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10)화 (110/190)

110화

어디 안 갈 테니까

‘빨리 어르신에게로 가서 해독제를 만들어야 해!’

해독제의 재료들을 얻은 수온은 탑 47층에서 곧장 온천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온천에 들어서자마자 1층 한편을 지키고 앉아 있던 해령이 귀를 쫑긋 세웠다.

“……돌아왔나?”

금방이라도 수온에게 달려갈 듯이 해령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그는 이내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점잖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수온의 이마를 살폈다.

“해령, 어르신은 어디에 계셔?”

“2층, 약방에.”

“알려줘서 고마워!”

지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수온은 곧장 해령을 지나쳐 약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해령의 눈이 계속해서 수온을 쫓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해령님, 계약자를 기다리시던 게 아닙니까?”

온천의 수건을 나르다가 수온을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해령을 본 영계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직이다.”

이마의 상처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해령이 손에 쥐고 있던 약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게나 걱정하셨으면서 뛰어가보시기라도 하시지.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신 분입니다.”

영계가 안타까움에 한탄하다 짧은 다리를 뽀작거리며 수건을 마저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어르신! 해독제를 만들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2층의 약방에서 수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 항아리(EX)가 “상황이 긴박하니 비행기는 생략하자”고 합니다.]

“알겠어요! 재료를 넣을게요!”

[‘약 항아리(EX)’가 “자! 드루와!”라며 뚜껑을 엽니다.]

[‘약 항아리(EX)’가 약초 ‘새살’을 삼킵니다.]

[‘약 항아리(EX)’가 홍옥의 열매 두 알을 삼킵니다.]

[‘약 항아리(EX)’가 ‘성스러운 석상 눈물 한 방울’을 삼킵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쩝쩝거리며 약을 제조하는 약 항아리를 지켜보던 해령은 수련하듯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 * *

박시우가 온천 사장을 캐스팅해오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병실을 빠져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는 급격한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한참 후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열병을 앓는 것처럼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을 때.

“지호야.”

땀에 범벅이 된 채 열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호의 곁에 누군가 다가와 앉았다.

‘누가 날 부르는 거지?’

지호는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열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호야, 약 먹자. 그러고 나면 아픈 게 싹 나을 거야.”

따뜻한 누군가의 손길이 지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엄마?’

자신의 머리에 와닿는 온기에 지호는 실종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릴 적 지호는 유독 약 먹기를 싫어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지금처럼 머리를 쓸어주며 지호를 달래어 약을 먹이고는 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어머니는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지호를 부축해 약을 삼키게 했다.

“잘 버텼다. 우리 지호.”

약을 전부 삼키고 나자 어머니는 지호를 향해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나 사실은 너무 아프고 힘들었어. 엄마, 이렇게 꿈속에라도 나와줘서 고마워요.’

꿈에라도 어머니를 만났다는 생각에 지호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며 울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포근한 손길은 한참 동안이나 지호의 눈물을 닦아내주며 그의 곁을 지켰다.

지호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달콤한 꿈이었다.

그 손길이 너무 생생해서 진짜라고 믿고 싶을 만큼.

“……역시 꿈이었나?”

한참 뒤에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지호의 곁은 비어 있었다.

조금 전 꿈 때문인지 오늘따라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지호는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어? 마나가…….”

무심결에 상태창을 확인한 지호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체력 : 203211/203211 | 마나 : 955270/955270 ]

분명 잠들기 전만 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나가 회복되지 않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마나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약을 먹는 꿈을 꿨는데 진짜 몸이 낫다니……. 신기하네. 꼭 진짜 같잖아.”

지호가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매만지며 얼떨떨해하고 있는 그때였다.

지이잉―

탁상에 올려둔 지호의 스마트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들여다봤다.

‘박지호, 지난 번에 부탁한 거 알아봤는데 헌터 협회에 등록된 E급 헌터 중에 청순이라는 이름은 없어. -박준영’

‘E급 헌터 중에 청순이 누나가 없다고?’

지호는 일전에 헌터 협회에 속해 있는 지인에게 청순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생각해봐도 청순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E급 헌터가 A급 던전에 와 있는 것도 그랬고 커뮤니티에 알려진 온천 사장의 신비로운 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 지옥귀 사태 때, 멀리서 보긴 했지만 온천 사장의 외모가 청순이 누나와 똑같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었어.’

“이제 막 각성한 헌터의 경우에는 헌터 협회에 등록을 안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지호가 추측을 이어가고 있는 중에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그런데 너 오늘 실시간 스트리밍 봤냐? 나 마지막 온천 사장님의 궁극기에 오열함. 갤러리에 저장해서 가보로 남길 명장면 [사진] -박준영’

‘온천 사장님이 실시간 스트리밍을 했다고?’

지호는 잠들어 있던 때라 미처 챙겨 보지 못했다.

“……이래서 덕계못이라는 말이 있는 건가?”

숨죽여 울부짖던 지호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준영이 보내준 온천 사장의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을 바라보던 그가 제 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뺨을 세게 때렸다.

“이상하다……. 잠이 덜 깬 건 아닌데?”

사진 속에는 온천 사장이 신비로운 은발을 흩날리며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부채를 펼쳐 들고 있었다.

지호는 그중에서도 온천 사장의 얼굴을 확대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몇 번이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청순이 누나잖아?’

“진짜 청순이 누나가 온천 사장……?”

행여나 누가 그 사실을 알게 될까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지호에게서는 전의 풀 죽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지호가 온천 사장의 실물을 영접했다는 것에 기뻐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계 탔다!’

* * *

나는 해독제를 만들자마자 지호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박시우와 집필 길드원들이 돌아오기 전이라 병실에는 지호 혼자뿐이어서 수월하게 해독제를 먹일 수 있었다.

[‘지옥귀의 저주 해독제’의 효과로 상태이상 ‘지옥귀의 저주’가 회복됩니다.]

[체력 : 203211/203211 | 마나 : 955270/955270 <상태 : 좋음>]

‘……됐다.’

약 항아리 어르신의 안경으로 확실하게 지호의 몸 상태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난 안도하며 빠르게 병실을 벗어났다.

‘내가 다녀간 뒤에 지호가 회복되었다고 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어.’

복도를 벗어난 나는 곧장 온천으로 돌아왔다.

기진맥진해서 온천으로 돌아온 그때, 내 앞으로 파란색 도포가 물결처럼 일며 가까워졌다.

내게 다가온 건 해령이었다.

마치 줄곧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해령, 나 석상도 부수고 염라한테 가서 홍옥 열매도 얻고 지호한테 해독제도 먹이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오늘 있었던 일을 정신없이 늘어놓는 나를 해령이 커다란 손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지호 괜찮……”

“그래, 잘했다.”

해령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제 쉬어도 괜찮다.”

잔잔하게 귓가를 울리는 해령의 목소리와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에 긴장이 풀어진 나는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품에 쓰러졌다.

* * *

쓰러지듯 안겨 잠든 수온을 받아든 해령이 수온을 조심스럽게 안아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눕혔다.

“자기 몸을 돌볼 줄 모르는 건 남매가 똑같군.”

수온이 자기 몸은 생각하지도 않고 움직이는 동안 해령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갔는지 몰랐다.

돌아오면 꿀밤이라도 먹여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다니……’

약통을 열어 염라의 가호가 닿지 못한 상처들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을 발라주던 해령이 굳은 듯이 행동을 멈췄다.

곤히 잠든 수온의 손이 해령의 옷깃을 꼭 붙들고 있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쥔 손을 바라보던 해령이 약통을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라.”

바르게 앉아 수온을 내려다보는 해령의 눈길이 봄볕처럼 따스했다.

“어디 안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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