를 펼치자 온천과 함께한 세월을 보여주듯 빛바랜 책장이 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된 레시피에는 나 같은 요리 초보도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도록 손으로 개량하거나 동전 크기로 재료의 양을 설명해둔 부분도 있었다.
‘요알못인 내가 봐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친절해!’
“고마워, 염라! 선대 온천 사장님께도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줘! 이 은혜는 잊지 못할 거라고!”
“그러지.”
“폐쇄!”
비법서를 전달받은 나는 곧장 저승의 문부터 닫았다.
“해령도 여기까지는 못 쫓아오겠지.”
온천에서 비법서를 봤다가는 해령에게 걸려서 다시 이불로 김밥 말이를 당할 게 뻔했다.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이지? 사악한 토마토.”
통쾌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던 나는 사악한 토마토라는 말에 웃음을 거뒀다.
“대왕님, 토마토가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별로.”
한 치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히려 날 바라보는 염라의 눈빛은 흥미로워 보였다.
‘기대도 안 했다.’
“때마침 잘됐네. 그런 의미에서 자리 하나만 빌려주세요.”
나는 염라의 바로 옆에 놓인 테이블에 냅다 자리 잡고 앉아 책을 펼쳤다.
“그 자리는…….”
“조용히 책만 읽고 갈게, 응?”
갈 곳을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짓자 염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잊지 마라. 그 자리에 앉은 건 네 선택이었다는 것을.”
염라는 해령의 당부를 저버리는 게 영 찜찜한 것 같았다.
“알았어. 후환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끝까지 책임지도록.”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날 바라보던 염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집무실을 빌려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낸 나는 곧장 비법서를 읽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염라가 지은 미소 뒤에 숨겨진 뜻을 알지 못한 채.
* * *
“염라대왕님,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쉿.”
염라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강림차사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행여나 수온이 깰까 염려한 염라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강림차사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동이 틀 시간까지 쉬지 않고 비법서를 완독한 수온은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다.
“염라대왕님, 그 자리는 훗날 왕비의 자리에 오르실 분을 위해 마련해둔 것인데……!”
염라의 성화에 못 이겨 음 소거에 가까운 수준으로 목소리를 낮춘 강림차사가 그에게 할 수 있는 한 격하게 항의했다.
“됐다.”
강림차사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린 염라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잠든 수온의 위에 덮어줬다.
저승의 법에 엄격한 염라였지만 이상하게도 수온의 일이라면 물러졌다.
염라의 따스한 눈길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수온에게 살며시 내려앉는 그때였다.
[‘온천표 돈가스 레시피’를 마스터합니다.]
[‘온천표 쑥 라테 레시피’를 마스터합니다.]
[‘특제 바나나 우유 레시피’를 마스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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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왕 온천 사장의 금손(EX)’을 획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