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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09)화 (109/190)

109화

염라의 가호

“S급 토마토.”

염라의 말에 탑 47층에서 있었던 일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되감겨졌다.

[기존 명성치(102585)가 올 스탯으로 환산됩니다.]

[전체 스탯이 102585 상승합니다.]

[전체 스탯 상승으로 등급이 상승합니다. ‘탑 좀 뚫어본 온천의 주인(S)’]

그러니까 나…… 한순간에 S급 헌터가 됐다는 거지?

해독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염라, 이 정도면 성실하다고 칭찬해줘야 할 정도로 토마토라고 부른단 말이지.’

나는 이 근거리에서도 흠잡을 곳 없이 반짝이는 흑색 장발의 남자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왜 뿔이 난 오리입이 된 거지?”

“토마토라더니 입도 달아주셨나 봅니다?”

의문스러워하는 염라를 향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짚었다.

“있다. 여기에.”

가늘게 접히는 염라의 날카로운 눈매가 묘하게 장난스러웠다.

“물리기 전에 손가락 치우시죠, 염라 대왕님.”

“사나운 토마토군.”

그 순간 깨달았다.

염라가 나를 토마토라고 부르는 것을 이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돈가스 괴물이나 돈돈이 같은 별명에 비하면 토마토는 귀여운 수준이니까.

케첩이 아닌 게 어디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염라님!

“일단 좀 놓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염라가 나를 지탱해준 덕분에 머지않아 똑바로 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내 두 다리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라는 날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해야 할 일?’

그게 뭔지도 깨닫기 전에 염라가 내 오른편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까워진 그의 핏기가 도는 입술이 내 상처에 호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엥? 이건 또 무슨 경우지?

황당한 눈길을 보내자 염라가 한쪽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렇게 해주면 아픔이 덜하다기에.”

염라의 말을 듣는 순간 베카에게 내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떠올랐다.

아……. 설마 나랑 베카가 나눈 대화를 들은 건가?

“뭐야? 그래서 상처에 바람을 불어준 거야? 아프지 말라고?”

난 무심결에 웃음을 터뜨렸다.

절대적인 저승의 권력자, 염라대왕이 했다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행동이었다.

“……난 어떤 이유로든 그대가 아프지 않길 바란다.”

본인이 해놓고도 민망한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염라가 부자연스럽게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그대와 있는 편이 저승초보다 약효가 좋으니까.”

그러고 보니 근래에는 염라가 담뱃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너 혹시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나를 토마토라고 놀리면서 푸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반신반의하면서 던진 물음에 염라는 일리가 있다는 듯 날렵한 턱선을 매만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토마토라고 부를 때마다 이름값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값을 매긴다고 못 부를 것 같나?”

아니, 이 정도면 토마토 집착남이야? 뭐야?

염라는 내가 얼마를 부르든 물러날 것 같지 않은 굳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뭐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하시고 본론으로 들어가주시…….”

“아직, 남았다.”

짧게 속삭인 염라가 다시금 상체를 숙였다.

긴 흑발이 창백하게 흰 피부로 흘러내리자 그의 불그스름한 입술이 한층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염라가 상처 부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긴 속눈썹 아래로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며 나를 담았다.

아릿한 감각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자 잠깐 사이에 고통이 사라졌다.

[성좌 ‘저승의 염라’의 가호로 상처가 회복됩니다.]

아, 가호를 쓰려던 거였나?

순간적으로 날 바라보는 염라의 눈빛이 강렬하게 느껴지자 절로 긴장하게 됐다.

“이제 다 나았군.”

“어? 진짜네?”

상처가 난 부위는 정말로 전과 같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지 않은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염라의 가호 한 번에 머리의 상처까지 말끔히 나아 있었다.

언제 봐도 유용한 스킬이었다.

“염라, 혹시 성좌의 가호를 스킬로 얻거나 그럴 순 없나?”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누가 다쳐도 입맞춤 한 번으로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호가 아프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물론 박시우가 아플 때는 사용하기를 망설일 것 같긴 하다만.

박시우에게 입을 맞춘다? 으으…… 상상만으로 나는 몸을 파르르 떨게 됐다.

“불가능하다. 성좌의 가호는 말 그대로 성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이니까. 그대가 성좌가 된다면 모를까?”

“역시…… 그렇겠지. 맞다! 염라, 홍옥의 열매는? 구했어?”

약 항아리 어르신의 반응으로 봐서 홍옥의 열매는 해독제의 재료들 중에 제일 구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제발…….

성스러운 석상의 눈물을 구했어도 재료가 다 모이지 않으면 해독제를 만들 수 없었다.

염라의 옷깃을 꼭 쥐며 그가 홍옥의 열매를 구했다고 말해주기를 몇 번이고 빌었다.

자신을 간절하게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염라가 무심하게 집무실 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강림차사, 홍옥의 열매를 가져와라.”

염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갓을 쓴 강림차사가 나무로 된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나무 쟁반 위에는 붉은 구슬처럼 빛나는 열매 두 알이 놓여 있었다.

“구했구나? 고마워, 염라!”

“좋아하긴 이르다. 그냥 줄 수는 없으니까.”

안도하는 내게 염라는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어차피 그냥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그냥 줄 수 없다면 값은 얼마든지 치를게! 염라, 말해봐!”

난 박력 있게 손을 뻗어 염라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물었다.

“얼마면 돼?”

기세 좋게 소리치긴 했지만 사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설마 억 단위를 훌쩍 넘기면 그때는 어떡하지?

저승에도 할부가 되려나?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저승의 것을 가져갈 때 필요한 대가는 돈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본 건지 염라가 낮게 웃으며 답했다.

“돈이 아니면 뭔데?”

“저승의 규율대로라면 그보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지.”

돈보다 더 큰 대가라고?

“그래서,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닌 염라가 다른 곳도 아닌 저승에서 의미심장하게 질문을 던졌다.

긴장감에 절로 입이 바싹 말랐다.

“그 대가라는 게 뭐야?”

잔뜩 경계하며 묻는 내게 염라는 탁상에 기댄 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그대라고 답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나를 대가로 받치라고?

그제야 약 항아리 어르신이 홍옥의 열매를 구하는 것을 걱정했던 이유를 깨닫게 됐다.

홍옥의 열매의 대가는 결국 살아 있는 자의 영혼이었나?

“그렇다면 저승에 올 텐가?”

염라의 타오르는 눈길이 나에게서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그 말은 내가 죽는다는 거지? 그런 거라면 대가를 치를게. 지호한테 해독제를 가져다줄 수 있게만 해줘!”

내 대답을 들은 염라의 표정이 속을 짐작할 수 없게 모호해졌다.

“동생을 살릴 수 있다면 그대가 죽어도 좋다는 말인가?”

우리 남매 중 지호는 부모님처럼 평생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몸 사리지 않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내가 부모님을 잃은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누나, 난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누나가 밥 굶으면 지호도 굶을 거야!”

“지호는 누나가 웃을 때 제일 행복해!”

지호는 내 곁을 꿋꿋이 지켰다.

‘이번에는 내가 지호를 지킬 차례야.’

“그래, 그렇게 해서 지호를 살릴 수 있다면.”

“……그건 내가 곤란하다.”

“뭐?”

방금만 해도 나한테 저승에 오라고 한 건 염라 자신이 아니었나?

황당해하는 나를 향해 염라가 홍옥 열매가 놓인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대만이 내가 쉴 곳이 될 수 있으니까.”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염라가 내게 덥석 쟁반을 들려줬다.

“가져가라. 서둘러 동생을 살려야 하지 않나?”

쟁반을 건네준 염라가 재빠르게 내게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긴 머리카락에 가린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염라가 나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염라!”

이승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아가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염라를 돌아봤다.

내가 염라의 유일한 쉴 곳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염라, 힘들 때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 네 말대로 내가 네 쉴 곳이 되어줄게! 약속해!”

이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곧장 문을 넘어서 탑 47층으로 돌아왔다.

“봉쇄!”

저승의 문을 닫는 그때였다.

[2단계 스킬을 개방할 때까지 필요한 염라의 ‘ㅅㅈㅎ’ 기억 : 2/3]

[특수 스탯 ‘저승의 염라’의 XX가 500 상승합니다.]

* * *

“염라대왕님, 이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삼대가 덕을 쌓아도 얻기 힘든 홍옥의 열매를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냥 주시다니요?”

강림차사가 눈앞에서 홍옥의 열매 두 개가 증발하는 것을 보며 기겁을 했다.

홍옥의 열매는 목숨을 살리는 약에 들어가는 필수 재료였기에 저승에서도 보물처럼 여겨져 아무나 넘볼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대가는 이미 받았다.”

“대체 무엇을 받으셨다는 말입니까?”

“그대도 듣지 않았나? 난 고작 열매 두 알에 내가 비로소 숨 쉴 곳을 얻었다.”

“저 인간을 특별히 여기시는 대왕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이건 엄연히 저승의 규율에 위배됩니다. 감사에 들어가면 분명히 저승 대신들의 상소가 끊이질 않을 거라고요!”

“……그래서?”

집무실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은 염라가 나지막이 되물었다.

저승조차 차갑게 만드는 염라의 서늘한 음성에 강림차사의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게 닫혔다.

“이 사안에 대해 불만이 있는 자들이 있다면 전부 데려와라.”

탁상에 놓인 기다란 담뱃대를 들어 입에 문 염라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내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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