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왜 때문이죠?
뭐지? 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팬심 가득한 멘트는?
‘온천 회원’이면 내 팬 카페 이름이잖아?
게다가 어째서 베카랑 내가 엮여 있는 건데?
나는 온천 사장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베카는 헌터들에게 공략 대상이 아니었나?
그리고 베카가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현수막을 보는 순간 갖가지 의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베카, 이게 뭐야?”
“인간들이 마탑에 두고 간 물건이다. 문지기 말로는 요즘 들어 46층 입구에 그런 것들을 두고 가는 인간들이 많아졌다고 하더군.”
그 말은 이런 현수막 같은 게 이거 하나만이 아니라는 건가?
“그럼 설마 방금 검둥이가 들고 간 보따리 속에 든 물건들도?”
“맞다. 인간들이 주고 간 것들이다. 가져온 건 그저 일부에 불과하다.”
아까 그 보따리에 든 물건들도 적지 않아 보였는데 그게 빙산의 일각이라니…….
이건 꼭 팬들이 연예인을 덕질 하고 있는 것 같잖아?
대체 내가 온천에서 지내는 동안에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저승에서 돌아온 후 며칠간 몸 회복에 전념하고 곧바로 온천 일에 집중하느라 미처 바깥 상황을 신경 쓰지 못했다.
“여기에 나와 네 모습이 그려져 있어서 챙겨 와봤다.”
베카의 말을 듣고 나서야 현수막 한편에 검둥이를 탄 나와 베카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게 보였다.
이런 건 또 어느 틈에 찍은 거래?
다행히 때밀이 수건으로 가린 상태라 얼굴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너와 함께 나온 사진이 인쇄된 것들은 약방에 모아뒀다.”
내 얼굴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베카는 나와 함께 나온 사진이 있다는 것만으로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시간이 난다면 구경하러 와도 좋다."
날 바라보는 베카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게 꼭 집사에게 놀아달라고 요구하는 아기고양이 같았다.
저렇게 찹쌀떡같이 희고 동그란 얼굴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데 거절할 수 없지.
하지만 당장은 곤란했다.
“그럼. 이따가 꼭 보러 갈게.”
지금으로서는 온천 밖의 상황을 알아보는 게 먼저야.
“기다리겠다.”
약속을 받아낸 베카의 통통한 얼굴이 기대감에 빛났다.
“그리고 이거…….”
뭔가 전해줄 것이 있는 듯 베카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쪽지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저 물건들 위에 있었다. 나에게만 전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저 현수막이랑 같이 있었다고 하니까 왠지 열어보고 싶지 않아지는데…….
앞서 시스템의 강요로 선택해야 했던 주접 멘트로 인해 내 항마력은 이미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더한 주접을 보게 된다면 치사량을 초과해버릴 거라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베카가 눈앞에서 빤히 보고 있으니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펼쳤다.
‘마탑주 베카님, 온천 사장님! 제 동료가 되어주십시오! -온천 회원장-’
뭐지? 이 익숙한 멘트는?
온천 회원장이면 팬 카페 회장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온천 회원장이 남기는 말들, 박시우 말투하고 판박이란 말이지?
왠지 박시우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지난번 팬 카페 게시글을 탐독했을 때 온천 회원장이 집필을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혹시 박시우가 온천 회원장인 건 아니겠지?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박시우가 이 현수막을 들고 흔드는 것을 상상했다.
……끔찍해! 그건 재앙이야!
상상만 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시우가 누굴 덕질 할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지.
온천 회원에 가입한 건 온천 사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서 집필에 영입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박시우 성격에 팬 카페 회장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귀찮은 일을 도맡아할 리가 없다.
그 시간에 던전을 한 바퀴 더 돌고 레이드를 한 번 더 뛴다면 모를까?
어쨌든 온천 회원장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매번 이렇게 탑에 올라와서 조공을 한다는 건 그만큼 집요하다는 거니까.
“쪽지 전해줘서 고마워, 베카.”
“그리고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응? 뭔데? 우리 베카 부탁이면 들어줘야지!”
베카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옥귀를 상대하면서 나 대신 큰 고생을 치렀기 때문에 이 기회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쪽지에서 온천 회원장이라는 자가 나에게 자신의 동료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랬지?”
베카는 오통통한 만두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마탑을 지키는 주인이다. 아무리 간곡한 부탁이라 해도 헌터의 동료가 될 수는 없다. 혹시 온천 회원장을 만난다면 나를 대신해서 내 뜻을 전해줄 수 있겠나?”
아이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심각했던 거였어?
우리 베카는 마음씨도 따뜻하지! 누가 이 모습을 보고 마탑의 최종 보스라고 생각하겠냐고!
이렇게 귀여운 베카에게 팬이 생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꼭 전하도록 할게.”
사실 난 기회가 없길 바라지만…….
“그런데 베카, 그러면 나하고도 동료가 될 수 없는 거 아니야? 나도 마음만 먹으면 헌터가 될 수 있잖아?”
“넌 동료 같은 게 아니다.”
궁금해서 던진 물음에 베카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크흑! 베카의 말이 비수가 되어서 꽂힌다!
난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금껏 알고 지낸 시간과 함께 겪어온 일들이 있는데, 베카는 나를 동료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까?
솔직히 베카를 동료 이상의 가족처럼 생각했던 나로서는 상심이 컸다.
그때, 베카가 침울해져 있는 내게로 다가와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살며시 붙잡았다.
“내게 소중한 사람. 그러니까…….”
날 올려다보는 베카의 붉은색 눈동자가 가시 돋친 장미 넝쿨처럼 내 시선을 옭아맸다.
“뺏기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누구라도.”
* * *
방으로 들어온 나는 해령이 준 돈가스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베카를 만나는 바람에 조금 식긴 했어도 여전히 맛은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베카 말이야. 꼭 생선을 지키는 고양이 같았지?
순간이긴 했지만 귀와 꼬리가 살랑거리는 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여간 온천의 귀여움은 베카가 다한다니까?
흐뭇해하던 나는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좀 살펴볼까?
나는 자연스럽게 익명 헌터 게시판으로 접속했다.
[HOT]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이유 (사진o)
* * *
[사진]
우리는 온천 사장님이랑 베카 보유국이다.
* * *
└익명1 : 쌉인정.
└익명2 : 저 날 베카랑 온천 사장님 아니었으면 우리 지옥귀 밥 됐음.
└익명3 : 사태 파악 못하고 베카 공격한 헌터 협회 월급 뱉어내라!
└익명4 : 그냥 헌협 없애고 온천국 세우자!
└익명5 : 온천국 가보자고!
└익명6 : 나 집필인데 온천 사장님이랑 박시또 조합도 장난 아니었음. 온천 사장님 전방 지옥귀 처리하고 박시또 후방 집중 마크하는데 느와르 영화 한 편 찍는 줄.
└익명7 : 박시또X온천 사장 조합이라니!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가? ●▅▇█▇▆▅▄▇
└익명8 : 온천 회원이자 집필순이는 광광 웁니다. ༼;´༎ຶ ༎ຶ༽ (오열)
└익명9 : 그래서 어느 주식 매입해야 하는 거죠? 베카X온천 사장? 박시우X온천사장?
└익명10 : 그냥 다같살 하면 안 되나요? 난 절대 못 골라……. ༼;´༎ຶ ༎ຶ༽ (오열)
사진은 도시 한복판에 저승의 문이 열렸던 날, 지옥귀를 상대하고 있는 베카와 해령의 각인을 사용한 나의 사진이었다.
헌터 협회가 베카를 공격했다길래 헌터들 반응도 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완전히 열광하고 있잖아?
의도하지 않게 더 주목을 받게 되어버렸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고 지내야겠다고 다짐하며 화면을 내리는데 간간히 박시우와 나를 엮는 댓글이 보였다.
응, 아니야. 안 어울려.
나는 조용히 해당 댓글에 신고 버튼을 누르고 다음 인기글로 넘어갔다.
[HOT] 그런데 베카 잘 보면
* * *
[사진]
존잘이지 않음? 특히 흑발 백발 온도 차이 오진다. ༼;´༎ຶ ༎ຶ༽ (오열)
* * *
└익명1 : 흑발 적안 남주 국룰 아님? 흑발 베카파 좋아요 누르세요. [좋아요 :985631]
└익명2 : 백발 냉미남 베카 못 잃어!!! 질 수 없다! 백발 베카파 드루와! [좋아요 : 846156]
└익명3 : 난 둘 다. [좋아요 : 1525663]
└익명4 : 갓베카한테 조공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익명5 : 온천 회원 팬 카페에 전달하시면 대신 탑까지 배달해준다고 함.(온천 회원 팬 카페 주소)
베카가 백발로 변하기도 해?
지옥귀 상대하랴 저승의 문 닫으랴 정신이 없던 통에 미처 보지 못했다.
나는 베카의 백발 사진을 확대해서 유심히 바라봤다.
붉은 낫을 든 백발의 베카는 내가 아는 검은 아기 고양이 베카보다 훨씬 냉혹하고 차가워 보였다.
이럴 때는 고양이가 아니라 꼭 백표범 같네? 뭐, 어느 쪽이든 난 베카 그 자체가 좋으니까!
내 손은 자연스럽게 익명3의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있었다.
이렇게 조공을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생긴 걸 보니 모르는 사이에 베카의 팬이 많아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좋아요 수를 보면 마탑에 선물이 산처럼 쌓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베카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개운한 마음으로 익명 헌터 게시판을 끄려는데 화면에 렉이 걸리는 바람에 다른 게시글을 누르고 말았다.
[HOT] 요즘 인싸들이 노는 법
* * *
[사진]
[사진 속 온천 사장처럼 사우나 가운 차림에 때수건 스카프로 두르고 온천 사장에 빙의해서 현생네컷 찍음. (은발 가발+파란색 렌즈 필수)]
도대체 왜 때문에?
사진에는 나를 코스프레한 사람들 여럿이 단체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 그냥 각인 상태로 다녀도 안전할 것 같다.
의도하지 않게 인싸들의 핫트렌드가 되어버렸잖아?
뭐, 황당하긴 한데 전보다 움직이긴 편하겠어.
안심한 탓일까? 돈가스까지 먹고 배가 차자 금세 노곤해졌다.
내일은 해령한테 요리를 전수받아서 꼭 똥손에서 벗어나야…….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을 껌뻑이던 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 * *
수온이 잠든 뒤, 그녀의 손에 들린 휴대폰 화면이 진동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을 내며 켜졌다.
지이잉―
안녕하세요.
휴대폰에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수신된 문자가 떠올랐다.
화면이 다시 어두워지려는 찰나,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현정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