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들만의 은밀한 메신저
어린 시절, 박시우와 지호가 내가 냉장고에 넣어둔 초코 푸딩을 몰래 꺼내서 나눠 먹다가 들킨 일이 있었다.
아껴둔 초코 푸딩을 먹지 못하게 됐다는 슬픔에 울먹이던 나는 홧김에 그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누나, 지호가 잘못했어!”
“박수온, 문 좀 열어봐. 초코 푸딩 아직 조금 남았어. 이거 너 줄게.”
“저리 가! 내가 초코 푸딩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박시우! 박지호! 이 오징어쭈꾸미들아!”
“미안해, 오빠가 오징어 할게.”
“지호는 쭈꾸미야…….”
계속되는 사과에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나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초코 푸딩을 잃은 것도 슬펐지만 당시에는 누구보다 믿었던 둘이 내 소중한 간식을 몰래 먹었다는 것에 큰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속상한 마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펑펑 울기까지 했더랬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쯤 지났던 걸까? 바깥에서 연신 사과를 해대던 박시우와 지호 역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렇게 울다 지쳐서 잠시 잠들었던 것 같았다. 소란스러움에 다시 깨어보니 집 안이 한바탕 뒤집혀 있었다.
“지호랑 시우 거기에도 없어요?”
급하게 거실로 나오자 엄마와 아빠가 다급한 얼굴로 지호와 박시우를 찾고 있었다.
한참 뒤 엄마와 아빠는 한결 걱정을 내려놓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수온아, 오빠랑 지호 찾았대.”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서 찾아간 곳은 옆 동네의 마트였다.
“아줌마, 초코 푸딩 만들어주시면 안 돼요? 우리 누나한테 초코 푸딩 줘야 하는데……. 저 꿀꿀이에 돈도 많아요. 이거 다 드릴 테니까 초코 푸딩 주세요.”
“제 돈돈이도 가져왔어요. 돈돈이 배 가르면 아프니까 통째로 다 드릴게요. 그러니까 초코 푸딩 주세요.”
그곳에 도착하자 그간 한두 푼씩 아껴 모아둔 돈을 돼지 저금통을 캐셔에서 내밀며 초코 푸딩을 만들어달라며 사정하고 있는 지호와 박시우가 보였다.
“오빠, 지호야!”
나는 둘을 보자마자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누나, 여기에도 초코 푸딩이 없어. 미안해! 지호는 초코 푸딩도 못 구하는 오징어야…….”
“돈돈아, 오빠가 잘못했어. 대신 내가 크면 초코 푸딩 백 개 사줄게.”
사정을 들어보니 둘은 내게 줄 초코 푸딩을 사기 위해서 동네의 마트를 헤매고 다녔지만 아무 데서도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먼 동네까지 오게 된 거라고 했다.
“나 이제 초코 푸딩 필요 없어! 둘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지지 마.”
“누나, 지호는 오징어라도 행복해. 누나가 내 누나라서 고마워!”
“나도 돈돈이의 쭈꾸미로 살게!”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지호와 박시우의 손을 붙잡자 그들이 나를 힘껏 안았다.
누가 찍은 사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서로를 부둥켜안은 그 사진은 한때 ‘S급 헌터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감동과 가족애가 흘러넘치던 극적인 화해의 순간이었다.
그때야 우리 셋 다 어렸다 치고, 지금은 뭔데? 왜 이 둘은 아직까지도 이렇게 한결같은 건데?
내 앞에 벌서듯 무릎 꿇고 두 손을 든 채 울상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징어랑 쭈꾸미 씨, 알겠으니까 그만 일어나시죠. 누가 볼까 봐 무섭네. 나 집필 팬들한테 달걀 맞는 거 보고 싶어?”
박시우와 지호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로 세차게 저으며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랭커들인데 무릎이 이렇게 값싸서야…….
“누나, 거짓말해서 미안해. 아무리 누나를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해도 내 생각이 짧았어.”
“일단 침대에 누워. 몸 상태도 안 좋으면서 걱정시키지 말고.”
내가 설득을 시키고서야 지호는 순순히 침대로 올라가 앉았다.
나는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세모 눈을 뜬 채 지호와 박시우를 번갈아 봤다.
시선이 닿을 때마다 둘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이것들, 어지간히 쫄렸는지 진땀까지 흘리고 있네.
“나 이제는 어릴 때처럼 약하지 않아, 지호야. 그리고 너 역시도 힘들고 두려울 때가 있잖아? S급 헌터라고 해서 혼자서만 짐을 지려고 하지 말고 힘든 일이 있으면 누나한테 의지해줬으면 좋겠어.”
“꼭 청순이 누나처럼 말하네.”
지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급격한 갈증에 침대맡의 물컵을 들어 마시는 동작이 마치 기름칠이 덜 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오~ 청순이 누나가 누군데?”
낯선 여자의 이름에 박시우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있어. 온천 사장님이랑 누나만큼이나 멋진 사람.”
“푸헙! 컥…… 콜록콜록.”
연이어 나온 내 부캐들의 이름에 나는 마시던 물을 코와 입으로 동시에 뿜어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 괜찮아?”
놀란 지호가 내게 티슈를 건네줬다.
“괘, 괜찮아. 갑자기 사레가 들어서 그래.”
난 태연한 척 티슈를 받아들며 얼굴을 닦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온천 사장님이랑 박수온을 같은 선상에 두는 건 아니지.”
그때, 박시우가 선 넘지 말라는 듯이 얼굴을 굳혔다.
“워― 미안한데 그 꼴을 하고 날 보지 말아줄래?”
난 손바닥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파란색 렌즈 때문에 눈이 충혈된 채 정색을 하며 나를 돌아보는 박시우의 얼굴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잘 들어봐. 내가 파란 눈을 하면 호러지만 온천 사장님은 천상계 외모 그 자체시라니까?”
얼굴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박시우는 렌즈를 빼내면서도 입이 마르도록 온천 사장을 예찬했다.
“우리 온천 사장님의 자태가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웠는지! 아마 이슬밖에 안 드시고 화장실도 안 다니실 거야.”
그 성스러운 온천 사장이 너랑 같이 닭다리를 두고 싸우고 너랑 같은 화장실을 쓰고 있단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박시우는 첫 입덕을 경험한 소년처럼 동경에 빠진 얼굴을 했다.
“대체 온천 사장이 왜 좋은 거야?”
“멋있잖아! 네가 못 봐서 그래. 온천 사장님이 부채를 한 번 휘두르면 몇백 만의 지옥귀들이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더라니까? 그야말로 극락이 펼쳐진다, 그 말씀!”
온천 사장이 나인 걸 알면 바로 나락이 펼쳐질 텐데…….
미안하지만 사실을 알게 되는 즉시 실망할 박시우를 떠올리자 벌써부터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짧긴 했지만 이번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는데 글쎄 온천 사장님이 나한테 뭐라고 하신 줄 알아?”
당시 지옥귀를 해치우면서 균열까지 막아내느라 너무 정신이 없었던 탓에 기억에 남는 게 딱히 없었다.
“뭐라고 했는데?”
“방해만 되니까 당장 꺼지라고. 대박 포스 쩔지 않냐?”
……대체 어디서 포스를 느낀 건데?
“지호야, 니 눈에도 박시우가 제정신 아닌 것…….”
“랭커 1위 헌터한테 다짜고짜 꺼지라고 하다니 멋져!”
지호는 심지어 입까지 틀어막으며 감격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이상한 건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충고하는데 덕질은 그쯤 해라. 그러다 나락 간다.”
“나락도 락(樂)이야.”
진심으로 충고를 건넸지만 박시우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 됐어!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했어.
이제 뒷일은 박시우의 몫이었다.
“그런데 현정우는 어떤 사람이야?”
내 물음에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그게 왜 궁금해?”
내게 질문하는 지호의 눈매가 사뭇 묘하게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사실은 현정우가 흑막 성좌의 계약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물어본 거였지만 이 둘에게 아직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문자가 왔더라고. 현정우 씨한테서.”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병실의 문이 열리고 웃는 얼굴의 현정우가 나타났다.
“여러분, 제가 돌아왔습니다!”
박시우와 지호의 싸늘한 시선이 현정우에게 닿았다.
병실 안에는 전에 없던 살기가 맴돌았다.
* * *
수온의 동생이 쓰러졌다는 소식에 온천의 성좌들은 실시간으로 그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EX급 온천을 이용하는 손님들에게는 수온이 모르는 그들만의 단체 메신저 ‘온천 손님 단체방’이 따로 존재했다.
“문자가 왔더라고. 현정우 씨한테서.”
수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체 메신저창에 메시지가 분주히 올라왔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번호를 알아내서 먼저 문자 하는 거 그린 라이트 아닌가요?”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22222”라며 격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4444”라며 죽을 사(死)를 외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현정우에게서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며 수온의 휴대폰에서 현정우의 번호를 차단할 계획을 세웁니다.]
[‘탑의 주인’이 “탑 46층으로만 들여보내주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만들어주겠다”며 사신의 낫을 손수 갈고 닦습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명부에 현정우 이름을 쓰려다가 강림차사에게 제지당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다들 진정하라”며 조용히 부채를 펼쳐 듭니다.]
[가이드 ‘영계’가 온천을 박차고 나가려는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뜯어말립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가이드 ‘영계’를 매몰차게 뿌리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온천 손님 단체방’에서 퇴장합니다.]
[앞날을 내다본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지금이 곧 폭풍전야”라며 긴 한숨을 내쉽니다.]
[낙담한 가이드 ‘영계’가 작은 상을 꺼내와 혼술을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