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염ㄹ……!
“베카,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괜찮은지 보려고 했다. 그것뿐이다.”
이성을 되찾은 듯한 베카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
나는 베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 이리 내.”
“…….”
“어서.”
한껏 낮아진 목소리에 베카가 마지못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내보였다.
그의 손은 어딘가에 심하게 긁혔는지 찢긴 상처들로 가득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픔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석상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을 때…….
[‘탑의 주인’이 시스템의 설정값을 어기고 47층 문을 뚫고 들어가려 합니다.]
문을 뚫고 들어가려고 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베카의 손에 있는 상처들은 탑 47층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다가 생긴 것 같았다.
“이런 것쯤은 내게 상처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베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내게는 그 상처들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만큼 베카가 날 걱정했다는 거니까.’
“미안해, 베카.”
나는 몸을 낮춰 베카와 눈높이를 맞춘 뒤, 그의 상처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히 감싸 호 하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어릴 때 내가 다치면 엄마가 상처를 이렇게 ‘호’ 하고 불어줬거든. 그러면 아픈 게 덜해지는 것 같았어.”
내 숨결이 닿자 베카가 작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제 손을 소중히 쥔 나를 바라보는 베카의 얼굴은 불이 난 것처럼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게 너한테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베카의 손이 내 머리 위에 닿았다.
곧이어 호 하고 입김을 불어 넣는 소리와 함께 이마로 따스한 숨결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보다 네가 더 많이 다쳤다.”
“그래서 아프지 말라고 호 불어준 거야?”
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 상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성좌였다면 가호로 너를 치료해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못하는군.”
그 말을 하는 베카의 얼굴은 여전히 무미건조해 보였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무척 슬퍼 보여서 괜스레 나까지 울컥했다.
“가호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 베카가 방금 호 해줘서 하나도 안 아파!”
“정말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베카는 그 어느 때보다 귀엽고 순진무구해 보였다.
“당연하지. 조금만 있으면 싹 나을걸?”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자신하며 답했는데 베카가 내 이마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손으로 다친 부위를 만져보니 베카의 말대로 피가 묻어 나왔다.
“아악! 피, 피가!”
“거짓말쟁이.”
‘윽!’
날 보는 베카의 눈빛이 매서웠다.
대충 속아 넘어갈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나?
“전쟁광 말대로 온천에 가서 치료를 받아라. 인간은 약해서 피를 조금만 흘려도 죽는다고 들었다.”
“베카, 그래도 나 방금 무려 SSS급 석상도 쓰러트렸다구! 이 정도는 괜찮아. 이제 재료 하나만 구하면 끝나거든. 그러니까 베카는 먼저 온천에 가서 치료를 받아. 나도 금방 따라갈게.”
베카를 설득시키고 있는 그때였다.
마탑과 가까운 하늘에서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온천 사장님, 들리십니까? 또 뵙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성기 음질 때문에 조금 다르게 들리긴 했지만 저건 분명히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박시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드니 하얀색 헬기를 탄 채로 확성기를 들고 있는 박시우가 보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집필의 길드장 박시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박시우는 공중에서 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부디 저희 집필의 동료가 되어주십시오! 외쳐! 갓 온천 사장!
―갓 온천 사장!
박시우가 선창하자 주변에 떠 있는 두 개의 헬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이게 머선 일이고!’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밈 조건 반사가 작동했다.
―쏴리 질러!
―악!!!
적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함성은 여느 아이돌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네 호적 메이트가 아주 물건”이라며 배를 잡고 웃습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박시우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함이 마음에 들었다”며 “집필로 가자”라며 “갓집필!”을 외칩니다.]
‘샤레니안, 그 입 다물지 못해?’
[서늘한 아우라에 눌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순순히 입술을 잡아 봉합니다.]
박시우랑 엮이는 건 호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와중에도 박시우 일당이 탄 헬기는 점점 내가 있는 마탑으로 가까워졌다.
“베카, 혹시 저 헬기 탑 안으로도 들어올 수 있어?”
황당한 눈빛으로 박시우 일행을 지켜보고 있던 베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인이 뚫은 층이 아니면 시스템의 보호막을 통과할 수 없다.”
듣던 중 다행이었다.
‘그렇담 가까이서 마주칠 일은 없단 소리네.’
―Hello, Ms. Onsen!(안녕, 온천 사장!)
안심하기가 무섭게 박시우네 헬기 뒤로 까만 헬기가 따라붙더니 검정색 선글라스를 쓴 금발의 여자가 마이크에 대고 내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건 또 머선 일이고!’
헬기에 달린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허공을 울렸다.
―We are the best guild revolution in America. I came by portal to meet you. We want to cast you.(우리는 미국의 최고 길드 혁명이다. 난 온천 사장을 만나기 위해 포털을 타고 왔다. 우리는 너를 캐스팅하길 원한다.)
‘미국 최고의 길드가 나를 캐스팅하러 왔어? 대체 탑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실시간 스트리밍의 여파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게 바다 건너 미국까지 갈 줄은 몰랐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훗, 미국까지만 갔다고 생각하냐”고 물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몸서리치게 불길하구나, 운수야……?’
―노! 아이 돈 원트 잇! 온천 사장 이즈 코리아의 것! 오케이?
운수의 말에 불안감이 스치는 그때, 박시우가 혁명의 길드장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박시우 입만 좀 막아줘!’
박시우의 난잡한 콩글리쉬에 대한 부끄러움은 나와 집필 길드원들의 몫이 됐다.
그때 그들의 뒤로 빨간색 헬기와 모양이 조금 다른 헬기가 연이어 날아오는 게 보였다.
두 헬기는 다른 헬기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긴 현수막을 펼쳤다.
그 현수막에 쓰인 마치 급하게 번역기를 돌린 듯한 번역체 문구를 본 나는 조용히 47층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다들 미친 게 분명했다.
그것도 글로벌 단위로.
‘사랑한다! 온천 사장! 일본에 와라! 대규모 온천 지어준다!’
‘온천 사장 중국에 와라! 돈 준다. 많이! 세운다! 빌딩!’
* * *
“베카, 어르신한테 가 있어. 난 저승에 들렀다가 온천으로 갈게!”
수온은 헬기를 타고 몰려든 인파들의 눈을 피해 저승의 문을 열기 위해 47층으로 들어갔다.
수온을 그윽히 바라보던 베카가 문득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
‘이제껏 마탑의 주인으로 살아왔어도 치유 마법은 배워본 적이 없다.’
베카의 머릿속에 있는 주문들은 전부 대상을 파괴하거나 정신을 지배하는 전투 마법뿐이었다.
‘내가 다칠 일이 없으니 치유 마법을 알 필요는 평생 없다고 생각했는데.’
수온의 상처를 치료해주지 못하고 그냥 보낸 것이 베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베카님, 왜 또 여기 나와 계시는 겁니까? 또 온천에 가신 줄 알고 한참을 찾으러 다니지 않았습니까?”
“……치유 마법.”
베카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예?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입니까?”
“마탑의 도서관에서 치유와 관련된 마법서를 전부 가져오도록 해라.”
“아니, 대체 탑의 최종 보스인 베카님께서 치유 마법 따위를 배워서 어디에다 쓰시려고요?”
탑의 최종 보스 베카와는 어울리지 않는 주문에 루카가 격하게 반응했다.
풀이 죽어 있던 베카가 수온의 핏자국이 묻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 * *
헬기들을 피해 47층 안으로 피신한 나는 저승의 눈을 불러들였다.
“개방!”
손을 들어 보석을 떨어뜨리자 커다란 눈의 형상이 떠오르며 47층 가운데에 저승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홍옥의 열매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열린 문으로 들어섰다.
“염ㄹ……!”
염라를 부르던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에 염라가 서 있었으니까.
“악!”
놀란 내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려는 그때, 염라의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아 나를 지탱했다.
“그대는 정말 어디로 튈지 예상을 못하겠군.”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나와 눈높이를 맞춘 염라의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곡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S급 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