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드루와!
[앗! 온천에 귀인이(가) 나타났다!]
[!!긴급 퀘스트!! ‘원활한 온천 운영을 위한 똥손 갱생 프로젝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주의 : 구제 불가능한 똥손은 자동 수락 됩니다.]
[구제 불가능한 똥손(난이도 : EX)임이 확인되었습니다. 퀘스트를 자동 수락 합니다.]
똥손인 것도 억울한데 EX급인 거 실화냐?
내 손의 위력이 이 온천이 가진 위력과 같은 수준이라니.
이 정도면 쑥 라테가 괴물이 되기 직전에 멈춘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판이다.
혹시라도 EX급 쑥 라테 몬스터가 나타났다면 성좌들도 질색하며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르지.
똥손 치료가 시급하다!
해령을 만나자마자 알림창이 뜬 걸 보면 그가 내 똥손을 다시 태어나게 해줄 귀인인 게 분명했다.
난 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힘껏 해령을 불렀다.
‘앗,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레시피를 지켜도 요리가 망하는 대책 없는 똥손(EX)’을 가진 당신, 귀인의 도움을 받아 금손이 되고 싶으신가요?]
그렇구나. 난 애초에 레시피를 지켜도 요리가 망하는 손이었던 거구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 지호가 종이컵으로 라면 물을 맞춰서 넣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어도 라면은 한결같이 맛이 없었다.
그 이유가 이거였나? 똥손 패시브 스킬에 걸려 있어서?
25년 만에 처음 깨달았다.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퀘스트는 어김없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귀인의 마음을 흔들 답변을 다음 선택지에서 골라주세요!]
[※주의 : 선택지가 귀인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퀘스트가 종료되며, 한 번 떠난 귀인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필수이며 퀘스트는 중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게 무슨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도 아니고 귀인의 마음을 흔들라니?
어쩐지 시스템창이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준다 했다.
어쨌든 내가 똥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놓쳐서는 안 돼! 보란 듯이 성공해주지!
시스템창, 드루와!
“일찍이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탓에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해령이 먼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띠링!
이제 시작인가?
평소보다 흥겨운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1. 응, 네가 너무 청량해서 청량리에서 내려서 걸어오느라 잠을 못 잤지 뭐야?]
[2. 널 보는 순간 심장이 녹아내려서 냉장고에 넣고 오는 길이야.]
[3. 그래, 내가 똥손이 될 상인가?]
비장한 각오로 선택지를 읽어나갔는데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게 끝이야?
이 선택지 내 눈에만 문제 있어 보여?
더 놀라운 건 이 중에 해령의 마음을 흔들 만한 답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1, 2번은 완전 주접 멘트잖아?
해령이 이런 말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1, 2번이 가능성 있어 보였다.
난 잠시 깊은 고뇌에 빠졌다.
‘여기서 해령의 호감을 사면 평생의 족쇄였던 지독한 똥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눈 딱 감고 한 번이면…….
아니, 난 못해!
[제한 시간 안에 선택지를 고르지 않으면 자동 선택 됩니다. 제한 시간 : 3초]
시스템의 재촉에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해령에게 주접을 떠느니 차라리 광대가 되겠어!
[3번을 선택하셨습니다.]
시스템창이 떠오르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그래, 내가 똥손이 될 상인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새 뒷짐을 지고 해령을 바라보며 사극에 나올 법한 걸쭉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해령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수치사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구나.
각오는 했지만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열은 없는데……. 저녁에 뭘 잘못 먹었나?”
해령이 보기에도 어딘가 이상했는지 그가 내 이마에 커다란 손을 가져다 대며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걸로 다 끝난 거야.
3번을 골랐으니 퀘스트가 종료될 거라고 예상하던 그때였다.
띠링!
첫 선택지가 떴을 때와 똑같은 흥겨운 알림음이 울렸다.
설마……. 이게 먹혔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어느새 내 앞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떠올라 있었다.
[1. 응, 내가 좋아하는 굴이 있어. 네 얼굴.]
[2. 내가 똥손이라니! 내가 똥손이라니이이이!!!]
[3. 내가 먹는 기름이 있어. 바로 온리유.]
다른 의미로 신박한 선택지들이.
대체 시스템은 이런 걸 다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이제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시공간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됐고, 이번에야말로 끝낸다. 시험지도 번호 하나로 찍는 게 국룰이지!
똥손으로 시작한 삶, 똥손으로 끝낸다.
고민은 선택을 늦출 뿐! 똥손에 모든 걸 건다!
나는 막힘없이 2번 선택지를 눌렀다.
[2번을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똥손이라니! 내가 똥손이라니이이이!!!”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나는 곧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을 하늘로 추켜올리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해령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를 보듯 뜨악한 얼굴이었다.
‘똥손이어도 좋으니 제발 퀘스트를 끝내줘!’
이러다가는 똥손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쪽팔려서 온천 사장을 그만두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내 처절한 몸부림을 지켜보며 긴 한숨을 내쉬던 해령이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알겠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니 농성은 그쯤 하도록 해라. 조금만 더하면 온천에 있는 성좌들이 놀라서 모두 뛰어나오겠다.”
어째서인지 날 바라보는 해령의 눈빛에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그 말은…….”
어라? 목소리가 나오잖아?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해령이 주저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르쳐주겠다고. 온천의 요리.”
띠링!
[축하합니다! 귀인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됐다! 귀인을 얻었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령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귀인의 효과로 ‘레시피를 지켜도 요리가 망하는 대책 없는 똥손(EX)’이 평범한 손으로 승격됩니다.]
* * *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부터 온천의 요리를 전수해주겠다.”
해령의 족집게 강의를 약속받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손에는 노릇노릇한 온천표 돈가스가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잠시 부엌에 들렀다 가라던 해령이 내게 챙겨준 음식이었다.
“웬 돈가스야?”
“마탑 꼬맹이가 한 저녁은 안 봐도 뻔하지. 손이 노는 김에 만들어봤다.”
때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해맑은 표정으로 덥석 돈가스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좋은가?”
맛있는 돈가스를 먹을 생각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해령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당연히 좋지! 네가 만든 돈가스는 내가 먹어본 것 중에 제일이야!”
엄지를 척 올려 보이는 내게 해령은 이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달걀 요리보다?”
“응?”
뜬금없는 질문에 멀뚱히 해령을 바라보자 그가 은근슬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마탑 꼬맹이가 만들어준 달걀 요리 말이다.”
아……. 베카가 해준 달걀 프라이를 말한 거구나?
이런 질문까지 하는 걸 보면 해령은 낮에 내가 베카의 달걀 요리를 선택한 것에 생각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네 돈가스가 맛있는 건 사실이니까.”
솔직히 해령도 베카의 요리 솜씨를 모르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요리가 더 맛있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렇군.”
하지만 내 대답을 들은 해령은 그 어떤 말을 들었을 때보다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꼭 생일날 갖고 싶던 물건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고작 돈가스가 맛있다는 말에 그렇게 기뻐할 줄이야.
그동안 내가 너무 칭찬에 야박했나?
앞으로는 해령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맛있다고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2층 복도로 걸어 올라가는데 때마침 내 방 앞을 지나고 있는 베카와 마주쳤다.
“베카, 이제 들어오는 거야?”
“그렇다. 요즘 들어 부쩍 마탑에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서 피곤하군.”
지옥귀가 나타났을 때 베카의 위력을 보고도 덤비는 헌터들이 있다는 말이야?
헌터들의 무모함과 만용은 언제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헌터 중에 박시우랑 지호도 있다는 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베카님, 이것들은 어디로 옮기면 되겠습니까?”
베카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작은 모습으로 변한 검둥이가 제 몸집의 다섯 배는 될 법한 커다란 보따리를 발톱으로 집어 든 채 힘겹게 날고 있었다.
“저기 약방으로 옮겨둬라.”
“예!”
나는 검둥이를 다시 만난 게 반가워서 환하게 웃으면서 손 인사를 했다.
“흥!”
하지만 검둥이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콧방귀를 끼면서 약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검둥아, 우리 그때 좋았잖아……. 내가 등에 탈 때만 해도 좋았잖아. 응?
친해진 줄 알았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거야?
검둥이의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았다.
그때, 약방으로 들어가는 검둥이의 보따리에서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나왔다.
이건……. 꼭 현수막 같은데?
“검둥아, 이거 떨어뜨렸…….”
현수막을 들어 올리는 순간 말려 있던 천이 활짝 펼쳐지며 안에 적힌 문구가 드러났다.
‘온천 사장♥베카 조합은 못 잃어! -온천 회원-’