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약 항아리(EX) : ?]
까칠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섬세하게 나의 상태를 살피는 보석 같은 눈.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피부.
모자와 금줄이 달린 동그란 안경을 쓰고도 가려지지 않는 몽환적인 얼굴.
“……해령?”
물구나무를 서고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봐도 새벽하늘처럼 처연하고 새벽이슬처럼 청량한 외모를 가진 건 해령뿐이었다.
“그냥 해본 말인데 왜 또 울려고 해?”
어째서일까?
단지 해령의 얼굴을 본 것뿐인데 나는 묘한 안도감에 휩싸여 울컥했다.
박시우나 지호가 다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그들을 지키는 건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와 나란히 지키고 서 있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뭉근하게 퍼지는 따듯함에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해령은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다 말고 “뭐, 주인이 운다고?”라며 관심을 보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올해의 명장면”이라며 흑역사를 남길 각오를 다지며 카메라를 듭니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누가 토마토를 울렸냐"며 보고 있던 명부의 맨 뒷장을 열며 슬며시 붓을 듭니다.]
이놈의 성좌들 때문에 우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겠네.
덕분에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울긴, 누가 울어? 일단 염라, 진정하고 붓부터 내려놔…….’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저 녀석이 토마토즙을 만든 범인 아니냐”며 성좌 ‘온천의 지배자’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붓에 먹물을 묻힙니다.]
‘누가 토마토즙을 만들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붓으로 뭘 쓰려고? 해령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당장 멈춰!’
[성좌 ‘저승의 염라’가 마지못해 붓을 내려놓으며 말없이 나를 주시합니다.]
시스템창의 메시지만으로는 상황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염라가 어떤 표정으로 날 보고 있을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심히 민망해졌다.
‘나 안 울어. 진짜 안 운다고. 봐!’
난 울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보였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평생의 흑역사를 박제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며 입맛을 다십니다.]
‘현정우한테는 있던 공감 능력이 왜 나한테 오면 사라지는 건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정확히는 너한테만 없는 것”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그게 더 열 받아!’
성좌가 계약자 한정으로 특혜를 주는 건 봤어도 공감 능력을 제거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저승의 붓은 먹물이 묻으면 오랫동안 마르지 않는다”고 경고하며 명부로 눈을 돌립니다.]
“하마터면 네 덕분에 저승 구경을 할 뻔했군.”
성좌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해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체를 낮추며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 나만 본 것으로 해두지. 네가 울었다는 것은.”
해령이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가 봐도 내 약한 모습을 봤다는 걸 즐기는 듯한 미소였다.
“당연하지. 그러면 네가 죽다 살아난 날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것도 퍼질……읍!”
해령의 흑역사를 꺼내들어 맞서자 그가 다급하게 내 입술을 부여잡았다.
“거기까지.”
“푸후후후.”
난 해령에게 입이 잡혀 오리 주둥이가 된 와중에도 얄미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결국 내게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온천 밖으로 나온 거야? 그 옷은 또 뭐고?”
“말하지 않았나? 성좌도 종종 사람 행실을 하고 인간계에 나타나기도 한다고. 원래 차림새 그대로 움직였다면 이목을 끌었을 테니 샤레니안에게서 인간의 옷을 빌렸다.”
나는 일반적인 사람의 옷차림을 갖췄다는 해령을 위아래로 쭉 훑어봤다.
음, 인간의 옷차림이 맞긴 한데…….
“저 사람 뭐야? 배우인가?”
“은발에 눈이 파랗던데 혹시 온천 사장 코스프레 한 거 아닐까?”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 처음 봐. 야, 야. 사진 찍어달라고 해볼까?”
역시나…….
주변 반응을 보니 주목받는 걸 피하겠다는 해령의 계획은 일찍이 틀어진 것 같았다.
귀걸이도 안 했고, 외모에도 큰 변화가 없는 걸 보니까 패시브 영향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각인하면 지호도 날 못 알아보던데……
어쩐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샤레니안은 어째서 인간들 옷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 녀석도 성좌잖아?”
“말하지 않았던가? 샤레니안은 자주 인간계로 내려온다고. 말하고 보니 근래 들어서는 통 못 본 것 같지만…….”
“그렇구나.”
성좌가 인간화한 것은 처음 본 터라 신기했다.
그럼에도 해령의 얼굴은 평범한 후드티에 슬랙스를 입었을 뿐인데 ‘이게 바로 천상계 비주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자기주장이 몹시 강한 얼굴이랄까…….
“그래서 누추하신 분이 귀한 곳에는 어쩐 일로?”
“그 반대여야 하지 않나?”
“앗, 실수.”
“전혀 실수 같지 않은 얼굴이군. 뭐, 됐다. 좋은 말 듣자고 온 건 아니니까.”
다리가 저리지도 않은지 눈높이를 유지한 채 해령은 자신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손수 내게 씌워줬다.
해령의 가는 손가락이 안경에 걸리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이제 됐군.”
[알 수 없음]
(※인간은 성좌의 상태를 볼 수 없습니다.)
“이건…….”
해령의 얼굴 위로 낯익은 상태창이 떠올랐다.
“약 항아리의 안경이다. 이걸로 동생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 원인을 알 수 있을 거다. 이 안경이 보지 못하는 병은 없거든.”
약 항아리 어르신의 안경을 쓰면 병명을 알 수 있다는 거구나?
그런 놀라운 효과가 있다니……. 처음 안 사실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지호가 마나를 회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야!
“정말 고마워, 해령.”
지호를 낫게 할 방법이 생겼다는 기쁨과 해령에 대한 고마움에 무심결에 나는 두 팔로 그를 덥석 안았다.
“나 이걸로 지호의 병이 뭔지 알아내서 돌아올게!”
의지에 불타오른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잠시 굳어 있던 해령이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급히 말했다.
“안경 간수 잘하고, 들키기 싫다면서. 네 정체.”
한쪽 귀를 감싸 쥔 해령이 살며시 나와 눈을 맞추며 당부했다.
이건 좀 의외의 반응인데?
“웬일이야? 그런 말을 다 하고. 성좌들은 내 정체가 탄로 나길 바라던 거 아니었어?”
“그렇게 되면 더 성가신 일이 늘어날 것 같아서. 지금만 해도 넷…….”
“넷?”
당황한 것처럼 말끝을 흐리던 해령이 잠시 헛기침을 하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온천 손님 넷도 감당하지 못해서 손이 많이 가는데 정체까지 알려지면 더 성가셔진다는 말이었다.”
어쩐지 좋은 말만 해준다 했다.
“으이구, 알겠어. 안경 조심! 그럼 다녀올게!”
더 있다가는 왠지 잔소리를 한 마디 더 끼얹지 않을까 싶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해령에게 재빠르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지호가 입원해 있는 109호로 향했다.
* * *
수온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해령은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긴 다리를 걸쳐 앉았다.
“정말 무신경하긴…….”
해령은 자신을 껴안던 수온을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아니, 어쩌면 내가 과하게 의식하는 걸지도?’
“안는 것 정도는 샤레니안하고도 하잖아?”
샤레니안이 일방적으로 해령에게 들러붙는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경우도 더러 있었다.
수온은 온천에 있는 모두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듯했으니 와락 껴안는다고 딱히 이상하게 여길 게 없었다.
‘이상한 건 박수온이 아니라 나다.’
수온이 동생이 아프다는 문자를 받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해령은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급해도 주인의 허락 없이 물건을 빌려오는 일은 없었는데, 마침 코까지 골며 잠든 약 항아리를 깨울 수가 없어 무작정 안경을 들고 나와버렸다.
‘나답지 않게 여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기뻐하며 자신을 껴안던 수온을 떠올리자 입가에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진짜 미치겠군.”
해령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수줍음에 붉어진 귀를 손으로 감싼 채로.
* * *
109호실 앞에 선 나는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옷주머니 속에 넣었다.
평소엔 쓰지도 않던 안경을 끼고 들어가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적절한 때에 맞춰서 꺼내 쓰자.
그 참에 현정우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같이 알아보는 게 좋겠어.
빨리 흑막 성좌의 계약자가 누군지를 알아내지 못하면 또 언제 지옥귀 사태나 던전의 바나나가 갑자기 흑화한 일처럼 위험한 일들이 벌어질지 몰랐다.
더군다나 지옥귀 사태는 나뿐만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희생될 뻔했어.
지호가 회복되면 본격적으로 흑막 성좌에 대해서도 알아보자고 생각하며 병실의 문을 여는 그때였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병실 안을 돌아다니던 지호와 박시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쿵!
두 남자의 무릎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