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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03)화 (103/190)

103화

나이스! 해순이!

“수온 씨, 아직 계셨네요?”

“아…….”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현정우가 들어오자마자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시우가 내게 계속해서 뭔가 말하려는 현정우의 목에 강압적으로 팔을 두르며 환하게 웃었다.

“정우야, 우리 오랜만에 남자들만의 진실한 대화나 나눠볼까?”

“예? 전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

“걱정하지 마. 곧 뭐든 말하게 될 테니까. 하하하하하!”

박시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기어코 현정우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순간 현정우로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 생각났다.

문득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을 때 그의 상태가 전부 물음표로 표시되었던 이유.

나는 곧장 약 항아리 어르신의 안경을 꺼내 쓰고 현정우를 바라봤다.

[체력 : 203300/203321 | 마나 : 940000/945230 <상태 : 좋음>]

어라? 이번에는 제대로 보이잖아?

지난번에 물음표는 오류였나?

“아, 잠깐만요! 형! 지호야, 시우 형 좀 말려봐, 악!”

평소 같으면 박시우를 말리고 나섰을 지호도 이번만큼은 못 본 척 현정우를 외면했다.

알림창 뒤로 비치는 절박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그는 박시우에게 이끌려 복도로 사라졌다.

나는 현정우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도 찜찜한 기분을 채 지울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고 미리 손을 써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누나, 그 안경은 뭐야? 못 보던 건데……. 누나, 시력 좋잖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 지호가 내 안경을 보며 물어왔다.

현정우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지호를 잠시 잊고 있었다.

“아, 이거? 패션용 안경이야. 누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을 해줘서. 어때?”

“누가?”

지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호는 내 거짓말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그 반응도 이해가 갔다.

지호도 내게 가족 외에 별다른 인간관계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라고 둘러대야 거짓말이 먹힐까…….

그때, 막막한 동굴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해순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물을 들이켜다가 사레에 걸려 거친 기침을 토해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해순이라는 이름에 포복절도합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배를 잡고 웃다가 성좌 ‘온천의 지배자’에게 “이참에 그냥 개명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합니다.]

“맞다. 그 누나 집에서 지낸다고 했지?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면 불편하지 않아?”

지호는 내가 낯선 곳에서 지내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 해순이가 조신하고 가정적이어서 뭐든 잘해줘.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도 직접 만들어준다니까? 진짜 내가 남자였으면 바로 결혼했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조신하고 가정적이라는 말에 “여기 이분이 바로 이 시대의 조신남”이라며 땅을 치며 웃습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누구 마음대로 결혼이냐”며 툴툴댑니다.]

[‘탑의 주인’이 곧장 ‘약 항아리(EX)’에게 ‘온천 돈가스 만드는 법’을 수강 신청 합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먹을 것으로 유인하는 자를 함부로 믿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며 “그중에 대다수가 나쁜X”이라고 충고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칭호 ‘먹을 걸로 유인하는 나쁜X’을 획득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 : ???]

“누나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 보니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나 보네. 그래도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말해. 바로 호텔 예약해줄 테니까.”

“지금은 해순이랑 지내는 게 더 좋아. 혼자서 집에 있을 땐 이따금씩 적적했는데 누구라도 같이 있으니까 즐겁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면 온천에서 지내고 난 뒤로는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와, 방금 나 좀 질투 나려고 했다!”

“갑자기 웬 질투?”

“누나, 방금 완전 행복하다는 듯이 웃었거든. 그렇게 웃는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해순이 누나가 진짜 좋은 분이시긴 한가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난 복어처럼 볼을 부풀린 지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해순이 누나한테 밀린 것 같아서 질투도 나지만 누나한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조금 안심이 되기도 하고……. 콜록!”

말을 끝맺지 못한 지호가 다시금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체력 : 203300/203211 | 마나 : 2/955270 <상태 : 위험 / 상태 이상으로 회복 불능>]

지호의 몸 상태를 나타내는 알림창이 붉은색으로 빛났다.

상태 이상으로 회복이 불능하다는 건 지호의 회복을 막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분명했다.

‘안경으로 병명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안경테를 클릭하듯이 두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해령이 시키는 대로 안경테를 만지는 척하면서 살짝 두드리자 지호의 상태를 나타내는 창이 넓게 커졌다.

[상태 이상 정보 : ‘지옥귀의 저주’로 마나 회복 불능]

[※경고 : 제한 시간 내 마나를 회복하지 못할 시 사망 <제한 시간 : 24시간 39분 57초>]

‘……지호가 죽는다고?’

“누나,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어르신의 안경이 내린 진단에 절망하는 나의 어깨에 지호가 손을 얹었다.

지호의 말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인 그때였다.

[!!히든 아이템 ‘약 항아리의 물약 제조서(EX)’가 ‘약 항아리의 안경(EX)’이 내린 진단에 반응합니다. [……펼쳐보기]!!]

그래! 나한테는 어르신의 물약 제조서가 있었어!

현대 의학은 지호를 낫게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약 항아리 어르신의 비법서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지호야, 몸도 안 좋은데 누워서 쉬고 있을래? 누나가 필요한 물건 좀 사올게.”

“고마워. 누나.”

나는 침대에 지호를 눕힌 뒤 잠자리를 매만져주고 곧바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약 항아리의 물약 제조서(EX)’ 345페이지]

[상태 이상 ‘지옥귀의 저주’의 해독제 재료 및 제조법]

[재료 : 저승의 홍옥 열매 2개, 새살 1개, 성스러운 석상의 눈물 한 방울]

[제조법 : 약 항아리에 저승의 홍옥 열매와 새살을 넣어 섞은 뒤, 성스러운 석상의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펼쳐보기]를 누르자 지호의 상태 이상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를 만드는 법이 열렸다.

문제는 내가 그 재료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르신이라면 재료에 대해 아실 거야!

“시…….”

제한 시간 안에 해독제를 만들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대강 확인하고 암호를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수온 씨,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바로 뒤에서 현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틈에 나타난 거지?

제조법에 한눈에 팔려 있던 탓이었을까.

나는 현정우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잠시 집에 다녀오려고요. 그런데 박시우는 어디 갔어요? 같이 나가셨잖아요.”

“아…….”

분명 현정우와 같이 나갔는데 박시우가 보이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다.

“시우 형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셨어요.”

잠시 말끝을 흐리던 현정우가 웃으며 답했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현정우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찝찝한 구석이 많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볼 새도 없이 지금은 온천으로 가는 게 먼저였다.

“바쁘지 않으시면 지호의 병에 낫게 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으실래요? 제가 들은 정보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때 현정우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다른 주제였다면 딱 잘라서 거절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주제였다.

‘무슨 속셈이 있는 걸까? 지호가 나을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내 정체를 의심받을 테고……. 그래도 지호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냥 내가 온천 사장이라고 확 밝히기라고 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그때였다.

등 뒤로 낯익은 목소리가 공간을 또렷하게 채우며 내 의식을 깨웠다.

“뭘 꾸물대고 있는 거지?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인간의 차림새를 한 해령이 매서운 눈초리로 현정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스! 해순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해순이라는 호칭에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나준 해령을 칭찬하려던 거였는데 도리어 그의 한쪽 눈썹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분은 남자 친구?”

해령의 따가운 시선에도 현정우는 꿋꿋이 미소를 잃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일일이 대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박시우와 지호가 괜한 오해를 해 난동을 부릴까 하는 걱정에 일단 대답하기로 했다.

뭐든 확실하게 해서 피곤한 일은 안 만드는 게 좋겠지.

“남자 친구는 아니…….”

그때 해령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현정우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양팔을 두른 채 기대어 선 해령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곧 그렇게 될 거라고 해두지.”

* * *

조금 전, 박시우는 현정우를 끌고 병원의 발코니로 데리고 나왔다.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현정우를 독대하는 박시우에게서는 병실에서의 장난스러운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번에 지옥귀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박수온한테 따로 연락한 것도 그렇고. 뭘 숨기는 건지 똑바로 말해.”

“형, 이래서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귀찮아요.”

“뭐?”

선한 웃음을 짓고 있던 현정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푸른색과 핑크색이 반반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던 현정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손이 많이 가거든.”

현정우가 푸른색의 정장 주머니에서 느낌표 모양이 새겨진 카드를 꺼내 들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기억 삭제.”

[스킬 ‘기억 삭제’로 대상의 기억 일부가 삭제됩니다.]

카드가 공중에 떠오르는 순간,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박시우의 모든 행동이 멈췄다.

“조금만 기다려요. 모두가 만족할 만큼 아주 재미난 쇼를 보여줄 테니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현정우가 발코니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굳은 듯이 서 있던 박시우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눈이 은색으로 빛나면서 왼쪽 눈밑에 눈물점이 생겨버린 그에게서 신비롭고 압도적인 포스가 흘러나왔다.

흡사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진 분위기의 박시우가 여유로운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카드를 들여다보던 그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역시 그 녀석이었나?”

마치 이 모든 일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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