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성좌의 멱살을 잡아버렸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이 괴물!”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작고 여린 남자아이의 꿈을.
작렬하는 오전의 태양 빛을 닮은 황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소년은 몸을 웅크린 채 주저앉아 던지는 돌을 묵묵히 맞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쟤는 저주받아서 우리랑 눈동자 색이 다른 거라고!”
“맞아, 네 옆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진다고 그랬어! 네가 쏟아내는 말은 전부 저주라고 말이야! 너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서 쓰러졌잖아. 네가 전날 그랬다며, 내일이면 느티나무가 죽을 거라고. 불길해!”
“너네 엄마, 아빠도 널 끔찍하게 싫어한다면서?”
어떤 모욕적인 말에도 반응하지 않던 소년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부모님 얘기를 꺼낸 아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매우 화가 난 것만은 분명했다.
“히익! 저주받은 눈이다!”
“당장 고개 숙이지 못해?”
무리를 지은 아이들은 또다시 황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뭐야, 아무리 애들이어도 그렇지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아무리 꿈이라도 여럿이서 하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지!
정의감에 불타오른 나는 소년의 앞으로 곧장 달려가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날아오는 돌멩이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소리쳤다.
“야, 너희들 당장 멈추지 못해?”
“넌 또 뭐야?”
그러게. 날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주기로 했다.
“난 돈가스 괴물이다!”
“돈가스 괴물? 돈가스가 뭐야?”
한껏 음산하게 웃으며 겁을 줘보았지만 그 아이들은 돈가스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들의 옷이 조금 이상했다.
조선시대에나 입을 법한 차림이었달까?
그렇다면 아직 돈가스가 없는 시대인 건가?
“그 앤 저주받은 녀석이라고! 가까이하면 너도 위험해질걸?”
등 뒤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언뜻 봐도 흙투성이에 얼굴은 성한 곳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은 아닌 것 같았다.
어른들은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거야?
소년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나에게 박시우와 지호가 없었다면 나 또한 이 소년처럼 방치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내 눈에는 이 아이보다 너희들이 더 불길하게 보이는데? 한 아이를 여럿이서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폭력까지 써?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왕년에 사악하기로 동네에서 좀 유명했거든? 이 아이를 괴롭히면 너희들을 다 잡아먹어주겠다!”
해령의 각인을 쓰며 겁을 주자 아이들의 얼굴이 일제히 새파랗게 질렸다.
“저 여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어! 귀신이다!”
“괴물이야! 돈가스 괴물이 나타났다!”
순식간에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로 변한 나를 본 아이들이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
역시 어린애들은 단순하다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등 뒤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날 도와준 거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너도 나처럼 저주받은 괴물이 되어버릴 텐데…….”
“세상에 괴롭힘을 받는 게 당연한 아이는 없어야 하니까.”
내 말에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작은 어깨가 떨렸다.
“이상한 녀석.”
“이제 괜찮아. 내가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우는 것조차 맘 편히 하지 못하는 그 소년이 너무 안쓰러워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아이를 두 팔로 감싸 안아 다독여줬다.
그때였다.
“부채의 꽃잎 한 장이 사라졌다더니만 여기에 와 있었군.”
갑자기 소년에게서 성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너 목소리가…….”
“쯧, 쓸데없는 것을 보여줬군. 돌아와라.”
순간 기다랗고 보드라운 손이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꿈이라기에는 생생한 감촉이었다.
“돈가스 괴물이라니……. 정말이지. 이상한 녀석.”
처음 들어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 * *
“일어나라. 돈돈.”
잠결에도 돈돈이라는 호칭은 귀에 정확히 꽂혔다.
“야! 박시우,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반사적으로 손이 나간 나는 그대로 멱살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라? 이건 재수 없는 박시우의 얼굴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까 나 어제 온천에서 잠들었었지?
“잠이 덜 깬 모양이군.”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에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내려보고 있는 잘 다듬어진 해령의 얼굴이 보였다.
“네가 왜 내 방에 들어와 있어? 돈돈이라고 부르는 건 또 뭐고?”
“어젯밤에 내가 때에 맞춰 깨우러 온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오늘 해령이랑 요리를 하기로 했었지?’
[온천 사장이 요리한다는 소식에 온천의 성좌들이 술렁입니다.]
‘내가 요리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소식을 전해 들은 온천 부엌의 찬장(EX)과 냉장고(EX)가 죽은 척을 합니다.]
‘너희들은 왜 죽은 척까지 하는 건데!’
너무 꿀잠을 잔 탓인지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단합이라도 한 듯이 떠오르는 시스템창들이 거슬렸다.
“돈돈이라는 별칭이 돈도 좋아하고 돈가스도 좋아하는 네게 딱인 것 같아서 불러봤다. 이렇게 격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해령이 내게 잡힌 옷깃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조금이라도 빨리 해령이란 걸 알아차린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서 손을 거둬들였다.
“박시우였으면 넌 이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을 거야.”
“살벌한 남매군.”
“응, 칭찬 고마워. 너도 위험한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해령은 살며시 주먹을 쥐어 보이며 웃는 나를 보고는 섬뜩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보다 혹시 너 내가 자고 있을 때 내 이마 만졌어? 아니면 머리를 쓸었다던가?”
문득 잠들어 있을 때 내게 닿았던 누군가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건 꼭 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때마침 깨어났을 때 해령이 있었고 말이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해령은 고목나무보다 딱딱한 얼굴로 정색을 했다.
거참, 아니면 아닌 거지. 표정 참 거시기 하네.
“잠꼬대는 그쯤 하고 오늘 뭘 만들지는 생각해봤나?”
“특제 바나나 우유를 만들고 싶어!”
빨리 퀘스트를 깨두지 않으면 조만간 근무 태만 경고가 뜰 위험이 있었다.
“그럼 볼 빨간 바나나가 필요할 텐데? 챙겨둔 게 있나?”
당연하지! 내가 A급 던전에서 얼마나 열심히 바나나를 주웠는데!
“있…….”
자신만만하게 답하며 인벤토리를 열었는데 발그레 바나나가 보이지 않았다.
아,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자리에 바나나를 다 떨어뜨리고 왔잖아?
“었는데 없네?”
당장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야 하는데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던전에 가서 바나나를 다시 구해와야 하나?’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오늘은 운수가 불길하니 온천 밖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럼 발그레 바나나는 어떻게 해? 당장 필요한데.’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정 급하다면 발그레 바나나를 사는 방법도 있다”고 합니다.]
‘사기에는 돈이 아까운데…….’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바나나 우유를 만들지 않는 방법도 있다”며 선택지를 늘려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고 만다. 그리고 운수, 넌 특별히 맛보게 해줄게.’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응, 안 들려. 거절은 거절해.’
나는 운수의 노란색 시스템창이 떠오르기도 전에 꺼버렸다.
……그래도 운수의 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조심하는 편이 좋겠지.
저번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가 저승 구경 제대로 했었다.
또 죽어서 재판을 치르느니 차라리 돈이 나가는 게 나아.
“내가 발그레 바나나를 사볼게.”
나는 해령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익명 헌터 게시판을 이용해서 종종 물품을 거래하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럼 준비가 되었을 때 나를 부르도록 해라.”
“알겠어.”
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스마트폰을 켰다.
그런데 부재중 문자 두 건이 들어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정우입니다.
현정우라면 박시우네 길드원이잖아?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무슨 일이시죠?
그냥 무시할까도 했지만 박시우나 지호에 관련된 연락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답장을 보냈다.
지이잉―
돌아오는 답장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호가 쓰러져서 병원에 있습니다.
* * *
“지호가 쓰러져요? 왜요? 어느 병원에 있는데요?”
문자를 확인한 난 현정우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 지옥귀 사태 때 보호막을 너무 무리하게 유지하다가 마나를 한계치 이상으로 끌어 쓴 모양입니다. 다나아 병원 109호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지호의 위치와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그 길로 온천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어쩐지 그날 지호가 무리하는 것 같긴 했는데…….
베카가 뒤를 맡아줘서 타격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호야, 제발 무사해야 해…….
숨이 차오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109호실까지 달려오자 박지호라는 이름이 보였다.
너까지 잃으면 나는…….
눈물을 머금고 109호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하나! 둘! 온천국!”
찰칵―
병실에는 때밀이 수건을 두른 환자복 차림의 지호와 사우나 가운을 입은 박시우가 똑같은 차림의 현정우와 함께 부채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