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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12)화 (112/190)

112화

어느 날 머리에서 X가 솟아났다

운수의 머리카락은 마치 한여름의 햇살처럼 눈이 부신 금색이었다.

그래서인지 귀와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는 보석이 박힌 화려한 장신구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어우러졌다.

천으로 눈을 가리고 방울이 달린 동그란 부채를 든 운수는 전설 속에 나올 법한 신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 덜 깬 것 같아. 온천이 꽃밭으로 보이는데?”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봐도 꽃으로 가득한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갔던 곳은 온천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환각에서 깨어났다면 온천에 있어야 맞았다.

“네가 있는 곳은 온천이 아니라 꽃밭인 게 맞다. 방금 네 발로 내 꽃밭에 들어오지 않았나? 그것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몰래.”

운수가 항의하듯 꽃이 그려진 부채로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부채에서 맑은 방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발로 여길 들어왔다고?”

해령을 본 이후의 기억이 없긴 하지만, 이곳으로 온 기억도 없었다.

“난 깨어 있을 때만 해도 온천에 있었어.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지난번에 꽃잎이 남긴 자취를 따라 흘러들어온 건가?”

짐작이 가는 곳이 있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이던 운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그 때수건부터 풀도록 해. 또 단명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때수건……?”

고개를 숙이자 내 손에 들린 때수건이 보였다.

그것은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커다란 황금색 꽃잎을 가진 꽃의 줄기를 감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마치 리본처럼 꽃을 장식하고 있는 때수건의 매듭을 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단명할 수도 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내 물음에 운수는 꽃밭을 가득 채운 꽃들을 찬찬히 돌아봤다.

“이 꽃밭의 꽃들은 시련이나 고통을 겪는 어린아이들 그 자체다. 피지도 못하고 지는 꽃의 영혼은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어 성불하게 하고, 시들거나 스스로 꺾이려는 꽃은 어둠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구원하는 것이 이곳에서 내가 맡은 일이다.”

‘꽃이 어린아이라고?’

난 때수건을 풀다 말고 내 앞에 놓인 커다란 꽃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누구인데?”

“그 꽃은 어린 날의 너다.”

운수의 답을 듣는 순간, 환각 속에서 과거의 나에게 세신사 스킬을 사용한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꽃에 때수건이……. 설마 했는데 진짜 나였어?’

“그 꽃이 꺾인다는 건 어린 시절의 네가 죽는 것과 같다. 과거의 네가 사라진다면 지금의 너 또한 사라지겠지.”

“그런 거였으면 빨리 말해야지!”

나는 한층 더 조심스럽고 분주하게 손을 놀려 꽃의 줄기를 동여매고 있는 때수건을 완전히 풀어냈다.

“살았다…….”

중대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의사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기진맥진해서 꽃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그나저나 내 꽃이 이곳에 있다는 건 운수는 예전부터 내 과거를 알고 있었다는 건가?’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불우한 과거가 있는 자라는 것 외에 특별한 건 느껴지지 않는다”며 현정우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고 가슴 아파합니다.]

돌이켜보니 운수는 현정우의 과거를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운수는 이곳의 꽃들을 돌보고 구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었지?’

“네가 날 구원한 적도 있어?”

“……그렇다.”

“이상하네, 내가 널 본 건 지금이 처음인데…….”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운수는 쉽게 잊힐 외모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게 내가 절박했던 순간이라면 더 강렬하게 남았을 텐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는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 사소하고 소박하지.”

운수가 나의 어린 시절이라고 칭했던 꽃송이에 부채를 부쳤다.

딸랑이는 방울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일며 꽃송이가 살며시 펼쳐졌다.

‘이때는……!’

열린 꽃송이가 영사기라도 된 것처럼 내 과거의 한 장면이 흘러나왔다.

나는 거실의 유리창을 열고 베란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님이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기억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던 날이기도 했다.

거실문을 열고 홀린 듯이 베란다 앞으로 다가섰을 때, 눈앞으로 황금색 꽃잎 한 장이 날아왔다.

유달리 반짝거리는 꽃잎에 절로 시선이 갔다.

‘예쁘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꽃잎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이제 막 잠에서 깬 건지 머리에 새 둥지를 만든 채로 방에서 걸어 나오는 지호가 보였다.

“누나, 거실문을 왜 다 열어놨어? 지호, 추워.”

지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지호야, 내가 미안해.”

세상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잠도 덜 깬 지호를 안고 엉엉 목놓아 울었다.

“돈돈아, 갑자기 왜 울어? 다쳤어? 왜 우는데?”

내 울음소리를 들은 박시우도 쏜살같이 달려왔었지.

“그때 그 꽃잎이 너였구나?”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내가 운수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부채로 내 얼굴을 가렸다.

“뚝 그쳐라! 울라고 보여준 건 아니니까.”

“그게 보여? 눈을 가리고 있어서 안 보일 줄 알았는데…….”

운수가 우는 얼굴을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다급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민망함에 말끝을 흐렸다.

“주술을 걸어둔 천이라 눈을 가리고 있어도 보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그래서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없었던 거구나?’

“그런데 왜 이 꽃밭에서 내 꽃이 제일 큰 거야? 아무리 봐도 이것보다 큰 꽃은 없는 것 같은데…….”

무안해진 나는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꽃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 꽃은…….”

이제까지 막힘없이 답하던 운수가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다른 꽃보다 거름을 많이 준 거야?”

“내가 무슨 정원사인 줄 아는 거냐? 이곳의 꽃들은 거름으로 자라는 게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을 토대로 물었을 뿐인데 거름이라는 말에 운수의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다.

“설마…… 꽃이 온천표 돈가스나 쑥 라테를 먹고 자라지는 않을 거 아냐?”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애초에 네가 만든 쑥 라테를 줬으면 살아남은 꽃이 없었을 거다!”

운수는 알림창으로 본 것과 싱크로율 100퍼센트였다.

‘빈말이라고는 모르는 녀석.’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상처만 남았다.

“그래서 뭘 주면 꽃이 자라는데?”

“순수하고 대가 없는 사랑.”

운수의 답을 듣고 나자 더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웃을 수 없었다.

이 꽃밭에서 내 꽃이 가장 크다는 건 내가 순수하고 대가가 없는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뜻일 테니까.

“나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그치?”

“그래, 넌 늦게 깨달은 것 같지만.”

매번 느끼는 거지만 운수한테는 꼭 정곡을 찔리게 됐다.

“또 네 꽃은 내가 특별히 공을 들여 키우기도 했다.”

“어째서?”

“네가 처음이니까. 이 꽃밭에서 만나서 구원한 게.”

운수가 부채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알고 보니까 내가 구원받은 게 먼저였지만. 그 이상한 여자가 너였을 줄은…….”

조용히 읊조리는 운수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이상한 녀석.”

아……. 이 목소리.

“운수야, 왜 굳이 눈을 가리고 다니는 거야?”

나는 운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나 민감한 부분일까 싶어 묻지 않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난 저주받은 눈을 가졌거든. 사람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불행해진다고 말했다.”

“……그것도 너였구나?”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날 꿈에서 본 꼬마가…….’

나는 운수의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내가 분명히 가리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는데……. 벌써 까먹었어?”

“그 말은…….”

그날, 꿈속에서 어린 날의 운수를 만났을 때.

“이상한 녀석.”

“이제 괜찮아. 내가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운수를 두 팔로 감싸 안아 다독이던 나는 긴 앞머리에 가려진 그의 눈을 마주했다.

“가리고 다니지 마. 네 눈이 저주받았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예쁘게 빛나고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 난 내 말에 크게 동요하고 있는 듯한 운수에게 옅게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속삭였었다.

“그 눈을 봐서 생기는 저주라면 얼마든지 받아줄게. 그것보다 널 보는 행복이 더 크니까.”

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가벼운 말이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운수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다.

어린 날의 운수도, 지금 내 눈앞의 운수도.

“내가 말했잖아. 예쁜 눈 가리고 다니지 말라고.”

나는 눈가리개를 한 운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걸리는 저주가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운수가 내게서 달아나듯 돌아섰다.

그때였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XX이 2000 상승합니다.]

운수의 머리와 등 뒤에서 흰색 털의 뾰족한 여우 귀와 보송한 여우 꼬리가 돋아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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